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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설

약관이 당사자 사이의 계약내용이 되어 당사자를 구속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약관이 갖는 구속력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하여 종래 우리나라의 상법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약관에 의한 계약을 자동적인 부합계약(附合契約)으로 파악하고, 약 관이 계약의 내용이 되기 위한 요건으로 당사자 사이의 채용합의58)도 반드시 필 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 왔다. 상법학자들은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약관의 구속력을 자치법설과 상관습법설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위 학설들은 약관 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라기보다는 약관이 구속력을 갖는 근거에 대한 탐구를 목 적으로 한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위 학설들이 약관 그 자체를 법원(法源) 으로 인정할지 여부에 대하여 대립하기는 하였으나, 양자 모두 약관의 본질을 규 범으로 파악하는 규범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1980년대 중반부터 민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약관의 본질과 관련하 여 종래 규범설에 입각한 견해는 더 이상 이론적 타당성을 얻지 못하고 약관의 구속력은 당사자 사이의 합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계약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계약설에는 약관에 의한 계약도 원칙적으로는 계약의 일종이나 일정한 경우의 약관은 법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제한적 계약설과, 약관의 법적 성격은 계약이지만 그것이 사인간의 거래관계에서 수행하는 법규범 유사의 성격으로 인 하여 순수한 의미의 계약은 아니고 소위 ‘규범적 요소가 가미된 계약’이라고 하 는 절충설 등의 중간적 견해도 있다. 최근의 주류적인 견해는 약관의 본질은 법 규범이 아니라 계약의 일종이라고 파악하는 순수한 계약설을 취한다.

(2) 학설의 대립

58) 채용합의란 계약체결에 대한 합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하자는 합의’를 말한다(이은영, 앞의 책, 113면; 최병규, “약관의 계약편입요건에 대한 연구”, 「경제법연구」 제 13권 제2호, 한국경제법학회, 2014. 8, 137면).

약관의 구속력에 관한 자치법설은 약관은 국가 내의 부분사회가 자주적으로 제정한 법규로서 성문법 규정의 불비를 보충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자치법으로서 의 실효성과 법원성을 갖는다고 한다. 다만 자치법설을 주장하면서도 약관의 법 원성에 대한 인정 근거는 약관의 규범력에 있는 것이므로 불공정한 내용의 약관 은 법원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아 자치법설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있거나,59) 자치법은 기업단체 내부에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라 부분사회의 하나인 기업이 자주적으로 설정한 법규로 이해하여야 하고 법제정권력의 다원성과 위임의 이론 에서 약관설정권이 도출된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60)

상관습법설은 본래 ‘약관 그 자체’를 상관습 또는 상관습법으로 인정하는 것인 데, 우리나라에서 상관습법설을 취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고유한 의미의 상관습법 설이 아니라 백지상관습법설을 취하고 있다. 이는 약관 그 자체는 상관습이라 할 수 없고, 다만 “특정한 거래에 있어 약관에 의하여 계약내용을 정한다”라고 하는 상관습 또는 상관습법을 인정하자는 것이다.61)

민법학자들은 위와 같은 종래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약관의 구속력의 근거로서 는 계약설이 가장 타당하나, 초기에는 계약설로의 극단적인 변화를 꾀하기 보다 는 계약설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정한 경우 예외적으로 다른 근거를 바탕으로 구 속력이 인정된다고 새기고 싶다거나,62) 법률이 기업에 대하여 약관의 작성의무를 부과하고 감독관청에 의하여 인가를 받은 후 그 약관에 따라서만 계약을 체결하 여야 하는 경우63)에는 예외적으로 규범설을 취하는 견해가 있었다.64)

이에 반해, 순수한 계약설은 작성된 약관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 효력이 없고, 계약상대방에 의하여 이를 계약내용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합의가 있을 때 비로소 당사자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한다.65) 이는 계약관계의 내용은 계약당사자의 합의

59) 정희철, 「상법학원론(상)」, 박영사, 1980, 47-48면.

60) 안동섭, “일반거래약관의 본질과 규제”, 「재산법연구」 제5권 제1호, 한국재산법학회, 1988, 512면.

61) 서돈각, 「상법강의(상)」, 법문사, 1979, 58-59면; 손주찬, 「상법(상)」, 박영사, 1982, 79-80면.

62) 곽윤직, 「채권각론」 재전정판, 1984, 35-36면; 김주수, 「채권각론(상)」, 1986, 49면.

63) 자동차운수사업법, 해운업법, 항만운송사업법, 항공법, 궤도사업법, 전기사업법, 도시가스사업법 등이 이러한 수권적 법률에 해당한다.

