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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출현한 데카당스 유형

Ⅱ. 작품의 세계

4.2 전후를 살아가는 여성의 유형

4.2.4 전후 출현한 데카당스 유형

『산소리』는 전쟁 직후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으로서 그 이전의 작품에 서는 그리지 않았던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여성 유형이 등장한다. 그들은 전 후 아메리카의 향락적 소비문화가 침투해 그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혼 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찰나적’이며 ‘향락적’인 형태로 일본적인 정서와는 단절된 이미지를 표방한다. 이러한 유형으로 신고 회사의 여사무원 에이코(英子)와 슈이 치의 정부(情婦) 기누코를 들 수 있다.

에이코는 작품 전반에 “딱 손바닥에 찰 정도의 작은 유방”(p.279)으로 자주 묘 사된다. 작은 유방은 관능적인 미와는 대조적인 이미지로 그녀의 가벼운 존재성 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에이코의 작은 유방은 신고로 하여금 춘화(春畫)를 연 상시킬 만큼 ‘방종’과 ‘퇴폐’로 함축되는 데카당스적 이미지로 부각된다. 작품 속 에서 에이코와 어울리는 남자들은 그녀의 외모나 인간적인 매력에 끌리는 것이 아니다.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다 버리면 그만인 가벼운 노리개 정도로 그녀를 대 한다. 에이코는 작은 유방 이외에 “얍삽한 여자다운 몸짓”(p.306), “보기만 해도 경망스러울 것 같은 여자”(p.307)로 그려져 시종일관 외형 그 자체만으로도 ‘찰나 적 향락’의 이미지가 넘친다.

에이코는 신고의 회사 여사무원으로 3년간 근무해온 여성으로서 한 회사에 근 무하는 기혼 남성인 슈이치와 춤을 추러 가기도 하고 슈이치의 아버지이자 상관 인 신고와 댄스홀에 가서 댄스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등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여성이다. 외형과 삶의 태도 모두에서 ‘찰나적 향락’의 이미지로 일관하는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에 대해 ‘타락했다’고 표현함으로써 퇴폐 적 이미지를 공고히 한다.

“하지만 조금 지나 생각해보니, 아버지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 가 나빴다는 걸 깨달았어요. 슈이치 씨를 따라 댄스하러 다니기도 하면서, 그만 우

쭐해져서는, 기누코 씨의 집까지 놀러 가기도 했었거든요. 타락했었죠.”

『全集 第十二巻』 p.352

에이코는 전쟁으로 순식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황량하게 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야기한다. 이러한 불안감의 고조는 찰나적 향락주의를 조장하여 에이코와 같은 타락한 인간을 출 현시킨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에이코 또한 전쟁의 산물이자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에이코는 작품의 후반부로 가면서 기쿠코와 슈이치 부부의 관계 회복을 도우 며 찰나적 향락의 경향을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것은 기쿠코와 슈이치에 대한 막연한 호의와, 기누코에 대한 질투심, 지인의 소개로 자신을 기꺼이 고용해준 신고에 대한 보은(報恩) 등의 복합적 요소에 의한 일시적인 양상일 뿐 그 이상 발전하지는 않는다.

“저런 좋은 부인이 계시면서, 남자들의 속은 알 수가 없어요.”

『全集 第十二巻』 p.353

에이코가 슈이치에게 호의를 보이고, 질투도 있다는 것을, 신고는 간파하고 있기 에.

『全集 第十二巻』 p.307

위의 인용문에서 말하는 “좋은 부인”은 슈이치의 아내 기쿠코를 가리킨다. 에 이코는 기쿠코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 호의를 가지고 슈이 치 부부의 재결함을 돕는다. 누군가를 돕고 호의를 베푸는 모습은 슈이치 부부에 게 국한되고 있다.

지금까지 전후 빠르게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조류가 전파되고 이에 잠식되어 눈앞의 향락과 쾌락만을 좇아 살아가는 여성 에이코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여성 유형으로는 기누코가 있다.

기누코는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다. 가와바타는『산소리』에서 처음으로 전쟁미망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기누코는 결혼한 지 2년밖에 안 된 슈이치와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는 여성이다. 그녀의 외모는 제3장「구름 불꽃 (雲の炎)」에서 예쁜 외모에 아주 심한 허스키로 그려진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맑고 투명한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이미지로 전후에 등장한 타락한 인 물을 조형하기 위한 작가의 설정임을 알 수 있다. 슈이치는 이 목소리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자극적인 욕망에 이끌린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퇴폐적인 연애를 이어간다. 기누코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연애는 전전(戰前) 일본의 전통적 인 여성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이는 전후 방향성을 잃은 인간군상을 조형한 것이다.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아닌 찰나의 관능에 끌려 순간의 쾌락을 좇아 불나방처럼 삶을 이어가는 나약한 인간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옆 사람을 돌려줄 테니 내 전사한 남편을 돌려줘, 기누코는 그런 소릴 하지 않 겠어요. 살아서 돌아오기만 한다면, 남편이 어떤 외도를 하든, 다른 여자를 만들든 말든, 난 남편이 좋을 대로 해 주겠어.

『全集 第十二巻』 p.369

기누코는 자신의 남편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남편이 어떤 짓을 하든지 수용할 수 있다며 극단적인 표현을 한다. 그것은 남편이 돌아온다면 지금 의 남자를 버릴 수 있다는 반증이다. 이것은 연애도 사랑도 아니다. 순간의 도취 를 위한 향락이다. 기누코의 찰나적이고 향락적인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누코는 함께 사는 미망인 이케다(池田)와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 운 몸으로 살아가자고 약속하며 주체적인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제7장 

「아침의 물(朝の水)」에서 이러한 의지와는 정반대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보 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타락해버릴 거야”(p.371)라고 자유를 빙자한 향락 과 찰나주의적 쾌락에 함몰되어 가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녀의 모습은 신고

에게도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p.516)으로 비추어지며 방종의 삶을 살아가는 기누코의 데카당스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기누코는 어떠한 남성이나 사람의 시선, 미망인이라는 사회적인 틀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분방한 태도로 자신의 외로움과 욕망을 해소하며 살아가는 여성이다. 다시 말해 ‘향락적 자유주의’를 표상하는 여성이다. 이는 ‘찰나적 향락’

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에이코와 함께 전후에 새롭게 등장한 데카당스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후의 새로운 타입인 에이코와 기누코의 이미지는 앞에서 살펴본 다 른 여성들의 이미지와 동일한 선상에서 가와바타의 여성관을 표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두 여성 인물은 전후 아메리카 문화의 유입에 따른 가치관의 변 화에 기인한다. 일본의 전통적 여성의 모습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가와바타의 저항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데카당스 이미지와는 대조적인 기누코의 마지 막 반전의 모습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누코는 임신 중절을 강요하는 슈이치 의 횡포에도 끝까지 새 생명을 지켜내며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떠난다. 그 녀의 모습은 앞에서 살펴본 기쿠코의 반전의 대사와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다. 가와바타는 영향력 있는 작가로서 전후 회복 불가능할 것만 같은 현실에 새 생명의 잉태와 탄생이라는 희망의 싹을 틔움으로써 새 삶의 재건 의지를 호 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