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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일본이 주변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는, 일본이 단시일에 열등한 전통과 단 절하고 우월한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자신감만큼이나 주변국이 서구적 근

대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열등한 사회라는 평가가 중요했다. 이런 주장은 주변국 의 독자적 역량을 부정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국의 역사를 재평가함으로써 뒷받침 되 었다. 예컨대 중국 문화를 추종한 조선 사회는 독자적 문화를 발달시키지 못했고 특 히 과학기술과 같은 실용적 학문 대신 공리공론

(空理空論)의 허학 (虛學)만을 일삼은

정체된 사회라고 평가되었다. 이러한 식민사관은 서구를 기준으로 모든 사회의 우열 을 판가름하는

“근대적 역사인식 ”에 크게 힘입었는데,

이 소절은 이러한 역사인식의 오류에 주의하며 조선 시대의 식물연구 전통을 그 사회 나름의 맥락에서 검토해 보 고자 한다

.

조선의 지식전통과 식민지 근대식물학의 관계는 지금껏 부각된 적이 없지만, 전 통과 근대 사이의 지적 연속성을 이해하기 위해 검토되어야 할 주제이다

.

과거 조선 의 식물연구 전통은 실질적이고 이념적인 두 측면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식물 학에 영향을 미쳤다

.

우선 전통문헌 지식

,

민간 전래지식은 한약재 자원을 개발하려 는 노력과 함께 발굴되어 근대적 식물연구에 실질적으로 활용되었는데, 식민지 전통 에 대한 이러한 의존은 이념적 차원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

조선인들에게 이는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던 반면, 일본인들로 서는 식민지의 발달된 지식전통을 인정하는 것이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조선의 지식전통이 지닌 정치적 위험성은 서구의 근대를 모든 문화가 나 아가야 할 하나의 모델로 삼는 단선적 진보사관 하에서는 쉽게 길들여졌다

.

식민지 시기 조선 의학전통을 발굴해 전통의학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미키 사카에

(三木

, 1903-1992)의 연구가 대표적 사례이다.

47 미키는

“중국의학과 일본의학을 제대로

알려면 조선의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평생 역설했을 정도로 조선의학이 한중일 지식 교류에서 담당한 역할을 중시했다

.

그는 조선의 문화를 쉽게 사대문화로 폄하하는 태도를 반박하며 모든 문화를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볼 것을 제안했다

.

그는 조선전기의

󰡔鄕藥集成方 󰡕 (1433), 󰡔醫方類聚󰡕 (1445),

허준

(許浚, 1546-1615)의 󰡔東醫寶鑑󰡕 (1613)을 조선의학의 독자적 성취를 보여주는 조선

의학의 정수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동의보감󰡕에서 완성된 조선의 본초학이 “󰡔본

초강목󰡕에서 출발하여 진정한 본초학

”으로 향했던 일본과 같은 길을 걷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조선후기의 본초학은

“약성가(藥性歌 )

본초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선 만의 고유한 전개를 보이긴 했지만

,

기존 본초 지식을 외우기 좋은 노래로 만들어 전하는 수준에 머물러 학문적으로는 정체되고 쇠퇴한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

48 미키는 이시진의

󰡔본초강목󰡕이 중국 본초연구를 혁신해 서구의 성과에 비견할 ‘근대적’

자 연분류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았고

,

일본이 바로 그

󰡔본초강목󰡕을 계승함으로써 임

상적 연구에 그치지 않는

“진정한 본초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보았다.

즉, 미키 는 서구 과학을 기준으로 각국의 성과를 비교·평가한 것이다. 이미 중국 과학사에 대한 조셉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의 접근을 비판하며 누차 지적되었듯 서 구 식물학과 유사한 부분을 비서구 학자들의 연구에서 분리하여 서구를 기준으로 비 교하고 평가한다면 전통사회의 과학활동을 오해할 소지가 있다.49 식물연구 전문가가 없는 조선의 상황에서 식물에 대한 연구를 각 연구자의 전체 연구에서 분리해 내는

47 미키 사카에의 󰡔朝鮮醫學史及疾病史󰡕는 1948년 완성되어 1955년 한정출판 되었다가 1963년 간행되

었다. 그는 1928년 조선에 와서 경성제국대학 내과에 근무하다가 이후 도립수원의원에 근무한 의사였다.

