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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식의 형상화 방식

홍대용의 「의산문답」은 형식과 내용이 일체가 되어 삶에 대한 태도와 세계에 대 한 이해를 표명한다. 형식은 글을 아름답게만 꾸미는 장식이 아니다. 저자의 삶과 정치적, 철학적 결단이 묻어나는 것이 문체이고 형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산문 답」은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던 홍대용의 입장을 드러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의산문답」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실옹이 허자의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 면서 꾸짖는 모습이다. 그러나 실옹은 허자의 학식이나 인품을 적절히 높여주면서 문답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옹 자신의 관점이 정당하며 바르다는 사실을 강 조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시작 부분은 허자를 묘사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미 본바와 같이 허자는 대단히 학식이 높은 인물로 그려져 있다.

子虛子는 숨어 살면서 독서한 지 30년에 천지의 조화와 性命의 隱微함을 궁구하고 五行의 근원과 三敎의 진리를 달통하여 人道를 經緯로 하고物理를 깨달아 통했다. 심오한 源委를 환히 안 다음에 세상에 나가 남에게 이야기했 더니, 듣는 자마다 웃었다.

허자가 말하기를,

작은 지혜와 더불어 큰 것을 이야기할 수 없고 비루한 세속 사람과 더불어 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하고, 서쪽으로 燕都에 들어가 선비와 더불어 이것저것 이야기할 때 여관에 서 60일 동안이나 있었으나 마침내 알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에 허자 가 슬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周公이 쇠했는가? 哲人이 죽었는가? 우리 道가 글렀는가?118)

118) 子虛子隱居讀書三十年, 竆天地之化, 究性命之微, 極五行之根, 達三敎之蘊, 經緯人道, 會通物理, 鉤深測 奧, 洞悉源委. 然後出而語人,聞者莫不笑之. 虛子曰 “小知不可與語大, 陋俗不可與語道.” 乃西入燕都, 遊談 于搢紳, 居邸舍六十日, 卒無所遇. 於是虛子喟然歎曰, “周公之衰耶? 哲人之萎耶? 吾道之非耶?”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허자는 조선을 벗어나 중국에 가서도 그와 더불어 대화를 할 만한 학자가 없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경지는 높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허자의 학문적 경륜은 실옹이 머무는 掘穴에 들어오자 실옹과 나눈 몇 마디에 의해 無化되고 만다.

네가 이 동해에 있는 허자인가?

그렇습니다. 夫子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중 략) 과연 허자로구나. 내가 무슨 술법을 가졌단 말이냐? 너의 옷차림을 보고 너의 음성을 들으니 동해라는 것을 알겠고, 너의 예법을 보니, 겸양을 꾸며서 거짓 공손함을 삼고 오로지 허로써 사람을 대한다. 이로써 네가 허자라는 것 을 알았지, 내가 무슨 술법이 있겠느냐? (중략)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 냐? (중략) 현자라는 것을 알 뿐이지 부자가 누구인 줄 내 어떻게 알겠습니 까? (중략) 내가 현자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내가 부자를 보니, 얼굴은 토 목(土木)같고 (중략) 현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하구나 너의 虛여! 너는 저 석문에 적힌 것과 斫木에 쓰인 것을 보지 않 았느냐? 네가 석문으로부터 들어왔고 작목에 쓰인 글자를 보았으니, 나의 이 름은 이미 알았을 터이거늘 도리어 모른다 하고, 나의 어짐을 알지 못하거늘 도리어 안다고 하니 너의 허가 너무도 심하다.119)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실옹은 대상을 객관적인 근거를 통 해 확인하고 그에 바탕하여 말을 하고 있는 반면 허자는 추측과 상투적인 사고에 바탕하여 말하고 있다. 실옹이 허자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하는 요인 은 관찰이다. 대상을 실제로 보고 그것에 근거하여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말을 하 거나 글을 쓸 때에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의산문답」은 대화체 서술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상을 설득해가는 방

119) 巨人乃言曰, “爾是東海虛子也歟?” 虛子曰, “然. 夫子何以知之? 無乃有術乎?” 巨人乃據膝張目曰, “爾果 虛子也. 余有何術哉. 見爾服聽爾音, 吾知其爲東海也, 觀爾禮, 飾讓以僞恭, 專以虛與人. 是以知爾爲虛子也.

