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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실패와 애도의 반복

문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소설 연구 (페이지 56-59)

1. 해원(解怨)의 서사

1.5. 애도의 실패와 애도의 반복

몇 권의 소설에 걸쳐 수차례 반복되는 해원의 시도는, 역사적 비극으로 고통받는 사 람들을 위무하고 구원하고 싶은 소설의 갈급한 욕망에서 기인할 것이다. 네 편의 소설 에서 ‘역사’는 ‘여성 피해자’를 만들고 동시에 ‘여성성’에 의해 구원받는다. 이제 사람들 은 눈물을 닦고 이 여성성을 기원으로 삼아 현실의 세계를 살아갈 것이다. 비록 마지 막에 눈물 흘리는 자들 사이에 성별이 여성인 자가 섞여 있을지라도, 성별 테크놀로지 에 기대어 이루어진 해원과 성장의 서사 자체는 여성성을 배제하며 구성된 것임을 부 정할 수 없다. 이들은 모성으로 표상된 상상적 세계로부터 남성의 역사적·상징적 세계 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더 이상 여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어둡고 쓸쓸한 인간의 땅’

에서 살아가는 아들들의 삶은 고단하겠지만, 바로 그 고단함이 역사적 주체인 남성의 멍에이자 힘일 것이다.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향해 프랑코 모레티는 “어떤 사건을 신화적 형태로 다시 쓰는 것은 이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며 그것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혐의를 경계한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누구나 한 번쯤 마콘도에 살아보 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콘도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에 상처와 착 취는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신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심지 어 아주 익숙하게” 될 것이다.49)

마술적 리얼리즘을 향한 모레티의 의심은 ‘홀로코스트’라는 명명에 대한 아감벤의 거 부와 그 이유가 일치한다. ‘번제’를 뜻하는, 본래 종교적 함의를 지닌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것은 “‘무의미한’ 죽음을 정당화하려는, 즉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에 의미를 되돌려주려는 무의식적 요구로부터 비롯”50)되기 때문이 다. 무의미한 사건에 직면했기에 그 사건으로부터 어떠한 의미라도 발견하고 싶은 뭇 사람들의 절박한 감정은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시도하는 삶의 서 사화에 충분한 이점이 있는 것처럼, 사건 자체를 ‘재주술화’함으로써 얻게 되는 의미는 숭고의 표정을 한 ‘이득’에 가까운 것이다.

수용소를 경험했던 부르노 베텔하임은 거짓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 ‘무의식적 요구’가, 단지 무의식적 소원 성취에 그치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무의미하게 죽었다는

49) 프랑코 모레티, 조형준 역, 근대의 서사시 , 새물결, 2001, 379~380쪽.

50)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새물결, 2012, 39쪽.

‘진실’에 직면하는 최후의 존엄성마저 빼앗아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더 큰 문제라고 고발한다. 나아가 그는 생존자들이 흔히 갖게 되는, 죽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삶 을 바쳐야 한다고 느끼는 ‘생존자의 사명’에 대해서도, 그 같은 사명 따위는 없다고 단 정한다. “살아남은 자가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한다면, 죽은 사 람들은 그와 같은 사명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게 되며, 따라서 그들은 죽어야 할 이유 가 있었기에 죽은 게 되기 때문”51)이다.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역사의 증언을 해야 한다는 사명조차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베텔하임의 말은, 우리가 증언을 다루고 재현할 때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는지 암시한 다. 당연하게도 죽은 자는 말할 수 없다. 설사 그가 살아 돌아왔어도 그때의 그와 지금 의 그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설사 같은 인물일지라도 그가 그 사건의 피 해자들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증언은 불가피하지만 필연적으로 불가 능한 영역을 포함하며, 그 불가능의 영역에 가슴 아프게 기입해야 할 첫 문장은 바로 이들의 비극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서사화하는 것이, 주체가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주체 를 덮쳐오는 상황에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갈망하는 욕망이자 형식이라면, 우리는 임철우가 반복하는 이 시도들의 기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의 작품들은 일종의 아카이브가 된다. 이 아카이브는, 사건의 고통을 목격한

‘죄의식의 남성 주체’가 얼마나 절실히 그것의 재현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는지, 그 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성별화된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사건을 의미화했는지 보여 준다.

