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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규율주의

문서에서 근대성의 구현체로서 학교: (페이지 126-142)

가. 근대적 공간의 형성

⑴ 공간담론의 지형도

‘베르그송(Bergson) 이전부터 공간은 죽은 것, 고정된 것, 비변증법적인 것, 정지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시간은 풍요롭고 비옥하고 생생하며 변증법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푸코의 언술은 시간담론이 특권적 지위를 누려왔던 근대학문체계에 86) 사전적 의미로 규율은 ‘집단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는데 행위의 규준이 되는 것, 기율(紀 律)’을 뜻한다. 푸코(Foucault)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에서 규율이 인간의 신체 를 통제하면서 동시에 개별자로 만든다며, 규율을 ‘개인을 권력행사의 목적이자 수단으로 삼 는 권력의 특수한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규율이란 이처럼 일상적 행위를 지배하고 나 아가 인식까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회적 힘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학교규율 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오성철(2001)은 학교규율을 ‘학교교육에서 학생의 몸과 행동에 대해 가해지는 일련의 의도적․체계적인 규제와 훈련’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학교 라는 공간에서 작용하는 사회적․교육적 힘, 규제와 훈련, 그리고 감시를 뜻하는 것으로 학 교공간에서 양성하고자 하는 인간형과 관련지어 사용하고자 한다. 규제와 훈련, 감시는 개인 이 스스로의 감시자가 될 정도로 ’내면화‘의 과정을 가져온다. ’규제․훈련․감시의 내면화‘, 그 핵심이 규율이라고 판단하여 ’규율주의(Discipli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서 공간담론이 상대적으로 주변화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시간과 역사가 지배하던 인 문사회과학계에서 공간담론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87)

공간담론의 최근 흐름은 물리적인 공간과 사회 주체간의 관계에 대한 탐색이 지 배적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임과 동시에 공간적 존재이며, 사회는 공간적으로 생 산되고 공간은 사회적으로 생산된다.88) ‘공간89), 주체, 권력’이 서로 결합되고 교섭하

87) 특히 근대성에 강한 문제제기를 하며 등장한 포스트모던 담론은 공간을 학문적 담론의 중 심으로 끌어올리는데 커다란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공간담론의 역사는 철학, 건축 학, 사회학, 지리학 분야를 중심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전개되어 왔다. 공간관념에 초점을 둔 철학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데카르트(Descartes), 칸트(Kant), 후설 (Husserl), 하이데거(Heidegger)에 이르는 일련의 계보를 형성해 왔고, 건축과 미술사분야에 서는 형상을 구성하는 상이한 양식적 특성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양식적․형태적’ 공간담 론이 전개되어 왔다. 사회학에서는 도시적 생활양식과 도시성(urbanism)을 탐색했던 위스 (Wirth)와 짐멜(Simmel)의 초창기 ‘도시문화론’에서부터, 자본과 노동, 국가의 상호관계에 초 점을 두고 자본주의 도시의 성격을 분석해온 ‘공간노동론’, ‘자본순환론’, ‘집합적소비론’ 등 일련의 도시사회학적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지리학에서는 물리적․기하학적 공간관에 기 초하여 공간법칙을 규명하고자 했던 ‘논리실증주의 지리학’과 인간의 장소경험과 장소정체성 의 형성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고찰한 ‘인간주의 지리학’, 자본주의적 상품․노동관계의 공간 적 형성과정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규명한 ‘공간정치경제학’적 연구들이 공간담론의 흐름을 주도해왔다(이무용, 2005: 31~32).

88) 시간-공간-사회의 삼변증법(trialectics)을 제창한 소자(Soja)나 하비(Harvey)의 역사지리유물 론, 일상적인 사회생활과의 연관성 속에서 공간을 이해하는 르페브르(Lefebvre)의 사회공간 론 등이 대표적인 논의들이다. 특히 르페브르의 사회공간론은 논리적․수학적 공간이라는 형식적․추상적 영역과 사회적 공간이라는 실천적․감각적 영역과의 관계 속에서 공간 개념 을 규명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89) 지리학에서는 장소(place)와 공간(space)을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장소개념이 인간주 의 지리학에서 주목하는 개념이라면, 공간은 실증주의 지리학이 중시하는 개념이다. 그만큼 공간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개개인들에게 의미 있는 요소를 중요하게 다 루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평균적인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우리는 공간이라는 용 어를 사용한다(전종한 외, 2005: 37). 장소가 주관적․개인적 의미층위를 갖는다면, 공간은 보 편적인 의미층위를 갖는다. 이 연구에서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영역이며, 공 식적․의례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란 의미에서 공간 개념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사회적 으로 생산된 공간을 ’공간성(spatiality)‘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비어있는 공 간이기보다는 수많은 이념들이 대결하는 전투의 장을 의미한다.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접 하게 되는 공간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쥔 집단이나 누군가에 의해 생산되고 만들어진 공간

르페브르: 공간적 실천 하비: 공간의 정치학 물질적인

공간적 실천

경험되는 것(the lived):