조선 의학사 관련 사료를 발굴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제시한 미키 사카에의 저작의 선구적 가치는 의심 할 것이 없다. 그는 근대의학을 기준으로 삼아 서양 외과술의 발달과 견줄 만한 종기제거술이나 음양오 행의 이론보다 증험이 중시된 법의학 저작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김호, “醫史學者 三木榮의 생애와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의사학󰡕 14 (2005), 101-122. 이는 미키 사카에와 경쟁하며 그의 ‘식민사관’을 극 복하고자 한 김두종도 공유한 시각이었다. 여인석, “一山 金斗鍾 선생의 생애와 학문,” 󰡔의사학󰡕 7 (1998), 1-12.

48일본에 󰡔본초강목󰡕이 1607년 들어왔던 것을 기억하는 미키 사카에는 󰡔동의보감󰡕에 “󰡔강목󰡕을 인용한 조문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겼던 듯하지만 정유재란 등의 상황에서 󰡔본초강목󰡕의 수입이 지 연되었을 뿐이다. 의도적인 누락은 아니었다.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561, 560, 564.

49니덤의 중국과학사 성과와 그의 접근에 대한 비판은 Joesph Needham et al,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4-); N. Sivin, “Why the Scientific Revolution Did Not Take Place in China - or Didn't It?,” Chinese Science no. 5 (1982), 45-66; Kim Yung Sik, “Natural Knowledge in a Traditional Culture: Problems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Chinese Science,” Minerva 20 (1982), 83-104; 김영식,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한국사시민강좌󰡕 16 (1995), 203-222; Roger Hart, “Beyond Science and Civilization: A Post-Needham Critique,” EASTM 16 (1999), 88-114; 문중양, “과학기술: 조선 유학사에서 과학사상사 서술의 과제와 방향”, 󰡔국학연구󰡕 3 (2003), 391-415. 서구 기준으로 이시진의 󰡔본초강목󰡕을 ‘근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시각을 비판한 연구로 Carla Nappi, The Monkey and the Inkpo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인위성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

이 소절은 최대한 당대 조선인들의 관점에서 전통시 기 식물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개관함으로써 미키가 제시한 평가를 재고할 것이다

.

50

우선 조선 초에 국가에 의해 주도된 연구가 많았고

18세기 이후 개인적 성과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

건국 후의 사회 안정화를 꾀하는 정치적, 경제적 정책의 일환으 로 약재에 관한 조사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다가

,

의약 소비가 대중화되고 증가한

18세기 이후 개인적 의서 발간과 유통이 증가한 것이다.

51 조선의 본초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의학적 실용성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

대부분 직업적 중인 계층에 속한 의사들이 남긴 본초에 대한 저작은 유학자들과 차별화된 이들의 전문직 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드러내며 임상적 지식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 다.52

향약에 대한 관심은 조선초부터 기울여져 태조

2년(1393)에 이미 각 도에 의학교

수를 파견하여 고려말의 의서인

󰡔鄕藥慧敏經驗方󰡕을 강습하게 했다. 1397년 설치된

제생원은 각도로부터 향약재를 수집했고

1398년 고려의서와 󰡔鄕藥簡易方 󰡕

등을 참 조한

󰡔鄕藥濟生集成方󰡕 30권의 편찬을 지휘했다.

향약재의 채집 또는 재배를 전담할 종약색(種藥色)이라는 관서의 운영도 시도되었다.53 세종은 이렇게 확보한 향약재가 당약을 대신해 쓰일 수 있는 것인지 의관을 명나라에 보내 확인하게 했고 향약

62종

을 검증하여 당약과 다른

14종을 구분하고는 이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향약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독자적 본초학을 수립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라기보다는 고가의 약 재 수입으로 인한 경제적 유출이나 약재 수급의 어려움에 대한 대책의 성격을 띠었 다. 그럼에도 지방색을 띨 수밖에 없는 생약 연구의 진전에 기여한 점도 분명했다.54

50다음 시도들은 그 사회의 관점에서 전통시기 ‘과학활동’을 검토하는 사례가 된다. Benjamin A. Elman, On Their Own Terms: Science in China, 1550-1900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김영식, 󰡔주희의 자 연철학󰡕 (서울: 예문서원, 2005); 임종태, 󰡔17, 18세기 중국과 조선의 서구 지리학 이해: 지구와 다섯 대 륙의 우화󰡕 (서울: 창비, 2012).

