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 식물학의 ‘근대화’

나카이 다케노신은 이미

1906년부터 도쿄제대의 연구실에서 조선식물 연구를 수행하

기 시작해서

,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채

1909년 조선식물에 대한 졸업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이후

1913년부터 30년 간 조선총독부 촉탁 식물학자로서 18차례 일

본과 조선을 오가며 조선식물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

이를 통해 그는 신종 천여 종 을 포함한

4000종 이상의 조선식물을 근대적 분류법으로 분류 ·연구하여 전무후무한

조선식물 전문가로 이름을 떨쳤고, 덕분에 세계 식물분류학계에서 일본 식물분류학 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서구 전략의 모방

식물학의 세계적 중심이 된 도쿄제국대학

2장에서 보았듯 일본의 강제적 ‘개항’과 그에 이은 개혁의 소용돌이를 겪은 메이지

유신(1867) 세대는 전반적으로 전통에 대한 강한 불신을 보였다. 일본 식물학계도 도 쿠가와 시기의 박물 혹은 본초 전통과 자신들이 이제부터 배워야할 근대 식물학은

과학이다. 이 분야에 종사했던 것에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회고는 Richard A. Howard, “The Role of Botanists During World War II in the Pacific Theatre,” Botanical Review 60 (1994), 197-257 235쪽에서 재 인용. 원문은 Nakai Takenoshin, “Essential results obtained from my observations on tropical plants in Java, Galang Island of Rio Archipelago, and on Japanese plants in the surroundings of Beppu Hot Springs, Province of Bungo, Kiusie,” The Bulletin of the Tokyo Science Museum (1952).

거의 무관하다는 단절 의식을 드러냈다

.

젊은 시절의 나카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 러 에도시기 식물학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일본 전통 식물학 이 당시의 분류학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이라며 자신의 연구는 외국인의 연구

혹은 일본인의 최근 연구만 참고했음을 분명히 해두려 했다

.

4

과거와 단절하고 서구로부터 모든 것을 이식해 새출발하겠다는 생각은 메이지 개 혁의 전반적 기조였다

.

앞서도 언급했듯 이는 도쿄 대학 이학부의 구성과 식물학교 실의 분위기에서도 드러났다

. 1877년 설립된 도쿄대학 이학부의 초대 교수진은 거의

외국에서 초빙되었고

,

수업을 모두 영어로 진행했다. 유일한 일본인이 식물학 교수 야타베 료오키치(矢田部良吉, 1851-1899)였는데, 앞서 말했듯 그의 코넬 대학 학위와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

5 전통을 배려한 듯 보이는 이토오 케이스케(伊藤圭介,

1803-1901)의 임용도 사실 원로에 대한 예우 이상은 아니었다.

대학 부속의 고이시카

와 식물원에 배속된 이토오에게는

‘근대 식물학’을 강의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

았다. 강의를 전담한 것은 야타베로서, 그는 능숙한 영어로 생리학과 분류학의 기초 를 가르쳤다고 한다.6 오오바 히데유키가 전하는 평에 따르면 그의 강의는 독창적이 거나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식물학 교육을 통해 종래 본초학과 일

획을 그었다는 점

때문에 중요했다.7 야타베가 에도 본초학의 전통을 버린 덕분에 제대로 근대식물학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평가였다.

과거와 단절하고, 서양학문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영어로 최대한 서양학문 그대 로 배워야 한다는 의식은 하루 빨리 서양인과 다름없이 과학활동을 수행하겠다는 의 지를 반영했다

.

서양 국가들로 이루어진 문명세계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메이지 일본 최대의 과제를 식물학자들도 공유한 것이다

.

하지만 일본식물학계가 쉽게 지워 버릴 수 없는 과거가 있었다

.

