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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심미적 유형

Ⅱ. 작품의 세계

4.2 전후를 살아가는 여성의 유형

4.2.1 고전적 심미적 유형

고전적 심미적 유형은 가와바타의 작품 속에서 자주 나오는 이상적인 여성 이 미지이다. 외형적으로 우아하고 가녀린 매력을 발산하고 내면적으로는 순수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여성 유형이다. 다시 말해서 내면과 외면이 서로 조응하는

143) 박승미(2007)「川端康成의『山の音』에 나타난 여성관」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정순원(2007)

「川端康成의 작품에 나타난 女性像: “설국(雪國)”과 “산소리(山の音)”를 중심으로」등의 석사 논문 등이 있다.

144) 高橋英夫(1987)「川端康成における夢の摂理ー「山の音」試論」『国文学: 解釈と教材の研究』32巻 15号 学灯社 pp.72-78.

145) 鶴田欣也(2013)「『山の音』」田村充正 編『川端康成作品論集成第八巻』おうふく pp.219-246.

이상적 여성을 가리킨다. 이는 일본 고전 문학 『겐지모노가타리』에 나오는 처 연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들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헤이안 시대 왕조 문학에 등 장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덧없는 사랑을 숙명으로 알고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이에 대해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모노노아와레’라는 미의식을 도출했다.

『산소리』에서는 신고의 며느리 기쿠코에게서 고전적 심미적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작품에서 신고와 감수성 면에서 가장 호흡이 맞는 인물이 기쿠코이다.

기쿠코가 지닌 자연에 대한 감성과 가식이 없는 순수한 표현력을 신고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기쿠코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복(至福)이다.

62세가 된 신고는 자신이 노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서 죽음 이 가까이 있다는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신고에게 기쿠코는 유일한 안식처이다. 그녀는 용모와 자태 모두 왕조시대 귀족 여인처럼 우아하고 아름답 다. 게다가 자연을 느끼고 사람의 마음도 잘 헤아리는 덕성을 지녔다. 이런 유형 의 여성 인물을 창출한 것은 이상적 심미적 여성의 표본을 헤이안 시대 왕조 문 학에 나오는 여성에서 구했기 때문으로 유추해본다.

제2장「매미의 날개(蝉の羽)」에서 신고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 슈이 치(修一)와 딸 후사코(房子) 때문에 현실적인 중압감을 느낀다. 이처럼 답답한 가 정에서 신선한 공기가 통하는 창문 역할을 하는 인물이 기쿠코이다. 신고는 기쿠 코에게서 위안을 받고 안식을 느끼는 것으로 나온다. 다시 말해 신고의 기쿠코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초로의 노인 신고는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전후의 불안정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무력한 가장이기도 하다.

그런 신고가 유일하게 휴식처라고 생각하는 것이 며느리 기쿠코인 것이다. 작가 는 기쿠코라는 등장인물 안에 젊은 시절 신고가 동경했던 처형의 모습을 오버랩 시킴으로써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향해 보이는 비윤리적 감정으로 비추어지지 않 도록 기교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턱에서 목에 걸친 선이 말할 수 없이 세련된 아름다움이었다. 한 대에서 이런 선은 생겨날 것 같지는 않고, 몇 대를 걸친 혈통이 낳은 아름다움인가 하고, 신고 는 서글퍼졌다.

머리 모양 때문에 목이 돋보여서 그런지 기쿠코는 약간 야위어 보였다.

기쿠코의 가늘고 긴 목의 선이 아름답다는 것을 신고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알맞 게 떨어져서 누워 있는 눈의 각도가 한층 그것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것 같다.

가을 햇빛도 좋았는지 모른다.

그 턱에서 목에 이르는 선에는 아직도 기쿠코의 처녀다움이 감돌고 있다.

『全集 第十二巻』 p.533

위에서 그려지는 기쿠코의 모습에서 아름답고 기품 있는 자태를 떠올리게 된 다. 일본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가녀린 여성을 떠오르게 한다. 완숙한 미를 뽐내 는 여성이라기보다는 여리고 고운 선을 간직한 미소녀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 다. 작가는『부모에게 보내는 편지(父母への手紙)』에서도 여성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어린 “소녀가 가진 위험”

146)

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고 자신의 이상형을 밝히 고 있는데 이는 기쿠코의 미소녀적 이미지와 중첩된다. 기쿠코는 이처럼 외모에 서 풍기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소녀 같은 청초한 내면의 매력도 지닌 여성이다.

그 기쿠코는 화장을 하지 않고, 약간 창백한 얼굴을 붉히고, 졸린 듯한 눈으로 수줍어하면서, 연지가 지워진 순수한 입술에서 깨끗한 이를 보이고 멋쩍은 듯 생 긋 웃는 것을, 신고는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다지도 앳된 구석이 아직 기쿠코에게는 남아있는 것인가.

『全集 第十二巻』 pp.384-385

신고는 기쿠코와 신주쿠 공원에 갔던 것을 아내에게도 슈이치에게도 말하지 않 고 있다.

그러나 기쿠코는 가마쿠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털어놓은 것일까? 털어 놓을 만한 것도 못되지만 기쿠코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을 것 같다.

『全集 第十二巻』 p.459

위의 인용문에서 기쿠코는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아버지와 신주쿠

146) 川端康成(1980)『全集 第五巻』新潮社 p.188.

