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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조망하는 권력

문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소설 연구 (페이지 70-73)

2. 정신분석학적 서사

2.4. 정신분석학의 조망하는 권력

그런데 우리는 한여사가 히스테리 발작 이후 치매 환자가 되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는 균열 속에서 살아갈 수 없고, 서 둘러 이 균열을 체계적인 현실로 재구성해야 한다. 만약 짧은 시간 안에 이 균열이 봉 합되지 못하면, 주체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 애초 균열의 시간이란 영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푸코의 ‘히스테리와 치매의 대조’를 떠올려보면, 한여사가 히스테리 이후 새로운 현실을 재구성하지 못한 채 치매 로 넘어간다는 사실은 다소 징후적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19세기, 샤르코로 대표되는 ‘정신의학’에서 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

의 교체 시기에 주목하며, 기존 정신의학의 권력에 누수를 일으켜 정신분석학을 태동 시킨 것이 바로 히스테리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신분석학의 수립은

“정신의학으로부터의 최초의 거대한 후퇴”에 해당하며, 지식으로서 정신분석학은 “이 최초의 패배에 대해 최초의 방어선을 구축”한 결과로 규정된다.66) 실제로, 히스테리를 완벽히 장악하려 한 정신의학의 강고함에 비해 정신분석학의 대화 치료는 탄력적이다.

푸코는 이 두 권력의 양상을, 엄격하기에 저항에 직면하기 쉬운 ‘규율권력’과 느슨하기 에 빠져나가기 어려운 ‘생명권력’의 관계에 대응시킨다. ‘권력’과 ‘지식’ 사이에 공백이 란 있을 수 없으니, 규율권력에서 생명권력으로 권력의 양태가 전환됨에 따라 지식과 담론 역시 신체에 기반한 정신의학에서 욕망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으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이런 푸코에게, 지나간 삶을 ‘고백’하고 실재를 누설하는 한맥기로원의 ‘진실의 장치’

가 어떻게 보일지는 자명하다. 이것은 마치 피분석자가 스스로 무의식을 고백해야만 끝나게 되는 ‘대화 치료’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히스테리로 잠시 주인기표를 두드리지만 곧이어 치매 상태에 빠져버리는 한여사의 모습은, 분석가 의 담화가 가져온 궁극적인 결과, 다시 말해 생명권력이 이끌어낸 순응의 상징이라고 도 볼 수 있다. 그녀는 에피소드 전체에 걸쳐 자신의 상상적 세계를 고백하고 히스테 리화 되었지만, 결국 정신병원을 연상시키는 이 자애로운 양로원에서 치매 환자로 관 리되다 죽을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이 라캉의 말처럼 피분석자를 주인기표로부터 ‘해 방’ 시켜주는지, 혹은 푸코의 말처럼 ‘생명’으로 만들어 ‘관리’해주는지, 소설은 모호하

66) 미셸 푸코, 오트르망 역, 정신의학의 권력 , 난장, 2014, 202쪽.

게 처리한다.

그런데 소설의 이 모호한 태도는, 애초 라캉의 담화이론 내부에 존재하는 모호함으 로부터 유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캉의 설명에는, 히스테리자의 담화를 유도하는 분 석가의 담화라는, 메타적 담화가 어떻게 따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혹은 그것이 메타적 담화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없다. 라캉의 말에 따르면, 분석가 는 히스테리자의 담화와는 다른 담화를 구사한다. 그러니 분석가의 담화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분석가의 담화가 히스테리자의 담화가 아니라면, 분석가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주인기표에 근거한 주인의 담화나 대학 담화를 통해 피분석자를 ‘장 악’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려면, 분석가 역시 피분석자를 향해 히 스테리자의 담화를 구사해야만 피분석자의 주인기표를 의문시하며 담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분석가와 피분석자 모두 동일한 형식의 히스테리자의 담화를 구사하며 서로의 말을 주인기표 삼아 두드려대는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 다는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 뫼비우스의 끈을 다소 변칙적으로나마 끊어내기 위해, 분석 상황에서는 분석가가 서 있을 외부지점이 요구된다. 그런데 일단 메타적인 외부지점이 가설되면, 늘 더 메타 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더 바깥에 서 있기’ 놀이는, 내가 아무리 멀리 서 있으려고 달려가도 ‘그런 너를 보고 있는 나의 자리’가 있다는 선언에 의해 상대화 된다. 그래서 결코 상대화될 수 없는 분석가의 자리를 얻기 위해, 결국 정신분석학이라 는 지식 체계는 권력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도입한다.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 는 세미나 참여자를 향한 라캉의 짧은 대답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여기서 유 래할 것이다.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저는 실언을 하지 않는다는 거지 요.”67)