바로 캠페르

,

튠베리, 지볼트가 일본 식물에 대해 연구

4 中井猛之進, “日本産蓼科植物,” 󰡔植物学雑誌󰡕 23(272) (1909), 367-397, 367. 中井猛之進, “所謂さくら たでノ學名(日本臺灣韓國ノさくらたで),” 󰡔植物学雑誌󰡕 22(253) (1908), 59-64은 이이누마 요쿠사이(飯沼 慾齋, 1782-1865)의 󰡔초목도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이누마의 도설은 이토오 케이스케와의 협업 으로 린네 명명법에 따라 작업한 것이다. 나카이는 도쿠가와 식물학의 유산 중에서 이렇듯 ‘근대적’ 법을 따른 몇몇 성과에만 주목했다. 나카이가 일본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한 것은 1930년대 중반 지볼트의 논문을 번역한 일과 관계된 듯하다. 자신의 성과를 전통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화훼전통을 포함한 도쿠가와 시기 식물연구의 역사를 지볼트가 인정한 대로 자랑하게 되었다.

5 그는 開成學校 출신으로 영어를 잘해 외교관으로 미국에 갔으나, 경로를 바꾸어 과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코넬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開成所로 1876년 부임했다가 그대로 도쿄대학에 남았다. 鈴木善次,

󰡔バイオロジ-事始󰡕 (東京: 吉川弘文館, 2005). 이후는 식물학과는 물론 다른 학과도 모두 일본인 교수로 대체된다.

6󰡔日本科學技術史大系󰡕 15권, 15.

7大場秀章, 󰡔日本植物研究の歴史: 小石川植物園三〇〇年の歩み󰡕 (東京: 東京大学出版会, 1996), 85.

해 놓은

,

유럽 식물학의 일부가 된 과거였다. 야타베와 그의 교수직을 이은 마쓰무라 진죠(松村任三, 1856-1928)는 외국인에 의해 일본 식물 연구가 거의 완성되어 버렸다 고 탄식했다

. 18세기 이래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탐욕스럽게”

식물 채집에 나 서, 일본인들이 연구를

“시작”한 19세기 말에는 “눈에 띄는 식물은 거의 기재(記載,

description)가 끝나고,

새로운 종의 기재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인식

이었다.8

게다가 앞선 연구 덕분에 일본 식물 연구의 중심지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 식물 표본과 그에 대한 문헌이 집적된 유럽이었다. 튠베리와 특히 지볼트가 일본에서 수 집했던 무수한 표본은 일본식물에 대한 기준표본

(Type Specimen)으로 유럽 유수의

박물관과 식물원에 보관되어 있었고, 일본 식물에 관한 방대한 서양어 문헌도 아직 일본에는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이는 독자적 근대 식물학을 발전시키겠다는 메이지 일본 식물학계의 노력에 심각한 걸림돌이었다. 일본학자가 미기재종으로 보이는 식 물을 찾아도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유럽학자와 기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새로 채집한 모든 표본은 유럽의 유사한 기재종 표본과 비교·검토되어야 했 고, 문헌을 통해 이미 보고된 것이 아닌지도 확인되어야 했다

.

일본 학자들은 신종으 로 보이는 표본을 하나하나 외국 학자에게 보내어 감정을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고

,

그 결과 일본식물의 학명에 서양학자들의 이름은 늘어만 갔다

.

이런 상황에 대한 불 편한 심기는 야타베의 유명한

1890년 선언으로 드러났다.

동경식물학회의

󰡔植物学雑

󰡕에 영어로 발표한 “태서 식물학자 제씨에게 고함”은 이제 신종을 찾은 경우 “유

럽의 전문가와 상담하지 않고 직접 학명을 부여하기로 했다

”는 통보였다.

그는 일본 학자들이 성장하고 있으며

“충분하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표본과 참고문헌”을 모았

다는 사실을

“대담한”

결정의 이유로 설명했다. 그는 이 선언을 실현하듯 두세 개의 신속과 신종을 곧 발표했지만

, 1890년 바로 교수직에서 면직당하며 자신의 약속을

다하지 못했다

.

9

이 자립 선언을 계승한 것이 마쓰무라 진죠였다. 1890년 도쿄대 식물학 교수직을

8 마쓰무라의 대중적 전기에서 후쿠시마 대학교수 樫村利道가 전하는 이야기다. 長久保片雲, 󰡔世界的植 物学者松村任三の生涯󰡕(東京: 暁印書館, 1997), 3.

