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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분야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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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우리나라와의 관계

7. 국방분야 협력

XII. 우리나라와의 관계

G E R M A N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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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무 관계

가. 한·독 외교 약사

⑴ 양국간 초기 접촉

○ 조선 16대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때 인질로 잡혀가 청국에 머무는 동안, 1644년 독일인 신부 아담 샬(Adam Schall)과 친교를 맺게 된 것이 양국민간 접촉의 효시

- 이 후 19세기 중반까지 약 2세기간 접촉 중단

○ 여타 열강에 비하여 근대국가 성립이 늦었던 독일은 국내적으로 안정 기반을 다진 1860년대에 들어 열강의 해외진출 경쟁에 참여

- 극동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어 청국 및 일본과의 관계 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조선과의 관계개선도 시도하였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무산

⑵ 국교 수립

㈎ 통상・우호・항해조약 체결

○ 1869년 폰 브란트(von Brandt) 주일 독일공사가 부산에 건너와 양국간 우호·통상조약 체결을 요청했으나 동래부사 거절

- 1873년 대원군의 하야 및 조·일 수교 이후의 개화정책에 힘입어 폰 브란트 공사가 1882.6월 한·독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 으나, 독일정부는 동 조약의 문구가 애매하여 독일인의 치외법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비준을 거부

○ 그 후 수차례의 협상 끝에 조약문구를 수정하여 1883.11.26 민영목 외무독판과 차페(Eduard Zappe) 주요코하마 독일총영사간에 조・독 통상・우호・항해조약이 체결되었고, 1884.11.18 서울에서 비준서가 교환됨으로써 양국간 국교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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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11월 독일은 서울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쳄브쉬(Zembsch)를 초대 총영사로 임명

- 독일은 1903.4월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하고 잘데른(Saldern) 변리공사를 임명하였으나, 1905.12월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주한 독일공사관을 폐쇄

○ 조선정부는 1887.9월 이래 조신희를 비롯 수명의 주독 전권대신을 임명 했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1901.8월 민철훈 주독 전권공사가 처음 부임 - 주독일 공사관은 이범진 공사를 마지막으로 1905.12월 폐쇄

○ 독일은 조선에서 광산채굴 및 철도부설권 등 경제적 이권획득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1898년 강원도 당현 금광채굴권 이외 별다른 이권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

㈏ 독일 황태자 방한

○ 국교 수립후 양국관계는 특별한 마찰 없이 발전해 오다가 1898.7월 독일 하인리히(Heinrich) 황태자의 방한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정부는 장차 러·일의 각축을 예상, 독일측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황태자를 극진히 환대

- 하인리히 황태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서, 해군 제독으로 극동 순방 중이었으며 방한기간 중 고종황제를 예방하고 관립 독어 학교 및 당현 금광을 시찰

㈐ 재한 독일인의 활동

○ 조선정부는 일본과 최초로 국교수립(1876년)을 하였으나, 전문지식 및 대외교섭 경험의 부족으로 수년간 일본으로부터 유입되는 물품에 대한 관세징수를 못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직면

- 조선이 이러한 사정을 청국에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자, 이홍장은 조선에 친청국 세력을 심어 두고자 천진 주재 독일 영사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를 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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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1월 묄렌도르프는 조선정부의 외교와 해관사무를 관장하는 고종 황제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조선의 대열강 외교 및 부국강병을 위하여 노력

- 신식교육 실시를 위하여 관립 영어학교를 설립하였고, 복잡한 화폐 제도 개혁을 위한 전환국을 설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

- 1885.5월 영국 군함이 거문도사건을 일으키자 영국측에 강력 항의 하기도 하였으며, 조선군대를 훈련할 러시아 교관 초빙을 교섭하던 중 조·러 밀약을 맺었다는 열강의 비난을 받고 관직에서 해임

○ 볼얀(J. Bolljahn)은 독일의 군사제도를 배우기 위해 설치된 관립 독어학교 (1895.5)에서 독어교사로서 활동

○ 20여년간 일본해군 군악대 교사로 활동하던 엑케르트(Franz von Eckert)는 1901년 대한제국 시위대 군악대장으로 임명되어,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하고 서양음악 보급에 주력