이런 ‘정신분석학과 권력’의 관계를 간파한 사람이 드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분석 자의 ‘저항’을 몰인식했던 샤르코 (정신의학)와 그것을 저항으로 인정하고 존중한 프로 이트(정신분석학) 중에 누가 덜 독선적인 사람이냐는, 라캉의 ‘답이 정해진 질문’에 이 폴리트는 이렇게 반박한 적이 있다.

“최면을 통한 샤르코의 지배가 단지 대상화된 존재에 대한 지배, 더 이상 자기 자신 의 주인이 아닌 어떤 존재에 대한 소유와 관련된 반면 프로이트의 지배는 여전히 자기 의식이 있는 어떤 존재, 어떤 주체를 정복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정복해야할 저항을 지

67) 자크 라캉, 맹정현·이수련 역, 세미나11 , 새물결, 2008, 140쪽.

배하는 것에는 저항을 단순히 억압하는 것보다 더 강한 지배 의지가 있습니다.”68)

물론 여기에 라캉은 동의하지 않지만, 이폴리트의 프로이트에 대한 분석은 예리하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은 이 두 가지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정확함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관대함과 그 관대함에 가려진 강력한 지배 의지. 늘 정신분석학에 따라붙는 열 광과 비판의 양면은 여기서 기인한다.

정신분석학과 ‘여성성’의 관계 역시 이와 유사해서, 정신분석학은 페미니즘으로부터 강력한 구애와 거부를 모두 경험했다. 정신분석학의 성담론은 여성을 ‘욕망의 일반 경 제’에 포함 시키면서 기존의 성별화를 전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성을 새롭게 구획 하고 그것을 자연화해 버렸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학은 여성을 욕망하는 주체로서 인 정하되 더 넓은 분할선을 그어 과학의 언어로 된 여성성의 범주를 만든다. 그런데 늘

‘느슨한 확립’이야말로 수정하기 어렵고, 과학의 언어야말로 ‘가치중립성이라는 가치’를 표방하므로, 정신분석학적 여성성은 가장 융통성 있는 방식으로 가장 강력하게 체제에 부착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는 많은 성적 비유들은, 그것이 ‘옳아서’거나 그 것을 ‘의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고 있다. 선 악의 좁은 틀에서 벗어났기에, 정신분석학적 성별화는 더욱 논파하기 힘든 알리바이를 얻게 되었다.

위안부 피해자의 욕망과 성애에 눈 감지 않는 이 정확한 소설은, 대체로 이러한 정 신분석학자의 표정과 닮아있다. 소설에서, 더 이상 여성은 숭고한 여신이나 가련한 피 해자로 부정확하고 비좁게 규정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누구나 욕망의 주체일 뿐이다.

이 평등함과 관대함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는 비로소 발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발화의 범위를 당사자인 피분석자 본인이 정할 수는 없다. 범위와 한계는 분석가가 승 인하는 것이다. 소설이 구사하는 분석가의 담화에 맞춰 그녀는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 든다. 그렇게 무의식까지 실토한 그녀가 곧이어 ‘치매의 육체’를 갖는다는 것, 과연 이 것은 ‘분석가-소설가’가 그려내는 라캉적인 낙관의 결론일까, 푸코적인 비관의 결론일 까.

68) 자크 라캉, 맹정현 역, 세미나01 , 새물결, 2016,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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