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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일본의 식물연구 전통

도쿠가와 시기의 식물연구 전통을 다룰 때 일본 역사학계가 흔히 취하는 태도로 외 래문화와의 접촉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

사상사학자 쓰루미 슌스 케는 일본인들은 일본이 고립된 섬나라로서

“세계에서 보다 선진적이며 보다 보편적

인 문화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다

”고 인식했고,

그 때문에 문화적 열등감, 타문화에 대한 호기심

,

새로운 것을 학습하려는 태도 등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2 이러한 인식의 영향만은 아니겠지만

,

일본 전통 식물학의 역사는 다른

‘우월한’

문화와의 접 촉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며 일본 식물 연구의 역사를 내재적 발달 과정으로서보다 는 외래

‘선진문명’과의 접촉을 중심으로 검토해왔다.

근대 식물학의 뿌리로 일반적 으로 소개되는

‘박물학’의 역사는 흔히 막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

1583~1657)이 1607년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의 󰡔本草綱目󰡕 (1596)을 들여와 도쿠가

와 이에야스에게 바치고 주석을 붙인 일에서 시작하여,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은 외국인이라는 지볼트

(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가 린네의 분류법을 ‘전파’

시킨 일로 대략 끝난다.3

도쿠가와 일본의 식물연구에서 타문화와의 교류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말할 것

2 쓰루미 슌스케, 최영호 옮김, 󰡔전향 : 쓰루미 슌스케의 전시기 일본정신사 강의 1931-1945󰡕 (서울: 형, 2005), 38.

3 앞서 언급한 上野益三, 󰡔博物学の時代󰡕; 大場秀章, 󰡔江戸の植物学󰡕과 󰡔植物学史・植物文化史󰡕; 矢部 一郎, 󰡔江戸の本草: 薬物学と博物学, ライブラリ科学史󰡕; 木村陽二郎, 󰡔江戸期のナチュラリスト󰡕 등이 모두 이런 구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식물학사가 아직 전문적 역사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하고, 식물학자 등이 주도하고 있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2절에서 더 논의된다.

도 없지만 이 절은

‘중국’

혹은

‘서양’으로부터 지식체계가 ‘전달’된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일본 사회의 조건을 바탕으로

‘쇄국 일본 ’의 독특한 대외 문화교류를

고려하고자 한다.4 왜냐하면 도쿠가와 식물연구의 전체상은

󰡔본초강목󰡕과 같은 한

권의 외국 서적이나 지볼트 같은 한 명의 외국인보다는 일본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 이 다양한 목적으로 식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모습에 의해 드러날 것이기 때문 이다.

도쿠가와 시기 식물 연구의 한 축은

󰡔본초강목󰡕을 들여온 하야시 라잔과 같은

유학자(儒學者) 혹은 유의

(儒醫),

곧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 의사들이 담당했다

.

오랜 군웅할거의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자들은 지배 기 반을 강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학자들을 정부의 교육과 문화의 담당자로 채용했다

.

이 일본의 유학자들은 과거제도 하의 중국이나 조선의 유학자들에 비해 정치적 영향 력이 없었고 출세의 길이 막혀있었지만 대신 권력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 을 추구할 자유를 누렸다. 예컨대 많은 유학자들이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부합한다

고 보고 자기 지방의 식물을 연구했다.5 막부의 초대 유학자로 네 명의 쇼군을 섬긴 하야시 라잔이

󰡔본초강목󰡕을 공부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유학자들의 식물 연구는 개

인적인 학문적‧수양적 관심에 의한 것과 막부나 번의 실용적 필요에 부응하는 두 가 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

일본 경제가 안정적 발전을 이루어간

18세기부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

첫 번째 사례 중 두드러지는 것은

18세기 초 가이바라 에키켄(見原益軒, 1630-1714)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오노 란잔(小野蘭山, 1729-1810)의 연구를 들 수 있다 .

막부의 유학자였던 가이바라 에키켄은 중국 문헌에 이미 기록된 것만이 아니라 일본의 식물 을 직접 관찰하고 채집하여

󰡔大和本草󰡕 (1709)를 펴내며 중국 본초를 바탕으로 한

일본 식물 연구에 획을 그었다

.

이러한 일본 식물 연구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는 오노 란잔이다

. 3년 동안 같이 살았던 손부를 몰라보았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

몰두한 그는

48권짜리 대작 󰡔本草綱目啓蒙󰡕 (1803-1806)

이외에도 많은 식물 관련 저작과 채약기를 남겼다.

