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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복하고 반복되는 증언

문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소설 연구 (페이지 87-91)

2. 증언의 불가능성과 불가피성

2.2. 번복하고 반복되는 증언

사람이 무서워?

사람이 뭐가 무서워.

사람이, 사람이 무서우면 안 되지.

사람이 무섭지.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무섭지.

사람은 사람을 해치니까.

사람이 뭐가 무서워,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84) 진 리스의 탈식민주의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에서, 식민지 출신 아내가 본국 출신 남편이 붙여준 이름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지요? 그것도 오베아예요.” 오베아는 자메이카 고유의 주술적 행위이 다.

군인이 내 치마를 찢었어. ( 군인 , 99~100쪽)

두 권의 증언집85)이 악보라면, 여기 실린 노래는 도돌이표와 긴 쉼표 들로 뒤덮여 있다. 그녀들은 반복하다 번복하고 침묵하다 다시 반복한다. 이어지는 증언들 사이로 돌연 낙차가 드러나면, 여전히 그녀들은 어찌할 바 모른 채 망설이거나 부정하거나 중 단한다. 이러한 ‘반복의 중단’과 ‘중단의 반복’을 트라우마라 부르든 회피나 강박이라 부르든, 그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완고한 ‘물음’의 형식이다. 아무리 반복 해서 묻고 또 물어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전생의 죄’까지 거슬러 가버린 그런 물음 의 형식.

이해할 길이 없었어.

전생이 아니면, 전생에 지은 죄가 아니면, 내가 겪은 일들을.

(……)

내가 믿는 거…….

전생, 벌,

그리고 내가 전생에 지은 죄. ( 숭고함 , 20~21, 29쪽)

물음들은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된다. “내가 또 따라가면 어쩌지?”, “엄마, 엄마는 알 았지?”, “내가 챙피해?”, “소식 없어?”, “엄마, 내가 몇 살이야?”, “복동아, 너 어디에 있 어?”, “여기가 어디에요?”, “누가 오나?”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물음들은 흡사 그녀들의 몸을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하여 흘러나오는 읊조림 같기도 하고, 듣고 있는 우리에게 다음 구절을 요청하는 돌림 노래 같기도 하다. 물음들은 그렇게 나지막한 후 렴구처럼 공간을 둥글게 감싸며 맴도는데, 여기서 비극적인 것은 독자로 하여금 공간 의 온기와 울림마저 느끼게 할 만큼 생생한 이 물음의 노래가 극단적인 폭력을 경험한 생존자들 특유의 말투라는 점에 있다.

85) 길원옥 증언집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이하 군인 ), 김복동 증언집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이하 숭고함 ).

그런데 지금 내가 불행하지 않은 것은 그때 불과 10센티미터 왼쪽에 있었기 때문일 까? 소련군 저격수가 나 아닌 B를 쏘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8월 15일에 패전이 결정 되었기 때문일까? 그러면 그때 10센티미터 오른쪽에 있던 녀석의 행복은 어찌 되었을 까? 만약 전쟁을 끝낸다는 천황의 칙어가 쇼와 20년(1945) 8월 14일에 내려졌다면 어 찌 되었을까, 8월 16일이었더라면 또 어찌 되었을까?86)

전장 체험을 연구하면서, 도미야마 이치로는 증언자들 특유의 ‘답변할 수 없는 물음 에 대한 집착’을 발견한다. 그는 전장의 생존자들이 집착하는 특정한 물음들이 대부분 신체와 직접 관련된 구체적인 기억과 감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주목하며, 문제는 이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경험이 결코 개별적인 ‘나의 체험’으로 삶 속에 적절히 기입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증언자의 말은 이어진다.

우리는 온전히 처리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헛되이 부둥켜안고 있었을 뿐, 그것 을 체험으로서 의미를 부여해서 처리한다는 것은 전망조차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다.

