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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고 3남 김정은의 3대 세습이 불투명 한 가운데 북한 내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작년에 실시된 화폐개혁은 가격폭등으로 이어져 주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키 고 정권의 대 주민 통치력의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화폐개혁을 주 도한 것으로 알려진 노동당 재정부장과 김태영 부부장은 올해 3월 10일 우리의 육사에 해당하는 평양 강건군관학교 연병장에서 처형되 었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우리에게 기회이자 위기이다. 급변상황을 제대 로 관리하고 우리가 원하는 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최상이다. 하지만 급변사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중국으로 대량탈북이 이어지고 중 국이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준다면 이후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불 리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급변사태에 대한 대비작업을 충실히 하여 만전을 기한다면 북한의 급변사태는 우리에게 기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동독의 급변 사태를 맞아 이를 통일로 이끌어낸 독일의 예를 살피기로 한다.

동독의 급변사태는 1989년 가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며 시작되었 다. 여름부터 집단탈출이 있었으나 장벽의 붕괴를 계기로 공산정권 이 몰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동독주민의 무혈혁명이 성공 한 것이다.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축출되고 에곤 크렌츠(Egon Krenz)에 이어 만프레드 게를라흐(Manfred Gerlach)가 당서기장에 선임

* 이 단원은 한국경제연구원 북한 급변사태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2010년 9 월 10일 NDI의 정책세미나 ‘북한 급변사태 시 긴급 식량구호대책’에 참석 하여 발제한 부분을 수정・보완한 것임.

되었으나 급변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다.

동독에 급변사태가 발생하자 서독의 콜 총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대동독 문제에 접근했다.

하나는 국제정치적 및 외교적 차원으로 동독 탈출자들을 보호하고 향후 사안들을 독일민족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었다. 결국 이것은 통일외교로 이어졌다. 다른 하나는 정치・사회적 안정이었다.

동독의 급변사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궁극적으로 동독에 민주적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1) 동독 내부 정치상황

동독의 급변사태는 1989년 초부터 조짐이 나타났다. 소련에서 시 작된 개혁의 물결이 동유럽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동독에서 치러진 그해 5월 지방선거는 공산당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부정선거로 얼 룩졌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 공산정권이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사통당 후보 일색인데다 득표율마저 99%를 기록하자 시민들의 저 항이 노골화되었다.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고 호네커 정권의 군과 슈타지를 동원한 탄압이 거세졌다. 동독 시민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미 반세기 동안 축적된 자유와 풍요로움에 대한 동경이 분출되었 던 것이다.

라이프치히에서는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회가 월요 데모로 승화되어 반독재 투쟁에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평화와 인권 단체가 조직화되고 정치적으로는 ‘새 포럼’(Neues Forum)이 만들어져 본격적인 반정부운동을 전개했다.125) 8월 초부터는 동독 탈출이 조

125) Susanne Benzler, Deutschland-Ost vor Ort, Opladen 1995, p.86.

직적으로 일어났다. 동베를린 소재 서독대표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 고 체코와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에도 동독을 탈출한 주민들로 인 산인해를 이루었다.

월요데모는 정권의 무력진압으로 초기에는 다소 위축되는 듯했으 나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점점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며 확대되었 다.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데모는 이웃도시뿐 아니라 베를린 등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무력진압에도 비폭력을 고수한다는 지도부의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여행의 자유를 달라, 우리가 주 권을 가진 국민이다”라는 주민들의 외침은 지속되었다.

호네커는 디데이를 정했다. 월요데모를 완전 진압한다는 계획으로 군부와 비밀경찰 슈타지를 준비했다. 비폭력시위대를 진압해 왔던 병력들은 당의 방침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이런 가운데 한 아마추어 비디오 기사가 교회 지붕에 올라가 월요데모의 현장을 촬영해 서독 제2공영방송 ZDF에 비디오를 보냈다. 월요데모 현장이 전 세계로 퍼 져나갔다. 세계인의 눈이 동독에 집중되었고 공산당은 호네커를 축 출하고 서독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을 공언하게 되었다.

북한에는 동독과 달리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이 없다고 말한 다. 하지만 북한이 급변하고 과거사를 정리해야 할 시점이 오면 주민 들의 저항사가 어김없이 기록될 것이다. 탈북으로 정권에 저항했던 주민들의 모습, 화폐개혁으로 실망한 북한주민들의 항의, 장마당 상 인과 군인들의 싸움과 같은 사건들이다.

북한의 개방을 주도했던 연형묵, 김달현, 박봉주를 비롯해 최근 권 호웅 내각참사의 처형에 이르기까지 김정일 정권의 총살은 이런 저 항으로부터 정권을 비호하려는 김정일의 극단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1) 샤보프스키의 실언과 베를린장벽 붕괴

동독의 내부 상황은 공산당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의 시위와 저항 으로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외적 상황은 동독 공산당에 더 큰 좌 절을 안겨주었다. 1989년 9월 헝가리 정부가 대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동독인들은 당에 ‘발(행동으)로 정치적 심 판’을 가했다.

