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에구치 노인의 의식의 흐름의 추이

Ⅱ. 작품의 세계

5.3 에구치 노인의 의식의 흐름의 추이

『잠자는 미녀』는 노년에 접어든 노인들이 죽음을 직시하면서 허무를 느낀 나 머지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삶의 활력을 얻기 위해 은밀한 집에 찾아가는 이야기다. ‘잠자는 미녀’라는 표면적인 설정만을 본다면 퇴폐적인 호색문학(好色 文學)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시점인물인 에구치 노인의 의식의 심층에 닻을 내 려 탐색해보면 그 안에는 과거에 대한 참회와 성찰, 근원적으로 갈망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잠자는 미녀’를 매개로 해서 기억과 환상이 뒤섞여 의식 속에 재현된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한 반추이며 참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에구치 노인은 어머니의 존재라는 생의 근원에 다다르게 된다. 에구치 노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와 존재의 근원에 대 해 물음을 던진다. 잠자는 미녀들에 대한 생각도 성적 대상에서 차츰 보살과 같

은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그녀들이 살아갈 미래에 축복을 기원하는 심정으로 이 행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잠자는 미녀들과 체온을 나누고 오감 으로 느끼면서 에구치의 의식에 떠오르는 광경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마무라 준코(今村潤子)는 “에로스 그 자체인 나체의 미녀를 굳이 ‘진홍색 비로 드 커튼’ 안에 재우는 장면설정은 에구치에게 모태 감각을 되살려 성(性)의 근원 으로 돌아가 삶을 생각하게 하기 위한 것”

169)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마무라 준코 의 견해는 위에서 서술한 논자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 것으로서 설득력이 있다 고 본다.

‘잠자는 미녀’들에 의해 촉발되는 에구치 노인의 과거의 기억은 이성간의 사랑 으로 만났거나 스치듯 우연히 만난 여성들과의 기억, 결혼 전 순결성을 빼앗긴 막내딸의 기억 등 대부분 여성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 고 에구치의 여성 편력은 결혼해서 세 딸을 낳고 출가시킨 후에도 50여 년 가까 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모성적인 여성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갈망은 ‘잠자는 미녀’의 집에 처음 방문한 날부터 드러나고 있다.

비밀클럽을 찾기 전 에구치 노인은 매일 밤 선잠에 악몽을 꾸기 일쑤이며 젊 은 나이에 암으로 죽은 여류 시인의 시집에 나오는 두꺼비, 검정 개, 익사체 같 은 것을 떠올리며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비밀클럽에 와 서 잠재워진 소녀들이 있는 방으로 가기 전에도 에구치는 ‘잠자는 미녀’가 익사 체 같은 소녀가 아닐까 주저하고 “깨어나지 않는 소녀 옆에 하룻밤 누워보려고 하는 노인 만큼 추한 것이 있을까?”(p.139)하고 노년의 추한 모습에 혐오감을 느 끼기도 한다. 이와 같이 죽음의 공포와 노년의 추함을 느끼면서도 ‘잠자는 미녀’

의 집을 다섯 번이나 찾게 된 것은 그녀들이 번잡한 현실 세계가 아니라 별세계 에 잠들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에구치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소 녀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감각적 묘사를 하는데 특히 살냄새와 같은 후각과 부드 럽고 포근한 촉감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편안한 잠에 빠진다. 소녀들이 발산하는 풋풋한 살냄새는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서 느꼈을 젖 냄새로 비약한다. 모성 내지

169) 今村潤子(1997)「『眠れる美女』ー人間の根源への遡及」『国文学: 解釈と鑑賞』62巻4号 至文堂 p.123.

는 모태로의 회귀를 통해 노년의 허무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초연해져 가는 에구 치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소녀는 ‘젊은 온기와 부드러운 향기’로 에구치를 매혹시키며 노년에 맛볼 수 없는 달콤한 잠을 선사한다. 특히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젖 냄새는 강렬 한 환각을 불러일으키며 젖 냄새 때문에 다투었던 과거의 여성을 되살려내게 된 다.

에구치는 소녀의 드러난 어깨를 이불로 덮어 감추며 눈을 감았다. 소녀의 냄새 가 감도는 가운데 문득 갓난아이 냄새가 코에 와 닿았다. 젖먹이의 그 젖비린내다.

소녀의 내음보다도 달콤하고 진하다.

“설마···.” 이 소녀가 아이를 낳고 가슴이 불어 유두에서 모유가 배어 나오고 있을 리는 없다. 에구치는 소녀의 이마와 볼, 그리고 턱에서 목에 이르는 처녀다운 선을 조사하듯이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어깨를 덮은 이 불을 살짝 들어 살펴보았다. 분명 젖을 먹인 흔적은 없다. 가만히 손끝으로 만져보 아도 젖지 않는다. (중략) 실제로도 여자다운 냄새가 날 뿐이다. 그러나 에구치 노 인은 분명히 바로 지금 젖먹이의 냄새를 맡았다. 순간적인 환각이었을까. 왜 그런 환각이 일었을까 의아해하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신의 마음속 작 은 빈틈에서 젖먹이의 냄새가 떠오른 것일 것이다.