○ 분쉬(Richard Wunsch)는 고종황제의 주치의로 활동(1901-1904)

※ 1905년까지 약 150명의 독일인이 한국에 체류

⑶ 일제치하 양국관계

○ 일제의 한국 점령기간(1905-45년) 중 외교관계 단절

- 단절된 외교관계에도 불구, 양국민간 관계는 독일선교사의 포교활동 및 한국학생의 독일유학으로 지속

- 일본을 통해 독일의 문학, 철학, 음악, 법제도 등이 한국으로 유입

○ 1908년 엑카르트(Andre Eckardt : 1884-1968년)를 비롯한 독일 베네딕트 소속 선교사들이 내한, 일제의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를 설립하고 포교활동

- 엑카르트는 1929년까지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의 문화·예술, 역사 등에 대해 연구하고 독일로 귀국 후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는 등 독일내 최초의 한국학자로 평가

○ 최초로 독일에 유학한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철학, 신학 및 인문과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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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였으며, 이미륵, 안호상(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1920 년대 유학

- 일제통치기간 약 27명의 한국인이 독일에 유학한 것으로 추산

※ 이미륵(1899-1950, 본명 이의경)

- 1928년 독일에서 학업을 마치고, 작가생활을 하며 뮌헨대학에서 강의, 1946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를 발표한 후 전후 독일문단에서 인 정받는 작가로 명성

- 이 작품은 유려한 독일어 문체로 쓴 명작으로서 당시 독일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까지 수록

※ 베를린 올림픽과 동아일보 사건

- 제11회 베를린 올림픽(1936년) 마라톤경기에서 손기정 1위, 남승룡 3위 차지,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자 조선 총독부는 1936.8.27 동아일보를 무기정간 처분하고 신문사 간부들 해고

⑷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양국 관계

㈎ 국교 재개

○ 서독정부는 전승국에 의해 작성된 점령국 규칙에 의거 대외 행위가 제한 되었기 때문에, 파리조약(1954년)으로 점령국의 지배가 종식되어 1955.5월 주권이 회복된 이후에야 우리나라와의 국교수립 추진 가능

○ 양국간 인사교류 및 통상관계 증가에 대비, 1954.10월 한국은 본(Bonn) 인근 레마겐 Remagen)에 총영사관을 개설하였으며, 양국은 1955.12.1 상호 국가 승인

- 독일 총영사관은 1956.10월 서울에 개설되었고, 한·독 양국은 각각 총영사관을 1957.3월 공사관으로, 1958.8월 대사관으로 승격

㈏ 한국전쟁 복구지원

○ 한국전쟁의 발발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전승국으로 하여금 독일의 재무장을 서두르게 하였으며, 서독은 1955.11월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한국전쟁 중 파병은 불가능)

○ 한국전쟁 기간에 서독 정부는 인도적 견지에서 의료지원단을 파견하기로

227 결정하고 전쟁 종료 후인 1954년 부산적십자병원을 설립, 1954.5월부 터 1959.3월까지 독일 의료지원단을 한국에 파견하였으며, 25만여명의 한국민들을 치료

○ UN 안보리의 긴급 구호계획에 관한 결의에 따라 기증금 4만 7,000달 러 제공

㈐ 양국관계 발전

○ 국교가 재개되자 양국은 분단경험 공유로 결속을 하게 되었으며,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중반까지 서독정부의 외교정책 기조였던 할슈타인 (Hallstein) 정책을 우리 외교정책에 그대로 도입

- 서독정부는 당시 우리정부의 대북한 정책을 지지

○ 서독은 전후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하여 재정, 경제 및 기술원조를 제공 하였고, 한국은 서독의 경제재건에 필요한 노동력 지원요청에 따라 한국 간호사 및 광부를 파견

- 1963년 247명의 한인 광부가 서독에 도착한 이래 1977년까지 총 7,936명의 광부, 10,564명의 간호사(1965-76년) 파독

※ 출처 : 파독 광부 45년사(재독한인 글뤽이우프 발행), 1995년 독일 병원협회(DKG e. V.)