이때 재현의 결과물을 살피는 작업은 복잡다단한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모성이나 여성성 역시 그 자체가 다층적으로 얽힌 역사적·정치적 감각을 반영하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섣불리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거나, ‘권 력’과 ‘저항’을 둘러싼 ‘대항 담론’을 확립하는 대신, 역사적·정치적 무의식과 맥락, 그 사이를 통과하는 성별 범주 등 다양하게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 편의 소설이 보여주는 여성성 역시 단지 남성적 판타지에 불과한 것으로 손쉽게 환원해서는 안 된다. 여성성에 대한 이 향수 어린 요청이 임철우 소설의 유토피아적 충동과 윤리에 맞물려 있음을, 이 이분화·성별화된 재현 문법이 남성적 질서에 대한 비판과 여성성으로 표상된 대안적 세계를 향한 노력과 상상력을 담보하고 있음을 지워

51) 오카 마리, 김병구 역, 기억 서사 , 소명출판, 2004, 104~105쪽.

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구조화된 재현 문법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성의 ‘서사적·

역사적 주체의 자격’을 공고화하려는 정치적 무의식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축 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텍스트는 서로 결탁하고 모순되기도 한 수많은 논리와 감각의 교차 속에서, “단순히 중심부 아니면 주변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권력축과의 관계”를 통해 “상이하고 때로 모순되는 의미들”52)을 지니며 존재한 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임철우는 타자를 향해 누구보다 예민한 더듬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성 을 타자화했다. 이 두 문장이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임철우는 죄의식의 주체로도 여신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여성에게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밖에 줄 수 없었다. 여성이 아이를 낳은 것으로 설정된 경우 그녀의 여성성은 모성 신화로 전환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녀에게 남은 자리는 피해자의 자리밖에 없 었다. 여성을, 그것도 성폭력을 겪은 여성을 철저히 피해자로 재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던 임철우가, 그녀들을 위해 해줄 수 있었던 일은 아름다운 ‘작은 마 술’을 삽입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위안부 피해자인 순례의 소녀상은 노랑나비 와 함께 동화처럼 출현한다. 동시에 그렇기에 순례는 끝끝내 한 명의 사람으로 등장할 수 없었다. 이 실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임철우 자신일 것이다.

80년 5월에 대한 애도로 평가받는 봄날 이후, 임철우의 후속 작업을 지켜보는 사 람들은 그가 자신의 애도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애도의 작업을 수행 중이다. 그는 애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이 궁극적으로 애도에 실 패했음을 고백한다. 역설적으로 그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감동은, 그가 이렇게 끝없 는 애도로서 자신의 ‘애도의 실패’를 절박하게 지시한다는 점에 있다. 한 작가가 자신 의 삶 전체를 통해 애도에 대한 갈망과 그 실패를 보여줄 때, 그리고 그것이 우울과 강박의 증상이 되어버릴 정도로 막대하고 갈급할 때, 그의 삶은 숭고할 만큼의 진정성 을 드러낸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대상의 상실에 대한 애도에 실패한 것이 우울증이라면, “우울한 자에게도 할 말은 있다.” 그는 애도에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객체’의 현존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애도” 대신 그 사건 에 “트라우마적으로 붙들려 있을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한다.53) 그는 여전히 사건의

52) 리타 펠스키, 김영찬·심진경, 근대성의 젠더 , 2018, 74쪽.

53) 차승기, 「멜랑콜리와 타자성」, 비상시의 문/법 , 그린비, 2016, 350~352쪽.

시공간을 응시하며 애도를 욕망하고 동시에 망각을 거부한다. 그렇게 작가 임철우는 자신이 만든 감옥에 자발적으로 갇힌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문학적 감동은 작품의 내부에서보다 작품과 작품으로 이루어진 외부의 숲에서 비롯됨을 부정할 수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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