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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과학주의

문서에서 근대성의 구현체로서 학교: (페이지 173-181)

가. 문명 개화와 과학화

⑴ 신문물과 개화

근대가 이전시대와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의 하나는 과학문명의 시대라는 점이다.

과학은 인간을 그 어느 시대보다 유물론적 존재로 만들어버렸을 뿐 아니라, 철학 적․종교적인 사유방식까지 바꾸어 버렸다. 근대성은 합리주의의 모체인 과학성을 바탕으로 인식되고 이 과학성은 사회의 모든 단위들을 재조직하고 일상을 변화시키 는 핵심이 되었다. 서구의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이원론은 서구 모더니티의 핵심 주제 이다. 근대의 주체 혹은 자아개념은 주체와 객체의 양분법을 작동시키며, 이 대립구 조가 근대과학의 기반을 형성한다.

과학은 계몽된 이성의 전형이었다. 계몽주의와 과학은 인간사회를 더욱 계몽되고 진보적인 상태로 나아가게 하고 끌어올릴 손수레였다. 사회과학의 기본개념은 계몽 주의적 진보개념, 즉 합리적이고 경험에 기반을 둔 지식의 적용을 통해서 인간을 좀 더 행복하게 하고 자유스럽게 할 사회조직과 제도를 만들 수 있다는 관념과 밀접하 게 연관된다. 과학은 이 과정에서 18세기 인간에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과학 은 인간 자신의 이해관계에 가장 두려운 자연의 측면들을 통제하는 능력을 증진시 킬 수 있다는 전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118) 과학적 성취의 영향력은 과학적 발명들 을 앞세워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조선에 서구문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 기, 청나라를 통해서였다. 그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 도 소수에게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개항을 즈음해서 박래품이 본격적으로 유입

118) 과학은 좀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농업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기근을 줄이거나 근 절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은 원료를 이로운 상품으로 변환시키는 공정과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질병과 질환을 줄이는 것을 약속해 주었다. 인간이 기독교의 창조신화에 수용 된 지혜와 종교적인 원인과 결과에 대한 관념에 기반을 둔 ‘무지와 미신’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전망을 확실히 보장하고 있었다.

되면서 서민들의 생활문화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런 신식물건들에는 문화적인 충격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물을 건너왔다는 뜻으로 양(洋)이라는 접두어가 새로이 덧붙게 되었다. 양복, 양동이, 양은, 양화, 양 장, 양잿물, 양옥, 양철, 양식 등등. 그러나 알게 모르게 흘러들어온 물건들이 개항기 의 문화적 충격에 완충적인 역할을 했겠지만 본격적인 물건의 유입이 시작되기에 앞서 사회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상당한 공포와 위기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진송, 1999: 71). 문물이란 필요에 의해 창안되는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문화적 충격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기술과 과학의 옷을 입은 서양의 물질문명은 그 물질 을 소유하지 못한 조선사회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서양의 물질문명을 약탈과 지배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문화적 충격과 힘의 논리 때문일 것이다. 즉 서구사회 의 근대화과정에서 촉발된 물질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은 물질을 통해서 문명과 문화가 보편화되고 균질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개항 이후 서양물건이나 일본물품들이 수입되면서 일상에서 새로운 문물은 낯설 지 않게 되었다. 점점 양품이 일상화되고 익숙해지자 새로운 물건에 대한 수요는 증 가하였고, 늘어나는 수요를 일부분 가내수공업 형태로부터 공장제 수공업으로 생산 하게 되면서 자본주의적 산업구조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의 신문이나 잡 지119)를 보면 신문물을 대표하는 모자, 양복, 구두 등이 광고 면에 등장하고 있다.

광고에 소개되는 물건들이 산업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모더니 티의 특질을 표상하는 글들로 채워졌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제조된 수공업적인 물건들도 광고에 등장하면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상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전 조를 보이고 있다.

이상적 일대 데파-드멘트 스토아―매점 백삼심 헌軒 … 오락과 이익과 편리와 사회봉 119) 이 시기의 잡지 『별건곤』(1924년 11월호~1934년 3월호) 역시 초반에는 광고가 거의 없

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광고의 양이 증가하고 있다. ‘신여성’ 잡지에 대한 광고부터, 감기와 신열에 좋다는 ‘노신’, 여성 전용 ‘크림’, 여성을 위한 ‘양산과 양장’,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만년필’, 사냥을 위한 ‘공기총’ 등 다양한 상품의 광고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예외 없이

‘모던’을 강조한다. 심지어 복덕방에도 ‘모던복덕방’이라는 이름을 붙여 광고하고 있다.

사의 종로권상장 鐘路卷商場(매일신보, 1922년 9월 27일자).

물론 새로운 문물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신문물 은 좌절과 불안감을 낳기도 한다. 이 불안감은 아마도 요즘처럼 유행에 뒤졌다는 소 외감이라기보다는 ‘문명’에서 소외된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별건곤』에 실린 승일 의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라는 제목의 글 일부이다. 1920년대 라디오와 영화 등 대중매체의 확산은 일반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근대적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파에 의한 라디오의 놀라운 체험, 그러나 그것을 향유할 수 없음을 서러워하고 있다.

돈 없는 동무여! 당신네들은 8, 9십전을 내고 신문을 보듯이 그만한 돈을 내고 그 대 신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 낮에는 신문이고 밤에는 유성기인 라디오를 들을 수 가 있을까요. 그렇다. 생활과 라디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활과는 아직도 멀다. 어느 것이 다 아니 그럴리요마는 문명, 그것도 돈 있는 자의 소용물이다. 문명은 쉼 없이 새 것을 내어 놓는다. 그것은 ‘부르주아’에게 팔리어간다. 그리하여 모처럼 의의있게 나왔던 것이 그 본의를 잃어버리게 된다. 서러워한다. 라디오가 운다.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승 일, 1926년 1월호).

