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도야는 곧 조선 전통에 기반한 조선약재 대신 중국약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이 변신은 하지만 꼭 조선 전통에 대한 그의 실망이나 중국의 방대한 전통과 약재자원에 대한 그의 개인적 기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사실 이 변신은 그의 개인적 선택이라기보다 경성제대 약리학교실이 대륙으로 관심을 확장한 데 따 른 변화로 보인다.
이 절에서 살펴볼 것은 그가 약리학교실이 추진하던 중국약재 연 구를 시작한 이후 이를 자신의 연구와 점차 차별화시켜나가는 모습이다.
이 절은 그 의 중국약재 연구가 어떠한 점에서 차별성을 띠었는지, 그러한 선택의 배경,
전략, 결과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선택은 무엇보다 조림기사로서 그가 느꼈던 일본의 식민지 과학활동, 나아 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의식을 반영했다
.
이시도야는 앞서 인공조림의 위험 성을 이야기하며 강제적인 식림에 대해 자연이 저항하리라는 우려를 드러낸 적이 있 었다. 산과 들에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는 일이“호랑이나 늑대 ”를 키우는 것 같아
서 자연의 저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또 돼지 같은 가축이라면 먹이 고 키워주는 주인에게 고마워할 것 같겠지만, 독자성을 가진 이 생명체들에게 인간 이 원하는 결과만을 요구하는 것은“돼지 편에서 생각하면”
전혀 즐겁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67 자연상태에 대한 개입의 정당성을,
그는 이를 테면 지배자가65 2장 3절 참고.
66 아사카와 등과 상호작용하며 조선 전통을 나름으로 평가하던 임업시험장 시절에 비해 더 정교한 오 리엔탈리즘을 필요로 했을 “동양의학자”들과 교류가 확대된 영향일 것으로 보인다.
67 3·1운동 이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石戶谷勉, “삼림에 대한 조림자의 태도와 전남삼림의
아닌 피지배자의 관점에서도 고민해본 셈이다
.
사실 일본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근대과학 활동이 서구추종적이고 이식적이란 그 의 비판이 단지 과학에 한정된 것일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조림정책과 총독부 가 지원한 나카이의 조선식물상 연구는 모두 일본의 강제적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행된 전시적 과학활동이었므로, 이에 대한 이시도야의 비판은 식민지배 자체 가 정당한지에 대한 회의 또한 수반했다
.
그가 중국약재를 연구하며 보인1930년대
의 행보는 그가 이식적이고 정당성이 결여된 일본의 식민지 과학활동을 그만두고 전 통 본초에 대한 연구를 택한1925년 이후 개입과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을 지속
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경성제대 한약 연구의 정치성
경성제대 약리학교실은 사실
1930년대에 이루어진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반
적 조정을 대표하는 기관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중국 진출이 본격화함에 따 라 일본이 과거에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서구발 문명화 이데올로기 는 도전받기 시작했다. 서구발 이데올로기란 일본이 아시아에서 아시아적 후진성을 가장 먼저 탈피해 서구적 근대화에 성공했으므로 이를 다른 아시아 국가에 전파하여 아시아의 근대화,
즉 문명화를 이끌 위치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의식 적인 서구 모방을 통해 제국주의적 근대화에 성공하고도 결코 서구와 대등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이 강했고,
이런 상태에서1931년 만주국의 설립 등을 계기
로 점점 서구 세력과의 대결로 돌입하고 있었다.
이제‘서구 모방’의 성공만을 지배
의 근거로 내세워서는 서구와 충분히 겨룰 수 없었으므로,
일본이“탈아”한 국외자
가 아닌 아시아의 내부자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아시아 문화,
즉“동아(東亞)”
문화의 공통성을 강조하고 이 문명과 서양의 문명을 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 로 일본을 내세우려는
“동서융합”
이데올로기가 제 때를 만났다.68하지만 일본이 아시아를 이끌어
“동서”를 융합할 자격을 갖추었는지는 분명치 않
았다. 아시아 문명이 중국 혹은 중화문명과 동일시 되어온 상황에서 중화문명의‘변
방’에 위치했던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 자격으로“동서융합”을 이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었다. 3장에서도 언급했듯 사실 “동아”
혹은“동양”이라는 말은
천혜”, 21.
68경성제대 약리학교실의 “동서융합”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신창건, “경성제국대학에 있어서 한약연구 의 성립”.
중국 중심의 과거에 대한 일본의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신조어였다
.
실제로1930
년대와
1940년대에는 일본이 “동서융합”을 주도해야 할 이유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각 분야마다 활발히 이루어졌다
.
69경성제대의 약리학교실은 의료분야에서 동서융합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하는 작업 을 주도한 곳이었다. 스기하라는 일본문화를 모방적이라고 폄하하는 시각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 “모방에 뛰어난 인종”이라는 칭찬은 곧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평가와 같았다.
그는 일본이 서구를 모방해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평가 대신 세계문화에 대한 독창적 기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일본이 메이지 이후 일구어온
“서양의학”
전통에 한방의학을 가미하여“독특한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한방의학이 아직 현존하는 조선은 그러한 재창조를 수행할 적지였다.
