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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인간관

문서에서 마르크스 ꡔ독일 이데올로기ꡕ (페이지 171-182)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기 위해서는 ‘유적 존재’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두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ꡔ경철 수고ꡕ에서 인간을 ‘유적 존재’라고 규정하면서 인 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분시켜주는 보편적인 특성이 자유롭고 의식적 인 활동인 노동을 한다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규정하 면서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인간의 존재 방식, 특히 계급 에 따라 상이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두 개념의 의미를 중심으로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 나타난 마르크스와 엥겔 스의 인간관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1) ‘유적 존재’로서 인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인간

마르크스는 ꡔ경철 수고ꡕ에서 ‘생산물로부터 소외’와 ‘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라는 소외된 노동의 제1, 제2 규정으로부터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 외’라는 제3의 규정을 이끌어내면서 인간 본질과 관련하여 “인간은 유적 존재(Gattungswesen)이다”(ÖPM 516쪽)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마르크스 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욕과 경쟁에 사로잡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적 인간이 아니라, 유(Gattung)로서의 인간 즉 유적 존재로서 인간 종족 전체의 특성을 지닌 보편적 인간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용어는 원래 슈트라우스(D. F.

Strauß)에 의해 대중화된 개념으로서 인간들은 아주 다양하고 상이한 성 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불어 있을 때 비로서 완전한 인간을 형성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도 ꡔ기독교의 본질ꡕ 등 에서 ‘유’(Gattung)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러나 그 이후에는 ‘공동체’

라는 용어로 대체하였다(D. McLellan, ꡔ청년 헤겔 운동ꡕ, 129-130쪽 참조).

이처럼 이 용어에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사회성’ 또는 ‘공 동체성’이라는 특성이 함축되어 있다.

마르크스도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서 ꡔ 경철 수고ꡕ와 같은 초기 저작에서는 ‘유적 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 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유적 존재’ 개념에서 ‘사회성’이라는 특성과 함 께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 즉 노동의 특성도 강조하는 등 그 구체적 내 용에서는 포이에르바하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마르크스는 유적 존재로 서의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의 전체적 성격 즉 종의 유적 성격은 삶의 활동이며, 자유로운 의식

적 활동(die freie bewußte Tätigkeit)은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ÖPM 516쪽)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을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동물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러한 인간의 본 질을 설명한다. 동물은 직접적인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하 지만 인간은 이러한 신체적 욕구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생산한다. 동물 은 자기 종의 수준과 욕구에 따라서 생산하지만, 인간은 사물 각각의 종의 수준에 따라 생산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또한 미학적으로 생산한다. 자 연은 동물에게 단지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는 학문적 대상이자 예술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마르크 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 및 동물에 있어서 유적 생활(Gattungsleben)은, 실제적으로 인 간(및 동물)이 비유기적인 자연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인간이 동물보다 좀 더 보편적이며(universell), 인간이 살아가는 비유기적인 자연의 영역이 동물보다 좀더 보편적이라는 데에 있다.”(ÖPM 515쪽)

동물이 직접적인 신체적 욕구에 사로잡혀서 본능적인 생산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일면적’이라면, 인간은 여기서 벗어나서 다양한 사물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좀더 ‘보편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 것 이다. 그리고 동물은 자신의 생명 활동과 직접적으로 통합되어 있지만, 인 간은 자신의 삶의 활동을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바로 대상 세계의 가공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유적 존 재임을 현실적으로 입증한다. […]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 삶의 대상 화이다.”(ÖPM 517쪽)

인간은 창조적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대상화시키고, 또 이러한 대 상화된 세계에서 자기를 직관하고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다. 그래서 인간 은 자기를 대상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의식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란, 사회 속에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인 노동을

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고, 이 러한 노동을 통해서 생산된 대상 속에서 자기를 의식하고 확인한다. 따라 서 노동은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유적 본질을 실현하고 그것 을 확인하는 장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ꡔ경철 수고ꡕ 이후의 저작에서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 물론 및 헤겔의 관념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서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을 체계화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유적 존재’, ‘유적 본질의 회복’, ‘인간 본질’, ‘소외’ 등의 용어를 ꡔ경철 수고ꡕ에서처럼 핵심 개념으 로 자주 사용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이 용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면 서 이 용어의 사용을 꺼려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 서 “철학자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이러한 ‘소외’는”(DI 34쪽 / 76 쪽) “사변적이고 관념적으로 즉 환상적으로 ‘유의 자기 산출’로서 이해될 수 있고”(DI 37쪽 / 80쪽)라고 말한다. 여기서 철학자란 마르크스가 비판하 고 있는 독일 관념론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편적 이고 추상적인 ‘인간 본질’이나 ‘유적 존재’라는 개념보다는 역사적 유물론 의 관점에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 특히 ‘계급’의 구성원으로서 인간 개념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깊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 ‘유적 존재’나 ‘인 간 본질’과 같은 개념의 사용을 꺼려했지만, 그렇다고 ‘유적 존재’에 포함 된 인간 본질에 대한 관점을 버렸다고 볼 수는 없다. ꡔ독일 이데올로기ꡕ나 이후의 저작들에서도 인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 다.

