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과학주의 또는 실증주의의 문제점

문서에서 마르크스 ꡔ독일 이데올로기ꡕ (페이지 86-90)

역사적 유물론은 과학주의 또는 실증주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 스와 엥겔스가 역사적 유물론을 하나의 ‘과학’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것 이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과학적 방법이란 과학 주의 또는 실증주의적 방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앞의 3장 2절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역사적 유물론이 물질적 생산 활동을 중시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도 그것이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또는 실증주의 경향은 ꡔ독일 이데올로기ꡕ 이외에도 마 르크스와 엥겔스의 다른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엥겔스는 ꡔ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ꡕ의 영문판 「서문」(1892년)에서 초기 저작인 ꡔ 신성 가족ꡕ에 나타난 견해와 동일하게 근대 유물론의 원천은 영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베이컨을 비롯한 영국 경험론자들에 대해 높게 평가하였다.

“영국 유물론의 진정한 선조는 베이컨이다. 그는 자연 과학을 진정한 과 학으로 간주하였으며, 감각적인 물리학을 자연 과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 로 간주하였다. […] 그의 학설에 의하면 감각은 틀림없는 것이며 모든 지

식의 원천이다. 과학은 경험 과학이며,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에 이성적 방 법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귀납, 분석, 비교, 관찰, 실험은 이성적 방법의 주 요 조건들이다.”(ESUW 527쪽)

엥겔스는 베이컨을 영국 유물론과 실험 과학의 원조로서 간주하면서,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 즉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자연 과학적 탐구 방법 을 유물론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하고 경 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면서 여기서 출발하여 실제적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경험론과 유물론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 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로 이러한 경험론적 탐구 방법을 과학 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마르크스가 자연 과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취 하게 된 이러한 경험론적인 자연 과학적 연구 태도는 ꡔ자본론ꡕ(1867년) 에서 자신의 연구 방법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물리학자는 자연 과정을 그것이 가장 명확한 형태로 그리고 교란적인 영향을 가장 적게 받으면서 나타나는 곳에서 관찰하든가 또는 가능하다면 그 과정의 순수한 진행을 보증하는 조건에서 실험을 하든가 한다. 이 책에 서 내가 연구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및 그것에 상응하는 생 산 관계와 교류 관계이다. 이것들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국가는 지금까지 는 영국이다.”(Kapital I 12쪽)

마르크스는 자신이 영국을 자본주의 경제의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 에 대해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물리학자가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방 식과 동일하게 자본주의 경제를 탐구하려고 한다. 즉 객관적으로 명료하 게 드러나는 경제적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을 “자연 법 칙”(Kapital I 12쪽)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르크스는 ꡔ자본론ꡕ의 방법이 형이상학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자신이 사용한 방법은 연역적, 분석적 방법이라고 이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탐구 방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자신의 연구 방법 은 실재론적이지만 서술 방법은 변증법적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실재

론적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ꡔ자본론ꡕ이 “주어진 사실의 비판 적 분석에만 국한하고 미래의 음식점을 위한 요리법(콩트류의?)을 저술하 지 않는다(Kapital I 25쪽)”는 비난에 대해 카우프만(Kaufmann)의 다음 과 같은 설명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타당한 것으로 수용한다.

“마르크스는 오직 다음 하나에만 전념한다. 즉 정밀한 과학적 연구를 통 해 사회적 관계의 일정한 질서의 필연성을 증명하며, 그에게 출발점과 거 점이 되는 사실들을 될수록 더 완전무결하게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현재의 질서의 필연성과 함께 이 질서가 불가피하게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다른 질서의 필연성을 증명한다면 완전히 충분하다. […] 마르크 스는 사회의 운동을 법칙, 즉 인간의 의지와 의식 및 의도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인간의 의지와 의식 및 의도를 결정하는 그런 법칙이 지배하는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간주한다. […]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개의 사실을 가급적 정확하게 연구하는 것이다.”(Kapital I 26쪽)

마르크스는 이 글이 자신의 ‘실재론적 방법’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실재론적 방법이란 객관적 관찰을 토대로 한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확인 가 능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여기서 얻은 지식을 다른 사실에 관한 지식과 연 관시켜서 법칙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험적 사실과 이로부터 이끌 어낸 일반 법칙만을 중시하고 가치 판단과 같은 그 이외의 다른 지식들은 배제하는 실증주의적 태도이다. 마르크스는 자연 과학이 자연을 탐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 과학이 사회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래서 사회의 운동과 변화 과정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적 유물론을 체계화시켰던 시기인 19 세기에 크게 유행했던 실증주의 또는 과학주의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실증주의’ 또는 ‘과학주의’라는 개념은 꽁트가 언급한 실증 주의적 방법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버마스(J.

