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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작품의 세계

3.3 여성인물의 표상

3.3.4 유키코

지금까지 기쿠지는 후미코를 오타 부인의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 만 그것도 지금은 잊은 것 같다.

어머니의 몸이 미묘하게 딸의 몸으로 옮겨가 거기에 기쿠지가 괴상한 유혹을 느 꼈다는 등의 사념 따위는 오히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어둡고 추한 장막에서 기쿠지는 나올 수 있었다.

후미코의 순결의 아픔이 기쿠지를 구해 낸 것일까?

후미코는 저항하지 않고 순결 그 자체의 저항이 있었을 뿐이다.

『全集 第十二巻』 p.149

지금까지 지카코와 오타 부인의 주술에 걸린 듯 어둠의 인생을 살아온 기쿠지 였다면 이제부터는 후미코의 밝고 능동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어둠의 장막은 서 서히 걷히게 될 것이 암시된다. 결국 후미코의 때 묻지 않은 순결함을 통해 어둠 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기쿠지를 재생 시킨 후 죽음을 암시하는 후미코의 모습으로부터 죽음을 불사하고 헌신하는 숭 고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곧 사랑과 죽음은 하나라는 가와바타의 생사일여관 을 엿볼 수 있다.

여자’라는 관념적인 형태로 묘사된다. 작가는 하얀 천마리학을 일본적인 전통미 로 표상하고 있으며 오래오래 지키고 싶은 순결한 미의 이미지를 담았다고 생각 된다. 작품에서 기쿠지는 유키코와 두 번의 만남을 가지게 된다. 첫 번째 만남은 지카코의 초대를 받은 엔가쿠지 다도모임 때였다. 그때 유키코는 다음과 같은 이 미지로 그려진다.

여기까지 신고 온 버선을 천마리학 무늬 보자기에 싸면서 아가씨는 기쿠지를 먼 저 지나가라고 예의 바르게 서 있었다.

『全集 第十二巻』 p.15

위의 인용문에서 그려지는 유키코의 모습에서는 일본 전통 다도의 ‘화경청적’

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신고 온 버선을 보자기에 싸는 행위에서는 세속의 더러움을 씻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려는 청(淸)의 이미지가 투영된다. 또한 기쿠지를 먼저 지나가게 하는 행동에서는 상대방을 공경하는 경(敬)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기쿠지는 “중년 여자의 과거가 뒤엉킨 앞에서도 청결하게 차를 타는 아가씨를 기쿠지는 아름답게 느꼈다.”(p.22)고 표현한다. 여기서 ‘중년 여자의 과거’는 오타 부인과의 불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오염된 세속의 세계라 고 해석할 수 있다. 세속화된 현실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유키코의 모습은 적(寂)의 정신의 투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유키코의 이 미지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 퇴색된 다실이라는 공간에서 전통의 아름다움을 상 기시킨다. 또 유키코에게는 다른 인물들에게서 그려지는 죽음의 기운과는 대조적 인 건강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자세 바른 가슴에서부터 무릎에까지 기품이 보인다.

신록의 그림자가 아가씨 뒤 장지문에 비쳐, 화려한 기모노 어깨와 소맷자락에 부드럽게 반사되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카락도 빛나는 것 같았다.

다실치고는 물론 너무 밝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가씨의 젊음을 빛나게 했다.

처녀다운 빨간 비단보도 달콤한 느낌이 아닌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아가씨의 손이

빨간 꽃을 피우는 것 같았다. 아가씨 주위에 희고 작은 천마리학이 춤을 추고 있 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全集 第十二巻』 p.24

위의 인용문에서 그려지는 유키코의 이미지에서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에너 지가 발산된다. 생명감 넘치는 푸르른 잎과 활력을 느끼게 하는 빨간 꽃, 그리고 그 주위에서 생기 있게 춤추는 학이 그리는 밝고 깨끗하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 은 어둠과 죽음의 색채로 그려지는 다른 인물들과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보인다.

