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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문답」을 홍대용 사상의 총결로 이해 할 때, 그 중요한 근거의 하는 바로 人 ㆍ物 의 同異 문제에 관한 논의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김원행 문하에서 수업할 때부터 중요한 관심사였을 이 문제는 「心性問」ㆍ「答徐成之論心說」 등의 心性論에 관한 저술을 거쳐 마침에 「毉山問答」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논제로 자리를 잡았다.

홍대용은 앞의 심성론에 관한 저술들에서 드러낸 人物의 동일성이라는 관점을 「의 산문답」에서도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실제 논의의 방식과 사상적 함의에 있어서 양 자의 논의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종래의 18세기 人物性同異論爭에 대한 반성적 작업의 최종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아우가 湖洛派의 性論에 대한 잘잘못을 물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 를,

이런 문제는 初學淺見으로써는 알 수가 없으나 대개 호락파는 모두 朱子가 논한 바 성론에 의거하여, 說을 세운 것인데, 주자의 설도 그 초년기와 만년기 의 설이 다르고, 주자어류에 수록된 것도 사람마다 각각 다르니 이것이 논쟁 의 발단이 되어 그간에 잘잘못이 없지 아니하나 대개 볼 때 큰 사유가 되는 것은 모두가 한결같이 논쟁하여 이기는 데만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니, 너무 지나친 일이라 하겠다. 퇴계ㆍ율곡ㆍ우암 같은 여러 선생들의 性理說은 일찍 이 이와 같은 쟁변은 없었으니, 정말 퇴계ㆍ율곡ㆍ우암다운 데가 있었다. 이

점이 뒤의 학자들의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이다.76)

從弟 홍대응에 따르면 홍대용은 인물성론논쟁 즉 호락논쟁에 대해 매우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곧 호락논쟁은 초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 논쟁의 발단은 주희 자신의 初晩之說의 차이와 제자마다 다른 朱 子語類 기록의 차이에 있었다. 말하자면 주희의 학설과 주자어류 는 각각 비 일 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그것에 근거하여 논쟁을 벌인 양쪽은 어차피 옳고 그름을 나누어 갖기 마련인데, 당사자들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큰 일 로 여기고 이겨려고만 애쓴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적 시각 속에서 홍대용은 자신의 견해를 人物性同論으로 정리하고, 「의산문답」에 이르러 人物均論 으로 귀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인ㆍ물의 同異 문제를 자신이 피력할 새로운 세계 관의 근본이라는 의미로 大道의 本源이라고 규정하고, 자연과 사회에 관한 본격적 인 논의에 앞선 서론으로 삼았다. 이문제가 자연관ㆍ사회관 등을 망라하는 세계관 전체의 기본 관점과 방법을 담고 있다고 본 셈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짤막한 논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홍대용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의산문답」에서 논한 인ㆍ물의 동일성은 대체로 두 측면으로 나누어 재구성할 수 있다. 먼저 그 하나는 신체의 형상과 기능 측면에서의 동일성이다.

사람이 다른 物과 다른 것은 마음이요, 마음이 다른 物과 다른 것은 몸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너의 몸이 物과 다른 점을 꼭 이야기하라.77)

홍대용은 사람과 만물이 다르다고 할 경우 그것은 心이 다르기 때문이고, 사람의 心이 다른 생물의 心도 다르다고 할 경우 그것은 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 각하였다. 그러나 홍대용에 따르면 초목이나 금수의 몸은 그 원리의 측면에서 볼

76) 小弟問湖洛論性之得失 先生曰 “此非初學淺見所可得聞, 大抵湖洛, 皆據朱子所論以爲說, 而朱子說有初晩 之別, 語類所錄, 人各不同, 此所以爲爭端, 其間不無得失, 而看作大事, 一向務勝, 不已則太過. 退, 栗, 尤翁 諸賢性理之說, 曾無若是爭辨, 而不害爲退, 栗, 尤翁. 後之學者所當戒也.” (洪大容, 湛軒書 湛軒書附錄,

「湛軒先生遺事 )

77) “人之所以異於物者心也, 心之所以異於物者身也. 今吾問爾, 爾身之異於物者, 必有其說.” (洪大容, 湛軒 書 內集 卷4, 「毉山問答」)

때 사람의 몸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사람과 초목ㆍ금수의 心도 다르지 않고, 결국 사람과 다른 생물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직접적으로 人身小天地論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즉 당시의 상식적인 견해에 따르자면 사람의 몸은 작은 천지이고, 사람만이 자연계 의 형상과 기능을 모방하여 가지고 있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곧 사람의 둥근 머 리는 하늘은 모방한 것이고, 모난 발은 땅을, 피부의 털은 산림을, 精血은 강과 바 다를, 두 눈은 해와 달을, 호흡은 바람과 구름을 각각 모방했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사람만이 나이가 들면서 지혜가 쌓이고 감각 기능이 완벽해지며, 仁義禮 智信의 다섯 가지 도덕적 본성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홍 대용은 바로 실옹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아! 너의 말과 같다면 사람이 물과 다른 점이란 거의 없나니, 대저 털과 살 로 된 체질과 정액의 교감은 초목(식물)이나 사람이 같거늘, 하물며 금수(동 물)이겠는가?

