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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작품의 세계

3.3 여성인물의 표상

3.3.3 후미코

의 사회적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겠다는 계산이 들어 있다. 그러나 계획이 무산 되자 “이나무라 댁 아가씨도 놓치고 기쿠지 씨도 분발해서 새 생활을 다시 시작 하시려면 다도 도구도 필요 없겠지요.”(p.126) 라며 다기를 팔아 자신의 부를 축 적하려 한다. 또 집도 팔겠다는 기쿠지의 말에 “아버지 대부터 출입했던 사람에 게 처리하는 게 안심이 되실 겁니다.”(p.126) 라며 계산적인 속내를 드러낸다. 지 카코가 세상적인 상식이 발달했다는 의미는 이렇듯 처세술에 능한 그녀의 이미 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기쿠지는 어머니를 빼닮은 후미코에게서 처음에는 오타 부인의 모습을 보지만 차츰 그녀의 올곧은 심성과 삶의 태도에 더욱 끌리는 모습을 보인다. 기쿠지는 시종 지카코의 독기를 느끼며 지카코의 영향권 안에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다 오타 부인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이로 인해 기쿠지 의 죄의식은 깊어만 간다. 그러나 후미코를 만난 이후부터 기쿠지는 자신의 마음 이 조금씩 정화됨을 느낀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사죄할 방법도 면목도 없어 하는 기쿠지에게 후미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스스로 돌아가셨어요. 기쿠지 씨가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씀하신다면, 제 쪽이 더 엄마를 돌아가시게 한 게 돼요. (중략) 곁에 있던 사람이 책임을 느끼거나 후회 를 하거나 한다면 엄마의 죽음이 어둡고 불순한 것이 될 거예요. 뒤에 남은 사람 의 반성이나 후회는 죽은 사람의 무거운 짐이 될 것 같아요.”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가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기쿠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용서만 받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엄마도 용 서받고 싶어서 돌아가셨는지도 몰라요. 엄마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

후미코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서 나갔다.

기쿠지는 후미코의 말에 머릿속 장막이 한 겹 걷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全集 第十二巻』 pp.76-77

위의 인용문을 보면 후미코는 어머니를 잃은 슬픈 상황 속에서도 감성에 빠지 기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있다. 그래 서 기쿠지의 마음을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정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미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거나 후회를 하는 것은 망자와 남겨진 사람 모두에게 짐이 될 수 있으니 서로 용서하는 것으로 충분하 다고 말한다. 후미코의 말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방황하던 기쿠지에게 “죽은 사람 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도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p.77)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논리로 기쿠지를 위안해 준다. 이후에도 후미코는 기쿠지가 엄마의 망상에 사로 잡혀 혼란스러워하면 “이제 엄마의 일은 과거지사로 묻어두어도 괜찮다고 생각

하는데요.”(p.111) 라며 기쿠지가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일깨워준다. 기쿠지는 밝고 솔직한 후미코와의 대화를 통해 “말하는 동안 씻긴 듯 맑아졌다”(p.95)고 표현하거나 “오타 부인 사이에서 생긴 어두운 죄의식이 딸의 목소리를 통해 사 라질 줄은 기쿠지는 생각지 못했다.”(p.97)고 표현하며 그녀를 통해 내면이 정화 되고 치유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 후미코는 “아가씨의 뒤를 지날 때, 화병의 흰 모란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p.37)라는 묘사를 통해 은은한 모란 향이 나는 여성으로 표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란이라는 꽃은 ‘치료, 부끄러움을 아 는 마음(廉恥心)’으로 상징된다.

122)

모란의 상징성은 후미코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쿠지는 오타 부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유품과 후미코를 통해 부인 의 환영에 사로잡혀 ‘어둡고 추한 장막’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또 망령의 그림 자가 배회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제될 수 없다고 자각하기도 한다. 그 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의 기쿠지는 망령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다. 기쿠지와는 달리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이는 후미코는 어머니의 망령이 깃든 시노 찻잔을 쓰쿠바이(蹲)

123)

에 던져 깨버린다. 어머니의 혼이 깃들 어 망상을 불러일으키며 삶을 비극으로 몰아가는 찻잔을 깨버림으로써 기쿠지를 적극적으로 구원해 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찻잔을 깨는 행위가 쓰쿠바이를 통 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세속적 번뇌와 때를 씻어내는 정화의 의미가 들어 있다 하겠다.

작품에서 후미코는 흰색의 이미지로 자주 표현된다. 이는 순결함, 고귀함, 성스 러움, 구제, 재생 등을 상징한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후미코의 이미지는 다실이 라는 공간이 지닌 마성에 휘둘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밝은 측면을 보이고 있다. 기쿠지는 후미코의 깊은 사려와 현재를 소중히 하는 태도에 의해 구원될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후미코는 기쿠지에게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결정적인 운명이 되었다.

122) アド·ド·フリース著 · 山下主一郎ほか(1989) 앞의 책 pp.489-490.

123) 다실 뜰 앞의 낮은 곳에 갖추어 놓은 손 씻는 물을 담아놓은 그릇.

지금까지 기쿠지는 후미코를 오타 부인의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 만 그것도 지금은 잊은 것 같다.

어머니의 몸이 미묘하게 딸의 몸으로 옮겨가 거기에 기쿠지가 괴상한 유혹을 느 꼈다는 등의 사념 따위는 오히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어둡고 추한 장막에서 기쿠지는 나올 수 있었다.

후미코의 순결의 아픔이 기쿠지를 구해 낸 것일까?

후미코는 저항하지 않고 순결 그 자체의 저항이 있었을 뿐이다.

『全集 第十二巻』 p.149

지금까지 지카코와 오타 부인의 주술에 걸린 듯 어둠의 인생을 살아온 기쿠지 였다면 이제부터는 후미코의 밝고 능동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어둠의 장막은 서 서히 걷히게 될 것이 암시된다. 결국 후미코의 때 묻지 않은 순결함을 통해 어둠 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기쿠지를 재생 시킨 후 죽음을 암시하는 후미코의 모습으로부터 죽음을 불사하고 헌신하는 숭 고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곧 사랑과 죽음은 하나라는 가와바타의 생사일여관 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