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시대 식물연구의 자유롭고 활발한 전개양상은 지볼트와 같은 외부 관찰자 에 의해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
그는 일본 식물대에 대한 일본학자들의 조사연구가 유럽 못지않게 진전되어 있고,
나아가 문헌을 통해 식물의 이름이 통일되어 연구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갖추어진 점에 주목했다. 일본에는 유럽과 같은 이론적 논의 는 드물었지만 그럼에도 약재연구와 화훼문화가 발달해 응용 측면의 지식은 유럽보 다 낫다는 것이 그의 총평이었다.
2221이들이 펴낸 저작들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극히 사실적인 곤충이나 식물의 묘사가 두드러지지만 샤벤 카이는 신농이 약초를 캘 때 썼다는 붉은 채찍에서, 쇼햐쿠샤는 신농이 하루에 100가지 정도 약초를 직 접 맛보아가며 연구를 했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샤벤카이는 도야마 번주 마에다 요시야스(前田利保,
1800-1859)가 에도에 머문 1830-44사이에 활동했다. 쇼오햐쿠샤는 이토오 케이스케의 스승인 미즈타니
호오분도 참가했지만 참가자들은 오와리(현 나고야) 번사들이었다. 木村陽二郎, 江戸期のナチュラリス ト, 201-207.
메이지 유신
(1867)
세대는 지볼트의 이런 평가에서 한 가지 특징은 계승했지만 그의 긍정적 태도는 버림으로써 일본 식물학의 경로를 바꿔놓았다.
즉 메이지 일본 식물학계는 유럽인인 지볼트에게는 자연스러운 유럽을 기준으로 삼는 비교 방식을 계승하여‘서구 식물학 ’을 기준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와 달랐던 일본의 전통을 부정 하는 길을 택했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식물학을 도입해 그것을 수행한다는 점을 강 조하기 위해 다양한 전통을 포용했던 도쿠가와 시대의 연구와 자신들의 식물연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역사적 단절성을 주장했다.
특히 일본 식물 연구의 한 축을 이 루었던 중국 전통은 올바른 유럽 전통의 도입을 저해한 부정해야 할 전통이 되었다.
이들은 도쿠가와 식물학의 체제를 유럽식 학문체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학문의 내 용과 제도를 포괄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했다.이러한 노력의 결과 메이지 식물학 체제 속에 도쿠가와 식물학의 흔적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이 절은 도쿠가와 시대 식물 연구 전통이 메이지 식물학의 인적, 사회 적, 제도적 기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줄 것이다. 제2차 대전 종전까지 일본에서 식물학이 근대 과학교육과 연구체제 속에 자리잡고, 또 식물분류학이 근대 식물학의 기조가 되는 과정은 도쿠가와 전통에 크게 힘입었다. 이 절에서는 박물국 의 설립과 활동
,
초·중등 과학교육의 정비, 식산흥업과 식물학, 고등교육과 학회 등 의 순으로 일본 근대 식물학에 도쿠가와 전통이 남긴 다양한 흔적을 살펴본다.
도쿠가와 시기 식물학에 대한 오늘날의 역사인식은 사실 메이지 세대의 인식을 대부분 계승했다. 전후 도쿄제대 식물분류학 교수로 식물학사를 연구했던 오오바 히 데아키는
“에도시대 식물학 성과의 대부분은 메이지 시대가 되는 시점에 거의 잊혀
지고, 학문으로는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부터 재출발”했다고 평했다. 에도시기 식물 연구자들을 서양의 자연사학자에 비견해“naturalist”라고 불렀던 기무라 요오지로도
“일본의 대표적 본초학자 ,
식물학자, 내츄랄리스트” 오노 란잔의 이름조차“메이지
시대에 일본 식물학이 근대화된 이후 잊혀져가고
”
있다고 평했다. 생물학자로서 일 본과학사협회의日本科學技術史大系
편찬에 참가했던 우에노 마쓰죠오는 메이지 생물학 및 농학이 에도시대에 축적된 성과의 연장선상에 있다기보다는“마치 나무에
대나무를 이은” 것처럼 서로 단절되었다고 평가했다. 우에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 런 단절적 인식이 도쿠가와 시대 식물학 전통이 서구 전통보다 뒤떨어진다는 평가와22 Siebold, “日本植物學ノ現狀ニツキテ,” Flora Japonica (植物文献刊行會, 1937), 1-11. 구미학자들의 일 본 식물연구 문헌을 재간행하던 식물문헌간행회에서 펴낸 Siebold의 일본 식물지에 수록되어있다. 3장에 서 살펴볼 나카이 다케노신이 번역했다.
결부되어 있음도 잘 보여준다. “메이지 유신 이전 박물학은 학자들의 열성에도 불구 하고 연구방법이 근대화되지 않아서 린네 이전 유럽에서 행해지던 정도
”라는 평가였
다.23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도쿠가와 시기의 식물연구 전통을 자랑하기도 했다. 일본 식물학이 메이지 시대에
“재출발”했다던 오오바도 “식물학이 아주 높은 레벨에서 재
출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에도 시대에 축적된 식물학의 성과가 있다”고 평가했고,
우에노도“비교적 짧은 기간에 일본이 구미의 완성된 생물학 체제 ”를 받아들여 정착
시킨 데 도쿠가와 시대의“독자적”
식물연구 전통이 기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사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메이지 식물학계도 공유하던 것이다. 이를테면 대 부분의 연구논문을 서구학계를 겨냥해 영어로 펴내던 동경식물학회의植物學雜
誌
는 1892년 일본에 이미 국제적 인정을 받은 식물학자가 많은 점을 자축하며 “본
초학의 전통에 힘입은 것”임을 인정했다.24
도쿠가와 시대의 식물학이 유럽보다 못했고 근대식물학과 무관하다면서도 일본에 독자적 식물연구 전통이 강했던 덕분에 식물학이 빨리 근대화 되었다고 주장하는 혼 돈상은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의 역사인식에 일어난 혼돈을 반영한다
.
