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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인구라고 해야 고작 3,000명 남짓한 충청남도의 어느 면(面), 도서 관 회의실에 주민 수십 명이 모였다. 그들은 ‘마을버스 협동조합’ 설립 문 제를 의논했다. 군청 소재지, 여러 읍‧면 소재지 및 배후 마을을 돌아다니 는 노선버스가 운행 노선과 횟수를 대폭 줄였기에 자구책을 마련하려는 움 직임이다. 물론, 주민들은 순전히 자력(自力)으로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크기가 작은 차량을 구비하고 노선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되 군청의 지원이 있다면, 적자를 보지 않고 차량을 운행할 수 있다 는 계산이다. ‘마을버스 협동조합’이 이윤(profit)을 남길 필요는 없다. 적자 를 보지 않고 계속 운영할 수만 있으면 된다. 승용차가 없어 대중교통에만 의존해야 하는 어르신들의 어려움을 덜어드리는 데에, 즉 사회적 배제 (social exclusion)에 대응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구가 감소하여 노선버스 운행이 줄어드는 것은 농촌에서 흔한 일이다.

주민 상당수가 승용차가 없거나 운전을 할 수 없어 대중교통에 의존해야만 하는 고령층 교통약자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서는 ‘수요응답형 여 객자동차운송사업’이라는 범주를 따로 마련하여 농어촌에 한해 사업자가 비용을 줄여 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제3 조 3호). 그리고 수익성이 없는 노선 운행에 대해 자금을 보조하거나 융자 하는 방식으로 지원할 수 있는 길도 열어 두었다(제50조 ①항의 2). 그럼에

도 농촌에서는 교통약자 문제가 커지고 있다. 전형적인 시장 실패(market

failure) 사례다. 공공 부문이 법제를 정비하고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음에

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 실패(government failure) 사 례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농촌 정책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환경

등까지 포괄하여 ‘주민 삶의 질 향상’을 강조하며 그 외연을 확대해 왔다.

농촌 주민의 욕구와 의견을 중시하는 상향식 접근 방법을 표방해 왔다. 그 리고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와 주민 결사체의 동반자 관계(partnership)에 기초한 거버넌스(governance)를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인구 감소와 고령 화→공공 서비스와 상업적 생활 서비스 축소→인구 감소와 고령화”(송미령

‧김정섭‧박주영 2009: 445)라는 악순환 고리는 더욱 강고해지는 듯하다. 최

근에는 지역사회 안에서 구성원 사이에 여러 측면에서 격차가 확대되고 인 구 구성도 복잡해지고 있는데, 이런 변화는 농촌 지역 주민의 그리고 농촌 지역 안에서 사회적 배제를 심화시키고 있다(김정섭‧마상진‧김미복 2012:

16). 주민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사회적 배제가 심화되는 한국 농촌의 현실

에서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가 특별한 의의를 얻는다. 서두에 언급한 일화(逸話)는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움직임과 지방자 치단체 등 공공 부문과의 협력을 토대로, 주민 스스로 삶의 질 여건을 개선 하려는 사회적 경제 실천의 단편이다.

사회적 경제란 무엇인가? 아주 포괄적으로는 ‘사회적 목적을 가진 경제 활동’이라고들 정의한다(장원봉 2006: 22; 주성수 2010: 29; Amin 2009: 4;

Borzaga and Tortia 2007: 34). 좁게는, “국가와 시장이 공급하지 않고 또 그런 의지가 없는 일자리 창출과 사회 서비스 제공을 위해 비영리조직의 역량으로 지역사회 자원을 동원하고 활용하는 전략”(주성수 2010: 18)이라 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1 지난 세기 종반부터 유럽에서는 ‘복지국가(welfare

1 사회적 경제를 시장 실패와 정부 실패가 중첩되는 영역에서의 대안(代案)쯤으 로만 보는 것은 단견이다. 그럼에도 한국 농촌에서는 그 중첩된 곳이야말로 사 회적 배제가 발생하는 전형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의 역할과 의

state)의 위기’와 ‘노동의 위기’를 배경으로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이 증 폭되었다(주성수 2010: 18; 장원봉 2006). 2006년에는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가 집행위원회(EU Commission)에 ‘사회적 경제의 중요성과 사 회적 경제가 공공 정책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평가할 것을 요청했다. 이 어서 2008년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회원국 국민계정에 부속하는 위성 계정(satellite accounts)으로서 사회적 경제 계정을 작성할 것을 권고하고 작성 매뉴얼을 개발하기도 했다(Monzón and Chaves 2008: 553-555; Barea and Monzon 2006).

한국에서도 사회적 경제는 큰 관심을 끌고 있다. 2014년에 사회적 경제 와 관련된 ‘기본법(안)’이 세 차례나 발의된 바 있다.2 그렇게 사회적 경제 에 관한 관심이 커진 경과를 이른바 ‘사회적 경제 조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조직 수의 꾸준한 증가, 그리고 일련의 관련 제도 정비 과정에서 확 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제도화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대 후반 ‘자활지원센터’ 설립으로 본다(장원봉 2006: 235).3 2008년

6월 말 기준으로 전국 242개 지역자활센터에 소속되어 있는 자활기업은 총 712개였으며, 2010년 12월 말의 인정 자활기업은 총 1,243개다(조성은

2012: 26).4 2007년에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시행되면서 사회적 경제 논

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인증하는 사회적 기업의 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2007년에 26개였던 것이 2014년에는 1,251개에 달했다.5 그러다 가 2012년에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된 후, 협동조합 설립 움직임은 놀

의가 특별히 부각되는 지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2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유승민 의원 등 67, 2014430일 발의), ‘사회적 경제기본법안’(신계륜 의원 등 65, 20141013일 발의), ‘사회적경제기본 법안’(박원석 의원 등 10, 20141111일 발의) 등이다.

