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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과 문학의 윤리

문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소설 연구 (페이지 97-101)

2. 증언의 불가능성과 불가피성

2.5. 증언과 문학의 윤리

70년대 후반 뉴욕의 빈민지역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에서 활동하던 조각가 존 에이헌John Ahearn은 쥐를 잡으며 놀고 있는 이곳의 아이들을 실물 크기의 입상으로 제작한다.103) 아이들은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주눅 들어 보이지 않았고, 긴 막대기를 든 채 쥐를 괴롭히고 있었으며, 조금도 안쓰러워 보이지 않았다. 예상하다시피 이 같은 재 현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가난을 극복해가는 ‘자본주의 판타지’ 영웅 서사를 원했던 이들에게도, 가난과 불평등에 허덕이는 참혹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원했던 이들에게도, 아이들이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실제로 존 에이헌 은 뉴욕시로부터 사우스 브롱크스 거리에 세울 상징적 조형물을 주문받고 유사한 작품 을 만들었으나, 극렬한 비난 속에 닷새 만에 철거당하고 만다.

어쩌면 증언의 생명이 이와 같을 것이다. 역사와 의미의 궤도에 서둘러 안착하고 싶 은 사람들에게 편집되지 않은 증언은 사실과 오류의 불안정한 혼합물쯤으로 보인다.

아직 궤도에 진입하지 않은 증언은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피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리 큰 고 통이라 해도 ‘자연스럽게’ 주목해주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많은 부침을 겪어 야 했던 클뤼거의 말처럼 “고통은 강도뿐 아니라 종류도 중요하다.”104)

광복 이후에도 87년 절차적 민주화를 거치고 91년에서야 위안부 피해 증언은 시작되 었다. 그리고 ‘페미니즘 리부트’인 지금, 위안부 피해 증언 역시 ‘리부트’되고 있다. 어 떤 사건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못하는 것에는, 반대로 어떤 사건이 새로이 알려지는 것 에는 복잡한 맥락이 존재한다. 더 많은 것들을 파악한 자들이 더 많은 것들을 증언하 고, 더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이 더 많은 증언을 유도한다. 그렇게 증언은

103) 존 에이헌, <쥐 잡는 아이들The Rat Killers>, 섬유 유리에 유채, 1986.

104) 루트 클뤼거, 최성만 역, 삶은 계속된다 , 문학동네, 2018, 14쪽.

증발할 수도 삭제될 수도 있지만, 역으로 발견되고 재생되기도 하며 ‘증언의 공간’을 변형시킨다.

이 같은 ‘증언의 공간’의 가변성 때문에, 아감벤은 자신이 특별한 자 즉 ‘구조된 자’

였음을 철저히 자각했던 프리모 레비를 경유하면서, 증언이란 ‘익사한 자’들을 대신하 여 ‘증언의 불가능성’을 증언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레비는 자신의 책에 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란 독일어를 이해할 수 있거나 혹은 특정한 기술이 있다 거나 하는, (물론 대체로는 운에 의해 작동했지만) 수용소 생활에 적응 가능한 체력과 요령을 지닌 ‘특수한’ 사례였다고 말한다. 생존에 유리했던 이러한 특징들은 증언자들 사이에서는 보편적 특징이었지만, 전체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매우 드문 특수함이었기 에, 증언자는 사건을 재현하는 ‘언어의 불가능성’ 뿐 아니라 ‘증언의 불가능성’까지 증 언해야 하는 이중의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런 곤경은 사건마다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 상황은 조 금 다르다. 한 민족의 ‘절멸’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아우슈비츠와 일본군의 성적인

‘위안물’을 제공하려는 구체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이 있었던 위안소의 상황이 같을 리 없다. 위안소에 있는 여성들은, 이곳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 고 비교적 어린, 상당히 유사한 계층의 여성들이었다. 이 생존자들은 레비와 달리, ‘익 사한 자들’과 질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다. 동시에 그런 이유로, 이들 생존자 중 누구도 화학자-작가인 레비처럼 언어를 추리고 정제하고 증류하여 증언할 수 없었다.

