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과학주의와 학교의 지식

문서에서 근대성의 구현체로서 학교: (페이지 192-200)

가. 학교-지식-기계127): 학교의 지식선택

⑴ 문명․야만 담론의 전파

개항은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질서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

127) 학교지식이 사람들의 활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며, 특 히 지식은 ‘근대적 신체’, ‘근대 주체’를 만드는 주요담론을 제공하는 강력한 기제이므로 기 계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자면 자급자족형 농업경제체제에서 세계열강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강제 편입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교육은 이러한 사회변동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 들이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았고,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양문화권의 논리와 경험에 의존했던 종래의 서당128), 서원, 향교 등은 신 문화와 신지식에 대한 적응능력의 상실로 인하여 그 교육적 기능이 사실상 소멸되 었다.

신문화와 신지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관련된다. 그것은 때로는 제도로의 정착 문제, 이념 갈등의 문제, 교육과 정책의 문 제로 자리하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면서 서구를 배척하던 ‘척사(斥邪)’의 태도로부터 ‘동도서기(東道西器)’129)라는 절충적 수용태도로 나아가게 되었다.

개화기에 발표된 교육관계 論․說을 검토하여 보면 그 다수가 新學과 舊學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이때 신학이란 물론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학문을 의미하고, 구학이란 전통적인 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新舊學問이 同乎 아 異乎아>, <新舊同義>, <新學과 舊學의 관계>, <學無新舊> 등의 題名으로 실린 이들 논설 등은 모두 舊本新參 혹은 舊主新輔의 이념에 주로 근거하는 것으로 동도서기론의 한 전형을 이룬다. 유학의 本末論과 道器論에서 그 이념적 정당성을 찾고 있는 동도서 기론은 일본의 和魂佯才論이나 중국의 中體西用論과 함께 동양사회의 대 서양문화 수용 방식의 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정순우, 1992: 12).

서양문화에 대한 동도서기론적 접근방식은 단순히 사유체계나 이념체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교육정책이나 교육제도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고종의 ‘교육입 국조서’는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교육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그 이념적 바탕에 128) ‘18세기 서당 연구’를 수행한 정순우(1985년)는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맹아를 18세기 후반 의 서당교육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의 자생적 근대교육의 맹아를 봉건교육 의 해체라는 내인에 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자생적 근대교육의 맹아 는 말 그대로 맹아일 뿐, 그 자체가 근대교육의 실체라 할 수 없으며 그 근대성의 구체적 근거도 빈약해 보인다.

129) 동도서기론이라는 논쟁의 등장 이후 한국 근대교육사의 주요쟁점과 사건은 이 ‘외세’와 외세문화의 수용에 대한 제 계층과 계급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정순우, 1992).

는 동도서기론적인 요소가 함께한다. 무엇보다 동도서기론에는 유가적인 사회체제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있어 보수적 성향이 존재하고 있다. 동도서기론의 절충적 입 장이 지닌 봉건적 요소는 개화기 교과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학부 편찬의 수신 교과서에서는 “我等은 皇室을 尊奉하야 鴻恩의 萬一을 報答함이 가 하도다. 皇帝皇后兩陛下는 臣民의 父母이신즉 우리 臣民된 자는 황제황추양폐하를 부모 와 같이 依仰할지로다”라고 하여 전근대사회의 군신관계가 존속되어지기를 기대하고 있 다. 또한 당시의 집권층이 서구 제국과의 통상관계와 문화수용을 위해 설립한 육영공원 의 교과과정에서도 기존의 문화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체, 서구문화의 부분적인 수용만 을 시도하고자 하는 노력이 쉽게 발견된다. 左院을 관리나 고관자제를 중심으로 선발하 여 보수적 성격을 강하게 한 것이나, 과거와 漢文經史를 강조한 것은 모두 동도서기론 적 접근 방식이 지닌 시대적 한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정순우, 1992: 13).

동도서기라는 절충적 수용태도를 거쳐 서구문명을 보편적 문명으로 인식하는 단 계에 들어선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군사적 힘을 배경으로 서양이 동양을 압도하고, 서구화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서구문명은 보편문명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당시 사회를 진단하고 처방했던 근대 의 인쇄매체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근대화 프로젝트를 펼쳤다. 근대 신문들이 지향한 목표는 서양의 강대국이나 일본과 동등국이 되는 것이었고, 동등국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과 인재양성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삶을 대상적으로 파악하는 근대적 사유체계와 학문체계의 도입으로 귀결된다.

문명개화한 나라 사람들은 군사를 조련할 줄 알고, 이로운 병장기와 화륜선과 철도와 전신과 전화와 편한 의복과 유익한 음식과 정결한 거처를 만들 줄 알고, 나라 일에 죽 는 것을 영광으로 하는 연고로 사람의 몸이 강하고 마음이 굳세고, 지혜가 높아진다(독 립신문, 1896년 4월 25일자 논설).

서양은 때가 즉 돈이다. 한 시각이라도 놀고 보내면 돈을 몇 원 내어버리는 것으로 알아 누구라도 놀고먹는 사람은 세상에 천하고 쓸데없는 인생으로 대접한다(매일신보, 1898년 4월 30일자 논설).

