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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림기사 이시도야: 일본 과학활동의 ‘이식성’

이시도야는 현지 전문가로서 식민지 과학활동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서구식 근대과학 에 기반한 일본의 식민지 과학활동이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

이에는 세 가 지 연관된 계기가 작용했다

.

첫 번째는 일본 조림학계의 관행에 따라 수행되던 식민 지 조림사업이 실패한 것이었고

,

두 번째는 이 실패를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 서 알게 된 지역의 토양, 기후, 생태, 문화의 독자성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

마지막은 이렇듯 지역적 전문성을 갖춘 현지인들의 기여를 인정해 주지 않았던 중심부 학자 나카이의 태도와 방법론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절은 이시도야가 식민지 과학활동의 문제를 발견하는 과정

,

그에 따라 중심부 학계와 거리를 두고 현지인들과 유대를 강 화함으로써 현지 전문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식된 나무와 향토의 불화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조림전문가 이시도야 쓰토무는 갓 스물인

1911년 조선총독

부 산림과에 기수로 부임했다

.

서울 청량리의 묘포가 그의 담당이었고 서울에만 남 은 시범양묘장 운영을 위한 묘포작업이 주 업무였다

.

이때는 통감부 시절 설치했던 임업시험소는 폐소되고 지방의 모범양묘장 다섯 곳이 지방관청 산하로 이관된 후로 서, 초기에는 양묘일을 돕는 고원으로 있던 김이만과 정태현을 제외하면 총독부의

조림 담당자는 이시도야 뿐이었다

.

조선과 일본의 풍토나 수종이 크게 다르지 않으

“일본 본토의 경험 및 연구 결과를 바로 응용”하자는 생각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2

하지만 일본의 연구결과에 의존하겠다는 정책은 당장 문제를 드러냈다

.

총독부는

“교통이 편리하여 대중의 눈에 잘 띄는 산지,

강변 혹은 철도 주변

등을 골라 모범

림을 육성함으로써 식민 통치의 효율을 보여주려는 계획 하에

1912년 보조금까지 신

설하며 통감부 시절의 모범림 사업을 재개했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

조선에서 조 림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상태에서 일본의 관행에 따라 일본 밤나무

,

적송, 흑송, 오 리나무, 백양, 아카시나 일본사시나무 같이

“생장이 빠른 종”의 묘목을 들여와 심었

지만, 크고 작은 실패가 잇따르며 기대했던 효과를 얻지 못한 탓이었다

.

묘목만 나눠 줄 것이 아니라 현지의 달라진 토양과 환경을 조선에서 직접 연구해야 한다는 현지 기사들의 의견을 총독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3

총독부는

1913년 임업시험소의 개소를 허가했고 이시도야가 소장이 되었다.

하지 만 아직 총독부가 이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

초기의 임업시험소는 촉탁 한 명과 두 명의 상근 직원

,

다시 말해 도쿄의 나카이

,

서울의 이시도야와 정태현

(鄭

台鉉

, 1883-1971)으로 업무를 시작했고, 1914년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 1891-1931)가

합류함으로써 상근자 세 명의 자그마한 조직이 되었다

. 1922년 임업시험장으로 확대

되기까지 유지된 체제였다

.

4 이시도야는 이 세 명의 직원과 다양하게 상호작용하고 그 관계를 변화시키며 일본 조림정책이 현지에서 일으키는 문제점들을 파악해갔다

.

이시도야는 우선 현지 직원들과 함께 황폐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아카시와 가로 수로 도입되기 시작한 포플러 등의 외래종, 그리고 가죽나무, 산오리나무 등 일본종 의 양묘작업을 수행했고, 성공적 양묘와 조림을 위해 식재 실험을 진행했다. 그가 초 기 양묘 및 조림 작업부터 주목했던 것은 바로 일본종을 포함한 외래종을 조선에 이 식하는 데 수반되는 문제들이었다. 그는 일본에서와 다른 결과를 내는 일본묘목이나

,

훌륭한 외래종 묘목이 조림과정에서 일으키는 문제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조선의 토양과 기후

·환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2岡衛治, 󰡔조선임업사󰡕 하, 임경빈 옮김 (과천: 산림청, 2000), 307-333.

