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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정부의 동독 안정화 방안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를 전후해 동독인과 구소련과 동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계의 엑소더스가 본격화되었다. 서독정부의 대 책도 일대 개정을 가해 급증하는 이주자들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 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유사한 상황이 재연될 개연성이 존재한다. 독일 과 같은 규모는 아니라 해도 구소련 지역의 고려인들과 중국 내 조 선족들의 한반도 이주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1) 독일 이주자 대책

독일 이주자 문제와 대책은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다음 해에 이루어진 통일을 기준시점으로 일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 다. 분단 시절 서독의 이주자 대책이 독일 혈통주의에 기초한 원칙 (이주자 전원 수용)을 고수했다면 통일 전후 대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 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전이 종결되며 자유로운 서독행이 가능해지자 서독정부가 일정한 룰을 도입해 이주자들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정책적 전환을 초래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1989년 동독의 무혈혁명을 기점으로 이주자의 수가 급증했 기 때문이다. 분단 직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구동독 귀순자들은 1989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 해 전인 1988년까지 매 년 평균 2만 명 정도였던 동독이주자(귀순자, 탈출자)가 1989년에는 35

만 명에 달했고 소련과 동유럽으로부터 들어오는 해외이주자도 급격 히 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던 1987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증가하던 해외이주자는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대대적인 증가세 로 돌아섰다.

1986년까지 연평균 3~4만 명에 불과하던 해외이주자가 1988년에 는 20만 명을 넘었고 1989, 1990년에는 각각 35만 명, 39만 명에 달 했다. 이런 귀순자들과 해외이주자들의 급격한 증가로 서독의 사회 복지는 타격을 입었고 서독정부는 기존 정책에 일대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둘째, 통일 후 독일의 경제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 로 노동력이 부족해 해외인력을 수입해 왔던 독일이 늘어나는 실업 으로 골머리를 앓게 되었고 정부는 통일 후 동독경제 회복을 위해 엄청난 재정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즉 경제침체가 전통적인 귀순 자 및 해외이주자 정책의 변화를 주문한 셈이다.

해외인력 수입국 독일의 위상이 반전되었고 사회복지 분야는 과 도한 부담으로 타격을 입었다. 당사자인 동독인들이나 해외이주자 들도 인색해지는 지원책과 사회적 분위기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128)

1) 개념 정의

동서독이 분단된 이후 독일민족의 서독 행렬은 통일이 되고 이미 5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들 이주자들의 문제는 오랫동안 서독사회의 주요 테마가 되어오고

128) 귀순자들의 심리적 갈등에 대해서는 C. Friedrich, “Zur psychologischen Situation von DDR-Zuwandern,” in Deutschland Archiv 5, 1980. p.526 이하 참조.

있었다. 이들 이주자들은 이주 형태와 출신 지역에 따라 <표 1>과 같이 구분된다.129)

<표 3> 이주자 유형

유형 내 용

제1유형 귀순자(Uebersiedler)

▲ 동독정부의 허가를 득하고 서독으로 이주한 자들

▲ 서독정부가 동독정부로부터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석방시켜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에 억류되어 있던 정치범들(귀순자들은 서독으로 이주함과 동시에 동독국적을 잃게 됨)

제2유형

탈출자(Zuwanderer) ▲ 동독정부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한 자 제3유형

해외이주자(Aussiedler)

▲ 독일을 떠나 동구나 구소련지역에 거주하다 동구의 붕괴와 동서독 통일로 독일로 이주하는 자

귀순자와 탈출자를 굳이 분류하게 된 것은 1961년도에 동독에서 설치한 장벽 때문이다. 왜냐하면 국경에 장벽이 설치되기 전까지는 서독행을 결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국경지역에 장벽과 철조망이 들어서고부터는 상황이 반 전되었다. 동독 국경수비대의 국경 통제가 강화되었고 서독으로 탈 출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표 3>에 분류된 대로 귀순자들은 동독법에 따라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서독으로 이주한 자들로 정의하는 반면, 탈출자는 불법으로 국 경을 넘은 자들을 의미한다. 물론 서독 여행을 위해 동독정부의 허가 를 얻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으며, 국경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동독정 부는 세밀한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귀순자들의 서독행을 허가했다.

129) 귀순자들에 대한 사회 문제를 학문적 차원에서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퍼탈대 사회과학대 롱게(V. Ronge) 교수는 이들 서독이주자들을 이와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으며 그의 이러한 분류는 이 문제에 대한 논 의 속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허가는 서독에 가족이 있는 경우로 극히 제한했고 주로 나이든 노인 이나 병든 환자 등 동독경제에 부담이 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 어졌다. 귀순자의 범위에는 정치범도 포함되어 있다. 서독정부는 1인 당 평균 9만 마르크를 들여 1963년부터 1989년까지 3만3,577명을 석 방시켜 서독에 수용하였다. 이를 위해 총 34억 마르크가 사용되었다.

