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법적안정과 신뢰보호
2. 법치주의의 필요불가결성
법치주의가 발전하면 시장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경제의 발전을 가 져온다는 명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명제의 근거를 법치 주의가 가져오게 마련인 법제도의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에 두고 있다.
계약법, 재산법 등 법제도의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이 시장의 행위자들 로 하여금 안심하고 계획을 세우며 투자를 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시장경제가 앞선 나라들이 하나 같이 법치주 의가 앞선 나라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 라가 중진국의 지위에서 선진국의 지위로 나아가면서 시행착오적으로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경제위기에서 단 기적인 외채의 급증으로 일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IMF 국제구제금융 으로 회생하면서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구조조정, 투명성의 확보, 비자금의 문제, 파생소수주주권, 규제철폐, 회사파산 및 회생제도 등 많은 것을 체험해 오고 있다. 법치주의가 확립되지 아니하면 선진국으로의 한 단계 도약이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 서도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문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경 제발전과 법치주의를 결부시키는 처방을 내놓고 있다7). 더구나 최근
7) David M. Trubek and Albaro Santos, ed., The New and Economic Development: A Critical Appraisal,(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D.M. Trubek, “Law and Development” in N.J. Smelser and Paul B. Baltes, eds.,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and Behavioral Sciences, Oxford: Pergamon, 2001); David M. Trubek and Marc Galanter, “Schlars in Self-Estangement: Some Reflections on the Crisis in Law and Development Studies in the United States,” Wisconsin Law Review, 1974, 1062-1102면; David M. Trubek, “Toward a Social Theory of law and Development,”
Yale Law Journal, 82권 1-82면(1972) 등 참조.
에는 신자유주의의 기치 하에 거침없이 경제발전을 위한 법치주의의 처방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집단기억 속 에는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의 권위주의체제 = 국가주도 하의 빠른 경제성장의 체험을 아름답게 간직하면서, 그리고 경제에서의 국 가의 역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다른 한편 “세계화” “규제 철폐” “선진화”를 주문같이 외고 있다. 이때의 규제철폐는 반시장적인 규제입법의 철폐를 의미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한 만큼 지성적으 로는 우리의 과거의 권위주의체제 = 법치주의 후퇴 = 급속한 경제성 장의 체험과 경제발전(또는 도약)을 위한 법치주의의 처방을 어떻게 조화롭게 체계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주변 지성인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공식은 경제성장은, 적어도 도약단계(take-off stage)에서는, 독재(우리의 경우 권위주의)가 단연 낫고, 고도화 단계에서는 (자유)민주주의 = 법치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및 대만)의 경험은 확실히 이 공식을 지지한다.
지금의 중국을 보라고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하면서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지금의 인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또 우리나라의 발전을 부러워하면서 찾아오는 가난한 제3세계의 지성 인 방문객들에게 너희나라도 경제발전하려면 독재하라고 차마 주문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체험이다. 모든 독재체제가 다 경제성 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독재체제 외에도 정치지도자의 지도력8), 낫게 살겠다는 성취의지9), 정치적 안정성 등 이 법치주의와 함께 중요한 요인들로 떠오른다.
나아가 법치주의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예측가능성 및 안정성 자체 는 아닐지라도 이에 상당하는, 시장경제 주체들에게 투자의 유인을
8) Yoo Se-Hee, ed., Political Leadership and Economic Development: Korea and China, (Seoul: Institute for Sino-Soviet Studies Hanyang University, 1983) 참조.
9) David C. McClelland, The Achieving Society, (New York: Free Press, 1961) 등 참조.
주기에 충분한 예측가능성 및 안정성을 장기 독재체제가 줄 수 있다 면 경제성장은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10)을 우리의 과거의 체험을 근거로 하여 행할 수 있다. 우리의 과거 권위주의체제 하의 경제성장은 확실히 이 명제를 지지한다11). 중국의 경제성장도 이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의 틀 속에서는 우리나라 와 중국의 행태는 확실히 차별화된다. 우리의 경우에는 자유민주주(및 법치주의)와 시장경제(지금에 비하면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겸하고 있 었지만)의 틀(1948년의 헌법체제)을 세워놓고 시작하였다. 그리고 권 위주의는 이 기본체제를 다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둔 채 이와 괴리되 는 권위주의적인 정치관행(practice)의 모습으로 독재가 행하여 졌다.
그리하여 헌법학적으로 우리는 “헌법규범과 정치관행의 괴리”의 현상 을 지적하곤 하였다12).