3 통감부 시기 전시행정이 축소되며 지방관청으로 양묘사업이 이관된 결과 자발적으로 양묘사업을 한 도는 1911년에는 강원도 밖에 없었고 1912년에 충청북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강원도가 있었다. 보조금 은 이를 확충하려는 노력이었다. “地方造林事業槪要”, 󰡔朝鮮總督府月報󰡕 2(11) (1912년 11월), 1-11. 임 업시험장 편, 󰡔林業試驗場 六十年史󰡕 (서울: 山林廳 林業試驗場, 1982), 1-22.

4임업시험장은 지속적 증원을 했지만 1937년에도 기사 6명, 촉탁 2명, 기수 16명, 해방 당시 장장인 특 임관 1명(현 1급이상), 고등관 7명, 판임관 20여명의 조직으로 남았다. 임업시험장 편, 󰡔林業試驗場 六十 年史󰡕, 5-9.

아직 인공 조림의 경험이 일천한 일본에서 조림과 토양 및 기후·환경의 관계에 대한 실질적 연구는 널리 수행되지 않고 있었다

.

환경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구미로부터 환경의 영향을 극복할 수 있다는 비싼 종자를 도입하는 방식을 선호했다.5 일본의 전문가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외국의 우수한 수 종을 도입하여 일본의 황폐한 숲을 쉽게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하에 여러 우수 수종을 들여왔는데

“황금수(黃金樹 )”, “영목(靈木)”

등으로 불리며 대대적으로 소개된 미국개오동도 그런 사례였다

.

성장 속도나 목재의 활용 측면에서 기대가 높았던 이 나무는 조선에까지 도입되어 이시도야에게 양묘와 조림 시험이 맡겨졌다. 결과는 만 족스럽지 않았다

.

양묘에는 성공했으나 묘목을 산에 옮겨 심자 잘 자라지 않았던 것 이다. 이시도야는 일본에서 아직도 인기가 많은 이 외래종의 문제를

1917년 󰡔大日本

山林會報

󰡕에 아사카와와 함께 보고 했다.

그는 기대했던 외래수종 중에 양묘장에서 는 좋은 성적을 보이다가 실제 산야의 토양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며 외 래수종에 의존하려는 일본 임업계의 관행을 꼬집었다.6

미국개오동 실험결과는 이시도야로서는 예상했던 바일 것이다. 그는 이미 다양한 양묘와 조림 실험을 통해 외래종의 문제에 대해 파악하고 토종 조림을 준비해 왔다

.

그 결과는

1917년과 1918년 각각 󰡔大日本山林會報 󰡕와 󰡔朝鮮彙報󰡕를 통해 발표되었

다. 우선 역시 아사카와와 함께 발표한

󰡔大日本山林會報 󰡕의 글은 조선산 잎갈나무

종자로 묘목을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조선 토종 나무로 양묘와 조림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기본 기술을 확보했다는 이야기였으니 굳이 일본 나무를 도입하 지 않고 조선 나무로 조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이다. 이들은 같은 종의 일 본 나무에 비해 토종이 현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점도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

철도 침목 용재로 사용되는 유용한 나무인 잎갈나무를 일본 나가노현 신슈와 가라후토

(현

사할린) 지방에서 도입해 왔는데, 이들이 파종에 성공한 조선산 잎갈나무가 시험재배 중인 신슈 종이나 가라후토 종과 비교할 때 발아율과 생장율

,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는 비교표가 제시되었다

.