세계 문명한 나라에서는 법률이 다같이 공정하여 어느 나라에 가든지 제나라 사람과 같이 대접하며 제나라 법률과 같이 다스리는 고로 다 같은 권리를 준다(매일신보, 1898

년 5월 9일자 논설).

개명한 나라가 다 부강한 까닭은 정부도 있고 백성도 있어 각각 직업은 다르나 사람 인즉 다 같은 한 종자요, 다 같은 평등권이라 하므로 정부와 백성이 一心이 되기가 쉽 고 일심하므로 부강(매일신보, 1898년 9월 20일자 논설).

문명한 나라는 부국강병(富國强兵), 정치와 법률이 밝고, 공정함, 화륜선․철도․

전신․전화와 같은 발달된 문물, 편한 의복, 유익한 음식, 정결과 위생, 나라와 동포 를 사랑하는 마음, 자주독립한 마음, 놀고먹지 않고 열심히 일함, 평등한 권리, 인재 의 등용, 지혜로움 등등의 양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문명의 표상은 서구의 제도나 문물로부터 서구적 시야로 포착된 민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포괄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실현되고 있는 문물, 제도, 행위가 모두 ‘문명’으로 치환한다.

이런 표상 속에는 서양 자체 혹은 서양의 전부를 ‘문명’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작동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⑵ 문명화의 과정: 근대 교육과 서구식 학교

양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지배논리 하에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사회진화론에 맞서 기 위해서 선결해야 할 과제는 게으르고 나태한 신체, 구습에 젖어 있는 몸의 개조 였다. 열강과의 경쟁에서의 패배는 곧 민족의 사멸을 의미했고, 국가와 민족을 보존 하기 위한 책략이 신체에 대한 관리였다. 제국주의 열강과 맞설 수 있는 건강한 신 체,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 신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근대 매체들이 문명화하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교육을 통해 문명화와 습속을 변화시켜 문명화하는 방법이었다.

만일 조선 사람들이 꿈을 깨어가지고 물을 주워 먹어 가면서도 진보하여 공평하고 정 직하고 편리하고 부국강병하는 학문과 풍속을 힘쓰거드면, 조선 사람도 영국이나 미국 사람만 못하지 않을 터이요. 조선도 청국을 쳐 요동과 만주를 차지하고 배상 8억만 원 을 받을 터이니, 원컨대 조선 사람들은 마음을 크게 먹어 10년 후에 요동 만주를 차지 하고 일본 대마도를 찾아올 생각들을 하기를 바라노라. 하면 될 터이니 결심하여 할 생 각들만 하고 못 되려니 하고는 생각지 말지어다(독립신문, 1896년 8월 4일자 논설).

위 논설은 학문과 풍속을 문명화의 과정이라며 조선을 문명국으로 도약하게 하는 가장 시급하고도 빠른 길이라고 제시한다. 문명은 교육을 통해 달성된다. 문명의 기 초는 교육이기 때문에, 문명화의 길은 교육을 통해 열린다. 따라서 이 시대 매체들 은 무엇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라가 개명되기를 위하는 자들은 항상 말하되 인민을 교육한 후에 문명이 진보된다 고 하나니, 그 의론이 좋은 말씀이지만 현금에 정부 사세가 시급한지라. 어느 겨를에 자 제들이 각항 학문을 졸업하고 나라에 수용되며, 국중에 대학교가 하나도 없거늘 정부가 어찌 학식이 고명한 재목을 얻을 수 있으리요(독립신문, 1899년 6월 27일자 논설).

법률을 고쳐야 개화, 정치를 고쳐야 개화, 군율을 고쳐야 개화, 경찰을 고쳐야 개화, 의복을 경편히 입어야 개화, 도로 교량을 어찌하며 집을 삼사층을 지어야 개화라고 분 분한데, 개화 전체의 실지는 먼저 인민의 마음부터 열리고 깨치게 하여야 되니 학교를 확장하여 인민의 자녀를 몰아다가 하나도 무식한 사람이 없게 한 연후에 개화는 이루어 지는 것이다(매일신보, 1898년 10월 3일자 논설).

신문들은 반복해서, 야만은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야기된 상태임을 강조하면서 교육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 상태는 타고난 민족성 때문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교 육만 잘 받으면 동양의 제일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교육은 곧 서구식 학문과 근대식 학교를 의미한다. 문명화 프로젝트가 서구 따라잡기라는 점에서 문명의 요체가 되는 교육이 서구의 학문과 학교제도에 의해서 작동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서구식 학문과 학교는 가장 핵심적인 문명 의 척도였다. 그래서 각급 학교 설립, 의무화된 소학교제도, 10년 정도의 교육기간, 소학교․중학교․대학교․전문학교에 들어가는 교육과정, 남녀 평등교육, 개화 서책 의 반포, 외국 책의 번역, 도서관 설치, 외국 유학생 파견 등 서구식 혹은 일본식 교 육제도를 소개하거나 실행을 촉구하였다.

아세아 사람 모씨는 세계 각국을 널리 유람하고 동서양 학문을 도저(到底)히 섭렵한 사람이라. 일찍이 말하여 가로되, 동양 학문은 높은 담 안에 있는 사람이요, 서양 학문 은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가장 이상적이고 유리한 평론이로다(독립신

문서에서 근대성의 구현체로서 학교: (페이지 19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