조선이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물질적 병참기지 ”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병참기
지”가 될 수 있는 이유였다.70 이식적 과학활동을 비판하던 이시도야가 향토의 토착 전통을 이해하고자 시작했던 조선 한의학 연구는 점차 동서융합의 사명을 띤 작업이 되었다.1929년 이시도야의 첫 중국행은 바로 “동서융합”을 이끌어 일본의 중국 팽창을
지원하겠다는 경성제대 약리학교실의 목표가 일본의 중국 진출을 위해 오래 노력했 던 同仁会(1902-1945)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었다. 동인회가 대지문화사업(對支文化事 業
)
기금이라는 중국연구기금을 지원해준 것이다. 구미 선교단체에 비견될 이 단체는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의료문명화 사업을 추진한다는 사명을 내건 독특한 단체로서 제국주의적 확장을 통해 성장하고자 하는 일본 전문가 집단의 적극성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일본의학계는 이미 청일전쟁 직후부터 아시아 문명화에 대한 지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同文醫会와 亞細亞醫会를 결성했는데 이를 통합한 것이1902
년의 동인회였다.
일본이 앞서 배운 서구의학을 아시아 각국에 전파하기 위한 것이 었다. 동인회는“영·미·불·러와 나란한 5국으로 일등국의 걸음 ”을 당당히 한 일본이
“동아의 선진국으로서 다른 제국(諸國)을 맡아서 계발할 의무”가 있다는 데 깊이 공
감한 정치인·의료인과 국민의 대중적 참여로 1945년 패전까지 유지되었다.
7169고야스 노부쿠니, 동아·대동아·동아시아: 근대 일본의 오리엔탈리즘.
70 杉原德行, “漢方醫學の科學的檢討”, 朝鮮及滿洲 (1939년 1월), 41–43, 42; “漢方醫學の科學的檢討 (其二)”, 朝鮮及滿洲 (1939년 2월), 34–37.
71오오사토 히로아키의 동문회 연구는 꼼꼼한 기초연구로서 자신의 중국 유학생교류에 대한 연구를 위 한 자료조사의 형태이다. 본문의 인용은 1942년 동인회40년사를 재인용. 大里浩秋, “同仁会と 同仁”,
人文学研究所報 40 (2007), 47–105, 47.
동인회는
“동문(同文)”
즉 한자문화 전통이라는 공통점을 아시아의 운명에 일본 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로 내세웠지만, 일본 의학계가 동인회를 통해 중국, 한국 및 아시아 제국에 전파하려던 의학은 철저히‘서구’
근대의학이었다.
메이지 일본의 공 식 의학체제에서 배제된 한방의학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동인회는 아시아 각국에 근대적 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적 의료와 위생을 도입하는 일을 주 사업으로 했다.
강제병합 이전 일본이 대구,
평양, 용산 등에 지은 서구식 의료기관 이 모두 동인회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고, 1912년까지 이들이 중국과 조선,
방콕, 싱 가포르에 파견한329명의 의사는 모두 일본 근대 의료체제에서 의사자격을 얻은 이
들이었다.72하지만 조선과 같이 이미 확보된 식민지나 동남아시아 등에서의 의료문화 지원사 업은 기금의 부족과 함께 점차 축소되었다
.
의학사 연구자 오오사토 히로아키(大里浩秋
)에 따르면 동인회는 늘 아시아 전체를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중심 목표
로 삼았다고 한다
.
이들은 이미1916년 앞으로 10년 간 중국 각지에 33개의 병원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구미 각국의 의료사업이“중
국인들 사이에 서양인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키우는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이유 였다.73 동인회의 이 계획은1918년부터 국고보조금을 지원받게 되었고 ,
외무성 산하 에 대지문화사업이 꾸려지자 이 기금을 통해 지원받았다.
이들이 내세운 대중국 문 명화 사업에 대한 일반회원의 기부금도 많았다.
동인회가1923년 말 3만 8천여 명의
회원에 기부총액이2백만 엔을 훌쩍 넘었던 것은 이런 대중국 사업에 대한 일본 국
민의 공감이 상당히 광범위했음을 보여주었다.
74이렇게 서구 세력에 대한 경쟁심을 보이면서도 서구의학을 중심으로 일본의 중국 진출을 이끌어온 동인회는 경성제대 약리학 교실의 중국 한약재 조사를 지원함으로
써
“동서융합”
이데올로기로 그 이념을 전환하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1929년 여름이시도야는 동인회의 대지문화사업 기금으로 만주와 몽고, 하북 지방을 여행하며 각 종 연구기관과 한약시장 등을 섭렵하여 중국 한약재 연구를 본격화할 수 있는 문헌 과 표본을 수집해 돌아왔다
.
이 중국 여행의 결과는1930년 1월부터 1931년 5월까지
72大里浩秋, “同仁会と 同仁”.
73 일본이 서양 선교집단이나 자선재단 등의 의료사업에 대해 가진 경쟁적 의식은 일본의 조선 나병수 용소 확충에서도 드러났다. 정근식, “조선에서의 근대적 癩 구료의 형성”, 보건과 사회과학 1 (1997), 1–30. 구미의 중국 의료사업에 대해서는 Mary B. Bullock, The Oil Prince’s Legacy: Rockefeller philanthropy in China (Washington, D.C: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등.
74大里浩秋, “同仁会と同仁”,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