내가 너에게 묻겠다. 생물의 종류는 셋이 있으니, 사람ㆍ금수(동물)ㆍ초목(식 물)이 그것이다. 초목은 거꾸로 나는 까닭에 知는 있어도 覺이 없으며, 금수는 가로 나는 까닭에 각은 있어도 지가 없다. 이 三生의 종류는 한없이 혼란을 일으키는 바, 서로 망하게 또는 흥하게 하는데, 귀천의 등급이 있는가?78)

홍대용은 금수는 물론이고 초목도 털로 덮힌 피부가 있고 정혈로 교감을 하므로, 그것들은 몸의 형상 면에서 기본적으로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초목 에는 知만 있고, 금수에는 知와 覺이 있으며, 사람들에게만 知ㆍ覺ㆍ慧가 모두 있 다는 점에서 세 생물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 차이란 만물이 복잡하게 뒤 섞여 사는 중에 드러나게 마련인 여러 차이들 중의 한 종류일 뿐이다. 곧 생물의 세 종류 사이에 능력ㆍ속성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차이가 일률적으로 사람의 우월성을 의미하는 차이가 결코 아닌 이상, 사람과 금수ㆍ초목 사이에 귀천 의 등급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78) “噫! 如爾之言, 人之所以異於物者幾希, 夫髮膚之質, 精血之感, 草木與人同, 况於禽獸乎? 我復問爾. 生之 類有三人也. 禽獸也. 草木也. 草木倒生故有知而無覺. 禽獸橫生, 故有覺而無慧. 三生之類, 坱軋泯棼, 互相 衰旺, 抑將有貴賤之等乎.”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홍대용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인물의 동일성을 신체 이외에 예의를 비롯한 각종 도덕 규범의 측면으로까지 확대하여 적용하였다. 즉 허자의 입을 통해 상정한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자면, 금수와 초목은 예의도 없고 服飾ㆍ儀章의 제도도 없으 며 禮樂ㆍ兵刑을 쓸 줄도 모른다. 곧 말하자면 신체의 형상과 능력 면에서 금수ㆍ 초목과 구별되는 인간은 사회ㆍ문화적 측면에서도 자연히 그것들과 구별된다는 것 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실옹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너는 진실로 사람이로군. 五倫과 五事는 사람의 禮義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 서 서로 불러 먹이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며,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이다. 사람으로써 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로써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이 보면 사람이나 물이 마찬가지다.79)

실옹의 관점은 당대 성리학자들의 보편적인 세계관인 ‘인간 소우주론’ 관점을 뒤 집어, 사람은 물론 동식물에도 오상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洛論의 人物性 同論에 입각하여 人物均論을 펼치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 중심적으 로 사고한다. 그러기에 자연은 무가치하고 천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물의 관 점에서 사람을 보면 物이 귀하고, 나아가 하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과 물이 마 찬가지라는 사고는 허자의 30년 학문 수양을 일순간에 무력화 시키는 발언이자, 당대 성리학자들의 허식을 비판하는 실옹의 선언인 것이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 보듯, 홍대용은 사물의 본성에 오상이 갖추어졌다는 것을 보 여줄 뿐이다. 그것이 합당한 주장인지 입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만물의 생태적 모습을 묘사하고 나열한다. 사람은 오륜과 오상이 예의이고, 금수는 서로 떼 지어 다니며 불러 먹이는 것이 예의이고, 식물은 떨기로 무성한 것이 예의이다.

예의를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이라고 보지 않고 모든 천지만물의 본성으로 보는 것 이다. 여기서 인간은 오륜, 동물의 떼지어 다님, 식물의 떨기로 무성함을 동일한 차 원에 두고 논할 수 있는지, 인간의 오륜이 본성인지 윤리의 문제인지를 실옹은 일 일이 논증하지 않는다. 실옹은 다만 인간의 오륜, 식물의 떨기성, 동물의 군집성이 모두 예의라는 주장을 통해, 예의란 저마다의 삶의 조건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 혹

79) “爾誠人也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義也. 以人視物, 人貴而 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은 방식이라는 새로운 사실에 주목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듯 홍대용은 과감한 비 유와 비약을 서슴지 않는다. 이 비유와 비약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지 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논리적 타당성이나 논리적 합리성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는다. 홍대용은 자연의 타고난 특징을 짚어줌으로써 자연을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할 뿐이다.

위의 구절에 바로 뒤이어 “사람으로서 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다.”는 철학적 명제를 던진다.

이 명제는 莊子 의 「제물론」에 의거한 말이다. 이 명제는 옳고 그름을 따지라고 던진 말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말이다. 그에 따라 바로 앞선 문장을 다 시 생각하게 된다. “오륜과 오상은 인간의 예의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서로 불 러 먹이는 것은 동물의 예의이고 , 떨기로 나서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임”을 인 정하려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편협하게 쌓아온 인간중심의 지식과 인간 중심의 마음으로 자연을 보게 되면 자연은 인간만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 나 나를 비우고 자연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인정하게 되어 그 자연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홍대용이 진정 의도했던 철학적 성찰 이 바로 이것이다. 중심을 상정하면 사람과 사물은 차별화되지만, 사람과 사물의 사이, 즉 하늘에 서서 보면 사람과 사물은 똑같다. 각각의 본성은 다만 다른 양태 로 표현될 뿐이다.

홍대용에게 있어 철학적 성찰은 사심 없이 대상을 관찰하는 태도에서부터 나온 다. 物의 본성이 인간보다 결코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그는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

너의 미혹이 너무도 심하구나. 물고기를 놀라게 하지 않음은 백성을 위한 용의 혜택이며, 참새를 겁나게 하지 않음은 봉황의 세상 다스림이다. 다섯 가 지 채색 구름은 용의 의장이요, 온몸에 두루한 문채는 봉황의 복식이며, 바람 과 우레가 떨치는 것은 용의 兵刑이고, 높은 언덕에서 화한 울음을 우는 것은 봉황의 禮樂이다. 시초와 울금초는 종묘제사에서 귀하게 쓰이며, 소나무와 잣 나무는 棟樑의 귀중한 재목이다.

이러므로 옛사람이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고 세상을 다스림에는 物에 도움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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