새로운 문물이 주는 충격은 사회문화적 측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산업이 기존 산업을 대체해가면서 경제적 측면에도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상에 서 확인할 수 있는 유행의 변화와 함께 여러 가지 의식이 교차하는 다양하고 복잡 한 시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신문물과 신문화를 처음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의 우월감과 함께 무지한 사람들에 둘러싸인 낭패감도 느 꼈을 것이다. 서구화된 문화, 이질적인 물건과 그를 둘러싼 새로운 사회 구조는 계 급적인 갈등이 필연적인 측면도 있었다. 새로운 것은 늘 일부에게만 열려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는 소비되고 재생산되었다. 물질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문화에 대한 계급적 구별짓기와 문화적 괴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의 새 로운 문물은 그 자체로 개화를 의미한다.

⑵ 개화와 과학화

개화란 물적 개화로서의 ‘개물(開物)’, 인적 교화로서의 ‘화민(化民)’을 결합한 용어 로, 개물이란 국내자원의 개발에 의한 산업의 근대화이며, 화민이란 계몽과 교육에 의한 인간의 의식과 지식의 근대화(강재언, 1988: 175)를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물과 문명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에 앞서 과학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서구의 발 전된 문화가 바로 물질을 중심으로 한 것임을 발견하면서 더욱 높아졌다. 개화기

‘문명’에 대한 인식은 ‘산업’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드러나게 된다. 산업의 근 간이 되는 학문 즉 과학을 진흥시키는 것이 곧 식산흥업(植産興業)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문명이 곧 국운과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과학에 대해서는 신문물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좀더 깊은 학문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과학을 일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 이게 되었다. 그 노력은 한말부터 시작되어 1883년 박문국은 신식인쇄소를 차리고 한성순보를 발간했으며, 한성순보는 적극적으로 서양문물과 지식을 전하였다. 1886 년 창간된 한성주보에서는 천문, 역사, 물리, 전기 등 과학지식에 관한 기사가 빈번 하게 게재되었다. 문물과 과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게 된 것은 대한제국의 정책적인 노력에도 힘입은 바 크다. 위기의 제국이 우선 호소할 것은 ‘민족’이었지만 그 다음은 민족의 실력이었으며 그것은 문물의 진흥과 과학적 진보를 토대로 발전 하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물질문명과 과학적 지식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교 육이 실시되어야 했다(김진송, 1999: 83).

다음은『서울』에 실렸던 장응진의 “상식과 과학”이란 제목의 글 일부이다. 과학 적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를 강조한 계몽주의적 글이다. 진보와 개화를 위해 합리적 인 사고, 즉 상식을 가르칠 필요성과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이고 조직 적인 사고와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우러나오는 과학적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학문 을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특히 물질적 측면의 과학적 지식의 고양에 힘쓸 것을 요청하고 있다.

원만한 상식을 수양하는 동시에, 우리는 과학을 좀 배워야 하겠다. 지금의 문명은 과

학의 산물이라. 그러면 과학이란 어떠한 것인고? 여기에 또한 한마디 말로 정의를 내리 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과학이란 체계적 상식이 라 하는 듯하다. … 우리 인류의 생활하는 방식은 두 개의 방면으로 관찰할 수 있으니, 하나는 물질적 방면이요, 하나는 정신적 방면이라. 그런 중 금일의 문명을 형성한 원동 력의 대부분은 자연과학의 이용에 있음을 생각할 때에 이것에 대하여 한마디 더하는 것 이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 … 근세에 발달된 인류의 지식은 이상과 같이 자연계의 산물 을 이용함으로써 만족하지 않고 다시 과학의 힘으로 능히 정교한 온갖 기계를 발명하여 막대한 인력을 대용하며, 화학공업의 발달은 각종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품을 인조로 제출하여 실용에만 공급할 뿐이 아니라, 우리의 호기심을 더 일층 만족하게 하여 준다.

특히 근세에 이르러서야 증기기관과 전기 사업이 발명된 이후로는 물질문명의 추세는 비상한 급속도로 진보를 하였다. … 그리하여 과학(자연과학, 정신과학) 발달은 상식의 진보를 촉성하며, 상식의 진보는 과학의 발달을 촉진하니 상식과 과학은 양면이 서로 원인이 되며 결과가 되어 우리 인류가 항상 일층 완전의 영역으로 인도하여 간다(장응 진, 1999년 12월호).

계몽의 불빛은 개인의 일상을 철저하게 분할, 통제, 균질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새 로운 형태가 이성을 앞세운 과학이었다. 개화는 곧 과학문물의 받아들임이었고, 과 학은 새로운 문물로 그 모습과 속성을 드러냈다. 근대계몽기, 개화기는 전시대와는 다른 역동성과 예측의 어려움이 잠재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서구 혹은 일본의 충격 속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담론들이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의 모든 담 론들은 아직 완성된 형태가 아닌 미분화의 상태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옛 것 과 새 것,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이 충돌하면서 삶의 전반을 새롭게 절단하고 배치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 같은 시대에 과학은 곧 근대의 선각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에게는 가장 우월 한 지식의 유형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학과 과학적 사고는 봉건적인 논리에 대항하 는 가장 분명한 사고체계였으며, 과학적 방법이 계몽과 진보를 가져다 줄 수 있으리 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의 계몽주의자들이 자신의 과학적 이해력을 바탕 으로 자연을 관찰, 이용, 지배하는 새로운 인간이 과학적 방법에 의해 창조될 것이 라고 믿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칸트가 계몽주의를 ‘그의 정신을 사용하여 그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있는 인간’이라고 정의하면서, 내세운 슬로건 ‘감히 알려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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