余有何術哉?” 虛子曰, “恭者德之基也. 恭莫大於敬賢 ,俄者吾見夫子以爲賢者也, 膝行而前, 向風而拜, 拱手 而立於右, 今夫子以爲飾讓而僞恭, 何也?” 巨人曰, “來. 吾試問爾, 爾以余爲誰也?” 虛子曰, “吾知其爲賢者 而已, 吾烏知夫子之爲誰也?” 巨人曰, “然. 雖然. 爾旣不知我之爲誰, 則又烏知我之爲賢者乎?” 虛子曰, “吾 見夫子, 土木之形, 笙鏞之音, 遯世獨立, 不迷於大麓, 吾以是知夫子之爲賢者也.” 巨人曰, “甚矣! 爾之爲虛 也! 爾獨不見夫石門之題斫木之書乎? 爾由門而入, 見木之書, 吾之名, 爾所已知而反謂不知, 吾之賢, 爾所不 知而反謂之知, 甚矣. 爾之爲虛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식으로 유용하다고 판단한다. 실옹이 허자에게 賢者가 무엇이냐고 묻자, 허자는 보 편적인 유학자의 상을 들어 현자를 설명한다. 실옹이 물음을 던지는 의도는 당대의 학문하는 이들의 정직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고 반성하게 하려 는데 있다.

네가 이른바 현자란 어떤 자이냐?

허자가 말하기를,

周公과 공자의 業을 높이고 程子와 朱子의 말을 익혀서 正學을 붙들고 사邪 說을 물리치며, 仁으로 세상을 구제하고 명철함으로써 몸을 보전하는 이러한 자가 儒門에서 말하는 현자입니다.

하니, 실옹이 고개를 치켜들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道術에 미혹됨이 있음을 진실로 알겠다. (중략) 정학을 붙드는 것은 실 상 자랑하려는 마음에서 말미암고 사설을 물리치는 것도 실상 이기려는 마음 에서 말미암았으며, 仁으로 세상 구제하는 것은 실상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 에서 말미암고 명철함으로 몸을 보전하는 것은 실상 이익을 노려보자는 마음 에서 말미암았다.120)

허자의 답변에 실옹은 허자가 말한 현자의 여러 덕목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반박 한다. 그 모든 덕목들은 자랑하려는 마음, 이기려는 마음,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 이익을 노려보자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실옹의 말에 허자는 쉽게 설득되고 깨우침을 얻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이 러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두 사람의 대화는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오는데 그것은 문답체에 의한 서술 구조에서 독자는 깨우침을 받는 이를 자신과의 상관물로 보려 는 의식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홍대용이 의도한 것은 독자들을 설득 하여 깨우치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문답체는 논란이 되는 문제, 즉 어느 한편의 우위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의

120) “爾所謂賢者?” 虛子曰, “崇周孔之業, 習程朱之言, 扶正學斥邪說, 仁以救世, 哲以保身, 此儒門所謂賢者 也.” 實翁昂然而笑曰, “吾固知爾有道術之惑. 嗚呼哀哉. 道術之亡久矣. 孔子之喪, 諸子亂之, 朱門之末, 諸 儒汩之, 崇其業而忘其眞. 習其言而失其意, 正學之扶, 實由矜心, 邪說之斥, 實由勝心, 救世之仁, 實由權心, 保身之哲, 實由利心, 四心相仍, 眞意日亡, 天下滔滔, 日趍於虛.”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해결 과정을 보여주기에 용이한 형식이다. 허자는 실옹의 의견, 주장에 대해 강하 게 반발하는데, 이것은 주로 기존 성리학에서 절대시하는 주장과 당대의 보통 사람 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 지구관에 대해 실옹의 문제 제기와 설명이 전개될 때 이다. 이러한 논쟁거리는 당대의 시점에서 볼 때, 1인칭 화자가 서술자가 되어 전 개될 경우 독자들을 쉽게 설득하거나 동의를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 논쟁적 사안 에 대한 허자의 반발에 대해 실옹은 이미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다. 그 런데 실옹이 먼저 그것에 대한 의견을 밝히지 않고 허자로 하여금 질문을 하고 또 반론을 펴게끔 이끈 후, 답변을 하는 형식을 통함으로써 실옹의 의견을 보다 설득 력 있게 전달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논쟁의 방식으로 문답을 이끌어 상대를 설득하는 구조는 결국 독자를 설득하고 깨우치는 데로 귀결된다.