밝고 희망적인 이미지에 품격까지 겸비한 유키코의 모습은 그녀를 상징하는 꽃 인 창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124)

창포는 ‘신비로운 사람’ ‘우아한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귀함, 순결함, 무구함, 희망, 빛, 무지개의 여신이라 는 상징성을 내포하며 순수하고 맑은 구원자의 이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125)

이러한 이미지와 중첩되어 기쿠지는 자신의 어둠을 밝히는 환한 섬광처럼 그녀 를 느낀다.

그러나 지카코의 강압적인 독기가 전해져 왔다.

지카코의 유방에 반쯤 걸쳐진 커다란 반점이 떠올랐다.

그러자 기쿠지는 지카코의 다실을 쓰는 빗자루 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을 비로 쓰는 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하고, 마루를 닦는 걸레로 자신의 머릿속을 문지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중략) 기쿠지의 그 메슥거리는 혐오 속에 이나무라 아가씨의 모 습이 한 줄기 빛처럼 반짝였다.

『全集 第十二巻』 pp.45-46

위의 인용문을 보면 기쿠지는 지카코의 마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어둠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유키코는 기쿠 지의 심연에 회생의 밝은 빛으로 다가와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구원의 존재로서

124) 2장에서 유키코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도코노마 수반에 창포가 꽂혀 있었다. 아가씨도 붓 꽃 그림의 기모노 띠를 두르고 있었다.”(p.50)

125) 송홍선(2003) 앞의 책 p.54.

アド·ド·フリース著 · 山下主一郎ほか(1989) 앞의 책 p.358 참조.

유키코의 모습은 작품 곳곳에서 그려진다. 지카코의 다회 초대장에 이끌려 온 자 신을 혐오스럽게 느낄 때에도 천마리학 보자기를 든 유키코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가 하면 다회에서 아버지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여자를 둘이나 보게 된 이후의 울적한 마음도 유키코를 통해 씻겨져 나간다. 또 기쿠지에게 유키코가 남기고 간 다실의 향기로 인해 어둠의 공간인 다실을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설 렘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와 같이 유키코는 기쿠지에게 구원의 존재로 다 가오지만 어두운 마성에 지배된 기쿠지에게는 닿을 수 없는 “영원한 저편의 사 람(永遠に彼方の人)”(p.52)으로 그의 관념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존재이다. 현실 에서는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동경의 여성으로 그려지는 유키코의 모습은 다음 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 길은 선로와 거의 직각으로, 동서로 지나고 있어서 마침 석양을 반사하고 있 었다. 금속판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중략) 가지가 퍼지고 넓은 잎이 우거 져 있었다. 길 양쪽은 견고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그 큰길에 이상하게도 인적이 없다. 황궁 수로의 막다른 곳까지 조용한 전망이 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차도도 조용하다.

몹시 붐비는 전차 안에서 내려다보니 그 거리만 해질녘의 기묘한 시간 속에 떠 있는 것 같이 어쩐지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 가로수 그늘을 분홍빛 비단에 하얀 천마리학 무늬 보자기를 안고 이나무라 아가씨가 걸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기쿠지는 느꼈다. 천마리학 무늬 보자기가 분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기쿠지는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全集 第十二巻』 p.47

기다란 선로의 양 끝에 서 있는 서양식 건물과 조용한 황궁 수로의 대비는 일 본 안에 혼재한 당시의 근대화된 일본 도시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길은 도심 한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없는 조용한 모습에 녹음이 울창 하다. 기쿠지 또한 그곳을 보며 이국의 정취를 느낄 만큼 그곳은 도심 속이라고 느낄 수 없는 수풀이 우거진 산속을 연상케 한다. 한적하고 조용한 길 위를 분홍

색 바탕에 흰색의 천마리학 무늬의 보자기를 들고 유키코가 걸어가는 모습에서 는 일본 중세의 전통 다도에서 구현하고자 한 ‘와비(わび)’의 아름다움이 엿보인 다. 이와타 미쓰코는 『천마리학』은 무로마치 시대라는 중세적 일본의 미의식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126)