󰡔本草綱目啓蒙󰡕은 󰡔본초강목󰡕에 대한 그의 강의를 모은 것

4 미타니 히로시는 일본에서 ‘쇄국’이 ‘국법’으로 선언된 것 자체가 19세기의 일임을 지적한다. 통신의 나라를 중국과 조선으로, 통상의 나라를 네덜란드, 류큐로 제한하고 일본 국민의 해외 도항을 엄금한 일 본은, 그러나 특히 1720년 기독교 서적을 제외한 서양 서적 수입을 허가하는 등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다양한 문화교류를 허용했다. 三谷博. 󰡔ペリー来航󰡕 (東京 : 吉川弘文館 , 2003).

5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과 비교한 일본 유학자들의 상대적 지위나 문화적 역할에 대해서는 마리우스 B 잰슨, 김우영 외 옮김, 󰡔현대일본을 찾아서󰡕 (서울: 이산, 2006), 283-333쪽을 참고했다.

으로

󰡔본초강목󰡕

외에도 중국과 조선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했다. 조선 문헌만 보아 도

󰡔鷄林類事󰡕, 󰡔芝峯類說󰡕, 󰡔訓蒙字會󰡕, 󰡔東醫寶鑑󰡕, 󰡔村家救急方 󰡕, 󰡔鄕藥採集月

󰡕, 󰡔鄕藥集成方󰡕, 󰡔鷹鶻方 󰡕

등을 참고했다.6 또한 그는 채약 여행을 통한 채집 활 동에도 열심이었다

.

그가

48세에 막부의 부름을 받기까지 교토에서 본초에 대한 강

의와 연구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음은 이 시기 일본에서 식물에 대한 연구가 전문화되고 확대된 정도를 반영한다

.

7

두 번째 경우인 막부나 번의 재정확보를 위한

“천산물(天産物 )”

즉 자연자원 조

사도

18세기부터 두드러진다 .

물산학(物産學) 혹은 명물학

(名物學)이라고도 불리는

분야인데 이노오 쟈쿠스이

(稲若水 , 1655-1715)에게 맡겨졌던 1000권 분량의 대대적인

󰡔庶物類纂󰡕

편찬 계획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노오는 당시까지의 성과를 망라해 온갖 사물의 정확한 이름을 담은 백과사전을 펴내고자 했는데, 362권까지 완성하고 세상 을 떠났다

.

이 대업을 물려받은 것은 제자인 니와 쇼하쿠(丹羽正伯, 1691-1756)로서, 그는 이미 막부의 명에 의해 국제적인 규모의 약재 조사에 종사한 경험이 있었다

.

바로 조선인삼 국산화와

󰡔동의보감󰡕

한약재의 원식물을 조사하기 위해 조선에서 벌 인 약재조사 작업이었다

.

니와는 이 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문헌 중심의 명물학 전통 에 가깝던 이노오의

󰡔庶物類纂󰡕

작업을 혁신하고자 했다. 니와는 막부의 지원을 받 아 각 번에 자연물 조사에 대한 상세한 요청서를 전달함으로써 대대적인 연구를 기 획했는데,

󰡔諸國産物帖󰡕을 펴내려던 그의 꿈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다만 일부 취합 된 내용이 조선 박물조사 내용 등과 함께

󰡔庶物類纂 󰡕에 포함되었고 덕분에 물산학

에 대한 각 번의 관심도 고조되었다.8 니와의 본초 연구는 약재 국산화와 같은 일본 사회의 실용적 관심과 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이 결합된 연구였고, 이러한 내적 요구 를 타문화와 교류하며 전개시킨 국제적 연구였다.9

6홍문화, “우리의 이두향약명이 일본의 본초학에 미친 영향”, 󰡔생약학회지󰡕 3 (1972), 1-10. 오노 란잔은 이와 같은 조선 전통문헌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이두명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잘못 인용한 경우가 많다 고 한다. 조선내에서도 드물지 않은 실수인데, 중국이름만이 아닌 조선 향약명조차 인용하려 했기에 더 착오가 많았다는 것이다. 메이지 시기 일본 학자들 중에 오노 란잔의 틀린 한자명을 지적하며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上野益三, 󰡔日本博物学史󰡕, 152.

7上野益三, 󰡔日本博物学史󰡕, 67-77.

