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편향되어 일본의 문화적 성취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조선인들의 태도는 식민지 시기에 분명히 달라졌다
.
중국의 몰락과 일본의 부상,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경험한 조선인들은 메이지 일본의 역사인식을 쉽게 받아들였다.
역사는 단선적으로 진보하고, 그 진보의 최정점에는 모든 문명이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는 근대화된 서 구가 있으며,
그 이외의 문명은 그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이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조 선을 지배한 일본을 점차 조선을‘근대화’시킬 자격을 갖춘, ‘서구화’에 성공한 나라
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들은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든 아니든, 독립을 원하든 아니 든 일본을 매개로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점차 합의를 보이면서,
일본이75 정민은 成大中과 元重擧도 각각 일본록과 화국지를 저술했다는 점을 들어 일본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중 어느 책도 간행되어 널리 읽힌 흔적은 없다. 정민, 18세기 조 선 지식인의 발견, 64.
76 김두종, 조선의학사 전, 247-8. 일본상품의 유통과 그에 대한 김려의 평가에 대해서는 강혜선, “조 선후기 박물학적 취향과 김려의 한시”, 55. 물론 조선 식물의 일본 전래도 많이 이루어졌다. 佐藤信一,
“日鮮植物交換史實の二三に就て”, 林學曾雜誌 15 (1933), 884–893.
77조창록.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통해 본 서유구의 일본 인식: 和漢三才圖會를 인용한 사례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27 (2012), 103-130.
78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조선인들이 나름의 정세인식, 문명인식에 따라 취한 전략인데, 그 자체로는 한 문화의 내적 건강성이나 가치를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 이 조선의 사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데는 오히려 자신들의 서구 문화에 대한 사대성에 대한 자괴감이 나 중국문명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을 수 있다.
약속대로
“문명화”를 추진해 줄 것을 요구해 식민지에 실질적 변화들이 일어나도록
압력을 넣었다.
식민지 조선에 식물연구를 위한 기반이 갖추어져가는 과정도
“과학 문명 ”을 습득
하겠다는 조선인들의 의지와 노력을 잘 보여준다.
물론 조선식물에 대한‘근대적’
연 구를 시작한 것도,
식민지 연구집단의 다수를 이룬 것도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일본 인들이 식민지 조선의 식물을 연구하는 일은 일본에서 완성된 근대 식물학을 조선에‘이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을 강점한20세기 초두에 일본에 근대식물학
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던 점은 분명하지만 그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학문적 발달만을 의도적으로 추구한 식물학계도, 응용분야인 임학이나 농학계도 식물학 연 구기반을 확장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철도, 전신 등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다양한 투자가 필요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제국주의적 전쟁의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당장 보상이 없는 과학기술 분야에 적 극 투자하지는 않았다.
이 절은 임학, 약학, 박물교육 분야를 택해 식민지 조선이 일 본의 근대식물학이 이식된 곳이 아니라 도리어 일본의 근대식물학을 개척한 기회의 장소였음을 살펴보려 한다.
임학
임학·임업 분야는 식민지의 삼림자원을 개발하려는 일제의 전략적 움직임에 의해 추 동된 분야로 식민지가 확보되기도 전에 이미 각종 조사가 시작되었다
.
약학이나 박 물교육과 비교하면 당국의 전략적 개입이 가장 두드러졌지만, 실제 식민지에서 임업 관련 연구가 본격화되는 데는 식민지 조선에 정착한 연구자들의 역할이 컸다.
조선 에서 연구의 기회를 찾은 일본인 연구자들은 새로운 풍토를 고려한 활발한 연구를 토대로 조선에서 임학 연구의 기반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일본 임학의 발달을 자극 했다.79일본에서 임학은 아주 서서히 발전된 분야였다
. 1880년대 초반부터 개발로 인한
삼림자원 황폐화와 고갈의 문제가 제기되고 삼림의 보호와 개발을 위한‘과학’적 대
책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산림국 산하에 임업시험장이 확대 설치된 것은1910년,
일본임학회가 만들어진 것은1914년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상당히 그 발전이 늦었
다. 메이지 시기 내내 이루어진 산림 황폐화에 대한 대응은1881년 민유림과 관유림
79이는 일본의 대중적 제국주의 혹은 식민자 식민지의 성격을 반영한다. 1장 각주 8 참조.
