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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들은 허학에 대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성리학적 이념은 물론 선진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등 학문의 다양화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실학을 성립시켰다. 조선후기 실학파 형성의 학문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첫째 실학파는 정 통주의를 강조하면서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道學派와 달리 도학을 긍정하면서도 다 른 학문적 관심을 갖거나 도학파의 태도에 현실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는 데에서

49) “東儒之崇奉朱子, 實非中國之所及. 雖然, 惟知崇奉之爲貴, 而其於經義之可疑可議, 望風雷同, 一味掩護, 思以箝一世之口焉.” (洪大容, 湛軒書 外集 卷3, 「乾淨錄後語」)

실학적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다.

둘째, 실학파는 지식과 행동의 거리에서 오는 도학파적 모순을 극복하여 양명학 의 知行合一論은 실학파의 실천정신을 자극하였다.

셋째, 실학파는 17세기 초부터 燕行使行 등을 통해 전래된 서양과학시술과 천주 교에 대한 민감한 반응 보였다. 그들은 실직적인 사상이나 문화형태에 대해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의 도학파와는 달리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탐색하여 서학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보여주었다.

넷째, 고증학의 객관적ㆍ실증적 연구태도는 실학파에게 경전에 대한 의리론적, 성리학적 해석을 벗어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어 주었다.50) 특히 고증학적 방법 은 실학파에게 역사와 지리나 문헌에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관심을 자극하 여 국학연구에 기여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조선후기 실학파의 형성에는 그 시대의 현실적 변화라는 요인과 더불어 그 시대사상의 다양화하는 요인이 작용하였다. 정통의 道學과는 구별되는 양명학이나, 西學, 淸代의 考證學 등의 새로운 학풍이 17세기를 전후하여 전래되었 다.

홍대용은 전통적인 사유체계를 계승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시대의 현실적 변화를 흡수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양명학과 서학의 자연과학적인 부분을 수용하여 以天視物의 과학정신과 전통적 華夷사상에서 탈피한 자주의식의 사상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일찍이 사람의 눈은 한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치로 보아 혹 그럴지도 모 릅니다.51)

세상 사람은 옛 습관에 안착하여, 살피지 않는다. 이치가 눈앞에 있는데도 일 찍이 연구하여 찾지 않는 때문에 일평생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건만 그 심정 과 현상에 캄캄하다. 오직 서양 어떤 지역은 지혜와 기술이 정밀하고 소상하 여 측량에 있어서는 해박하고 자세하다.52)

50) 최현호, 한국실학사상연구 , 집문당, 1987, 14면.

51) “竊常聞之. 此人視有限也, 理或如是.”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52) “世之人, 安於故常, 習而不察. 理在目前, 不曾推索, 終身戴履, 昧其情狀. 惟西洋一域, 慧術精詳.” (洪大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한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말에 실옹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의 변화와 그 변화의 요구에 눈을 돌릴 것을 주장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홍대용의 학문의 기존의 성리학적 말폐에 대한 비판의식과 異端에 대한 관용의 태도 그리고 성인의 古學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홍대용이 처한 시대상황에서 실제로 추구한 학문의 지향은 단지 그 러한 비판의 반동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먼저 홍대용의 이상적인 학문에 대해 살펴보자.

대개 伏羲ㆍ神農ㆍ黃帝ㆍ堯舜이 일어나서 초가집에 살면서 자신부터 검소한 덕을 닦아 백성의 재산을 마련해 주었으며, 공손하고 겸양한 모습으로 밝은 덕을 몸소 실천하여 백성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문명한 교육이 차고 넘쳐서 천하가 화락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 이른바, 성인의 정치요 가장 잘 다스려진 시대였다.53)

「의산문답」속 홍대용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원초적인 학문관을 보여주는 부분이 다. 홍대용은 옛 성인들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학문의 시초 내지는 가장 이상적인 학문의 구현과정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남에게 미 루어나가는 ‘修己ㆍ安人’의 유학적 이념과 ‘공손하고 겸양한 모습’ 이라는 末節과

‘밝은 달’ 이라는 大道를 동시에 추구하고 실천하는 ‘本末의 균형’ 의 구조와 ‘知行 合一’ 의 논리가 조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백성의 재산을 먼저 마련해주 고” 다시 덕의 실천으로 “백성의 질서를 바로잡고 문명한 교육이 차고 넘쳤다”는 것은 바로 ‘下學而上達’ 이라는 학문의 순서 내지를 방법론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상적인 학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金鍾厚(?~1780)와의 논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二帝ㆍ三王의 大經大法과 공ㆍ맹(孔孟), 정ㆍ주(程朱)의 切要한 心法은 六經에 갖추어져 있다.”54) 고 하여 六經에 고대 최초의 원시적 학문의 요체가 담

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53) “夫伏羲神農黃帝堯舜氏作而茅茨土階 ,身先儉德, 以制民產. 欽文恭讓, 躬行明德, 以敷民彜, 文敎洋溢, 天 下煕皥. 此中國所謂聖人之功化至治之世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겨져 있음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옛 가르침은 그 어릴 때에 이미 六藝로써 가르쳤으므로 그 자람에 이르러 위로 비록 道를 아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더라도 아래로 적용함에 어긋나지 않 았다. 지금 사람은 오로지 章句만을 힘써 그 근본은 얻었으나 그 末藝에는 맞 지 않아 專廢해 버린다. 이러므로 道를 아는 사람을 이미 얻기 어려울 것인즉, 장구 誦說만은 비록 그 어긋남이 없다 하더라도 日用의 闕할 수 없는 것에 도 리어 어두워 살피지 못하여, 왕왕 사정을 疎脫함으로써 높은 韻致로 삼고, 庶 務를 綜核함으로써 비속鄙俗한 것으로 여긴다. 옛 군자는 비록 不器라 하지만, 一才一藝에 어찌 일찍 무능한 군자가 있었던가? 이것이 世에 도움이 없고, 俗 輩에게 웃음거리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六藝의 가르침은 진실로 마땅히 灑 掃의 節과 병행해야 하며 잠시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55)

下學의 실용지학은 六經에 있으며 ‘下學而上達’의 방법론을 구사했음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 외에도 육경이 孔門에서 정리되자 사람의 도리가 성립되었다.56) 고 말하기도 하고 「의산문답」에서 허자의 입을 빌어 강령이 모두 갖춰진 학문은 六經을 표준으로 삼고 程ㆍ朱의 학설에 절충했다57)는 표현이 보인다.

