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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주의와 학교의 시간

문서에서 근대성의 구현체로서 학교: (페이지 108-126)

가. 학교-시간-기계72) : 아동기와 규율의 탄생

⑴ ‘아동기’라는 시간의 탄생

17세기 이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아이 혹은 어린이라는 관념은 의존이라는 관념과 결부되었다. 주인(master)에 대해 의존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 시종, 숙 련공, 군인 등이 모두 어린이로 불려졌다. 군대에서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일선 의 군인들을 ‘잃어버린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같은 시대에, 의존성을 신체적 나약함의 결과로 보았던 귀족가문에서는 오히려 유아기를 지칭하는 경향도 있었다.

아리에스의 분석에 따르면(Ariés, 2003), 서양의 중세에는 ‘아동기’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동에 대한 관념은 17세기에야 등장한다.

중세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특별 한 존재로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온갖 일상사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른들과 섞여 일이나 오락, 스포츠 등을 함께 하고 있었다. 오늘날처 럼 아이들만을 위한 특별한 놀이나 장난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어 른처럼 존중받고 있었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열 살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본격적 72) 학교의 시간이 사람들의 활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이 점에서 학교의 시간은 기계로 파악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다(각주 61번 참조).

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진입해서 자신의 생활을 수행하게 되었다.73)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없었던 까닭에 아이들에게 그들만의 복장이 없었다. 배내옷 을 벗자마자 같은 신분의 성인 남자나 여자들처럼 옷을 입었다. 중세인에게 복장의 차이는 연령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위계, 신분의 차이에 의한 것이었다. 17세기까 지 귀족 혹은 부르주아 출신의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옷을 입게 된다. 무엇보다 아이 들은 어른과 다른 존재로서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관념도 부재했 다. 아이들에게 음담패설과 외설스런 행동을 하기도 했다. 상스런 언어, 음란한 행동 과 상황들이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행해졌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듣고 보았다. 당 시에는 어른들의 놀이와 아이들 놀이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구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이들은 어른들과 함께 어울려 놀았다.74)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무절제함(immodesty)에서 천진난만함(innocence)으로 아동기 에 대한 관념75)이 변화한다. 많은 경우에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에 대한 인식은 아동 73) 중세나 초기 튜더 왕조 시대의 영국에서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수도사가 되려는 교육의

혜택을 받지 않는 한)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장시간의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상인의 자식 이나 중․상류층 아이들은 도제살이나 시동으로 보내지는 것이 보통이었고, 따뜻한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명문가의 자식들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정략결혼을 당하기도 했다. 모든 계 급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어린 나이에 죽어갔다(Townsend, 1996: 14).

74) 근대 초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이 결핍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동시대 사람들의 진술에서도 무수하게 나타난다. 아이들에 대한 경멸은 종교적 은유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 다. ‘새로 태어난 갓난아이는 우리의 최초 부모로부터 우리의 음부를 통하여 내려온 원죄의 얼룩과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한 역사가의 말대로, 17세기까지만 하더 라도 어린이에 대한 부모의 태도는 ‘독재적이며 실제로 포악한’ 것이었다(이영석, 2003: 82).

75) 이 시기에 독자적인 아동문학이 출현한다. 오늘날에야 엄청나게 많은 아동문학 서적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아동문학의 탄생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린이 책의 역사 Written for children』를 쓴 타운젠드(Townsend)는 어린이 문학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이가 단순히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라 독자적인 요구와 관심을 가진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Townsend, 1996: 13). 물론 처음부터 독자적인 아동문학이 출현 했던 것은 아니다. 15세기경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은 ‘예절 책들(courtesy books)’이 었고, 교훈들은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운문으로 적혀 있었다.

아리에스의 분석도 유사한데, 16세기 말에 상황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권위 있는 일부 교육자들은 의심스런 책이 아이들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 후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는 부분을 삭제한 ‘고전(古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계로 이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확산을 동반했다. 1666년 『기독교 아동교육에 관하 여』를 쓴 바레(Varet)라는 교육가의 ‘아이들의 교육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의 하나’라는 주장이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거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내포되 어 있었다. 첫째, 아이들을 절대 혼자 두지 말 것, 둘째, 아이들을 귀여워하기보다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길들이는 것, 셋째, 신중하고 매우 절제된 행동거지를 가르치 는 것, 넷째, 아이들이 갖추어야 할 신중함과 겸손함에 대한 관심을 기울 것 등이다 (Ariés, 2003: 208~212).