위기를 간파한 크렌츠 정권은 수차례의 각료회의를 열어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관련 여행법’을 개정한다고 결정했다. 기자회견은 1989 년 11월 9일, 오후 6~7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각료회의에서는 주민 들의 격렬한 시위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정권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여행 자유화 조치를 발표하기로 의결했다. 시행일은 11월 10일로 잠정 결정되었으며 대변인 격인 샤 보프스키 시장에게는 시행일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내려지지 않았으 므로 구체적인 시행일은 발표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이탈리아 연합통신 ANSA의 Riccardo Ehrman 기자가 어눌한 독일어로 질문을 던졌다.

“며칠 전에 여행자유화 조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는데 어 떤가요?”

샤보프스키는 해외 특파원들과 현장 카메라 앞에서 침통한 표정으 로 크렌츠 서기장이 전달해 준 문서를 읽어내려 갔다. “외국을 여행 하려는 주민은 사전에 신청서를 제출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서베를린과 서독으로의 여행도 조건(여행동기나 가족관계) 없 이 언제든지 자유롭다.”

며칠 동안 과로에 시달리며 각료회의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채 서류 한 장을 들고 서 있는 샤보프스키 대변인에게 후속 질문이 이 어졌다. 독일 디벨트의 Peter Brinkmann 기자였다. 그는 “여행 자유화

조치는 언제 시행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샤보프스키는 얼떨결 에 “Das tritt nach meiner Kenntnis … sofort, unverzueglich”126) “제가 알기로는 … 지금 즉시 유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회견은 동독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동독정부의 완전한 승인이 나지 않은 답변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사람들이 국경으로 모여들었다. 수만 명의 주민들이 곳곳에서 국경수비대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명령은 받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국경을 통과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서로서로 부둥켜안았고 그 자리에서 베를린장 벽 개방을 축하했다. 이어 주말이 되자 수백만 명의 동독주민들의 물 결이 서독으로 밀려들었다. 서독을 향해 트라비와 바르트부르크(동독 의 대표적인 차종 2개)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고 친척을 방문하고 여 러 도시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서독에서 지급한 100마르크의 환영금 을 주머니에 넣고 ‘소비자 파라다이스’를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샤보프스키의 실수가 베를린장벽 붕괴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는 구공산세력들로부터는 ‘돼지,’ 개혁주의자들로부터는 ‘쥐,’ 국민 들로부터는 ‘천의 얼굴을 가진 자,’ 함께 기소된 자들로부터는 ‘겁쟁 이’라는 좋지 못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127) 하지만 그가 자의반 타의 반 내린 결정들은 혼돈의 동독사회에서 유혈사태를 막고 사태를 평 화적으로 마무리하고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26) Hans-Hermann Hertle, Chronik des Mauerfalls, 10. Auf., Berlin, 2006, p.145.

127) 동독의 홍보전문가 Karl-Eduard von Schnitzler의 샤보프스키 비판 참조, Berliner Zeitung, 2000년 7월 3일자

(2) 대외상황: 동서독 외교전쟁과 헝가리 국경 개방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은 소비에트연방을 해체시 켰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변화는 동유럽 공산권에 지대한 영향 을 끼쳤다. 체코・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 대다수 국가에 변화의 바 람이 불며 체제전환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변화의 물결은 동독에도 불어닥쳤다. 1989년 8월 동독에 대규모 엑소더스가 시작되었다. 급변사태다. 탈출한 동독주민들은 체코, 폴 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베를린 서독 대표 부에도 서독행을 요구하는 동독주민들로 가득했다. 서독 콜 정부의 개입이 즉각 이루어졌다. 체코, 폴란드 정부에 동독 탈출자들을 보호 해 줄 것을 요구했고 모든 탈출자들은 서독에서 수용하게 될 것을 선언했다. 동독 탈출자들에게는 서독행을 약속해 주었다.

9월에는 동서독 간에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이 벌어져 헝가리의 대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었다. 동독은 전통적 바르샤바 동맹국이 고 사회주의 형제국임을 내세워 국경 개방을 막아보려 했으나, 서독 은 변화의 시대에 헝가리도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해 달라고 설득 했다. 서독은 또한 헝가리 개혁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재정적 인 약속도 해 주었다. 당시 네메츠 총리과 호른 외무상은 이 순간이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를 차후 밝히고 있다. 외교전쟁은 서독의 승리로 끝났고 헝가리 정부는 9월 11일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한다 고 발표했다(제4장. 2. (3) 대헝가리 외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