육경으로 출발하는 성인의 가르침은 중세에 내려오면서 점차 氣가 팽창되고 치 우쳐져 홍대용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결국 그 이상적인 구현을 할 수 없게 된다. 이 상적이었던 성인의 학문에 대한 동경과 추구는 儒家나 道家를 막론하고 후세의 학 자들에게 소망으로 남게 되며 시대가 어지러워질 때마다 옛 성인의 학문에서 해답 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곤 했다. 홍대용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원초적 학문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54) “二帝三王之大經大法, 孔孟程朱之切要心法, 具在六經.”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3, 「書ㆍ與人書二首」) 55) “古之敎也, 於其幼時, 已敎以六藝, 故及其長也, 上而雖未及知道, 下而不失爲適用. 今人之專務章句, 固得

其本, 而於其末藝, 不合專廢. 是以知道之人, 旣未易得, 則誦說章句, 雖或無差, 而日用之不可闕者, 却昧焉 不察, 往往以疎脫事情爲高致, 綜核庶務爲鄙俗, 古之君子, 雖不器於一才一藝而曷嘗有無能底君子乎? 此所 以無補於世而見笑於俗輩, 是以六藝之敎, 固當幷行於灑掃之節而不容或廢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1,

「小學問疑 )

56) “六經定於孔門而人之道立矣. 箋註成於洛閩而人之道明矣.”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3, 「書ㆍ與人書二 首」)

57) 주 48 참고.

混沌이 뚫어지매 大樸이 흩어졌고 文治가 승해지매 무력이 쇠했으며, 處士 가 제멋대로 의논하매 주나라 道가 날로 쭈그러졌다. 秦始皇이 서적을 불사르 매 漢 나라 왕업이 조금 편케 되었고 石渠에서 분쟁이 생기매 신망(新莾신은 국명 왕은 왕망이 왕위를 찬탈했으며, 鄭玄과 馬融이 경서를 演繹하매 三國이 분열 되었으며 晋氏가 淸談을 일삼으매, 神州가 망하였다.58)

학문의 존재가치에 대해 홍대용은 天下興亡의 근원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 고 있다. 食慾과 色慾이라는 인간의 생명체로서의 기본적인 욕구에 의한 미혹은 가 정을 망치게 하며 개인의 사욕이나 사회적 권세의 다툼에 미혹되는 것은 나라의 기반을 좀 먹게 하는 정도이다.

또한 너에게 백성들의 세 가지 미혹됨을 말하겠다. 食色의 미혹은 가정을 망치고, 利權의 미혹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며, 도술의 미혹은 천하를 어지럽힌 다. 너는 도술에 미혹됨이 있지 않느냐? 또한 너는 너무 지나치다. 이름이란 德의 병부 반으로 가른 竹이요요, 號란 덕의 겉이다. 내가 實翁이라는 것을 네 가 알았다면 내가 實者라는 것을 알면 그뿐이지 도리어 나를 賢者라 함은 무 엇이냐? 너는 나의 얼굴을 보고 土木에 비기었고 나의 음성을 듣고 笙鏞에 비 기었으며 또 내가 산중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써 세상을 도망하여 외로이 서 고, 雷霆도 두려워하지 않는 데에 비기었으니, 이것은 사물을 접촉함에 따라 생각이 싹트고 환경에 따라 말하는 것으로 아첨이 아니면 허망이다.59)

하지만 道術60) 즉 한문적 진리가 잘못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시키면 인류 사 회 전체를 어지럽히는 대란의 결과를 몰고 온다는 것이다.

58) “混沌鑿而大樸散, 文治勝而武力衰, 處士橫議, 周道日蹙. 秦皇焚書, 漢業少康, 石渠分爭, 新莽簒位, 鄭馬 演經, 三國分裂, 晉氏淸談, 神州陸沈.”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59) “且吾語子, 生民之惑有三. 食色之惑, 喪其家, 利權之惑, 危其國, 道術之惑, 亂天下. 爾無乃有道術之惑者 乎? 且爾過矣. 名者德之符也, 號者德之表也. 爾知我之爲實翁, 則知我之爲實者而已, 反以我爲賢者何哉? 爾 見吾之形, 擬之土木, 聽吾之音, 擬之笙鏞, 以吾之居山, 擬之以遯世獨立, 不迷於大麓, 是爾觸物而意萌, 隨 境而口辨, 非諛則妄也.”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毉山問答」)

60) 「의산문답」에서의 道術이란 용어는 의미대로 보면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道)과 그의 실현방법(術)을 내 용으로 한다. 문맥상 그 뒤에 “슬프다 도술이 없어진지 오래다. 孔子가 죽은 뒤 제자들이 어지럽혔고 주 자의 문하에 모든 유학자가 혼란시켰다.”는 구절과 연관시키고 송대 이후 신유학 즉 성리학을 道學이라 고 호칭하는 것을 본다면 이는 육경에 담긴 성인의 학문 즉 유학이라는 학문적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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