8 1738-9년까지 어느 정도 보고가 완료되었지만 니와 쇼하쿠의 사후 자료는 손실되었다. 木村陽二郎,

󰡔江戸期のナチュラリスト󰡕 (東京: 朝日新聞社, 2005), 55-58. 각 번이나 현 등에 남은 자료들이 있다고 하는데, 최근 이 자료가 수집되어 편찬되고 있다. 盛永俊太郎, 安田健編, 󰡔諸国産物帳集成󰡕 (東京: 霞ヶ 関出版, 1985).

9 타시로 카즈이는 특히 이 약재연구의 국제적 성격을 강조했다. 田代和生, 󰡔江戶時代朝鮮藥材調査の硏 󰡕.

중국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와 적극 교류하며 성장했던 일본 식물학계가 지속적으 로 새로운 지적 자극을 찾은 것은 자연스럽다

.

중국 문화권을 벗어난 유럽 식물학 전통의 도입은

18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난학자 집단이 담당했는데,

본 초가 중심이 되면서 난학자들의 주류였던 의사들이 주도했다.10 난학자들이 나가사키 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유럽 문화와 교류한 방식은 문화의 교류가 수용자의 의지 가 없이는 매우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

예컨대 일본학자들은 네덜란드 상관장이 쇼군 의 주의를 끌기 위해 선물한 유럽의 동물지와 식물지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유럽 학문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이를 검토하고 번역하기 시작했고

,

일본을 방문 했던 첫 번째 구미 식물학자인 캠퍼(Engelbert Kaempfer, 1651–1716, 일본 방문

1690-1692)를 만났을 때는 일본 식물학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유럽 식물학의 일본 소개는 그것을 배워보겠다는 난학자들의 집단적 의지가 확실 해진 후에 시작되었다. 유럽 식물학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스기타 겐파쿠(杉田

玄白

, 1733-1817)와 함께 󰡔解体新書󰡕 (1774)

번역에 참여하며 난학의 서막을 열었던

나카가와 쥰안

(中川淳庵, 1739-1786)과 그들의 뒤를 따랐던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

, 1754-1809)였다.

이들은

1775년 일본에 온 린네(Carl Linne)의 제자 튠베리 (Carl

Peter Thunberg)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튠베리는 지구상의 자연 만물을 관통하는

보편적 분류법을 만들고자 하는 린네의 기획에 따라 파견된 인물이었다

.

튠베리는 이들이 원하는 유럽 식물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1년 남짓의 짧은 일정,

단 한 번의 에도 참부 여행을 제외한 여행 제한에도 불구하고 대략

1000종에 가까운 일

본 식물에 대한 정보를 유럽으로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고 린네가 오노 란잔의

󰡔花

󰡕 (1765)등을 참고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카가와, 가쓰라가와 역시 튠베리와 이후

로도 서신을 교류함으로써 린네 분류법에 대한 책을 비롯한 문헌을 지속적으로 소개 받았다.11 호혜적인 교류를 통해 유럽 식물학과 일본 식물학이 함께 발달하고 있었던

10일본에서 난학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 같은 독특한 개인을 제외하면 튠베리가 왔던

18세기 후반에야 처음으로 연구 집단을 형성했다. 난학은 18세기 후반 이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1790년 칸세이 이학금령(異学禁令)이 내려져 주자학을 정학으로 선언했던 일은 오히려 난학의 세력이 커졌음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이는 이학금령을 내렸던 막부가 곧 “시세의 요구”에 응해 난서번역소 書和解御用(1811)을 설치하여 ‘난서’의 번역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木村陽二郎, 󰡔江戸期のナ チュラリスト󰡕, 220. 전반적 난학의 흐름과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의 난학에 대해서는 Grant Kohn Goodman, Japan and the Dutch, 1600-1853 (Richmond, Surrey: Curzon, 2000).

11 이들의 이름은 튠베리의 󰡔일본 식물지󰡕에 실렸다. 木村陽二郎, 󰡔江戸期のナチュラリスト󰡕, 164-170, 188-194. 벨기에 학자 Rembert Dodoens (1517-1585)의 르네상스식 동물지와 식물지의 네덜란드판은 1750 년에야 󰡔阿蘭陀本草和解󰡕라는 책으로 번역되었다. 물산학에 관심이 많았고 학문을 장려한 것으로 유명 한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령으로 시작된 것이다. 요시무네는 이노오 쟈쿠스이와 니와의 국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