○ 1960년대 중반에는 양국 정상의 상호교환 방문 실현 등 양국관계 심화 발전

- 1964.12월 박정희 대통령, 공식 방독

- 1967.3월 뤼브케(Heinrich Lübke : 1959-69년) 대통령, 공식 방한

○ 1967.7월 ‘동베를린 사건’으로 일시적으로 양국간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가, 1969.1월 프랑크(Paul Frank) 특사가 방한하여 동 사건의 타결에 합의 함으로써 관계 회복

- 이후 양국간 정치, 경제 및 문화관계 교류는 꾸준히 증진되어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 유지

○ 1990년 독일의 통일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한국에게 부러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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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되었으며, 독일통일 경험 공유라는 차원에서 양국 관계가 보다 발전

○ 현재 한국과 독일은 민주주의, 다자주의, 자유무역, 인권 등 핵심 가치 들을 공유하는 파트너로서, 다방면에서 활발히 협력중

- 2018년 기준 한-독간 무역 규모는 302억 달러(대독일 수출 208억, 대 독일 수입 94억)에 달하고 있으며, 2018년 누계 투자 금액도 상당(독일 의 대한국 투자 137.3억불, 한국의 독일 투자 57.7억불)

㈑ 수교 100주년

○ 1983.11.26 양국정부는 수교 100주년을 맞아, 서독측은 빈델렌(Windelen) 내독관계부 장관을, 우리측은 이규호 전 문교부장관을 각각 파견하고 다양한 기념행사 개최

○ 서독은 베를린 필하모니 내한공연, 발터 쉘(Walter Scheel) 전 서독 대통령 방한 및 문화예술계 인사를 파견

- 우리나라는 한국미술 5천년전, 한국 고인쇄물 전시회, 전통예술단 공연 및 학술 교류세미나 등을 서독에서 개최

㈒ 2005년 한국의 해

○ 2005.9월 베를린 아태주간의 포커스국 및 2005.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주빈국가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2005년 연중 독일 전역에 걸쳐 경제·문화 관련 행사 개최

㈓ 수교 125주년

○ 2008년 수교 125주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한국 사찰음식 소개전’을 개최하고(9.4) 독일 연방하원에서 수교 기념 리셉션을 개최(12.4)하는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통해 양국간 우의 증진

○ 독일 연방하원은 2008.12.18 수교 125주년 기념 「독·한관계의 역동적인 지속적 발전 결의안」 채택

229 ㈔ 수교 130주년

○ 2013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한독포럼 계기에 수교 기념식(6.19)을 개최하고(가욱 대통령 참석), 수교기념 공동우표를 발행하였으며,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양국 공동음악회를 겸한 기념 리셉션을 개최(9.30)

○ 2013년은 또한 광부 파독 50주년으로 동포사회와 협력하여 다양한 문화행사 개최 - KBS 가요무대, 이미자 콘서트 독일 개최 등

○ 양측 수교 130주년과 광부파독 5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 연방하원은 2013.6.27 「독·한관계의 역동적인 지속적 발전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6.27) 우리 국회는 「한·독수교 130주년 및 근로자 파독 50주년 기념 양국 우호협력 증진 결의문」 채택(12.19)

㈕ 유라시아 친선특급(2015년)

○ 한반도 분단 70주년과 독일 통일 25주년을 맞아 ‘하나의 꿈, 하나의 유라시아’라는 구호 아래 한국 외교부와 코레일 공동으로 2015.7.14.

-8.2일까지 유라시아 실크로드 친선특급 사업 실시

○ 최종종착지인 베를린에서 통일의 꿈을 이룬 독일의 경험을 되새기고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한-독 대학생 통일 대토론회, 평화통일 기원 행진, 브란덴부르크문 광장에서의 야외 콘서트 등 각종 행사 개최

나. 독일정부의 대한정책

○ 한국과 독일 양국은 민족 분단의 경험을 공유한 역사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수교 이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

- 특히 우리의 경제부흥 과정에서 독일은 물심양면으로 지원

○ 독일정부는 한반도가 극동에서 미·중·러·일 4대 강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지역으로서 세계 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의 안정이 세계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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