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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억은 역사에 복무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그 방식으로 역사를 배 신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건을 이념화하고 그 이념의 숭고함을 ‘세계 무대’에서 경쟁 해보려는 야심가들에 의해, 사건은 기억을 버리고 기념된다. 역사를 보았다고 자부하는 자들, 서사를 파악했다고 확신하는 자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은, 사건의 당사자들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사건 앞에서의 무력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저항과 항쟁의 서사로 승화되었 다고 해서, 우리가 사건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건을 자원으로 삼아 우리의 능동적 주체성을 세우는 것은, 사건의 막대한 폭력성과 유일무이성, 그럼에도 불구한 무의미함을 처절히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경 계해야 할 대상은, 5·18의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자들 뿐만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맞바꾸며 무너진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나르시 시즘적 욕망은 숨어있다. 이 욕망이 행차하는 모든 길에 ‘성장’이 존재한다.

최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갈등들은, 사건과 타자의 고통 을 둘러싼 왕복운동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우리 중 선량하고 평범한 대 다수의 사람들이 최대한 ‘경제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지출한다. 누군가는 타인의 고통 자체를 부인하고, 누군가는 이 기회에 성장을 희망한다. 때로는 사건과 기억의 입구를 봉인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들을 윤색하여 의미화하기도 한다. 문학 역시 이 같은

‘외면’과 ‘기념비화’ 양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타인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고통을 거름으로 한 ‘우리의 성장 서사’ 쓰기를 거 부하는 일은, 마치 높은 파고의 바다에서 빠져나오지도 떠밀려가지도 않은 채 버티고 서있는 것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 또한, 이 높은 파도 앞에서 드물게 성공 하고 자주 실패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존중할만한 언어와 문학의 불가피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같은 불가능의 지점에 존재할 것이다. 증언과 재현의 불가 피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공간. 이곳은 타인의 고통과 기억을 재현하려는 문학이 포기 할 수 없는, 반드시 찾아야 할 ‘비장소의 장소’일 것이다.

본 연구는 이처럼 사건 앞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문학의 실패, 문학의 불가피한 불가능성을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적 관점에서 검토하고자 했다. 사건과 타자의 고통 을 향해 문학이 직조하는 그물망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닌 정치학의 경계선을 드러내는 것이 이 연구의 목표였다. 기존의 성별정치학이나 민족주의, 정신분 석학 담론으로 수렴되지 않는, 증언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학을 준비하는

초보적인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기에, 본 연구는 철저히 재현물을 중심으로 재현 주체 가 직면한 재현체제의 경계선과 이를 둘러싼 재현의 성공과 실패를 재구성하고 고찰했 다. 다시 말해, 소설이 매개한 ‘맥락의 재현’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방법론으로 인한 한계도 뚜렷했다. 본 연구의 문제 의식 중 하나가 일직선의 서사로 이루어지는 의미화의 폭력에 대한 경계였기에, 이 글 은 의도적으로 글 전체를 꿰뚫는 누빔점을 설정하지 않고 개별 작품의 차원에 머물고 자 했다. 그런데 이 노력은 단지 특정 이론을 특권화하지 않으려는 시도에만 한정되지 못했다. 예컨대, 당대의 현실 정치와 그를 둘러싼 담론 지평, 문학장 내외의 상징 투쟁 등 외부적 요소의 중요성도 상당 부분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은 추후 연구에서 보완하고자 한다. 다음 연구에서는 소설 내부의 형식과 구조를 적극적으로 읽어내면서 도 구체적인 시간 축을 둘러싼 사회적·정치적 맥락을 보다 다층적으로 재구성하여, 단 일한 체계나 특권적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고도 확장된 분석이 이루어지도록 보강할 예 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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