이제 아동기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여러 각도에서 해 부되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은 타락에 넘어갈 수도 있는 지극히 취약한 속성으로 이해되었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다는 생각은 아동기에 대한 이중적 태도 로 귀결된다. 한편으로는 삶의 타락, 특히 어른들의 난잡한 세계로부터 아동을 ‘보 호’해야 한다는 생각과 다른 한편으로는 아동의 인성과 이성의 ‘발달’을 통해 아동을 단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면 모순되어 보이는 이중적 태도는 천진난만 의 시기이자 동시에 성장의 시기로서의 아동기에 대한 새로운 도덕관념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보호와 발달’이라는 인생의 한 시기, 아동기를 만들고 규정하게 된다.

‘아동기’라는 시기의 탄생은 아동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 는 근대학문의 체계화와 함께 이전사회와는 다른 특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76)

⑵ 분화와 규율의 성립

15세기 이전까지 학생들은 특별한 단체의 규율적 권위, 학교의 위계에 종속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 중세의 콜레주는 10대 초반의 아이들에서부터 나

때부터 아동기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Ariés, 2003: 200~201). 1762년에 출판된 루소의 『에밀Emilé』은 순진무구한 존재로서의 아이라는 인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76) 물론 독자적인 아동기의 출현과 인식이 조선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으며, 조선사회 에는 서양과 다른 아동 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적인 아동 기에 대한 인정과 그에 터한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사실에 있다. 무엇보다 서양 의 발견은 근대학문의 체계화와 함께 전 세계에 보편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많은 어른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이 연령에 따른 학급의 구별 없이 수업 을 들었다. 교사는 학생들을 젊은 동료로 간주했으며, 스승의 권위의식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리에스의 책에는 ‘토마스 플래터(Thomas Platter)’의 전기가 자주 언급되는데, 당시의 학교생활과 가족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499년에 발레에서 태어난 그는 6세부터 친척집에 보내져 염소를 돌보았다. 부모의 손에 떼밀려 산 속에서 고독한 생활을 해야 했던 어린 목동들의 신세가 흔히 그러하듯 이 여름에는 건초 위에서 자고 겨울에는 빈대와 이가 들끓는 침대요에서 자곤 했다. 어 머니는 토마스가 9세 6개월이 되었을 무렵 친척 신부에게 아들을 위탁했다. 10세쯤에 그는 잔혹한 선생을 떠나게 되는데,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사촌 파울루스(Paulus)를 따라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파울루스는 울름과 뮌헨에서 이미 학교를 다녔으며, 중세 학생 특 유의 끝없는 유랑생활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다른 학교를 편력하기 위해 떠나면서 성 모찬송기도를 노래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10세 된 토마스를 데리고 갔다. 이것이 토 마스가 20세가 될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 독일, 스위스, 알자스의 학교들에서 보내게 될 긴 방랑생활의 시작이었다. 결코 한 장소에 오래 머문 것이 없었던 그는 실레지아, 작센 을 거쳐 할레, 드레스덴, 브레슬라우를 두루 돌아다녔다. 브레슬라우에서 주교좌성당 옆 에 있는 생트-크루와 학교를 다녔고, 그러다 윗교구의 생트-엘리자베트 학교에 몇 명의 스위스 학생들이 있는 사실을 알고 그곳으로 갔다. … 15세의 독립 정신을 갖게 된 토 마스가 사촌과 결별하기까지 토마스는 유랑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조달했다. 구걸도 하 고, 거리에서 노래도 부르면서 그의 사촌 형을 부양하는데, 여전히 글을 읽을 수 없었으 며, 부양과 방량에 지친 토마스가 도망을 치다가 파울루스에게 잡히면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욕설과 구타였다. … 그는 고향인 발레로 돌아와 10년 전에나 시작했었어야 할 초보 문법을 소학교에서 배웠다. 거기서 약간의 쓰기를 가르쳐줄 신부를 발견했지만 달 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숙모의 아들이 어느 날 알파벳을 가르쳐주었다. 오랜 편력을 마치고 그의 나이 19세에야 읽기와 쓰기를 습득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는 읽기 를 배우기 전에 이미 도나투스를 외워서 알고 있었다. 이것은 구두 전달이 문자소통보 다 더 널리 퍼져 있었던 시대의 마지막 잔재였다. … 토마스는 학식 있으나 엄격하기로 소문난 선생이 있는 취리히로 가서, 미코니우스 신부의 학생이자 기숙생, 문하생이 되었 다. 이후 쓸 줄 아는 데만 18년을 기다렸던 토마스는 인문주의에 사로잡혔고, 지식에 대 한 엄청난 욕구를 보였다. 2~3년 만에 그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희랍어와 히브리어까지 배웠다. 이후 그곳에서 개인 수업을 하던 그는 고향인 발레로 돌아와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40세가 되었을 때 바젤에 있는 한 중요한 학교의 교장직을 제안받은 토마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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