을 확정해 세수의 토대를 마련한 일과
1886년 전국 산림의 관할구역을 나눈 임구서
(林區署)
제도 정도로, 조림은 大日本山林會를 결성한 관련 업자들이 사업상 추진했을 뿐이었다
. 1898년에야 삼림 관련 기본법인 森林法이 제정되었는데 보안림과 삼
림경찰 및 남벌,
도벌, 방화 등의‘삼림범죄’에 대한 규정만을 담은 소극적인 것이었
다. 임학자인 야마모토 히카루(山本光, 1908-2000)에 따르면 처음으로 적극적 조림의 필요성을 명시한1907년의 개정 삼림법은 재정 지원 방안이 없어 실효성이 없었
기에 실제로 일본 본토에서 국가차원의 조림이 시도되고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임업 장려비 예산이 신설된1919년 이후라고 한다.
80이에 비하면 조선에서 임업의 진전은 빨랐다. 이미 강제병합
10년 전에 시작된
삼림자원‘개발’을 위한 연구는 식민지의 확보와 함께 더욱 가속되었다.
일본은1901
년과
1905년 기사들을 파견해 조선의 삼림자원 및 임야면적 조사를 수행함으로써 조
선이 일본처럼 국토 중 임야비율이 높을 뿐 아니라 함경도와 평안도 산간은 아주 풍 부한 수림 지대임을 파악했다
.
일본은 개발의 이익을 양국이 나누는 조건으로1906
년 대한제국정부와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 삼림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후 삿포 로 농학교 출신의 임업기사 및 임무관들을 여러 명 초청해 조선 삼림개발에 착수했 다. 1907년에는 농상공부 하에 임업과를 설치하여 수원, 대구, 평양에서 양묘사업을 시작함과 동시에 경성 및 평양에서 모범조림을 실행했다. 1908년 임업과는 산림국으 로 승격되었고,
묘포가 있던 수원, 대구, 평양, 목포 및 경성의5개소에 임업사무소가
설치되었으며, 삼림관리에 대한 기본법인삼림법과 그 시행규칙도 갖추어졌다.
1910년 초에는 한국정부와 함께 임적(林積 )조사에도 착수했다.
81 이런 행보는 강제병합 이후로 더 활기를 띠어
1911년에는 삼림법을 보완해 삼림령을 제정했으며 ,
1912년 삼림산야 및 미간지 국유사유 구분표준, 1915년의 국유임야 구분 조사내
규, 1918년의
조선임야령
등 일련의 법안으로 임야 소유권 및 개발에 대한 법적 근거를 완비함으로써 일본 자본이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완비했다.8280 도쿄 임업시험소, 농상무성 산림국(1881)의 개설과 대일본산림회의 결성(1882)은 모두 1880년대 초반 이었다. 山本光, 林業史·林業地理 (東京: 明文堂, 1961); 日本科學技術史大系 15권, 265-289. 임학자 야마모토 히카루는 도쿠가와 시대의 임업사를 거의 무시해도 좋은 것 정도로 다루었다. 大日本山林會,
日本林業八十年史 (東京: 大日本山林會, 1962)는 간략하게나마 임정에 대한 간헐적 관심과 그 변화를 보여준다. 다음 Totman의 글은 일본 3대 수림 중 하나인 아키타 현의 삼림대가 17-8세기 삼림자원 고갈 이후의 번의 대응에 의한 것임을 논했다. Conrad D. Totman, The Origins of Japan’s Modern Forests: The Case of Akita (Honolulu: Univ. of Hawaii Press, 1985).
81 岡衛治, 조선임업사 상·하, 임경빈 옮김 (과천: 산림청, 2000). 오카 에이지의 조선임업사는 1941 년 조선산림회가 임정 30년 기념으로 발간을 추진한 것으로 전시 상황으로 인해 1944년 12월에야 출판 되었다.
식민지의 임산 자원을 개발하려면 조선에 임업 교육 및 연구 기반이 필요하리라 는 점은 분명했지만
,
어느 정도의 투자를 할 것인지는 물론 일본의 정책에 달린 문 제였다. 일본은1906년 양묘 작업을 위한 기술원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인 임업교육
에 착수했다.