64) 종래 위와 같은 견해를 취하였던 이은영 교수는 절충설로 견해를 수정하였다(이은영, 앞의 책, 103면); 원칙적으로 계약설을 취하면서 구체적인 경우에 여러 가지 예외를 인정하는 다원설의 입장도 있다(김주수, 앞의 책, 63-64면).

65) 김형배, “보통거래약관에 의한 계약”, 「고시연구」제227권, 고시연구사, 1993, 61면.

를 근거로 정해져야 한다는 사적자치의 원칙을 약관에 의한 계약체결에도 그대 로 적용한 결과이다. 계약설은 법률로 기업의 약관 작성의무·국가의 인가 및 변 경명령권 등이 규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당해 사업 영역의 공공성이나 공익 성 때문인 것이지, 국가의 감독이나 통제가 약관의 구속력의 근거가 될 수는 없 고, 약관이 계약의 내용이 되어 당사자를 구속하는 근거는 오로지 당사자의 합의 라고 본다.66) 따라서 법률상 행정청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약관이 그러한 인가 없이 그 내용이 변경되어 행정상 제재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 약관의 사법상 효 력은 부인할 수 없고, 그러한 약관도 유효한 계약의 내용이 된다.67)

약관의 구속력에 관한 절충설은 다음의 이유로 규범설을 비판한다. 첫째, 약관 은 법률과 같이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는 일반적 적용범위를 갖지 않는다. 둘째, 약관은 일반 법률과 달리 그 자체로 법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계약에 편입되어 야 효력을 갖는다. 셋째, 법률의 포괄적 추상적인 표현에 비하여 약관 조항은 구 체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약관은 법규범이 아니라 당사자의 합의에 기초 하여 계약의 내용을 구성하는 계약의 초안이므로 기본적으로 계약적 성질을 갖 지만, 약관이 거래관계에서 담당하는 기능을 고려하면, 약관의 법적 성격은 ‘규범 적 요소가 가미된 계약’으로 변형되었다고 설명한다.68)

(3) 판례의 태도

판례는 약관규제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보통보험약관이 계약당사자에 대하 여 구속력을 갖는 것은 그 자체가 법규범 또는 법규범적 성질을 가진 약관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험계약 당사자 사이에서 계약내용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것인 바”라고 하여69) 약관의 구속력의 근거는 당사자 사이에 이 루어진 합의에 있다고 본다. 이는 약관의 법적 성질을 계약으로 파악한 것이고,

66) 김상용, 앞의 책, 26면; 김준호, 앞의 책, 1453면; 김형배 · 김규완 · 김명숙, 앞의 책, 1224면; 정 기웅, 앞의 책, 27면; 정찬형, 「상법강의(하)」 제18판, 박영사, 2016, 514면; 지원림, 앞의 책, 1247면; 한삼인, 앞의 책(2011), 21-22면.

67) 손지열, 앞의 책, 305-306면.

68) 이은영, 앞의 책, 104-108면; 다만 약관규제법 제3조, 제4조 및 제6조에서 제14조까지의 규정은 계약설을 전제로 한 것이나 약관규제법 제3조 제4항이나 약관의 편입요건으로 고객의 동의를 명문화하지 않은 점 등은 계약설을 완화하는 요소라고 한다(송덕수, 앞의 책, 1270-1271면).

69) 대법원 1985. 11. 26. 선고 84다카2543 판결.

이와 같은 입장은 약관규제법이 제정된 이후부터 최근까지 변경 없이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70)

(4) 검토

약관이 계약의 내용으로 되어 당사자를 구속하는 근거를 법규범으로 접근하거 나 당사자 사이의 합의에 의한 계약으로 접근하든 관계없이, 약관은 실제로 계약 의 내용이 되어 당사자를 구속하는 효력이 있다. 따라서 약관의 구속력의 근거를 검토하기 위하여 약관의 법적 성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큰 의미 를 갖지 않는다. 다만 약관에 의하여 체결된 계약의 효력과 통제에 대하여 규범 설과 계약설의 접근방법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그 한도 내에서 위와 같은 논의 는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 생각건대 약관규제법 제3조의 규정과 사적 자치의 원 칙 및 약관의 사회적 기능이 갖는 현대적 의미에 비추어 보면 약관의 본질은 계 약이라고 보는 순수한 계약설이 타당하다. 또한 약관의 구속력의 근거를 당사자 사이의 의사합치에서 찾는 계약설에 따르는 이상 약관의 내용통제와 관련하여서 도 계약설을 기초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