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허위 의식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 하 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 관계는 모든 계급의 보편적 이해 관계와 일치 하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기존 사회의 모든 분열과 모순을 제거하는 보편적인 인간 해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현실을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허위 의식으로 서의 이데올로기는 특정 개인이나 계급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옹호하고 대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3. 다른 사상가들의 이데올로기 개념과의 비교
기가 계급 투쟁에서 차지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데올로기는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실천적인 사상이자 신념 체계로서 부르주아뿐만 아 니라 프롤레타리아에게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르주아 이데올로 기’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즉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라는 용어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상이 이 데올로기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계급의 이해 관계를 대변해 주는가이다. 레닌은 이데올로기에서 부정적 의미를 제거하여 가치 중립적 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사용하면서 실천적 의식으로서 이데올로 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 그람시의 이데올로기 개념
그람시(A. Gramsci)도 레닌의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의적 이데올로기’와 ‘유기적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였다.
그람시는 ꡔ옥중 수고ꡕ에서 이데올로기를 물질적인 하부 구조의 단순한 반 영으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고 상부 구조의 한 형태로서 이데올로기의 적 극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다(A.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of Antonio Gramsci, 375-7쪽 참조).
‘자의적 이데올로기’(arbitrary ideology)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지 배 계급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시키는 허위 의식이다. 이에 비해 ‘유기적 이데올로기’(organic ideology)는 역 사적 차원에서 볼 때 주어진 역사적 구조에 반드시 필요한 이데올로기이 다. 이것은 인간이 활동하고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며 투쟁하는 지형을 창 조하는 힘이며, 또한 대중을 조직하는 힘이다. 그람시는 어떤 사상이 대중 적 신념으로 자리잡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물질적 힘’(material force)이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기능을 강조하 였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관계를 반영하는 단순한 의식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물질적 힘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 데올로기는 계급 투쟁에서 다른 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데 있 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3) 소련과 동독의 저작들에 나타난 이데올로기 개념
이처럼 레닌과 그람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비해 좀더 분명하게 이데 올로기의 적극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이데올로 기적 투쟁의 필요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 철학 비판 서설」에서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서만 전복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론도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인 힘으로 전환된다”(K.
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 385 쪽)라고 하면서 실천적 활동에서 이론이나 사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의 중 요성을 강조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도 철학 이 위력을 떨치고 있고 계급 대립이 첨예화되지 않아서 공산주의적 의식 이 부족한 독일과 같은 사회에서는 특히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DI 457쪽 / 200쪽 참조). 또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대폭적인 개조를 통해서 공산주의 의식을 대량으로 산출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였다(DI 70쪽 / 122쪽 참조). 이와 같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이데올로기가 계급 투쟁이나 혁명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견해가 명 료하게 충분히 개진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의 변화 과정을 반영하여 스토이스로프(H.
Steußloff)가 대표 집필하여 한때 동독의 대학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ꡔ역 사적 유물론ꡕ에서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오늘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에서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계급 및 여타의 사회적 집단들의 생활 환경과 이해 관계에 대한 관념적인 표현을 나타내는 것이며, 계급(집단) 의식과 모든 의식 형태들의 본질적인 특징이다.”(H. Steußloff, ꡔ역사적 유물론ꡕ, 277쪽) 여기서는 마르크스나 엥 겔스가 주로 사용했던 허위 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 개념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로 이데올로기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부어(M. Buhr)와 클라우스(G.
Klaus)의 ꡔ철학사전ꡕ을 중심으로 편역된 ꡔ철학대사전ꡕ에도 이데올로기를
“특정한 계급 이익을 표현하며 또 그에 상응하는 행동 규범, 입장, 가치 평가를 포괄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법적, 교육적, 예술적, 도덕적, 철학적 등) 견해의 체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ꡔ철학대사전ꡕ, 1020쪽)라
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이데올로기가 계급이나 집단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 는 관념이나 신념의 이론적 체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다.