근대 일본은 제국주의적 대외 팽창을 통해 민족적 혹은 국가적 정체성과 그에 필요한 역사인식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며 탄생했는데,
이에는 전통 과학기술에 대한 평가가 중요했다. 메 이지 일본은 과학기술을 핵심으로 하는 서구 문명이 일본의 전통 문명과 다르며, 서 구가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서 일본은 물론 일본이 기준으로 삼았던 중국 문명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데 크게 이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부정적 자의식에 대한 반발로
1890년 무렵 강하게 일어난 국수주의 하에서도 서구 문명의 “물질문명”
분야에서의 장점은 부정되지 않았을 정도였다.25 하지만, 대신 일본 전통의
“정신문명”적
우월성 혹은 과학기술 분야의 성취로 보일만한 전통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고,
서구 식물학과 대등하게 교류한 일본 박물학은 그 좋은 사례였을 것이다.하지만 메이지 일본을 움직인 아이디어는 전통을 부정하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 야 한다는 것인 듯했다
.
일본은 서구문명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해야 하는 후발주자라23大場秀章, 植物学史・植物文化史 (東京: 八坂書房, 2006), 139; 木村陽二郎, 江戸期のナチュラリス ト 188; 日本科學技術史大系 15권, 15. 上野益三, 日本博物学史, 137.
24 大場秀章, 植物学史・植物文化史, 139-140; 日本科學技術史大系 15권, 13; 1892년 글은 日本科 學技術史大系 15권, 90쪽에서 재인용. 3장에 상술된다.
25 1880년대 말부터 대두한 政敎社등의 국수주의와 이들의 동·서양 문명인식에 대해서는 함동주, “근대
일본의 서양담론과 政敎社”, 일본역사연구 15 (2002), 73–92.
는 인식 하에 후진적 아시아와 연결된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와 동화되고자 하는 강 한 욕구를 보였다. 메이지 사상계를 지배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구호에 각인되어 있는 인식이었다.
역사가 단선적으로 진보한다고 보는
“근대적 역사관 ”의 소산인 이 논리는 “자기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
적극적 서구모방을 정당화했다.
26 이런 인식 하에서 서구와 같은“문명국”이 되는 길
은
‘서구’의 과학기술 체제를 완전히 수용해서 그것과 동화를 이루는 길 뿐이었다.
이러한 역사관은 일본 과학기술사 분야에서 이미 상당 부분 극복되어 왔다. 단절 적 인식은 과학기술 담당자들의 인적·문화적 연속성 및 사회 제도 측면의 연속성이 지적되며 수정되었고
, ‘서구’를 완성된 모델로 해서 뒤따라갔다는 후발주자 의식도
당시 유럽의 상황, 즉 그들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기반을 만들어가는 상황 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약화되었다.
27 이하에서는 메이지 일본에서 식물연구를 위한 사회적 기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식물학 분야에 대해 이러한 과 학사학계 일반의 논의를 적용해 볼 것이다.
박물국의 설립과 활동
메이지 시기 식물학의 사회적 기반으로 도쿠가와 시대 박물학자를 주축으로 문부성 산하에 문을 연 박물국에 주목할 수 있다
. 學制 (1872)를 통해 근대 교육제도가
마련되기 바로 전해인1871년의 일이었다 . 1867년 막부의 명을 받아 파리 만국박람
회에 일본 곤충표본을 출품하고 참관했던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 1838-1916)가 박
물국의 중심인물이었고 오노 란잔의 현손으로 본초에 해박한 의사였던 오노 모토요 시(小野職愨, 1838-1890)가 가세했다. 다나카는 이토오 케이스케에게 의학,
난학, 본 초학 등을 배웠고 쇼오햐쿠샤에서 활동했는데, 서구 학문을 도입, 소개하려 한 스승26근대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은 프라센지트 두아라, 문명기·손승회 옮김,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 기: 근대 중국의 새로운 해석 (서울: 삼인, 2004). 일본의 무의식적 자기 식민지화와 열등한 타자에 대 한 의식적 식민화 노력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는 고모리 요이치, 송태욱 옮김, 포스트콜로니얼 : 식민지 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 (서울: 삼인, 2002).
27 Bartholomew의 경우 도쿠가와 시대 의학이나 난학, 유학 등에 종사했던 계층이 대부분 이후의 근대 학문도 담당했음을 보여주었다. 생물학자의 40%는 의사 집안, 그 중에서도 특히 린네 명명법을 빨리 받 아들인 미즈타니 호오분의 나고야 지역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한다. 기술적 측면의 연속성은 Morris-Suzuki가 잘 보여주었다. Bartholomew, The Formation of Science in Japan, 50; Morris-Suzuki, The Technological Transformation of Japan. 일본과학기술사대계 시리즈는 근대의 단절성을 강조하는 시각 이지만 다른 과학사학자에 의한 일본 과학사통사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카야마 시게루는 “도 쿠가와 의사들이 일본에 근대과학을 들여왔다”고 썼다. Shigeru Nakayama, “Japanese Scientific Thought,”
in Charles C. Gillispie, ed., Dictionary of Scientific Biography, 15/1, 743. 후발주자 의식의 극복은 廣重徹,
科學の社會史(東京: 岩波書店,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