탈출자는 동독정부의 허가를 득하지 않은 채 서독으로 탈출한 이 주자를 의미한다. 탈출자는 이미 동서독이 분단된 직후부터 생겨나 기 시작해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설치되기 전까지 매년 평균 20만여 명에 달했다. 장벽이 만들어진 후에는 그 규모가 10% 수준으로 급격 히 감소했다. 귀순자와 탈출자가 동독에서 서독으로 귀순한 사람들 인 반면, 해외이주자는 구소련과 동유럽 지역에서 흩어져 살고 있던 독일혈통을 의미한다.

<표 4> 베를린장벽설치 이전까지 탈출자 규모(1949~1961년)

연도 탈출자 베를린 경유 탈출자

1949 129,245

1950 197,788 193,277

1951 165,648

1952 182,393 118,300

1953 331,390 303,737

1954 184,194 104,399

1955 252,870 153,693

1956 279,189 156,377

1957 261,622 129,579

1958 204,092 119,552

1959 143,917 90,862

1960 199,188 125,053

1961 155,402 125,053

2,686,938

-주: 1) 1962년 탈출자는 21,356명, 1963년 42,632명, 1970년 17,519명, 1983년 11,343명 등 1988년까지 연평균 2만 명에 달함.

2) 1961년은 8월 12일(베를린장벽 설치)까지 통계치임.

자료: 󰡔내독성보고서󰡕, 1975.

분단 직후 거의 매년 평균 20만 명에 달하는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주해 왔다. 그 수는 1959년까지 대략 230만 명에 달했으며 반소 시위가 있었던 1953년에는 33만 명이 서독행을 택했다. 탈출자로 동 독 시민이 급격하게 감소하자 동독정부는 1961년 8월 12일, 한 달 만에 베를린장벽을 설치했다. 이후 동독이주자의 숫자는 현저하게 감소했다(<표 4> 참조).

해외이주자는 소련해체, 동유럽 개방에 이어 독일통일이라는 상황 이 주어지자 급격히 증가해 통일독일 직후 최대현안이 되었다. 해외 이주자의 발생은 유럽역사의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으 로 다양한 민족이 평화스럽게 살던 유럽은 지난 19세기 중반 이후 민족국가를 강조하는 새로운 기류가 태동되었고 민족 간 분쟁이 고 조되었다. 타 민족에 대한 박해와 추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통적 으로 전 유럽 그리고 소련의 극동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던 독일계는 이런 민족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었다.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키고 유태인을 대량학살한 독일민족에 대한 보복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동남 유 럽지역에서 무려 88만여 명이 삶의 보금자리를 버리고 독일로 귀환 했고 2차 대전 중인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소련과 독일인 이주 협정을 체결해 38만9,000여 명,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등 과의 이주협정을 통해 14만5,000여 명의 독일계 혈통이 독일로 이주 했다.130)

특히 1941년 히틀러의 소련침공이 시작되자 소비에트연방 내 볼 가강 지역에 모여 살던 35만 명의 독일계와 코카서스 지방에서 정착

130) Joachim Rogal, Aussiedler 1991. p.1 이하 참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전까지 소련을 비롯한 발틱해 연안국가, 동유럽 국가 등지에 흩 어져 있던 독일계는 총 860만여 명에 달했다.

해 살던 독일인이 시베리아와 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추방되기도 했다.

2) 귀순자 및 이주자 발전 추이와 공론화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설치되자 이주자의 수는 훨씬 감소했다. 하 지만 서독여행을 허가받고 서독을 방문한 후에 동독으로 귀환하지 않는 노인이나 연금수령자는 해마다 10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르렀 다. 물론 이런 변칙적 체류는 동독실정법에 따르면 불법이지만, 동독 정부는 의도적으로 이런 노인들을 중심으로 서독 여행을 허가해 주 어 변칙적인 이주를 조장해 왔다.

이것은 더 이상 직업생활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을 서독으로 이주시 킴으로써 동독정부의 재정지출을 줄이며 각종 사회 부담을 감소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131) 하지만 이러한 귀순자들의 문제 는 독일 사회에서 커다란 쟁점이 되지 못하였고 별 저항 없이 독일 사회에서 수용되었다.

귀순자 문제가 독일 사회에 처음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이다. 동독정부가 서독의 끈질긴 요구로 동독인의 서독 여행 허가기준을 대폭 완화하게 되었다. 쌓여 있던 신청자들이 일시에 여 행 허가를 발급받았다. 한꺼번에 많은 귀순자들이 서독으로 이주하 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처리가 정치권의 주요 화두가 되었다.

귀순자 문제가 양독의 정치권의 쟁점으로 떠오르자 그동안 주로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만 허용해 왔던 동독정부의 서독 여행허가

131) 동독정부가 귀순자 문제에 대해 이와 같이 철두철미한 계산하에서 행동 해 왔다는 사실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기 일주일 전에 베를린장벽을 기 어오르다 동독 경찰에 의해 사살된 한 젊은 청년의 슬픈 사연 속에서 잘 나타난다. 이렇듯 동독정부는 젊고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여 행 허가는 엄격히 통제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