이때 전통 다도에서 추구하는 중세의 미의식이 란 외면적인 화려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다. 다인들 은 화경청적이 구현되는 다회의 격조를 높이기 위해 한층 승화된 미의식을 추구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와비’의 아름다움이다. 이때 ‘와비’란 한적한 가 운데 느끼는 소박하고 차분한 정취로서 시중(市中)에서 산거(山居)를 느끼려 하 는 마음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미즈오 히로시(水尾比呂志)는 ‘와비’의 아름다움 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그것과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27)

하얀 천마리학 무늬 보자기로 그려지는 유키코의 모습은 붉은 석양과 강렬한 대 비를 이루며 고결한 순백의 미를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그녀의 모습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을 때 한결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와바타는 수필『일 본미의 전개(日本美の展開)』에서 일본인들의 정신과 삶, 예술과 종교는 모두 일 본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자연을 통해 길러지고 성장했다고 말한다. 가와바타에게 있어서 자연은 일본의 정신(古来の心)과 상통하는 것이다.

128)

따라서 자연과 조 화를 이루는 미를 발산하는 유키코의 이미지는 가와바타가 지켜내고자 하는 일 본 전통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겠다.

3.4 ‘천마리학 보자기’의 상징성

『천마리학』이 집필된 시기는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국에게 지배를 당한 시기 (1945-1952년)와 맞물리는데 이때 일본은 미국의 문물과 사상의 급격한 유입으로 전후 대변혁의 시기를 맞게 된다. 가와바타는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통해『천마리학』은 속악해진 일본의 차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담은 부정(否定)의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의 마음은 점점 퇴색되어 가는 전통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기인한 것이라 본다. 따라서 그 이면에

126) 岩田光子(1992)『川端康成-後姿への独白-』ゆまに書房 p.234.

127) 水尾比呂志(1981)「「茶」와「와비(わび)」」이마미치 도모노부 외 · 백기수 역 앞의 책 p.261.

128) 川端康成(1982)『全集 第二十八巻』新潮社 pp.431-433.

는 전통미를 향한 원망(願望)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후 ‘일본 고전 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며 ‘고래(古來)의 일본’ ‘일본 미의 전통’을 천명했던 가와 바타의 모습은 이를 방증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와타 미쓰코는 “차는 중세에 발 달한 일본의 전통적 예도로서 그 양식은 일본미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러한 차에 대한 부정은 현재의 차에 대한 비판 정신을 기반으로 한 부정이며, 그 비판 정신은 적어도 얼마 전까지의 전통적 다도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

129)

이라고 말하 고 있다.

『천마리학』은 마성이 깃든 다회를 무대로 한 애욕의 이야기이다. 가와바타는 수백 년에 걸쳐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진 다기에는 수많은 사연이 얽혀있는 것 에 착안하여 이 안에 남녀의 애증이 그대로 빙의되어 있다고 설정한다.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 작품 속에는 속악해진 다실의 모습과 그 안에 얽힌 추악한 인 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작품 곳곳에는 그와 대비된 아름다운 풍경과 전통 미가 함께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중 유키코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천마 리학 무늬 보자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작품의 제목은 작품의 주제와 긴밀 하다고 본다. 이점을 고려해볼 때 ‘천마리학’이라는 제목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함축적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천마리학’과 ‘보자기’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학이 지닌 맑고 깨끗한 이미지와 고고한 자태는 고매한 기품을 자아낸다. 이승 훈은 이러한 학의 이미지는 “세속으로부터의 초연함”

130)

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또한 예부터 학은 고고한 자태와 생태적 속성으로 미루어 승천․초월․장수 등 을 상징하며 천년을 사는 선학(仙鶴)으로서 신비하고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졌 다.

131)

당시 일본의 시대상과 학에 내포된 상징적 의미로 미루어볼 때『천마리 학』을 통해 가와바타가 그리고자 한 학의 이미지는 전후라는 데카당스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일본만의 독자성을 가지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전통의 미’

가 아닐까 헤아려본다. 천마리학 문양은 일본의 미술공예나 복식에 자주 사용되 는 이미지이다. 가와바타가 천마리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것은 그의 간절한 염원

129) 岩田光子(1992) 앞의 책 p.234.

130) 이승훈(1995)『문학상징사전』고려원 p.148.

131) 엄소연(2013)『기의 분류로 본 한국의 동물상징』민속원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