Habermas)는 ꡔ인식과 관심ꡕ에서 자연 과학적 탐구 방법을 참된 것으로 간주하여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얻어진 지식만을 참된 지식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가리켜서 실증주의 또는 과학주의라고 말하고 있다(J. Habermas,

Erkenntnis und Interesse, 89-97쪽 참조). 하버마스는 이러한 실증주의적 경향이 마르크스 사상에도 내재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를 비판한다. 마르 크스는 노동과 상호 작용을 사회적 실천에 종속시키면서 반성적 행위인 상호 작용을 노동으로 환원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인간에 관 한 학문을 자연 과학 아래로 포괄시키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물리학을 전형으로 삼아서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자연 법칙’으로 제시 할 것을 요구한다.”(J. Habermas, Erkenntnis und Interesse, 62쪽) 바로 이러한 태도로 인해 마르크스는 자연 과학적인 방법을 수용하여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려는 실증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러한 하버 마스의 주장처럼 마르크스가 내세우는 과학성은 실증주의적 태도를 토대 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마틴 제이(M. Jay)는 1840년대의 헤겔 좌파적인 철학 적 성향이 마르크스주의나 비마르크스주의 모두에게서 “사회 현실에 대한 더 ‘과학적인’ 때로는 실증주의적인 접근”(M. Jay, The Dialectical Imagination, 42쪽)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19세기 후반에는 마 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사회 이론이 전반적으로 비판성과 부정성을 상실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치아피카스(G. Katsiaficas)도 소련의 마르크스주 의가 ‘과학적 자연주의’ 입장을 갖게 된 데는 마르크스 사상 자체에 실증 주의적, 자연주의적 경향이나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G. Katsiaficas, ꡔ신좌파의 상상력ꡕ, 518-9쪽 참조). 마르크스가 비록 밀이 나 꽁트를 자신의 경쟁자로 간주하여 겉으로는 그들의 실증주의적 방법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적인 이론적 탐구 작업에서는 실증주의적 태 도를 보여주고 있다. 리틀(D. Little)도 ꡔ자본론ꡕ과 같은 마르크스의 저작 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가 실제로 밀이나 꽁트의 실증주의적 방법 론과 강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D. Little, The Scientific Marx, 169쪽 참조).

카멘카(E. Kamenka)도 마르크스가 후기에 경제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그의 문체가 점점 더 경험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그의 주장은 더욱 더 꽁 트와 빅토리아 시대의 의미에서 ‘과학적인 것’으로 되었다”(E. Kamenka, Marxism and Ethics, 6쪽)라고 말한다. 테일러(C. Taylor)도 마르크스가

ꡔ자본론ꡕ을 과학적 저작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때 ‘과학’

의 개념은 19세기 후반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C.

Taylor, Hegel and Modern Socirty, 146쪽 참조). 엘스터(J. Elster)도 마 르크스의 방법론을 다른 학설들과 분리해서 논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 다고 하면서 마르크스는 19세기 인물로서 그가 내세운 과학주의는 그 당 시의 자연 과학의 성과로부터 소박하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 다(J. Elster, An Introduction to Karl Marx, 21-22쪽 참조).

이처럼 마르크스 사상에서 ‘과학적’이라는 것은 19세기에 널리 사용되 었던 실증주의적인 자연 과학적 방법의 의미에서 ‘과학적’이며, 따라서 역 사적 유물론의 과학성은 실증주의 또는 과학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고 볼 수 있다.

문서에서 마르크스 ꡔ독일 이데올로기ꡕ (페이지 8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