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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방약 연구자 이시도야

이시도야가 이상과 같이 나카이의 식물분류학에 대한 비판을 체계화한 것은 그가 임 업시험장을 떠난 뒤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43 이시도야가

1925년 임업시험장을 떠

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

그의 새로운 목표는 뚜렷했다. 조선 한방약재에 대한 연구였다. 일본의 모방적 과학활동이 갖는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증가함에 따라 자신이 공식 교육에서 배운 적도 없었고

,

자신의 근대적 과학활동과도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전통지식을 재평가하게 된 듯했다

.

앞서 보았듯

1918년 한방약재에 대한

40 지역에 따라 생기는 변이를 모두 신종 등으로 등록하고자 하는 나카이의 “동아시아” 분류법과 풍토 의 특질을 고려해 이 변이를 이해함으로써 종을 안정화시킬 것을 추구하는 코마로프와 이시도야는 나카 이와 분류학적으로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글, 직접 인용은 86, 87, 81, 86, 88.

41 학명에 대한 합의나 안정성이 없는 점은 현재까지도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 Hawksworth, D.

Improving the Stability of Names. (Köigstein/Taunus Germany: Published for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Plant Taxonomy in conjunction with the International Union of Biological Sciences and the Systematics Association by Koeltz Scientific, 1991).

42石戶谷勉, “濟州島の植物と將來の問題”, 81, 86.

43이시도야는 같은 해인 1928년 나카이의 울릉도 동해대륙설과 오동나무 울릉도 기원설에 대한 비판도 제기했고 자신이 나카이에게 보냈던 연호색이라는 약재 식물에 대한 나카이의 분류 오류를 정정하며 처 음으로 독자적으로 신종을 보고하기도 했다. 石戶谷勉, “內地に栽植する桐は果して鬱陵島の原産なるや”,

󰡔朝鮮󰡕 164 (1928), 67–70; “朝鮮産 延胡索 一新種”, 󰡔朝鮮博物學會雜誌󰡕 6 (1928), 87–91; “欝陵島ノ植 物區系=閥スル考察 (1)”, 󰡔朝鮮博物學會雜誌󰡕 7 (1928), 21–25.

최종보고서가 나올 때까지도 이시도야는 정태현의 도움에 힘입어 수행한 이 과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하지만 임업시험장을 그만둔

1925년에 나온 연구 성

과를 보면 그의 공부는 이미 꽤나 진행된 상태였다

.

그는

1925년의 조선박물학회 총

회에서

󰡔동의보감󰡕

등을 참고하여 조선 한방약재에 대해 발표했고 이것을

󰡔조선박물

학회잡지󰡕에 실었다.

조선의 본초 전통

1925년 이시도야가 박물학회 총회에서 발표한 후 출판한 조선 한방약의 원식물에 대

한 연구는 한중일의 대표 한방의서를 독자적으로 검토한 산물이었다

.

중국에서 전해 진 본초서의

“불완전한 기재문”에 근거하여 토산 식물을 찾으려 애쓴 “옛 조선과 일

본 사람들의 노력과 혜안

”을 높이 평가한 그는 특히 조선 문헌에서 일본이나 중국과

대비했을 때 특이한 약재

45종을 찾아 조선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도와 효능 등을 소

개했다.

사실 전통 본초서의 묘사만으로 토산 식물을 찾아내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 다. 이시도야에 따르면, 한중일 의서에서 한자명이 같은

100여 종의 식물 중 7할은

종이나 속이 유사한 식물이었지만 나머지

3할 정도는 속이나 과가 아예 달랐다.

44 이시도야는 이 차이를 지역별 식물상의 차이, 불완전한 기재문에 기인한 오해, 혹은 억지로 토산 대용품을 찾으려 한 조선이나 일본 본초학자의 의지 때문으로 추측했지 만, 이 차이를 문제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이가 있는 약재가 더 의미있다고 생 각했기에 조선 문헌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45종을 모아서 검토했을 것이다.

차 이나는 종일수록 풍토에 맞지 않는 중국 지식을 조선의 풍토에 적응시킨 결과일 가 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듯했다

.

