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Ⅱ. 작품의 세계

5.4 나오며

『잠자는 미녀』는 남성으로서의 존재감의 상실과 함께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느끼는 67세 노인의 고독과 에로티시즘을 그린 소설이다. 시점인물인 에구치는 우연히 친구인 기가 노인에게 ‘비밀클럽’의 이야기를 듣고 잠자는 미녀들이 있는 집을 찾게 된다. 그곳은 성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노인들이 인생의 마지막 일락 을 위해 찾는 곳이다. 기가 노인의 말에 이끌려 호기심으로 방문하게 된 그곳에 서 에구치 노인은 자신의 인생을 주마등처럼 반추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 봉착하게 된다. 가와바타는 에구치 노인의 의식 세계를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통해 보여준다. 에구치의 심층에 있는 기억을 되살려주는 촉매는 수면제에 의해 깊이 잠재워진 잠자는 미 녀들이다. 잠자는 미녀들은 각성된 의식은 없지만 육체는 살아있는 존재로 설정 되어 있다. 그래서 에구치는 무한한 의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잠재워진 소녀 들이 발산하는 이미지는 에구치 노인의 오감을 자극하여 과거 여성들과의 추억 을 회상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의식의 흐름을 타고 막내딸의 기억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환각과 환상을 불러일으켜 에구치를 몽환의 세계로 이끈 다. 에구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허무와 결핍의 근원 이 무엇인지를 추적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도달한 것은 어머니라는 존재이다.

에구치의 심연에 자리한 어머니는 두 가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하나는 따뜻 한 온기를 지닌 포근한 품으로 감싸 안아주던 삶의 원천으로서의 유아기 어머니 의 이미지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의 나이 17살에 임종을 맞이한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온기가 없는 싸늘한 손으로 있는 힘을 다 해 아들의 손을 붙잡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피를 토하며 죽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마지막 감각은 차가움과 피비린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색채로 각인된 어머니의 모습에서 세 살 때 폐결핵으로 죽은 가와바타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된 다. 가와바타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어머니의 모습을

‘잠자는 미녀’ 속에 구현하고 있다.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는 소녀들은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과 냄새는 생명 그 자체로 인식된다. 그러한 부단한 의식의 유동 속 에서 마침내 도달한 것은 어머니라는 존재이다. ‘잠자는 미녀’는 삶과 죽음의 피 안에 있는 모성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가와바타에게 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라는 존재는 기억할 수 없기에 현실감 이 없으며 관념 속에서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와바타는 ‘잠자는 미 녀’ 안에 부드러운 감촉과 향긋한 젖 냄새를 부각시킴으로써 모성성을 환기시킨 다. 따스하고 포근한 품속에서 출발하여 자애로운 부처와 같은 이미지로 비약하 여 그려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자 전적 작품인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두 번째(第二信)」에서 부모의 존재를

‘바람 소리(風の音)’나 ‘달빛(月の光)’과 같은 자연에 비유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 인할 수 있다. 자연에 투영된 어머니의 이미지는 작품 속 겹동백 나무를 통해서 도 묘사된다. 에구치는 꽃잎이 진 후에 다시 환하게 오색의 꽃을 피우며 되살아 나는 겹동백의 풍요로움을 통해 순결을 잃고 나락에 떨어졌던 막내딸이 어머니 로 아름답게 재탄생한 모습을 그려낸다. 이는 가와바타가 갈망하는 모성의 이미 지에는 만물의 부활과 탄생의 근원으로서의 대지모신으로서의 자연의 의미가 함 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네 번째(第四信)」에서는 정원에 있는 후피향나무 위에 올라가 책을 읽고 있으면 “상쾌함과 텅 빈 평온함 (爽やかでからっぽな安らぎ)”

175)

이 나뭇가지 끝에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가와바 타에게 있어서 자연은 현실의 고뇌와 번뇌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자유와 무상무 념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는 존재로서 모성과 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가와바타가 노년에 이르러 희구하는 이상적 여성의 형 태는 모성적 존재로서의 어머니임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죽음 속에 생명의 에너지를 잉태한 존재이다. 이는 가와바타의 불교적 생사관․윤회관과도

175) 川端康成(1980)「父母への手紙」『全集 第五巻』新潮社 p.212.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와바타에게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준비로서 삶의 일부인 것이다. 모성성이란 우주의 순환 원리 안에 있으며 대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가 편안한 안식을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가와바타의 미의식은 떨어지는 동백꽃 잎, 죽은 듯이 잠든 창녀의 찡그린 얼굴 등 생명체가 지닌 모든 징후로부터도 진정한 아름다움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다고 본다. 마지막 밤, 죽음의 여운이 감도는 싸늘한 방 안에서도 하얀 소 녀의 눈부신 광채에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것은 허무 속에서도 진정한 아름다움 을 추구하는 가와바타의 예술혼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잠자는 미녀』는 가와바타가 추구하는 궁극적 미학이 응축된 작품으로서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