그리고 이러한 저작들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적극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고 주장된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현실의 특정한 모습을 전달함으로써 사회를 유지, 변화, 혹은 혁명적으로 변혁시킬 때 행동을 이끌어 가려고 한다.”(H. Steußloff, ꡔ역사적 유물론ꡕ, 279쪽) 즉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을 동원하는 실천적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기존의 낡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경향을 띨 수도 있고, 또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추구하 는 진보적 경향을 띨 수도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 서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데 결 정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때 소련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콘스탄티노프(F. V. Konstantinov)가 지은 ꡔ사적 유물론ꡕ에서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특성을 반 영하며, 특정 사회 계급의 입장과 이익, 목표를 표현하고, 현존 사회 구조 의 유지 또는 변혁을 지향하는 견해나 사상의 체계이다.”(F. V.
Konstantinov, ꡔ사적 유물론ꡕ, 166쪽)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이데올로기 개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에 레 닌과 그람시를 거치면서 허위 의식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넘어서서 실천적 활동에서 적극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이론이나 사상 체계라는 의미로 확대 되었다.
2)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 개념과 지식 사회학
이러한 이데올로기 개념과 관련하여 이데올로기론 전반에 대한 포괄적 인 논의를 전개한 사람은 만하임(K. Mannheim)이었다. 만하임은 ꡔ이데 올로기와 유토피아ꡕ라는 저서에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두 개념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K. Mannheim, Ideologie und Utopie, 170-172쪽 참조).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는 존재와 불일치성을 빚고 있는 ‘존재 초월
적’(seinstranszendent)인 표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러나 이 두 개념은 기존의 ‘존재 구조’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지 여부 그리고 실현 가능성의 여부에 따라서 서로 구분된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존재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 즉 기존의 질서 를 비판하고 파괴하여 새로운 이상과 관념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킬 가능 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 즉 실현 불가능한 허위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기존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재생산하 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존재를 초월하는 관념 세계가 현실적인 역사적 단 계에 속하는 일정한 세계상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변혁적인 기능이 없을 때, 이 관념은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데올로기 개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존 질서와 지배 계급의 이해 관계를 옹호 하고 있는 허위 의식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이데올로기 개념과 동일하다 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하임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의식의 형태를 몇 가지로 구분한 다. (1) 선의의 존재 초월적 의식은 스스로 관념과 현실의 불일치를 발견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2) 자기 기만적 의식은 자신의 이념과 행동이 괴 리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지만 그러나 과욕적 본능으로 인해서 이러한 통찰을 은폐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3) 타인에 대한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기만의 경우이다. 만하임은 이처럼 선의의 존재 초월적 의식에서부터 시 작하여 자기 기만적 의식을 거쳐서 고의적인 기만 의식에 이르기까지 이 데올로기를 여러 형태로 구분하였다. 허위 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의 형태 들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는 분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러한 구분을 어느 정도 함축하고 있다.
만하임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의식의 여러 형태와 관련하여 ‘특수적 이데올로기’(partikulare Ideologie)는 허위성의 심리적 측면을 연구하며,
‘전체적 이데올로기’(totale Ideologie)는 다양한 관점을 지닌 정신적 측 면과 전체적인 사유 구조를 연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하임은 자신의 주요한 이론적 작업인 ‘지식 사회학’은 전체적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사
상가의 존재 제약적인 시각 구조’를 다룬다고 말한다(K. Mannheim, Ideologie und Utopie, 227-9쪽 참조). 지식 사회학이란 ‘지식의 존재 제 약성’(Seinsverbundenheit des Wissens)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나아 가 지식의 사회적 영향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데올로기론’이 의식적인 거짓이나 은폐 작용을 폭로하는 데 주안점을 둔 다면, ‘지식 사회학’은 의식적인 허위성에서 기인하지 않는 사유 구조를 사회 구조와 관련하여 탐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 행한 이론적 작업도 이러 한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을 토대로 관념론적인 청년헤겔학파나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데 올로기가 사회 구조, 특히 물질적인 생활 조건에서 어떻게 기인하고 있는 지를 밝히는 ‘지식 사회학’의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이데올로기론’의 작업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