이는 중국 혹은 일본 문헌을 절대적 기준으로 조선 문헌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이 지식을 교류하면서 발달시킨 독자적 지 식을 중시하는 모습이었다. 이는 나카이식의 분류학이나 일본의 조림이 서구추종적 인 점을 경계하는 그의 태도와 잘 부합했다.

조선 한방약재에 특화된 이시도야의 관심과 전문성은 곧바로 인정받았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신설된 약리학교실 제2강좌에서 한약연구를 담당할 세 주역 의 하나로 선정된 것이다

.

한방약 연구를 전담하는 이 강좌는

6번째 제국대학인 경

성제대에

“특성있는 간판강좌 ”를 만들려는 의도로 설립되었다 .

조림기사 출신의 이

44石戶谷勉, “朝鮮ノ 漢方藥ト其ノ原植物ニ就テ”, 󰡔朝鮮博物學會雜誌󰡕3 (1925), 1–10.

시도야가 강사로 합류했고

,

일본 교토와 게이오 약학의 전통을 이은 약리학 전문가 스기하라 노리유키(杉原德行

, 1892-1976), 도쿄제대 전통과 만철 조사부의 전통을 이

은 약물 화학분석 전문가 가쿠 텐민(加來天民

, 1895-?)이 가세했다.

이시도야가 담당 한 것은 전통문헌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하여 전통 약재의 원식물을 밝혀냄으 로써 스기하라와 가쿠가 약리 분석과 화학성분 분석을 수행할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었다. 그는

1930년대 개성 상인들의 지원으로 개성생약연구소가 설립된 이후로는 약

초재배 연구도 수행했다. 이시도야는 의욕적으로 이 역할을 담당하며 경성제대의 한 약연구를 일본에서도 유례가 없는

“종합약물학”

연구로 만들어가는 데 일익을 담당 했다.45

경성제대에 합류했을 무렵 이시도야는 전통 한방의학 지식과 그와 관련된 조선의 지식 전통에 대해 높은 기대감을 보였다

.

향토를 무시하는 이식적인 근대 식물분류 학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키워오던 그가 한방의학과 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향토에 토착화된 지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조선의 전통 문화가 찬 란했다는 인식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고

,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었다

. 1926년 일본에서 열린 제 3회 범태평양과학대회에 맞추어 나온 󰡔과

학 일본

:

과거와 현재(Scientific Japan: Past and Present)󰡕에 실린 두 글도 조선이 도 쿠가와 시대 이전까지는 본초

·의학 분야에서 뛰어나 그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평

가했다.46 하지만 이 시기 이시도야의 경우는 흔히 그 고대문화가 쇠락한 이후로 간 주되는 조선 중기까지도 조선문화가 우수했다고 보는 점에서 달랐고

,

게다가 흔히 조선문화를 중국문화에 대한 사대주의적 모방으로 간주하는 식민사관과 달리 중국 전통과 구별되는 조선문화의 독자성과 가치에 대해서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47

45스기하라는 동창회보에 실린 회고에서 이 간판강좌는 경성관광 버스 안내양이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또한 전통문헌 관련 연구는 문헌을 확보할 수 있는 넉넉한 예산을 주어 이시도야에게 전담시켰다고 기억했다. 이시도야가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할 수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杉原德行, “京城帝國大學 藥理學敎室”, 京城帝國大學同窓會. 󰡔紺碧遙かに: 京城帝國大學 創立五十周年記念誌󰡕 (東京: 京城帝國大學同窓會, 1974), 212-214. 신창건은 경성제대 약물학교실 제2강 좌를 제국 유일의 동서 학문이 결합된 “종합약물학”센터로 소개하며 그 성립과 활동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중심부 정책입안가와 학자들의 네트워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시도야와 같은 식민현지 학자 의 복잡한 지적궤적은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 신창건, “경성제국대학에 있어서 한약연구의 성립”, 󰡔사 회와 역사󰡕 76 (2007), 105–139.