우리나라 정부주도하의 경제성장은 민법, 상법, 사법권 독립의 원칙 을 담은 법원조직법 등과 같은 법치주의의 기본틀의 바탕 위에서 잇
따른 5개년 경제계획에 맞추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유도하는 외자도
입법, 외환관리법, 무역거래법, 수출진흥법, 자본시장육성법 등 그 때 그 때 필요한 수많은 각종의 수단적 입법(instrumental legislation)을 제 정하고 이에 따라 우수 생산업체 수출업체들에게 세금면제, 특별자금 (외환)지원, 포상 등과 같은 적극적 유도정책과 함께 면허나 특혜의 박탈 등의 소극적 유도정책을 시행하여 경제성장과 소득증대를 이루 어 나갔다. 법치주의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민법 등)과 사후적으 로 개입하는 사법부의 존재 및 시장행위자의 이니시어티브가 특징인
10) Trubek의 1972년 논문은 그 말미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이러한 생각의 일단을 Brazil의 경험에 비추어 개진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전게 “Toward a Social Theory of Law and Development,” 48-49면 참조.
11) Frederic C. Deyo, e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New Asian Industrialism,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7) 등 참조.
12) Choi Dai-Kwon, “Constitutional Developments in Korea,”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v. 6 n. 2, 27-48면, 특히 29-38면(2003).
데 비하여 우리가 체험한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모델에서는 수단적 특별입법의 제정과 사전적인 행정부의 주도로 시장행위자의 이니시어 티브를 촉진하는 법집행을 특징으로 하였다. 이러한 틀 속에서 소위 행정지도(行政指導)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행하였다. 행정지도를 포함하는 이러한 틀은 경제성장이 고도화되면서 경제에 오히려 비능 률을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에 등장하는 정치적 민주화 및 신자유주의사상의 유입과 맞물려 이제 규제철폐와 법치주의로의 고도 화는 시대의 요청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의 권위주의체제는 법치주의·민주주의의 바탕 위에서 이 와 괴리되는 권위주의적 정치관행과 함께한 정부주도의 시장경제 중 심의 성장경제정책의 집행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 러나 중국은 공산주의 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전체주의+국가계획경제 (command economy)체제로 시작하여 시장을 허용하는 공산당 1당지배 의 권위주의체제로 이행하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아직도 1당 독재의 나라이며 정치적 자유나 경제적 자유의 면에서 헌법규범과 정 치행태의 괴리현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주도하의 경제성장으로 태어난 시장경제가 그 필요에 의하여 점차 법치주의의 성장을 불러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법치주의의 성장이 어디까지에 이를 것인지, 민주화에 이를 것인지의 문제는 관심포인트 가 된다함은 잠시 후에 언급하는 바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그 후의 전개과정에서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선 진화의 점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가져오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독재체제=경제성장면에서의 유사성으로부터 마치 우리의 독재나 중국 의 독재(공산독재의 점에서 북한의 독재)나 다름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경우에는 더러 위협받기는 하였지 만 사법권(위헌법률심사제도 포함)의 독립을 비롯하는 법치주의의 틀 이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소위 독재체제 하에서도 멈추
지 아니하고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노동운동이 헌법이 규정하고 있 는 기본적 인권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를테면 1987년의 민주화는 헌 법학적으로는 헌법규범과 정치관행 사이의 갭을 없앤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갭을 없애는데 기여한 요인으로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존재와 억압이 역으로 자유사상의 교육효과를 가져온 이 헌법 하의 자유주의의 확산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3). 또 하나의 요인 은 비록 독재체제 하에서이지만 경제성장이 가져온 자유주의적 효과, 특히 중산층의 성장14)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주에 여유를 가지게 된 중산층의 성장은 자유의 희구(希求), 자유주의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 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여 얻어낸 우리의 민주화는 그 후의 평화 적 정권 교체를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전개 및 1987년에 도입된 헌법 재판소의 사법적극주의와 함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의 진전을 가져왔다. 다만 그 선진국화를 위해서는 후술하는 바와 같은 또 한 단계 도약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의 자유화 민주화의 경험에 비추어 중국의 빠른 경제성 장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중국의 헌법이 결 코 자유민주주의 헌법은 아니지만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빠른 경제성 장은 의문의 여지없이 중산층의 성장을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이 중산층의 성장이 중국 사회에 정치적 자유화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 냐, 내 배가 부르고 등 따뜻하면 정치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계층으로 머무르고 있을 것이냐, 요컨대 민주화가 전개될 것이냐 하는 점이 관 전의 포인트이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그리하였듯이 중국도 권위주의 정부주도 하의 경제성장드라이브(외자도입-수입대체산업육성-수출주도 산업육성-외환관리 등)도 시장의 틀을 만들고 그 틀 위에서의 경제성
13) 전게 Choi, “Constitutional Developments in Korea,” 34-35면; 전게 Choi, “A Legal Profession in Transformation,” 180-182면.
14)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