허자가 천지에 대해 질문을 하자 실옹은 땅은 둥글다는 地圓說을 편다. 이에 허 자는 즉시 반론을 편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 하였는데, 지금 부자는 ‘땅의 체(體)가 둥글다.’ 함은 무엇입니까?121)

이에 대해 실옹은 일식과 월식 때의 가려진 지구의 둥근 모양을 들어 사실적인 논박을 가한다.

심하다. 너의 둔함이여! 온갖 물의 형체가 다 둥글고 모난 것이 없는데 하 물며 땅이랴!

달이 해를 가리울 때는 日蝕이 되는데 가리워진 體가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체가 둥근 때문이며, 땅이 해를 가리울 때 月蝕이 되는데 가리워진 체가 또한 둥근 것은 땅의 체가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땅이 거울이다.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근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 그 얼 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리석지 않느냐?122)

121) “古人云天圓而地方, 今夫子言地體正圓何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122) “甚矣. 人之難曉也! 萬物之成形, 有圓而無方, 况於地乎! 月掩日而蝕於日, 蝕體必圜, 月體之圜也, 地掩日 而蝕於月蝕體亦圜, 地體之圜也, 然則月蝕者, 地之鑑也, 見月蝕而不識地圜, 是猶引鑑自照而不辨其面目也, 不亦愚乎?”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이렇게 허자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다른 문제로 대화는 넘어간다. 이러한 문제를 문답체가 아니라 일반적인 서술 방법을 사 용하여 서술하였다면 월식을 예로 든다 하더라도 당대의 독자가 쉽게 수긍하기 어 려울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지구가 둥근 이유를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경우로 실옹이 지구 地轉說을 설명하자 허자는 서양 사 람들도 하늘이 운행하고 땅은 고요하다고 하였고, 중국의 성인인 공자께서도 하늘 이 운행한다고 하였는데 실옹의 말은 이러한 말들이 모두 옳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자 책망과 함께 유사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의산문답」의 문답체 형식은 대화를 진행하는 가운데 실옹이 허자로 하여금 상 대론적 사고를 갖게 함으로써 설득과 깨우침의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 목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心性論에 관해 대화하는 서두부에서 잘 나타난다.

천지간 생물 중에 오직 사람이 귀합니다. 저 금수나 초목은 지혜도 깨달음 도 없으며, 예법도 의리도 없습니다. 사람이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이 금수보다 천한 것입니다.”

실옹은 고개를 젖히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진실로 사람이로군. 五倫과 五事는 사람의 禮義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 서 서로 불러 먹이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며,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이다. 사람으로써 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로써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이 보면 사람이나 물이 마찬가지다.123)

허자는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만물 중 가장 귀하다고 말하나, 실옹은 동물과 식물, 하늘의 입장에서 현상을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경직된 성리학에 바탕하여 인간 小宇宙論적 주장을 펴고 있는 허자를 실옹은 상 대론적 관점에서 현상을 이해하도록 하여 그러한 통념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실옹의 상대론적 사고에 대한 요구에 허자는 쉽게 응하지는 못하지만 문답을 이어

123) “天地之生, 惟人爲貴, 今夫禽獸也草木也 ,無慧無覺, 無禮無義. 人貴於禽獸 草木賤於禽獸.”

實翁仰首而笑曰, “爾誠人也.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義也. 以人 視物, 人貴而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 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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