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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문답」의 핵심이자 연행 이후 홍대용의 사상적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대 목은 마지막 결론부의 域外春秋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산문답」을 따라 읽 어가다 보면 域外春秋論이라는 핵심적인 내용이 이 글을 쓰기 이전에 미리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즉 글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域外春秋論 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이것은 홍대용이 사상을 드 러내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고 홍대용의 사상과 인식을 구성하는 과정이고, 주장을 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대체로 주제가 일관된 서두 부분과는 달리

「의산문답」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중간 부분은 산발적으로 내용이 전개되 고 있는데, 여기에서 域外春秋論으로 이어지는 주제의식은 「의산문답」을 통한 현실 인식의 구조화이며, 현실 구성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의산문답」의 중간 부분에서 실옹은 지구와 태양, 달을 중심으로 하여 천문학, 지구과학의 지식을 허자에게 설명, 설득, 비판, 논박, 깨우침의 방법을 동원하여 전 달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인류의 역사와 중국과 오랑캐의 구 별에 관한 화제로 넘어가는데, 여기에서 역외춘추론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미리 예상하기는 힘든 의외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허자가 말하기를,

천지의 형체와 정상은 이미 가르쳐 주심을 들었으나, 인물의 근본과 고금의 변화와 華夷의 구별을 듣고 싶습니다.83)

이러한 허자의 질문에 실옹은 인류 역사를 더러운 氣의 확대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마침내 소위 역외춘추론을 펴면서 의산문답을 마무리하는 데 에 이른다.

上古 시대에는 오로지 氣化로 되었기 때문에 인물이 많지 않았으나 태어난

83) 虛子曰 “天地之體形情狀, 旣聞命矣, 請卒聞人物之本, 古今之變 華夷之分.”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성품이 두텁고 정신과 지혜가 밝고 動靜도 점잖았다. (중략) 이야말로 인물의 근본이요 태평한 세상이었다. 中古로 내려오면서부터 (중략) 비로소 形化가 생 긴 것이다. 형화가 있음으로부터 인물은 점점 늘어나고 지기는 더욱 줄어지며 氣化가 끊어졌다. 기화가 끊어지면 인물의 나는 것이 오르지 精血만 타고나기 때문에 찌꺼기의 나쁜 것만 점점 자라나고 맑고 밝은 마음은 점점 없어졌다.

이것이 천지의 否運이요, 禍亂의 시초였다.84)

六朝는 江左 부속되었고 五胡는 宛洛을 처부시었으며, 拓跋은 北朝에서 位 를 바르고 西凉은 당나라에 통합되었다. (중략) 천자의 덕이 떨치지 못하고 胡 의 운수가 날로 자라남은 곧 人事의 감응이기도 하지만 天時의 필연이다.85)

여기에서부터 실옹은 域外春秋論을 펴기에 이르는데 이것은 처음 부분, 중간 부 분의 내용과 끝 부분의 첫 화제의 내용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도출된 최후의 결론 이라고 할 수 있다.

대저 자기의 것이 아닌데 취하는 것을 盜라 하고, 죄가 아닌데 죽이는 것을 적賊이라 하며, 四夷로서 중국을 침노하는 것을 구寇라 하고, 중국으로서 四夷 를 번거롭게 치는 것을 賊이라 한다. 그러나 서로 寇하고 서로 賊하는 것은 그 뜻이 한 가지다.

孔子는 주나라 사람이다. 王室이 날로 낮아지고 제후들은 쇠약해지자 오나 라와 초나라가 중국을 어지럽혀 도둑질하고 해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春秋 란 주나라 사기인 바, 안과 바깥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 느냐?