9 Yatabe Ryokichi, “泰西植物学者諸氏に告ぐ: A few Words of Explanation to European Botanists”, 󰡔植物 学雑誌󰡕 4(44) (1890), 355-356, 355. 야타베는 자신의 협조 요청에 점점 늦게 응답해 오거나 응답이 없 는 서양학자들의 태도를 먼저 꼬집었다. 일본인으로 처음 신종을 발표한 것은 이토오 케이스케의 손자 로 영국에서 유학한 이토오 도쿠타로(伊藤篤太郞)였다. 󰡔日本科學技術史大系󰡕 15권, 98. 야타베의 돌연 한 면직사유는 불분명하지만 “대학교수에 맞지 않는 행동거지”로 이야기 되었다. 大場秀章, 󰡔日本植物研 究の歴史󰡕, 89.

이은 마쓰무라는 식물학의

‘미개척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0 서양학자들이 일본 등 식물학의

‘미개척지’를 통해 근대 식물학을 발전시켰던 것과 동일한 전략을 택한

것인데, 일본식물에 붙은 서양학자들의 학명에 특히 민감했던 일본 학계의 입장에서 이 식물학적 미개척지는 신종 발굴을 통해 자신들의 역량과 존재감을 드러내 줄 좋 은 기회를 제공했다. 마쓰무라는 가라후토와 중국 등에 제자들을 파견했고, 1896년 대만에 파견된 학술탐험대에도 협력자들을 보냈다

. 1897년에는 류큐 , 1899년에는 홋

카이도에 채집을 갔고 이를 바탕으로 대만과 류큐의 신종식물들을 활발히 발표했다

.

1901년에는 󰡔植物學雜誌󰡕에 “東亞植物 ”에 대한 연재를 시작했고, 1904년에는 이 모

두를 포괄한

󰡔帝国植物名鑑󰡕 (1904-1912)의 편찬을 시작했다 .

11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일본 식물학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

조선에 대한 마쓰무라의 관심은 특히 공세적이었다. 그는 일본정부가 을사보호조 약(1905)을 체결하고

,

동인도회사를 본뜬 동양척식회사를 설립(1908)하기도 전에 고 이시카와 식물원의 채집가 우치야마 도미지로

(內山富次郞 )를 조선에 파견했다.

우치

야마는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여 식물을 채집해 갔다 .

또한 나카이

의 회고에 따르면

,

마쓰무라는

1906년 졸업논문 주제를 찾던 나카이에게 “재료도 있

으니 한국식물을

[연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카이의 선배인 하야타 분조(早田文

, 1874-1934)에게 대만식물 연구라는 과제를 준 2년 후였다 .

마쓰무라는 하야타가

올린 성과를 강조하며 식물학 불모지인 조선의 식물을 잘 연구하면 나카이 역시 주 목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고 격려했다.12 훗날 하야타와 나카이가 모두 도쿄 제대의 교수가 된 것은 식민지 식물 연구가 일본 식물학의 미래를 좌우할 과제라는 마쓰무라의 믿음을 보여준다

.

나카이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지원

대학

3학년이던 나카이는 조선식물 연구가 일본식물학계의 근대화,

혹은 그 사실에

대한 세계적 인정을 획득하는 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이해한 듯하다

.

나카이는 우선 스승이 표본실에 모아 놓은 표본과 관련 문헌에만 의존해

3년 만에 Flora

10大場秀章, 󰡔日本植物研究の歴史󰡕, 90.

11 中井猛之進, “理學博士松村任三氏植物學上ノ事績ノ概略,” 󰡔植物學雜誌󰡕 29(346) (1915), 342-348. 大 場秀章, 󰡔日本植物研究の歴史󰡕, 89-97.

12 우치야마의 채집과 논문 주제 선정 과정은 다음 두 글에서 회고되었다. 中井猛之進, “朝鮮植物の硏 ,” 󰡔東洋學藝雜誌󰡕 43(534), (1927), 561-571, 562; Nakai, A Synoptical Sketch of Korean Flora (Tokyo:

The National Science Museum, 195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