오카 마리는 김학순 생존자의 증언을 들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사건을 겪은 당사 자의 ‘생생한’ 증언 대신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는 식의 ‘진부한’ 표현들 때문 에 놀랐던 경험을 소개한다. 곧이어 오카 마리는 이 ‘진부함’이야말로 상징화·의미화되 지 못한 사건의 단절 지점, 즉 가장 선명한 ‘사건성’을 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진부함이 사건성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프리모 레비도, 빅터 프랭클도, 장 아매리도 존재할 수 없었던, 여러 겹으로 교차된 위안부 피해자들의 서발터니티이 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역사’의 궤도에 자리 잡지 못한 ‘미완’의 증언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다. 이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해, 증언의 ‘부정확’하고 ‘모순적’인 부분들은 ‘비판과 검증’

이라는 작업대를 거쳐 적절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거름망’을 통과하기 전 위안 부 피해자의 증언에, 일본군에 대한 증오와 민족에 대한 애정만 있을 리 없고, 남성에 대한 적대와 여성에 대한 연대의식만 있을 리 없다. 그녀들은 ‘착한 일본 군인’도 있었 다고 말하고, ‘조선인 업자’에게 끌려갔다고도 말하며, 엄마와 언니들과 동네 사람들에

게 받은 상처가 가장 지울 수 없었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미완의 증언들로 이루어진, 이 ‘증언의 공간’의 연약함이야말로 문학이 증 언의 곁에서 무엇을 감당해야 할지 암시한다. 상징화·언어화의 과정에서 증언의 변형 과 증발은 필연적이다.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니 그것마저 지시하기 위해, 문학은 증언의 공간에 머무른다. 그리고 작가 김숨은 이를 위해 ‘증언의 공간-되기’를 선택했다. ‘전생에 지은 죄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할 길 없었다’는 생존 자의 말은, 그녀의 남은 생 역시 ‘위안소의 밤’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 렇다면 그녀들을 재현하려는 자,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칸트식의 ‘책임’을 지는 것도, 라캉식의 ‘원인 되기’도 불가능한 이곳, 어떠한 의미도 배정받지 못한, 그리고 배정받기 를 거부한 이곳이야말로 증언을 재현하려는 자가 머물러야 할 가장 치열한 ‘윤리학의 영토’일 테니까.

사건으로서의 증언의 생명은 늘 위태로워서, 이 윤리학의 영토에는 강력한 급류들이 사방으로 흐른다. 이렇게 위태로운 공간에 그대로 머무르기 위해, 단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물살의 반대편으로, 마치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처럼, 최 선을 다해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까스로 멈춰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 역시 여기에 존재한다. 여전히 서성이고 노래하고 묻고 있는 증언의 목소리들과 그 울림으로 만들어진 미약한 인력. 이 약하고 간절한 힘들이 존재하는 바로 이곳 증언의 공간에서, 김숨은 청자로서 버티고 머무르며 감당했다.

내가 노래 불러줄까.105) 내가 노래하면, 너도 할래?106)

내가 널 위해 빌어주면 너도 날 위해 빌어줄래?107) 노래를 가르쳐줄까, 술 빚는 걸 가르쳐줄까.

노래 부르면서 술 빚는 걸 가르쳐줄까.108) 네가 있어야 내가 있지, 내가 있어야 네가 있고.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황금률이야.109)

105)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 22쪽.

106)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 9, 10, 115쪽.

107) 같은 책, 4쪽.

108) 같은 책, 118쪽.

109) 같은 책, 151쪽.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인간성’과 ‘비인간성’ 사이의 균열을 가로지르는 “희미한 능선이 증언의 장소”라면, 우리의 역사가 야만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연약한 ‘증언의 이접’에 의해서일 것이다. 저 아우슈비츠 이후 발 견된, “인간성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자신의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된 자”라는 역설, 자신의 ‘탈주체를 증언하는 주체’와 자신의 ‘비인간을 증언하는 인간’이 존재한다 는 역설은 ‘증언’과 ‘인간’이 같은 비/장소에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110) 그리고 이러 한 증언은 자신의 ‘인간 이후의 인간성’이 단지 ‘피해자’라는 전형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하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저항 같은 것으로 표상되는 미증유의 노력”111)으로서 겨우 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곳, 증언과 인간이 존재하는 이 장소가 문학의 처소임을, 그리고 이 장소에서 영원히 번민하는 것이 문학의 일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110) 조르주 아감벤, 정문영 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새물결, 2012, 201~202쪽.

111) 알랭 바디우, 이종영 역, 윤리학 , 동문선, 200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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