그러하나 가령 孔子가 바다에 떠서 九夷로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법을 써서 구이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나라 道를 域外에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즉 안과

84) “邃古之時, 專於氣化, 人物不繁, 鍾禀深厚. 神智淸明, 動止純厖, 養生不資於物, 喜怒不萌於心, 呼吸吐納 不飢不渴, 無營無欲, 遊戱于于, 鳥獸魚鼈, 咸遂其生, 草木金石, 各葆其體, 天無淫沴之灾, 地無崩渴之害, 此 人物之本, 眞太和之世也. 降自中古, 地氣始衰, 人物生成, 轉就駁濁, 男女相聚, 乃生情欲, 感精結胎, 始有形 化, 自有形化, 人物繁衍, 地氣益泄而氣化絶矣. 氣化絶則人物之生, 專禀精血, 滓穢漸長, 淸明漸退, 此天地 之否運, 禍亂之權輿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85) “六朝附庸於江左, 五胡跳盪於宛洛, 拓跋正位於北朝, 西凉一統於唐祚, 遼金迭主, 合於松漠. 朱氏失統 天 下薙髮, 夫南風之不競, 胡運之日長, 乃人事之感召, 天時之必然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

밖이라는 구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가 스스로 딴 域外春秋가 있었을 것이 다. 이것이 孔子가 聖人된 까닭이다.”86)

이는 제 각기 다른 지리적 조건, 역사적 전개속에서 華와 夷가 된 것이지 華가 따로 있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그것만이 정통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며, 명분 없는 침략과 공격은 華이거나 夷이거나 모두 도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排淸義 理를 지키는 것은 중국이 아닌 오랑캐이기 때문에 배척함이 아니고, 17세기 전반 기 두 번의 丁卯, 丙子胡亂(1627, 1636)에 따른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배격하는 것이며, 청조의 문물이 오랑캐의 것이기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기에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상대적 주체성을 인정하여 자주 의식의 정립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들어낸다.

홍대용은 당시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한 尊化的 태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중국 문헌에 매달려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自國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 정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동방의 풍속이 儒學을 숭상하여, 저술이 多樣하나, 다만 선비들이 늙어 죽도 록 일삼아 한 것이라곤 오직 중국의 文獻에만 매달리고 동방의 역사와 典故는 대개 빼어 놓고 강구하지 아니하여 먼 것만 바라보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 니 자못 괴이한 일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라시대와 고려 시대는 고증할 만 한 전적이 없고, 특히 본조 4백 년 동안은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치, 이름난 신하와 큰 선비가 어느 代에도 떨어지지 않았으나, 서적이 매우 적어 고증하 기 어렵습니다.87)

홍대용은 민족 주체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문화와 역사가 새롭게 연구되어 전개 되기를 희망하였다.

86) “夫非其有而取之謂之盜, 非其罪而殺之謂之賊, 四夷侵疆, 中國謂之寇, 中國瀆武, 四夷謂之賊. 相寇相賊 其義一也. 孔子周人也. 王室日卑, 諸侯衰弱, 吳楚滑夏, 寇賊無厭. 春秋者周書也, 內外之嚴, 不亦宜乎? 雖 然, 使孔子浮于海, 居九夷, 用夏變夷, 興周道於域外. 則內外之分, 尊攘之義, 自當有域外春秋. 此孔子之所 以爲聖人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87) “東俗崇信儒學, 著述多門, 但士子沒齒從事, 惟矻矻於中華文獻, 而東史典故, 多闕不講, 騖遠忽近, 殊爲詑 异. 以是羅麗之際典籍無徵, 惟本國四百年間良法美政, 名臣鉅儒, 代不乏人, 而書籍甚寡, 有難考證.” (洪大 容, 湛軒書 外集 卷1, 「與秋庫書」)

역외춘추론은 근대적인 자주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실옹의 생각이 이러한 데에까지 이른 것은 그 동안의 서술 내용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체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을 위해 의도적으로 처음 부분과 중간 부분을 설정했다고 하기에는 내용의 연결 관계가 선명하지 않다 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의산문답」의 주된 내용으로 보아 홍대용은 관념론에 빠져있는 허자, 즉 당대의 성리학자들을 문답체를 통해 비판하려 한 것인데, 이러 한 방식은 역외춘추론이라는 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미 리 정해진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이고 하지만, 과정 차제가 필자의 의식과 사상을 자연스럽게 형성하도록 하는 매개가 된다는 사실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 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역외춘추론은 실옹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으나, 실은 홍대용이 지니고 있던 당대 의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에 춘추가 있다면 오랑캐의 땅이라 불리는 域外에도 春秋가 있다는 역사적 자각이 역외춘추론이며, 이것은 「의산문답」의 서두부에서 物의 관점과 天의 관점에서 인간 을 본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관점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사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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