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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분단된 독일은 국제사회를 향해 통일을 요구할 수 없었다.

전범국가로서 분단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주변국가와 국제사회는 독일통일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독일 국민들은 마음속으로는 통일을 염원하고 있어도 현실적으로 통일을 요구할 수 없었다.

서독의 여러 연구기관이 조사한 통계에서도 통일을 원하는 수가 전체 국민의 95% 이상에 달했지만 현실적으로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수는 불과 3~4% 정도로 나타났다. 이렇듯 독일인들은 전 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국제사회의 분위기도 독일통일은 의제 밖이었다.

모여 공산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슈타지의 무력진압이 가 해졌고 70명의 재야인사들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월요일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니콜라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10월 9일에는 무려 7만 여 명이 월요데모에 가담했다. 슈타지의 무자비한 탄압이 예고되었 다. 쿠르트 마주어 등 시민단체 지도자들은 폭풍 전야와 같은 상황을 평화적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폭력시위로 발전하지 않도 록 ‘비폭력’을 연호했다. 사통당(SED)은 공식적으로 동독교회에 정치 적 행동을 삼가고 기도운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라이프치히의 월요데모는 점차 전국의 대도시로 확산되었다. 1989 년 10월 2일에는 나치시대 저항의 대명사이자 개신교 지도자들의 민 주화 운동의 산실인 동베를린 겟세마네 교회에서 정치범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고 교회 앞에서는 경고시위가 시작됐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에는 전 동독지역에서 약 12만 명이 참가한 월요데모가 일어났고 그 규모에 눌린 공안경찰은 계획했던 대규모 진압작전을 수행할 용기를 잃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18일 에 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총서기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18년간 의 권좌에서부터 내려왔다.

막강했던 슈타지와 최신예 장비로 무장한 군부가 라이프치히의 한 조그만 교회에서 시작된 주민들의 비폭력기도운동에 굴복하고 말았 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서기장에 올랐다.

하지만 동독주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더욱 거셌다. 공산당 지도부 는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던 개혁 공산주의자 한스 모드로브(Hans Modrow)를 총리로 세우고 주민들의 분노를 무마하려 했다. 모드로브 총리는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에게 회담을 제의하고 동독의 혼란상황 을 극복하기 위해 150억 마르크 규모의 재정지원을 요구했다. 이에 콜 총리는 문제해결을 위한 10개항에 달하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10개항에는 동독 내 민주화 요구와 유럽의 틀 속에서 동독 문제를 해결하려는 콜 총리의 노력이 담겨 있다. 동독의 문제를 유럽과 국제 사회의 이슈로 삼아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이런 가운데 동독주민들의 엑소더스가 폭발했다. 동독주민들은 동 베를린 주재 서독 대표부,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에 진입해 여행의 자 유를 부르짖는 한편 오스트리아 국경을 통해 서구사회로 몰려들었다.

급기야 동독정권은 베를린장벽을 개방할 것을 결정해야 했고 1989년 11월 9일 27년 만에 동서를 가르던 시멘트 장벽이 해체되었다.

서독의 콜 총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동독에 민주화 정권 창출을 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외교전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