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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함께 동행함으로 제자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여인 의 전통적인 역할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기는 새로운 차원에로 변혁되 고 있음을 누가는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넓은 의미에서의 제자들은 실질적으로 예수 를 따르지는 못했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예수께 헌신하며 그를 따랐 다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슈라게(W. Schrag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핵심적인 제자가 된다는 것이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은 아 니다. 그 분과 동행하며 팔레스타인의 길을 걷지 않아도 예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물론 동행하며 함께한 핵심적인 제자들과 같 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을 따르 는 대가로 영원히 바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르 심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게 하였으며, 아울러 그를 위해 위 험과 고난도 요구하였다.”(Schrage, 1988: 50-51)

그들은 상징적으로 예수를 따르며 예수 닮기를 노력할 때 제자로 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맞춰지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 가 가난한 자들보다는 오히려 부유한 자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다고 주 장한 학자들도 있다. 캐드베리(H. J. Cadbury)와 캐리스(R. J. Karis)21)가 대표적이다(서중석: 215-217). 그러나 이러한 양쪽의 주장은 누가공동체 멤버들의 경제적 상태를 단순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누가의 관심은 가난 한 자들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부유한 자들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 다. 오히려 누가공동체는 두 그룹 혹은 두 계층을 모두 포함한 큰 규모 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218)고 볼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평지 설교(6:20-26)에서 예수님이 복을 선언하는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20)”라는 구절 이다. 마태에 나타나는 가난한 자는 영적 가난(spiritual poverty)에 국한 되지만 누가의 가난은 물질적, 경제적 가난(material poverty)도 포함되 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곧 문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 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공동체의 멤버들의 경 제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누가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 다는 사실은 큰 찬치 비유(14: 15-24)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누가는 잔 치에 초대되는 두 그룹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도시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 지체장애자,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 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과 멸시 당하는 사람들은 서로 구별되는 세 집단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병마의 점진적인

내는 것으로 이해한다(Jermias, 1995: 313-316).

20) 존슨(L. T. Johnson)은 누가의 관심이 부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예언자적 비판을, 그 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려는 데 있었다고 결론짓고 있다(서중석: 217. 재인용).

21) 캐리스(R. J. Karis)는 누가복음-사도행전 안에서 가난과 부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는 누가의 공동체 안에는 분명히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있었지만 누가는 우선적 으로 부자들과 그들의 관심들과, 그들이 공동체에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본다. 가난과 부라는 누가의 주제는 우선적으로 그의 공동체 안에 재산가들에게 말해 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에 따르면 부의 위험에 관한 경고의 메시지는 가난한 자들 에게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Karis, 1984: 243-261).

희생자들이고,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경멸을 당하며, 사람들은 이들을 멀리한다(Schottroff, 1987: 908). 이 잔치가 누가공동체 멤버가 된 사람 들은 가난한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의 사역의 대상자 로 제시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의 선포는 누가의 중심적인 내용 이다(4:22; 6:20; 7:22-23; 14:13,23; 19:7,22-23). 누가가 이렇게 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 많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주의 기도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주의 기도가 누가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별 짓는 뚜렷한 기준(서중석: 173)이라는 점 을 고려하면 이러한 간구는 그날 그날의 떡이 없어 굶주리고 있던 누가 공동체의 가난한 구성원들의 처절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반면에 누가 는 부자들과 재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부자라고 부 르는 헬라어 “plusioi”란 단어를 누가는 자주 사용하고 있다. 마태는 이 단어를 세 번(19:23,24; 27:57) 그리고 마가는 두 번(10:25; 12:41) 사용하 고 있는데 반하여 누가는 열한 번을 사용하고 있다(6:24; 12:16; 14:12;

16:1,19,21; 22:18,23,25; 19:2; 21:1). 이는 그만큼 누가가 부자들에게도 관 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이해될 수 있다(김경진, 2000: 13). 세리장 레위가 예수를 위해 큰 잔치(5:29)를 베풀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재 산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삭개오(19:1-10)도 사회적으로는 죄인으로 여겨지지만 상당한 재물을 가진 사람이다. 그와 동시에 부의 위험에 관 한 경고들이 주어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다(Karris, 1984: 248).

한편 이상의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누가공동체가 가난한 자와 부유 한 자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공동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다. 누가공동체 내의 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 았다고 상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White, 1995: 145-151). 이러한 비일 관된 모습들은 바로 누가공동체가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자들 양쪽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과 누가가 이러한 두 그룹간의 갈등 해소를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줌을 알 수 있다.

결국 누가의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부유한 사

람들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며 누가공동체는 두 그룹 혹은 두 계층을 모두 포함한 큰 규모의 평화스러운 공존을 모색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누가의 근본적인 의도 중 하나는 그 공동체의 가난한 멤버나 부유한 멤 버가 모두 선교적 목적 아래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로 하 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서중석: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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