대한제국이 세웠던4년제 농상공학교에서 수원농림학교를 2년제로 축
소·분리한 뒤 그곳에 일본 교관을 초빙해 양묘기술원 양성을 위한1년제의 속성과를
마련한 것이다.
83 당국의 목표는 일본 기사들의 지시를 이해하고 수행할 보조적 인력 을 양성하겠다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임업속성과는2회에 걸쳐 20명이 못 되는 졸업
생을 배출하고 폐지되었는데, 아직 함경도와 평안도의 국유림 개발 이외에는 전시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임업정책에 그리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 로 조선인 인력이 처음 동원된 작업은 일본이“새로운 정치의 효과 ”를 보여주려 조
성했던 경성과 평양의 풍치림,
사방림 공사나 모범 묘포에서의 양묘 작업이었는데,
이권침탈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대를 무마시키려는 작업들이었다.
84이렇게 한말에 시작된 임업교육은 강제병합 이후로도 존속되었는데, 농림업을 위 주로 한 조선 개발 계획을 조선인들의 도움없이 수행할 수는 없었던 때문일 것이다
.
김근배의 연구가 잘 밝혔듯 서구 과학문명을 지도해 주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에서 과학기술 분야의 인력 성장을 오히려 제한했다. 식민지 유일의 대82 총독부는 “조림하기 위하여 국유임야의 대부를 받은 자에 대하여 그 사업을 성공한 경우에는 특히 그 삼림을 양여할 수 있음”이라는 삼림령 제7조의 조항으로 일본 자본의 진출을 장려했고, 조선의 삼 림은 점차 민간자본에 의해 개발되었다. 일본의 목재 수요가 제1차 대전의 호황과 도쿄대지진 (1923) 이 후의 건설 등으로 줄어들지 않는 상황에서 식민지 진출의 이익은 높았다. 전체 임야의 절반이 넘던 국 유림은 1939년이면 3분의 1 정도가 된다. 국유림/민유림 비율 변천표는 岡衛治, 조선임업사 20; 배재 수, 한국의 근·현대 산림소유권 변천사 (서울: 임업연구원, 2001).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는 각종 공 업원료를 대체하는 다양한 임산자원이 개발되어 목탄, 옻, 평양밤, 호도 등은 물론 떡갈나무나 굴참나무 등의 수피, 오배자, 송지 등이 일본으로 대량 수출된다.
83 조선은 1883년 미국에 보빙사 시찰단을 파견한 이후인 1884년 미국기계 등을 도입해 시험농장을 열 었다. 비록 시험농장은 자금과 인력의 문제로 1888년 이후 거의 방치상태에 있다가 1905년에야 농상공 학교의 부속농장으로 부활된 셈이지만, 조선정부는 지속적으로 농업의 근대화를 고민했다. 고종의 1895 년의 교육조서는 “허명을 버리고 실용을 취하는 교육”인 실업교육을 강조했고, 1899년의 교육칙서는 다 시금 농상공분야의 실업교육을 강조했다. 1899년 개교한 상공학교에 농과가 추가된 것은 1904년이다. 일
본은 1906년 인력부족과 조선인의 인식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 농상공학교에 개입해, 농과는
수원농림학교, 공과는 경성공업전습소, 상과는 선린상업학교로 분리시켜 ‘조선의 수준’에 맞는 2년제로 축소를 단행했다. 농업생명과학대학, 농학교육 100년: 1906-2006 (서울: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2006), 30; 한국농업교육사 편찬위원회, 韓國農業敎育史: 泉溪 宋海均 敎授 華甲紀念 (서울: 大韓敎科
書, 1994), 46.
84 임업시험소는 1907년까지는 수묘양성소라고 불리웠다. 서울 백운동과 평양 모란대가 일본 통치의 시 혜를 선전하기 위해 선택된 지역이었고, 이 선전용 조림에는 대한제국이 설치했던 뚝섬 원예시험장에서 나온 소나무(27,000그루), 해송(1,900), 상수리나무(14,700)외에 일본에서 수입한 산오리나무(4,200), 벚나 무(332), 단풍나무(243) 등이 심어졌다. 초기 조림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경비가 소요되는 자연증식에 의존했다. 조선임업사 상, 8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