3 한반도에서 사회적 경제의 기원(起源)19193‧1운동 이후에 시작된 협동 조합 운동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4 2014년 말 기준으로 1,204개다(중앙자활센터 2014: 11).

5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홈페이지(http://www.socialenterprise.or.kr: 2015317) 참고.

랄 만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회적 협동조합을 포함한 협동조합 설립 신고 및 인가 신청 수리 건수는 법률 시행 후 약 2년 2개월 사이에 6,423 건에 이르렀다.6

자료: 박경하 외(2014).

그림 1-1. 한국의 사회적 경제 조직 관련 제도 형성 과정

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비즈니스(community business) 육성 정책이 추진 되었고,7 그로 인해 수백 개의 사업체가 등장했다. 커뮤니티 비즈니스 조직

6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협동조합 홈페이지(http://www.coop.go.kr/COOP/main.do:

2015116) 참고.

가운데 ‘사회적 목적을 가진 경제활동’을 수행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 물 론, 사회적 경제 조직의 양적 증가가 사회적 경제 착근(着根)의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그에 못지않게 조직들의 협력 연결망(network)을 형성하고 지 역의 사회적 경제 조직 연결망이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부문과 동반자 관 계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이를 목표로 사회적 경제의 지방 거버 넌스를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 경제 조직이 많아지고 관련 법제와 정책사업이 정비되고 추진되는 가운데, 사회적 경제 논의도 학술 및 정책 두 분야 모두에서 광범 위하게 그리고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 가운데 농촌 문제와 관련해 중요 성을 갖는 것은 ‘사회적 경제의 역할’에 관한 논의들이다. 주요 내용을 다음 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부 실패와 시장 실패가 현존하는 곳에서 사회적 경제는 혁신적인 거버넌스 해법을 제공한다(Borzaga and Tortia 2007;

Dancause and Morin 2013). 둘째, 지역 바깥에서 가하는 경제적‧지정학적‧사 회적 압력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지역사회 주민의 욕 구를 충족하려는 경제활동을 촉진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즉 지역 발 전에 기여한다(Lloyd 2007). 셋째, 사회 서비스 소비자와 시민의 ‘자율적 역 량 강화(empowerment)’에 기여함으로써 사회적 배제에 대응하고 사회 통합 (social inclusion)에 기여한다(Gonzales 2007).

그 동안의 농촌 정책 기조와 근년에 부각된 사회적 경제 논의를 함께 살 펴보면, 한국 농촌에서 사회적 경제 전략이 갖는 의의를 소략하게나마 정 리할 수 있다. 첫째, 농촌에서 증가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협동 조합, 각종 커뮤니티 비즈니스 조직 등의 역할이나 구체적인 사업 목표는 다를 수 있지만 ‘사회적 목적을 가진 경제활동 조직’이라는 정체성을 공유 한다. 특히, 정부나 시장을 통해 충족하지 못하는 농촌 지역사회의 다양한

7 중앙정부 부처가 주도하는 대표적인 커뮤니티 비즈니스 관련 정책사업으로 안 전행정부의 마을기업 육성 사업과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 공동체회사 육성 사업을 들 수 있다. 마을기업이나 농촌 공동체회사는 사회적 경제 조직으로 간주되어 사회적 경제 관련 논의에서 함께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필요에 대응하려는 사회적 목적을 가진다.8 둘째, 그 모든 활동은 농촌 지 역사회 주민의 주도성을 전제로 하며 호혜와 연대를 토대로 축적되는 사회 자본에 기초한다. 농촌 발전을 목표로 하는 갖은 실천이나 정부 정책 등이 표방하는 내생적 발전(endogenous development) 패러다임과 궤를 함께한다.

한국 농촌에서 사회적 경제는 여러 차례 역사적 단절을 경험하면서 그 기반을 충실하게 닦아 오지 못했다. 한반도 최초의 협동조합은 1920년에 설립된 경성소비조합과 목포소비조합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협동조합운 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협동조합 조직 활동,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의 농민공생조합운동, 조선기독청년회의 농촌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협동조합 운동이 확산되었다(최민호 외 1997: 69-74). 그러나 1933년에 이르러 일제 는 민간 협동조합 운동 확산이 독립운동으로 전개될 것을 우려해 집요하게 탄압하고 1933년에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장원봉 2005: 177). 광복 이후 협동조합 운동은 다시 살아나 1950년대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9 농민

한국 농촌에서 사회적 경제는 여러 차례 역사적 단절을 경험하면서 그 기반을 충실하게 닦아 오지 못했다. 한반도 최초의 협동조합은 1920년에 설립된 경성소비조합과 목포소비조합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협동조합운 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협동조합 조직 활동,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의 농민공생조합운동, 조선기독청년회의 농촌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협동조합 운동이 확산되었다(최민호 외 1997: 69-74). 그러나 1933년에 이르러 일제 는 민간 협동조합 운동 확산이 독립운동으로 전개될 것을 우려해 집요하게 탄압하고 1933년에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장원봉 2005: 177). 광복 이후 협동조합 운동은 다시 살아나 1950년대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9 농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