(……) 우리는 저 군대나 전장이나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완전한 공백의 시기로 인식함 으로써, 아니 그렇게 인식함으로써만 오늘날의 현실에서 새로이 살아나갈 방향을 결정 해 왔던 것이다.87)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기억에 대해 “‘아픔은 본인밖에 모른다’고 하는 체험 의 특권화로 연결시켜 버리면, 거기서 전개되는 분절화의 가능성을 시야에서 놓쳐버리 게 되는”88)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들이 겪어낸 것은 결코 개인적인 체험으로 소 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적절한 말에 안착하지 못해 허공을 맴도는 증언들 을 들으며 ‘체험의 특권화’ 따위에 수긍해버리는 것은, 그들을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신 성화된 어둠의 영역 속에 던져두는 것이다.

증언자가 ‘10센티미터’에 집착하는 것은 결코 그것이 생생하고 강렬한 체험이어서가 아니다. 역으로, 아무리 복기해도 도저히 ‘나의 체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방비한

‘공백’과 대면했기 때문이다. 증언을 한다는 것, 그것은 구체적인 체험을 꺼내 그 공백 을 채워가는 과정이 아니라, “말하면 말할수록 그 담론에 의해서 구성된 의미가 붕괴”

되기 시작하는 공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말하면 말할수록 개별적 영역이 해

86) 도미야마 이치로, 임성모 역, 전장의 기억 , 이산, 2017, 97쪽.

87) 같은 책, 101쪽.

88) 같은 책, 100쪽.

체되고 마는 불안정한 발화, 그것이 바로 전장 체험의 이야기”89)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안부 생존자들이 부르는 물음의 노래가 어디를 맴돌고 있는지도 자명하 다. 나머지 삶 전체를 꽁꽁 묶어 그 주변을 맴돌게 하는 말뚝,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내 부지만 동시에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균열, 이어지는 이야기의 끝마다 불현듯 맞 닥뜨리게 되는 급격한 절벽. 그녀들의 말과 침묵은 라캉이라면 ‘실재’라 불렀을 어두운 중심점을 감싸며 공회전하고 있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나 ‘성노예’ 같은 공식적인 명명은 결코 이 실재를 관통하지 못한다. 말들은 항상 실재를 은폐한다.

그러나 언어가 지닌 독특한 아이러니는, 언어가 정확히 그 은폐와 모순의 방식으로 실재를 누설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그녀들은 ‘우리는 성노예가 아니다’라고도 말하고 ‘우리는 성노예다’라고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 ‘무엇’이었는 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사건의 기억”90)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진실은 증언자들의 반복과 번복 속에 아주 단순하게 드러난다. 그녀들은 말하기를 거부한다. “나 말 안 하고 싶어.” “말을 하면 아픈 데가 더 아파.” “나 부끄러워.” 그러나 끊임없이 발화한다. “아파도 말해야 해.” “말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알지.” “나 안 부끄러워.”

생존자들은 잊으려고 노력하고 동시에 잊힐까 두렵다. 모든 사람의 것인 이 언어로 지독히 개별적인 내 고통을 표현할 수 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모든 사람을 향해 소 리치고 싶다. 이 ‘불가능과 불가피함’을 둘러싼 반복과 중단은 생존자의 삶 속에 무한 한 생채기와 곡선을 그린다. 바로 이 자국들, 증언의 자리는 이 균열 어디쯤에 있으리 라. 구축하면 해체되는, 해체될수록 대면하는, 대면하자마자 증발하는, 불가능과 불가피 함 사이의 ‘비장소로서의 장소’로서. 이렇게 증언은 사건의 은폐와 발설을 동시에 포함 하는 장소로서 존재하고, 그래서 증언은 “거의 없으면서 많”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 (다시 말해서 결함적으로) 가능”91)하다.

그렇다면 ‘증언-되기’란 이 장소가 되려는 시도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서사화 의 작업이 ‘장소로서의 증언’으로부터 초과분을 삭제하고 결여분을 메우는 평면화의 작 업이라면, 서사화 대신 증언의 감각 자체를 재현하는 ‘증언-되기’는 증언의 추출과 정 제 작업을 거부하는 ‘증언의 공간-되기’다. ‘증언의 공간’이 된다는 것은 증언을 사실과 정보의 원산지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공간에 담긴 물음과 노래의 공회전,

89) 같은 책, 102~103쪽.

90) 오카 마리,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 현암사, 2016, 29쪽.

9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오윤성 역,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 레베카, 2017, 62~63쪽.

음각으로 새겨진 망설임과 한숨까지 미메시스하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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