51 신동원, “조선 후기 의약생활의 변화:선물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미암일기』,『쇄미록』,『이재난 고』,『흠영』의 분석”, 󰡔역사비평󰡕 (2006), 344–391.

52이기복, “18세기 의관 이수기(李壽祺)의 사회·지식 네트워크와 자기인식”, 출판예정 초고.

53종약색은 태종 연간인 1405년부터 1411년 사이에 별도로 있다가 전의감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족문화대백과사전.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김두종 󰡔조선의학사 전󰡕.

54 향약연구를 세종대 과학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간주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은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189 (2006), 39-72. Suh Soyoung,Herbs of Our Own Kingdom: Layers of the ‘Local’ in the Materia Medica of Early Choson Korea,” Asian Medicine 4 (2008), 395-422. 향약연구는 실용성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국초 통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이념적 역 할도 했다.

이를테면

1431(세종 13)년 간행된 󰡔鄕藥採集月令󰡕은 향약 채집과 가공의 방법을

확립하기 위해 식물의 분포 상태와 생태에 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약재 별 채취 시기 와 건조 및 처리 방법을 담았다

. 󰡔향약제생집성방 󰡕을 증보·첨삭하여 1433년 완성된

󰡔향약집성방󰡕 85권은,

앞 부분

75권은 중국 본초학 서적의 내용을 소개한 것이고 ,

마지막

10권은 향약만을 다룬 부분으로 630여 종의 향약재가 실려있다 .

이 향약재들

은 상당부분 중국 약재를 참고해 발굴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은 일찍부터 향약재 로 쓰일 조선 식물의 방언명들을 파악

·정리하고 그 성미,

효능, 형태, 채취 시기 등 중국 본초서에 없던 지식을 쌓아갔다

.

55

이후 조선에는 별도의 본초서라 할 만한 저작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 의서의 일 부로 본초가 다루어진 것인데

,

허준의

󰡔동의보감󰡕이 본초에 대한 내용을 전체 25권

3권에 해당하는 “탕액편(湯液編)”에 담았고, 18세기 이후 강명길(康命吉 ,

1737-1801)의 󰡔濟衆新編󰡕 (1799),

조선말 명의(名醫)로 이름났던 황도연(黃道淵

,

1807-1885)과 그의 아들이 편찬한 󰡔醫宗損益󰡕 (1868), 󰡔方藥合編󰡕 (1884)

등도 본초

부분이 있다

.

미키는 앞서 보았듯 서구의 앞선 식물학, 그에 비견할

󰡔본초강목󰡕,

그리고 그것 을 받아들여 일본이 취한

‘올바른’

진보의 경로와 조선이 취한 경로를 비교함으로써 이를 평가했고 쉽게 이에서 결점을 발견했다. 그는 허준의 책이 조선 본초지식을 완 성한 것이기는 하지만 명대의

󰡔본초강목󰡕

대신 송대의

󰡔증류본초󰡕

등 중국 본초에 의지한 바가 많은

“사대 성향”이 강한 책이며,

임상 위주라서

“진정한 본초학”은 되

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

그는 그 이후 조선 후기의 저작들은 모두

“약성가 본초학”이

라고 하는 독특한 형태로 전개되어 학문적으로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했 다.56

최근의 연구들은 미키가 지적한 사실은 옳지만 그의 평가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 적한다. 미키가 조선의 본초연구를 근대과학이나 일본 본초학을 기준으로 평가한 점 을 문제삼은 것이다. 허준은 본초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약재의 작용 양상을

55 미키는 조선 왕조는 향약에 대한 관심을 지속한 편이지만 이런 의식적 권장 노력은 향약 사용이 부 진한 상황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성종이 특히 종합적 대책을 시도해 1478년 󰡔향약집성방󰡕을 중간(重 )하기도 했지만 명과의 관계가 호전되며 당약에 대한 의존이 증가했다. 그는 임란 이후 1633년 󰡔향약 집성방󰡕을 중간하며 쓴 발문이 향약 쇠퇴의 정황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향약이 쇠퇴하기 시작한 지

100여 년이 넘어 재간행을 위해 책을 찾았으나 85권 완질을 갖추는데 탐라에까지 의존해야 했다는 발문

이었다.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김두종 󰡔조선의학사 전󰡕.

56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