46 Mitsutaro Shirai, “A Brief History of Botany in Old Japan”, and Yu Fujikawa, “A Brief Outline of the History of Medicine in Japan”, in The National Research Council of Japan, Scientific Japan: Past and Present (Kyoto: Maruzen Co., 1926), 213-227; 229-242. 저자들은 의사였다. 물론 곧 발행될 미키 사카에 󰡔조선의학사󰡕도 조선전기까지의 의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47총독부의 의뢰로 고적조사를 하며 식민사관을 뒷받침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 등의 경우 는 조선 미술의 시발점을 낙랑미술로 잡았다. 조선미술을 중국미술의 모방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정인보

조선 백자

,

민예품의 미에 대한 아사카와나 야나기의 긍정적 평가와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48

경성제대에 한약연구팀이 식민지 제국대학의 특색을 드러낼

“간판강좌”로 자리잡

은 것도 바로 조선 한약 전통에 대한 일본의 기대를 보여준다. 고문헌보다는 인삼과 같은 중요하고 거래량이 많은 한약재에 더 직접적 관심이 있었겠지만

,

그럼에도 자 원 발굴을 위해서는 문헌연구도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시도야를 연구 팀에 합류시켰을 것이다

.

이시도야를 강사로 발탁한 것은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에 부임하여 조선박물학회에 참여했던 스기하라로 보인다. 둘은 한방약에 대한 다양 한 문헌들을 섭렵하여

1926년부터 경성제대 약리학교실의 이름을 내걸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朝鮮の漢藥

”이라는 글이었다 .

이 글에서 두 사람은 조선을 일본제국 한약 연구의 전초기지로 내세웠는데

,

그 근거 중 하나는 조선의 발달된 한방의학 전통이 었다.

“조선의 한약”은 󰡔滿鮮之醫界 󰡕에 1926년 11월부터 1928년 8월까지 16회 연재되

었다. 중국, 일본, 조선의 한의학과 본초의 역사를 다룬 총론에 이어 조선의 대표적 인 한약

35가지를 때로 삽화도 곁들이며 상세하게 소개한 글이었다.

이 글의 서론은 조선의 한방의학이

“학술이나 채약 기술 ”

등에 있어

“상당히 진보한 것”이어서 일본

으로 꾸준히 전래되었다며 백제, 신라와 일본의 의학교류 내역을 구체적으로 기록했 다. 또 조선 시대에도

󰡔채집월령󰡕, 󰡔향약집성방󰡕, 󰡔동의보감󰡕과 같은 대규모 의서의

편찬작업이 있었다는 점

,

그리고 이런 저작에 한글로 토산의 식물명이 붙어 있다는 사실도 한글창제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특기했다.49

󰡔동의보감󰡕에 대한 기록은 특히 상세하고 긍정적이었다.

허준은 이시진에 비견되 는 대가로 묘사되었고 허준의 학문활동을 지원한 조선 왕조의 역할도 긍정적으로 부 각되었다.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내의원 편찬국에서 편찬을 시작했으나 정유재란

와 같은 조선 학자들은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유물에 근거한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는 거짓”임을 보여 주려 노력했다. 식민사관은 또한 조선시대를 ‘쇠퇴기’로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개입을 정당화했다. 정인 보, “터무니없는 거짓을 바로 잡는 글”, 󰡔薝園文錄󰡕 中, 정양완 옮김 (파주: 태학사, 2006), 40-72.

48 이양숙은 야나기의 조선미술론은 “민예론”의 지속적 영향 속에 있는 것으로 일반적 식민이데올로기 와 달랐다고 지적한다. 그의 “비애의 미”가 조선을 감상적으로 타자화해서 조선의 수동성을 강조했다는 해석에 대한 비판이다. 이양숙,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예술론”에 대한 고찰”, 󰡔민족문학사연 구󰡕 (2006), 123–153. 야나기의 피지배민족에 대한 공감적·우호적 미술론은 식민지 조선의 일본 지식인 사이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성제대 철학과 아베 요시시게도 그 사례로 볼 수 있다. 최재철, “경성(京城) 제국대학과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그리고 식민지 도시 경성의 지식인”, 󰡔日本硏究󰡕 42 (2009), 261–

279.

49石戶谷勉 杉原德行, “朝鮮の漢藥(一)”, 󰡔滿鮮之醫界󰡕 68 (1926), 17–2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