“인간은 의식에 의해서, 종교에 의해서, 그밖에 사람의 의욕하는 것에 의 해서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생계 수단(Lebensmittel)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을 동물과 구별하기 시작한다.”(DI 21쪽 / 58쪽)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생계를 위해 생산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 거나 또는 종교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동물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들을 낳은 근본적 계기는 바로 인간의 생산적 활동인 노동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인간을 ‘유적 존재’로서, 즉 자유롭고 의 식적인 활동인 노동을 하는 존재로서 보는 관점이 나타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또는 직관적 유물론을 실천적 활동성과 역사성의 결여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 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이러한 인간관이 반영되어 있다.

“물론 포이에르바하는 인간도 역시 ‘감성적 대상’(sinnlicher Gegenstand)이라는 것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순수한’ 유물론자보 다는 훨씬 탁월하다. 하지만 그가 인간을 ‘감성적 활동’(sinnliche Tätigkeit)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감성적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도 역시 이론에 머물러서 인간을 그에게 주어 진 사회적 연관 속에서, 또 현재의 모습대로 만들어낸 눈앞의 생활 조건 속에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코 현실적으로 실존하고 활동하는 인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인간’이라는 추상물에 머물러서 ‘현실적, 개별적, 육체적’ 인간을 다만 감각 속에서 인정하는 데 그쳤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인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연애와 우정, 그것도 관념 화된 형태로서의 그것만 알고 있었다.”(DI 44-5쪽 / 89-90쪽)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개체가 아니라 유(Gattung) 로서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 신적 본성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개별 자로 존재할 때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유로서 사회 속에 존재할 때는 무한 자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사회성을 인간의 유적 속성으로 보면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이에르바하는 감 각적인 사랑을 유적 존재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포이에 르바하에서 유적 존재로서 인간은 ‘감각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유적 존재’ 개념에 대해 위와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첫째,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을 ‘감성적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인간을 감성적 활동으로서, 즉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으로서 노동 을 하는 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비록 포이에르바 하가 인간을 ‘유’로서, 즉 사회성을 가진 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지만 그러

나 이러한 ‘유’는 “다수의 개인을 순전히 자연적으로 결합하는 내적인 무 언의 보편성(Thesen 6쪽)”에 머무르고 있다. 즉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즉 일정한 생산 관계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계급적 이해 관계를 담지하고 있는 자로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첫 번째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적 존 재’ 개념에서 핵심이 되었던 측면, 즉 ‘사회성’(공동체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로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실천적 활동’(노동)을 하는 측면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 소외가 지양된 공산주의 사회를 설명 하는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야(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 비로소 자아 실현은 물 질적 생활과 일치하는데, 이는 개인이 총체적 개인으로 발전하는 것과 모 든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에 상응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노동이 자아 실현으로 전환되고, 이제까지 제한되었던 교류가 개인들 사이 의 교류로 전환된다. 단결한 개인들에 의한 총체적 생산력의 전유와 함께 사적 소유는 종말을 고한다.”(DI 68쪽 / 121쪽)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가 건설되면, 물질적 생산 활동 즉 노동은 자유로운 활동이 되며 이를 통해 개인은 전면적인 자기 발전과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 서는 사적 소유로 인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력을 전유할 수 없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소유로 인해서 노동자들이 생산력을 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소외로 인 해서 노동이 자아 실현의 계기가 되지 못하였지만, 이러한 노동 소외가 극 복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자아 실현의 계기가 된다.

“개인은 (타인과의) 공동 관계에서 비로소 그의 자질을 다방면으로 발전 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된다. 그리고 공동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인격적 자유가 가능해진다.”(DI 74쪽 / 128-9쪽)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적인 억압이나 착취가 없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개 인은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인격적 자유’를 누리면서 자신의 자질을 전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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