나들이를 할 정도로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정작 신고는 아 들과 아내에게 며느리와 신주쿠 공원에 다녀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남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며느리와 함께 데이 트를 한다는 것이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신고는 알고 있다. 한편 기쿠코는 세속적인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세계에 속한 여성이 아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 수한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는 가와바타가 추구하는 심미적인 여성이며 고 전적 정취를 느끼게 한다. 기쿠코는 예술에 대한 조예도 있으며 자연의 미를 느 낄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을 갖추고 있어서 신고는 더욱 기쿠코에게 끌리게 된 다. 시아버지 신고가 기쿠코에게 느끼는 감정과 기쿠코가 시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은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기쿠코는 시아버지와 나들이를 다녀온 것을 감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순수한 인물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비도 하오리도 국화라, 국화의 가을도 지났군. 올해는 후사코의 소동으로, 기 쿠코의 생일을 잊어버렸구나.”

“오비는 사군자예요. 일년내내 맬 수 있어요.”

“사군자란 무엇이냐?”

“난초에 대나무에 매화에 국화···.”하고 기쿠코는 거침없이 말하고,

“아버님, 어딘가에서 보셔서 아실 거예요. 그림에도 있고, 기모노에도 잘 쓰거든 요.”

『全集 第十二巻』 p.321

“비스터가 뭐냐?”

“전망선이라는 것이지요. 잔디 테두리나 안쪽 길은 모두 완만한 곡선이에요.”

기쿠코는 학창 시절 선생님에게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全集 第十二巻』 p.449

기쿠코는 생명이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다양

한 사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귀 기울일 줄 아는 여성이다. 다시 말해 생명감이 넘 치는 역동적인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작품에는 기쿠코라는 인물이 지닌 자연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 부각되고 있다. 가와바타의 미의식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없는 아름다움은 무의미하다는 인식이 들어있음을 본다.

“젓가락 같고 이쑤시개 같은 귀여운 가지에,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은 정말 귀여웠어 요.”

“그랬었나? 꽃이 피어 있었나? 나는 몰랐구나.”

“피어 있었어요. 작은 가지엔 꽃이 한 떨기에 두어 개····이쑤시개 같은 가지에는 꽃이 단지 한 송이 달린 것도 있었어요.”

『全集 第十二巻』 p.458

기쿠코는 작품 전반에 걸쳐 가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기 도 하고 가족들 간의 심리적 갈등이 야기되지 않도록 재치를 발휘하는 등 세심 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제1장 ‘쓰보야키(壷焼)’ 이야기는 가족이 4명인데 신고가 저녁 식사용 소라를 3개만 사오는 바람에 난처해하게 된 에피소드다. 가 정사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자연과 주변 환경에까지 세심하게 살피는 기 쿠코에게서 민감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기쿠코의 이미지를 정리해 보면, 가녀린 소녀 같은 아름다움 속에 내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에서 청순하고 조심스러운 왕조 시대 귀족 여성들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내면과 외면의 조화에서 나오는 그 윽한 아름다움은 가와바타가 심취한『겐지모노가타리』의 미의식인 ‘모노노아와 레’의 고전적 정취가 느껴진다.

기쿠코를 통해 보여지는 가와바타의 이상적 여성상을 하세가와 이즈미는 “살 아있는 육체의 인간을 넘어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

147)

하다고 말하며 그 이미지상 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그와 대비되는

『산소리』속 주변 여성들에 의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기쿠코는 『설국』의

147) 長谷川泉 編(1969)『川端康成作品研究』八木書店 p.224.

요코『고도(古都)』의 지에코(千栄子) 등과 이미지가 일맥상통하고 있다. 가와바 타 특유의 관념과 몽상 속에서 구축된 여성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기쿠코가 지닌 아름다움의 힘은 주인공 신고를 비현실적인 망상과 죽음에 대 한 공포로부터 구제한다.

“기쿠코”하고 신고는 부르고 나서는

“꽤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인데, 기쿠코 내외는 별거해 볼 생각은 없니?” (중략)

“아뇨, 아버님께서도 잘해주시고, 저는 함께 지내고 싶은데요. 아버님 곁을 떠난 다는 건 얼마나 허전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다정한 말을 해주는구나.”

『全集 第十二巻』 p.392

신고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살아온 세대이다. 전쟁은 인간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신고도 전쟁으로 상처를 받았다. 신고는 제12장「상처 후(傷の後)」에서 전쟁에 의해 상실돼 버린 남성으로서의 기능과 편협해져 버린 사고방식에 대해 한탄한다. 이처럼 전쟁은 인간의 심신을 마비시켰다. 결혼한 아 들과 딸은 가정생활이 순탄치가 않고 늙은 아내는 둔감하다. 신고는 모든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게다가 62세라는 나이를 의식하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온다. 이럴 때 기쿠코의 애정 어린 한 마디는 신고에게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 을 발견하게 한다. 기쿠코는 삭막한 사막 같은 삶에서 유일한 오아시스로 작용한 다. 기쿠코의 소녀 같은 순수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다. 이와 비슷한 인물유형으로는『이즈의 무희』의 가오루를 들 수 있다.

“좋은 사람이네.”

“그건 그래, 좋은 사람 같아.”

“정말 좋은 사람이야. 역시 좋은 사람은 다르네.”

이 말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중략) 나 자신도 나를 좋 은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중략) 스무 살 난 나는 자신의 성질이 고아 근성으로 비뚤어져 있다고 지독한 반성을 거듭하며, 그 숨 막힐 것 같은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