7

5 일본에서 임업은 쇼와기 전반까지도 “급하지 않은 사업”으로 간주되어, 천연갱신 등에 의존했고 그나 마 기술이나 돈이 부족해 큰 실적이 없었다고 자체 평가된다. 목재 이입 자료를 보면 식민지 산림자원 에 의존할 수 있는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공 조림의 개척지로 볼 수 있는 홋카이도의 경우, 외래종 만능 의 풍조가 바뀌어 토종 조림을 추진한 것은 1927년으로 기록된다. 이론 부문에서는 독일, 프랑스에 대한 의존이 심했지만, 1910년대부터 독자적인 일본삼림대 정립 노력 등이 있었다. 大日本山林會, 󰡔日本林業 八十年史󰡕 (東京: 大日本山林會, 1962), 45-63, 64-71등.

6 石戶谷勉,·浅川巧, “朝鮮に於けるカタルペ-スペシオサの養苗及造林成績を報す”, 󰡔大日本山林會報󰡕

414 (1917), 36–40.

식물학적으로 조선에 있는 수종과 동일하다고 판명되어 이식만 하면 된다고 생각 했던 일본 묘목이 조선에서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증거는 이것만이 아니었 다. 이시도야의

1918년 보고서 역시 같은 종의 조선 수종과 일본 수종을 비교해 조

선 수종의 적합성을 역설했다

.

예를 들면, 겉모양에서는 차이가 없는 일본산 적송과 조선산 적송을 비교 조림했더니 후자가 내한성이 좋고 충해에 강해 훨씬 좋은 성적 을 냈다

.

밤나무도 일본 밤나무는 같은 종인 조선 밤나무보다 산출이 적었고, 일본의 산개암나무는 조선산 시베리아 개암나무보다 훨씬 생장속도가 느렸다. 조선 각지에 서 시험 재배 중인 일본 대표 수종 삼나무와 편백나무의 이식 결과는 특히 나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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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도야는 이러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의 환경을 비교했다. 사실 외래 수종을 이식하려던 일본의 조림기사들이 이식환경과 토양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

우수 수종은 모두 조선과 같은 기후대인 온대수종 중에서 선택되었고

,

앞서 말했듯 선정의 이유 중 하나로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는 점이 고려되었 다. 하지만 비슷한 기후대인 한국으로 옮겨심어도 문제가 없으리라 예상되던 일본 나무들이 고전을 하고 있는 상황은 이 정도의 고려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보여주었 다. 특히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이식하는 데 참패한 것은 획일화된

“기상관측표”에

의존한 판단이 충분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

삼나무와 편백은 조선과 같은 기후대인 일본의 온대 지역에서도 잘 자랐다. 하지 만, 일본의 온대에서는 동상을 입지 않고 겨울을 나던 이 나무들이 조선에서는 겨울 이 지나면 말라갔다

.

이시도야는 일단 종래의 기상관측표를 보완했다. 평균온도, 습 도만이 아니라 한파의 지속 기간과 한파 이후의 기온변화

,

바람의 세기 등을 고려했 다. 일별 최저온도, 최고온도, 평균습도, 강수량, 겨울강수량, 계절별 비온 날 수, 맑 은 날 수 등도 추가했다. 이렇게 비교한 결과 비슷한 평균기온을 가진 일본의 지역 에 비해 조선 대부분의 지역은 겨울의 최저기온이 낮았고

,

맑은 날 수가 많은 건조 한 겨울날씨라는 차이가 있었다

.

겨우내 나무가 수분을 보유하고 있기 힘든 조건이 라서 봄 무렵이면 고사에 이른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일본에서 이식해온 적송, 밤나무, 개암나무가 같은 종의 조선 나무보다 산출이나 성장이 뒤쳐지는 것도 월동 중에 해를 입는 것과 관련되어 보였다

.

그는 조선의 나무는 오랜 세월 조선의 기후 에 적응했기에 일본의 유사종과는 겨울 동안 수분의 보유량 등을 조절하는 생리적

7石戶谷勉,·浅川巧, “テウセンカラマツの養苗成功を報す”, 󰡔大日本山林會報󰡕 419 (1917), 36–40.

8石戶谷勉, “朝鮮に移植せられたる「スギ」「ヒノキ」の生育”, 󰡔朝鮮彙報󰡕 4 (1918),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