『全集 第十八巻』 p.143

위의 인용문을 보면 에구치 노인은 소녀에게서 갓난아기의 젖 냄새가 나는 환 각에 빠지게 된다. 에구치는 “자신의 마음속 작은 빈틈”이 젖 냄새의 환각을 불 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속 작은 빈틈’을 논자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채워지 지 않는 ‘결핍된 모성’이라 생각한다. 이는 환각을 경험한 이후 에구치의 다양한 감정의 교착상태를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다. 환각 이후 에구치는 갑자기 서글픔 이 밀려오고 죄악감에 빠져들어 도망치고 싶어지는가 하면 소녀의 몸에서 충만 한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아무런 감정의 교류가 없는 잠재워진 소녀와의 짧은 접촉임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소녀의 따뜻한 온기와

달콤하고 진한 여자의 냄새가 어릴 적 어머니의 품속에서 맡았던 노스탤지어로 통하는 냄새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냄새였기에 에 구치는 그리움에 젖어 서글픈 감정이 일었다고 본다. 또한 어머니와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앞에 두고 배덕의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그 를 죄악감에 빠져들게 하고 급기야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환각 다음으로 이어지는 손자들의 젖 냄새와 갓난아이였을 적 딸들을 안았 을 때 맡았던 젖내는 “잠든 소녀를 애처롭게 여기는 에구치의 마음의 냄 새”(p.146)로 연결되면서 부성애와 같은 감정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어 릴 적 자신이 맡았던 어머니의 냄새에서 촉발된 모성의 냄새가 ‘잠자는 미녀’와 같은 딸자식을 둔 에구치의 부성애를 자극시켰을 것으로 본다. 에구치는 첫 번째 밤의 소녀를 통해 떠오르는 기억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기억이나 추억은 오래되거나 최근이라는 것만으로 진정한 거리를 정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 일보다도 60년 전 어린 시절 일을 선명하고 생생 하게 기억하고 떠올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늙어서는 특히나 그렇지 않은가. 또 어린 시절의 일 쪽이 그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고, 일생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全集 第十八巻』 p.143

에구치는 막내딸의 젖비린내에 혐오감과 질투심을 느끼며 멀어져간 단골 게이 샤와의 기억과 결혼 전 여자 쪽 부모님의 심한 감시를 피해 만나던 애인과 유두 에 피가 나도록 격렬한 육체관계를 맺었던 세월 저편의 기억이 자신의 심층에 잠재되어 젖비린내를 맡는다. 첫 번째 밤의 소녀로부터 젖비린내를 맡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에구치는 다양한 기억들을 통해 답을 찾으려 하지만 모두 의식의 흐름 속에 막연하게 떠오르는 불확실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불 확실함 속에서도 명확한 한 가지는 노인이 되면 60년 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 제의 일보다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과 어린 시절 경험은 그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고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에구치의 이러한 의

식 속에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여성 편력과 젖비린내의 환각이 모성 희구라는 무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어릴 적 부터 병든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며 17살에 어머니와 사별한 에구치는 어머니의 부재라는 상실감을 안고 살아온 것이다. 모성 결락은 내면 깊숙이 각인되어 에구 치의 여성 편력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에구치는 많은 여성들과 교제를 했지만 모성애를 지닌 여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아 기의 무의식적 기억을 상상력을 동원해 되살려 젖 냄새라는 환각을 일으키게 된 것이라 본다. 첫 번째 소녀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그리운 어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에구치의 심리상태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와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 에구치의 마음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파도 소리가 거세다. 높은 절벽을 치는 것처럼 들린다. 이 작은 집이 그 절벽 끄 트머리에 세워져 있는 것같이 들린다. 바람은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이다.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라고 느끼는 것은 이 집과 에구치 노인의 마음 탓인지 모른다.

『全集 第十八巻』 p.138

위의 인용문에서 그려지는 높은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이 집의 위치 와 거센 파도 소리는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노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얼마 남지 않은 삶에 대한 애절함이 투영되고 있다고 본다. 거기에 겨울바람 소리까지 가세해 에구치의 마음은 황량하기만 하다. 그러나 첫 번째 소녀의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향기로 생기를 느끼는 가운데 파도 소리는 높지만 잔잔하고 바람은 겨 울이 다가오는 소리로는 들리지 않게 된다. 이후 눈을 감은 에구치는 새하얀 나 비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환영을 보게 되고 소녀와 경험해보지 못한 청결하 고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하얀 나비의 환영은 재생과 구원의 상 징인 하얀색과 재생과 부활을 의미하는 나비의 조합으로써 노년의 황량한 마음 에서 얼마간의 위로를 받게 된 에구치의 심리가 투영된 환영이라 볼 수 있겠 다.

170)

이렇게 첫 번째 소녀는 에구치에게 삶의 욕동을 느끼게 하지만 딸이 기형

170) 정신분석에서 나비는 ‘재생’과 ‘부활’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アド·ド·フリース著 · 山下主一郎ほか(1989) 앞의 책 p.9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