경험/경제적 공간의 지배/통제 공간의 지배적 생산 공간의 재현 지각되는 것(the conceived):

지각/과학적 공간의 전유/활용 공간의 주체적 소비 재현의 공간 상상되는 것(the perceived):

상상/문화․예술적 공간의 생성/재생산 공간의 새로운 대안 는 지점을 주요대상으로 하는 논의들은 ‘공간의 문화정치학’이라고 한다. 공간이란 무엇이고, 공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공간의 존재론과 인식론적 차원, 그리 고 사람과 공간이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논의가 중요한 까닭은 우 리의 삶이 어떻게 공간적으로 만들어지고, 삶의 공간적 차원이 어떻게 우리 삶에 영 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표 4〉는 공간의 사회성,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분석한 르페브르와 하비의 공간 개념을 정리한 것이다. 공간의 사회성, 즉 공간성(spatiality)은 사회적으로 생 성․생산된 공간, 즉 특정한 사회적 내용을 지닌 공간이다. 공간은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표 4〉르페브르와 하비의 공간 이해

⑵ 근대적 공간의 분화: 공동체, 가정, 개인, 권력의 시선

중세 서양에서 가족은 가부장적이든 부족적이든 간에 일단 대가족90)이었다. 가족

을 일상 속에서 소비하면서 살아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90) 직계가족이 산업화 이전의 영국에서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라슬렛(Laslett)의 연구가 있다.

그는 인구통계학적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영국의 경우, 하인들은 1800년 이전에 감소추세를 보이며, 1850년 이후 시기에 관한 연구는 하숙과 고용살이가 점진적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결혼, 고등교육, 출세가 보장되는 직업을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는 장성한 자녀가 가족과 함께 동거하는 것이 규범으로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현대적 패턴이 출현했음 을 보여준다. 도시지역에서는 전혀 중요시되지 않았던 남성 가내하인들은 1850년경 이미 몇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영국 농업에서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주인집에서 숙식하는 도제제도는 새로운 공장제 산업이 들어서면서 그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가내 고용살이는 1900년 이후까지도 영국 여성들이 가장 많이 취업하고 있는 단일 직종으로 남아 있었으며,

은 친척과 인척, 즉 결연 혈족으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였다(Goff, 1992: 338). 따라서 가족은 가계의 우위 아래에 있었다. 중세의 가족은 더 큰 공동체(사회)에 대해 열려 있는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공동체 또한 가족에 대해 개방되어 있었다. 거리와 집은 단절되지 않고 서로 이어졌으며, 아이들의 생활 역시 마찬가지여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남의 집에서 7~9년 정도의 견습(도제)생활을 했다. 재산정도에 상관없이 모 든 사람이 남의 집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자기 집에도 다른 집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서양의 중세에 거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아이는 실습을 통해 배웠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직업과 사생활 사이의 경계가 없었 기 때문에, 그러한 실습은 직업 내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시대착오적인 표현이기 는 하나) 직업생활을 함께 한다는 것은 사생활―이것은 직업생활과 혼동되었다―을 함 께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인 역시 가내 봉사를 자기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 이에게 지식, 실무 경험, 아이가 갖추어야 할 인간적 가치를 전수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교육은 견습수업을 통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훨씬 후에 주어진 의미보다 더 확 대된 의미를 그것에 부여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집에서 돌보지 않고, 계약을 맺거나 혹은 계약 없이 남의 가정에 보냈다. 아이들은 남의 가정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생을 시 작했고, 기사로서의 예의범절이나 직업에 필요한 것을 배우기도 하고 학교에 가거나 라 틴어를 배웠다. 이러한 견습 수업은 모든 신분에 퍼져 있던 관습이었다(Ariés, 2003: 58 0~582).

사람들은 거리와 광장에서 만났고, 집은 사적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항상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부엌만이 특수한 기능을 지닌 공간이었을 뿐 집안의 모든 공간 들은 자고, 먹고, 손님들과 대화하는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동식의 접이침대가 방마다 있어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들기도 했다.

농촌이건 도시이건 간에 개인의 대저택들 외에 다른 공공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1900년경에도 많은 여성들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바로 그 날로 유럽의 여러 다른 지역으 로 흩어졌다. 고용살이는 양차 대전 이후에야 거의 소멸된다. 하숙 또한 금세기 전반부에 크 게 감소되었으며, 북미의 경우 적어도 여기에 도덕적 개혁가들의 압력에 영향을 주었다. 이 와 함께 특히 결혼연령이 낮아지고 의무교육이 점차로 확산되는 등 이러저러한 변화의 결과 로, 성인기로의 전환 패턴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취업하고 결혼하고 자신의 가구를 꾸미는 몇 년으로 압축되는 식으로 지난 100년에 걸쳐 변형되었다(Anderson, 1994: 27~32).

