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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작품의 세계

3.3 여성인물의 표상

3.3.1 오타 부인

시점인물 기쿠지와 다실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긴밀한 관계를 이루는 여성인물 은 오타 부인, 지카코, 후미코, 유키코 네 명의 여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데모 니슈한 힘에 이끌려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인물은 오타 부인이다.

기쿠지와 오타 부인은 4년 전 아버지의 고별식에서 만난 후 지카코의 다회를 통해 재회하게 된다. 어릴 적 아버지의 바람기로 인해 괴로워하며 결국 죽음에 이른 어머니를 기억하는 기쿠지로서는 아버지가 죽는 날까지 사랑한 오타 부인 을 만나는 게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타 부인은 다회에서 자신 이 어떠한 입장인지도 잊은 듯 그리운 옛 정인(情人)을 만난 것처럼 기쿠지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다회가 끝난 후 기쿠지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타 부인 과 만나게 된다.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순순히 그녀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둘은『천마리학』에서의 첫 패덕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4년 만에 만났지 만 부인은 거의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기쿠지에게는 흰 살결의 좀 길어 보이는 목에 눈에 비해 코와 입이 작고, 코는 모양이 예뻐서 호감이 갔다. 그리고 나이 보다 젊어 보이는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첫눈에 호감이 가는 오타 부인의 매력 은 기쿠지로 하여금 도덕적 잣대와 상식을 초월한 이계(別の世界)

115)

로 빠져들게 한다.

오타 미망인은 적어도 45살 전후로 기쿠지보다 스무 살 가까이 위일 테지만 기 쿠지에게 연상이라는 느낌을 잊게 했다. 기쿠지는 연하의 여자를 안은 것 같았다.

114) 鶴田欣也(1981) 앞의 책 p.135.

115) 2장 「숲의 석양」에서 가와바타는 이러한 세계를 별세계(別の世界)로 표현한다. 본고에서는

‘몽환적 비장소’의 일종인 이 세계를 이계(異界)로 보고자 한다.

경험이 많은 부인이 자아내는 희열을 기쿠지도 느꼈던 것일 테지만 경험이 적은 독신자가 주눅 드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기쿠지는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된 것 같았고, 또 남자를 알게 된 느낌이었다. 자신이 남자라는 자각에 놀랐다. 여자가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수동적이고, 따라오면서 유혹하는 존재이며, 따뜻한 향기에 취하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기쿠지는 지금껏 몰랐다. (중략) 가장 꺼림칙해야 할 지금 달콤한 평온함이 있을 뿐이었다. (중략) 따뜻하게 착 감겨서 멍하니 있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여자라는 물결이 이렇게 뒤를 쫓아오는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 물결에 살을 쉬게 하고 기쿠지는 정복자가 졸면서 노예에게 발을 씻기 게 하는 듯한 만족감까지 느꼈다. 또 엄마의 느낌도 있었다.

『全集 第十二巻』 pp.30-31

위의 인용문을 보면 오타 부인은 경험이 많은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20대인 기 쿠지가 연하의 여자를 안은 것처럼 나이를 잊게 한다. 그리고 근친상간과도 같은 패덕의 순간에도 기쿠지는 어머니 품속과 같은 따뜻함과 평온함을 느낀다. 또 남 자로서의 정복감과 최고의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오타 부인의 치명적인 매력은 기쿠지로 하여금 “인간 이전의 여자 혹은 인간 최후의 여자”(p.65)로 느끼게 한 다. 이는 여성으로서의 최고의 아름다움과 관능미를 구현한 유일무이한 존재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오타 부인은 귀신에 홀린 듯 기쿠지에게서 옛 정인인 미타니(三田)의 환영을 보며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치명적인 매력으로 기쿠지를 도덕적 가책이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패덕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는 두 사람 모두 데모니슈한 힘에 사로잡힌 결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오타 부인의 시각적 이미지는 흰장미와 연분홍색 카네이션으로 표상된다. 이 안에 내포된 의미는 시노(志野) 물병과 찻잔에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후미코와 기쿠지는 오타 부인의 유품인 시노 물병에 잘 어울리는 꽃으로 흰장미와 연분홍 카네이션을 꽂는데 이 안에 상징성을 담고 있다. 상징 사전에 의하면 장미는 육 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 게 되는 순수, 기쁨, 젊음 등의 모든 요소를 갖춘 완벽한 존재를 상징한다.

116)

이 러한 상징성은 정신적인 황홀함과 완전성을 의미하는 흰색과 육감(肉感), 환희,

116) アド·ド·フリース著 · 山下主一郎ほか(1989) 앞의 책 p.533.

청춘의 상징인 분홍색과 어우러지면서 오타 부인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오타 부인의 절대적인 미는 그녀가 사용하던 시노 물병과 찻잔 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시노 물병의 “흰 유약에 은은한 붉은빛이 떠올 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듯 윤기 나는 표면”(p.74)은 기쿠지가 오타 부인을 안았 을 때 느끼는 어린아이와 같은 부드러운 감촉과 오버랩되면서 극도의 관능미를 자아낸다. 오타 부인의 관능미는 전혀 흠잡을 데 없는 명품 다기에 비유되면서 둘의 관계 또한 어떠한 죄의식과 추함도 따르지 않는 오탁이 없는 관계로 희석 시킨다. 시노 물병과 함께 그녀의 관능미를 일깨우는 매개물로는 시노 찻잔을 들 수 있다. 시노 찻잔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오늘 아침 후미코가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그녀 어머니의 입술연지가 스며든 자 국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유약 부분에 생긴 가는 금에도 갈색과 붉은색이 섞인 색 이 들어가 있었다. 입술연지가 바랜 듯한 색, 붉은 장미가 시들어 마른 듯한 색,

―그리고 어딘가에 묻은 피가 오래된 듯한 색이라고 생각하자 기쿠지는 마음이 이 상해졌다. 토할 것 같은 불결함과 출렁이는 유혹을 동시에 느꼈다. 찻잔 몸통에 푸 르스름한 검정색으로 두꺼운 이파리만 있는 풀이 그려져 있다. (중략) 그 풀 그림 은 단순하고 싱그러워서 기쿠지의 병적인 관능을 깨우는 것 같았다.

『全集 第十二巻』 p.108

오타 부인의 입술연지를 연상케 하는 갈색과 붉은색의 조합은 갈색이 지닌 차 분하고 성숙한 이미지와 붉은색이 지닌 순수하고 정열적인 사랑과 육체적 활력 의 상징성을 통해 중년의 원숙함 속에 싱그러운 젊음을 유지하는 오타 부인의 매혹적인 관능미를 그려낸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명품 찻잔에 지워지지 않는 입술연지의 오탁 자국은 불결함을 느끼게 한다. 근대화의 산물인 입술연지의 불 결함에서는 전후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가와바타의 부정적인 견해를 엿볼 수 있 겠다. 그러나 명품 다기에 그려진 풀잎의 생명력은 병적인 망상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기쿠지의 잠재워진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관능미로 되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맑고 깨끗한 흰 살결과 여성스럽고 가녀린 긴 목선, 어린 처녀 같은 순수함 속 에 어머니의 포근함 거기에 관능미가 더해진 오타 부인의 여성미는『설국』의 고마코와 요코,『산소리』의 기쿠코 등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가와바타 심층의 아니마의 투영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