17세기의 대저택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그 자체만으로 사실 상의 사회 집단을 형성했다. 가정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소한의 공간뿐이었다면 가족의식이 그곳에서 형성되거나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옛 시대의 사회성은 사생활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가족의식의 형성에 방해가 되었다. 그러 나 친구나 동료의 집을 아무 때나 예고 없이 방문하는 관행은 18세기 말에 사라졌 다. 이제 집은 열성을 갖고 꾸미는 대상으로서, 외부 세계와는 대립된다. 이것은 벌 써 가정생활에 대한 근대적 기호를 보여주는 것이며, 건강과 교육은 이후 모든 부모 들의 주요 관심사가 된다(Ariés, 2003: 624~635).

이처럼 중세 가족생활의 풍경을 바꾼 것이 바로 아동기의 발견과 그와 결합된 학 교교육의 발전이었다. 사람들이 어우러지던 공공의 생활이 가족의 생활로 변화되었 다. 조립식 침대가 붙박이 가구로 바뀐 것은 분명 가정생활의 발달을 나타내는 것이 며, 이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 가족은 더 이상 공동체와 연결된 대가족이 아니라 ‘프라이버시(privacy)라는 높은 담벽’으로 둘러싸인 채, “춥고 냉랭한 외부로부터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피난처”가 된 핵 가족으로 바뀌었다(Shorter, 1975: 205). ‘하늘의 법률에 따르고, 최선을 다해 그의 삶 을 신과 가족과 왕에게 바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제 가족에 대한 사랑은 신에 대한 신앙과 국왕에 대한 충성과 동격이 되었다. 가족 은 교육의 기능을 학교에 이전하고 친교와 경제의 기능을 사회로 이관했지만, 대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사적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중세 말부터 16~17세기까지 아이를 타인에게 위탁하는 풍습이 성행하던 시대에는 열망할 수 없던 거리를, 즉 부모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가정에 복귀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중세의 가족과 구별되는 주요한 특 징을 17세기 가족에 부여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교육과 직업, 장래에 대해 염려했다. 아이는 아직 모든 조직의 중심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Ariés, 2003: 637).

이처럼 특별한 존재로서의 ‘아동’이라는 관념은 바로 이 새로운 가족 모델의 등장과 함께 했다. 아동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아동기의 제도화, 규율화는 직계존비속만

이 함께 거주하는 새로운 가족형태와 선택적 친화력을 지녔던 것이다. 고프 역시

“어린이는 직계존비속만이 함께 사는 소가족(famille domestique)과 더불어 등장했 다. 이 소가족은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과 더불어 도시사회에서 등장․확산”(Goff, 1992: 343)되었다고 주장한다. 쇼터 또한 “핵가족은 낭만적 사랑보다는 어머니와 자 식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아동복지의 개념이 처음으로 싹트기 시작하면서 가족애란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Shorter, 1975: 205)고 주장한다.91)

아리에스는 아동기의 발견이 근대적 가족모델의 등장에서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 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세적 가족에서 17세기의 가족으로 그리고 다시 근대적 가 족으로의 변화는 오랫동안 귀족, 부르주아, 부유한 장인과 농민들에게만 한정되었다.

19세기 초까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빈민층은 중세적 가족처럼 살았고 아이들은 부모 곁에 머물지 못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가족생활은 그것이 귀족 과 부르주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잊게 될 정도로 거의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으 며, 이 근대적 가족모델은 외부세계에 대해 폐쇄된 사적 공간으로 바뀌었다(Ariés, 2003: 637~638). 어른의 축소판으로만 인식되었던 아이들이 특별한 존재로서의 ‘아 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다. 아동에 대한 심성의 변화는 아이 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가족 모델의 탄생, 권력이 개인을 다루는 방식의 변화와 맞

91) 기든스(Giddens, 1999)는 18세기 후반에 여성들에게 영향을 준 변화를 ‘가정의 창조’,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 ‘모성(motherhood)의 발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가 현대사회의 성과 친밀성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며 낭만적 사랑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친밀성이란 두 사람 사이의 정서적 가까움과 강한 유대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아개방(자신 을 드러냄)과 친밀한 의사소통을 통한 상호의존성 및 상호존중을 포함한다. 산업화와 더불어 가정과 직장이 분리되면서 ’경제활동으로부터 분리된 영역으로서의 가정‘이라는 관념이 출현 했고 가정은 점차 사적인 친밀성의 공간이 되어갔다.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짊어 지면서 ’모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가정 내에서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되면 서 ’아동기‘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정 안의 역할들은 가정에서 여성들의 통제력을 점 차 증대시켰다. 쇼터 역시 좋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전통사 회에서 어머니들은 두 살이 채 안된 유아의 발달과 행복에 대해 무관심했다. 현대사회에서, 어머니들은 그들의 어린 자녀들의 복지를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다(Shorter, 1976: 168). 부모됨 과 아동기에 관련된 태도와 행동에 있어서 쇼터는 감정과 배려가 점차 중요시된 점에, 아리 에스는 아동의 신체적․정신적 복지가 중요시된 점에 주요 관심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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