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조선시대 "

Copied!
8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특집 국토인문학

조선시대

국토 인식과 기행사경

(紀行寫景) 문화

박정애│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email protected])

03

들어가며

1859년 무렵 어느 날, 서울 남산 아래 겸가정(蒹葭亭)에 서는 10여 명의 문인이 판 놀이를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함께 한 인사들은 집주인 유본정(柳本正, 1807~1865)과 그의 지우들이었고, 전국의 대표적 명승 지 81곳이 표시된 ‘팔선와유도(八仙臥游圖)’를 펼쳐 놓고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만큼 이동하면서 술을 마시고 해 당 명승을 제재로 시를 짓는 놀이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그림 1> 참조). 놀이규칙은 정중앙에 자리한 겸가정, 즉 한양에서 출발해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 도·함경도·평안도·황해도를 거쳐 도성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을 가장 먼저 마치면 이기는 것이었다. 이 놀이는 직 접 봇짐을 매고 길을 나서지 않고도 각지의 명승을 두루 탐 방할 수 있는 데다가 적당한 취기가 시흥(詩興)을 돋우었을 테니 여러모로 글깨나 읽은 문인들이 즐기기엔 안성맞춤이 었던 셈이다. 이처럼 여행 형식을 차용한 판 놀이는 중국 송나라에서 시작되었고, 조선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국 내 명승으로 대체한 ‘남승도(覽勝圖)’ 놀이가 성행하였다.

남원의 유생 나내석(羅乃碩)이 1834~1850년 사이에 지 은 것으로 추정되는 「팔역가(八域歌)」도 함경도 백두산에 서 출발해 남진하면서 팔도를 유람한 후 경기도에 이르 는 여정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편찬한 「택리지(擇里志)」의 내용을 기행가 사 형식으로 번안한 작품으로 파악되었다. 저자가 전국의 자연적, 인문적 경관과 함께 해당 고을에 얽힌 역사적 사 건과 설화 등을 구어체로 풀어냄으로써 일종의 역사지리 교본을 만든 것인데, 여행기처럼 서술해 현장감을 살리고 독자의 흥미를 배가시켰던 것이다.

「팔선와유도」와 「팔역가」는 모두 지역적 범위가 팔도를 아우르고 있고 기행유람의 장점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이는 19세기 경향(京鄕)의 지식인

(2)

2 3 4

들이 자신의 거주지 외에 전국 방방곡곡의 지리정보에 해 박했고, 유람문화가 다양한 양태로 변용되었음을 말해준 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이후 가속화된 사회경제적 변동과 각종 지리지와 지도의 보급, 기행유람 풍조의 확산 에 따른 기행문학과 실경산수화 창작 등 문화계 동향과 맞 물려 있다. 특히 도성은 물론 팔도 구석구석의 명승지를 재현한 각종 시각자료는 오늘날 국토 순례의 길잡이로 삼 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조선 땅의 시각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산수 자연은 10세기에 이미 회화예

기부터 꾸준히 그려졌고, 임진 왜란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면 서 전국의 명승명소가 작화 대 상으로 떠올랐다. 또한 18세기 이후 기행사경(紀行寫景) 풍 조가 일대 문화현상으로 정착 되면서 전 국토의 경관이 시 각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당 대 화단을 가름하는 대표적 장르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배층 문인들이 집 결해 있던 한양과 순수 유람 처로 각광받은 금강산을 제외 한 지방 경관의 시각화 작업 은 단기 혹은 장기 업무로 현 지에 파견된 중앙의 관리들이 주도하였다. 가령 ‘낙민루 (樂民樓)’는 1674년(현종 15) 함경도관찰사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기획으로 제작된 「함흥십경도」에서 파생된 작품에 속한다. 화면은 함흥성의 관문인 낙민루와 성천 강을 가로지르는 만세교(萬歲橋)의 풍광으로 채워졌다 (<그림 2, 3> 참조). 남구만이 화면 상부에 낙민루의 위 치와 연혁, 주변의 경치에 대한 설명을 써넣고, 화공을 동 원해 그 내용을 시각화한 탓에 지리지와 그림이 조합된 모 양새다. 남구만이 방문객이 드물었던 북방의 오지에 숨어 있는 경승을 외지인들에게 알리고자 고안한 형식으로, 아 직 지방의 명승에 대한 이해가 일천했던 시대 분위기를 엿 볼 수 있다.

<그림 1> 유본정. ‘팔선와유도’. 「팔선와유도」. 1859년경. 목판화. 서울대학교 규장각

(3)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우리나라 국토 경관의 시각화 움직임이 본궤도에 오르기 까지는 문인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역 할이 컸다. 정선은 1711년(숙종 37)에 가진 금강산 유람을 계기로 전도(全圖)와 부분도(部分圖)로 이분되는 금강산도 의 기본 형식을 정립하는 동시에 조선 땅의 풍토에 어울리 는 개성적 화법을 창안하였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 강전도’는 정선이 금강산 전경(全景)을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를 품은 태극 형상으로 변주해낸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림 4> 참조). 정선은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 의 주된 활동지였던 도성 지역은 물론 지방관으로 체류한 경기도와 경상도, 유람 목적으로 방문한 충청도와 강원도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직접 답사하며 지역별 명승명소 도의 정형을 확립해 나갔다.

황진이(黃眞伊), 서경덕(徐敬德)과 더불어 개성 삼절(三絶) 로 회자되던 ‘박연폭(朴淵瀑)’을 찾아간 정선은 폭포 길이 를 두 배로 늘이고 농묵의 바위와 흰 물줄기의 강렬한 대 특집 국토인문학

<그림 2> 작자미상. ‘낙민루’. 「함흥내외십경도」. 1731년경, 종이에 채색. 51.7×34.0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3> 1920년대 함흥 낙민루와 만세교의 모습

<그림 4> 정선. ‘금강전도’. 1734. 종이에 담채. 94.1×30.7cm. 삼성미술관 리움

2 3

(4)

비로 화면을 채웠다(<그림 5, 6> 참조). 단순히 눈에 보이 는 경관을 화폭에 옮기는 데 주력하기보다 자신이 현장에 서 느낀 감흥을 과감한 변형과 생략, 수묵 효과로 극대화 시켜 표현하기를 즐겼던 것이다. 정선의 발자취는 그의 생

존 당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세기까지 그 여운이 전해졌다. 무엇보다 지형도식 묘법의 한계가 노정되어 있 던 17세기의 실경산수화를 표현성이 담보된 예술품으로 격상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지리학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함께 전국 지 리지의 편찬과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지도 제작 기술도 비 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와중에 회화적 표현을 적극 가 미한 새로운 유형의 지도, 즉 ‘회화식 지도’가 출현하였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해동지도(海東地圖)」는 전국의 군 현지도와 주요 관방도 등을 모아놓은 지도첩으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모두 전통적인 도면식 지도의 표현법 과 일반 산수화법을 혼용한 회화식 지도다. 지방통치에 필 요한 고을의 지형지물을 나타내는 데 중점을 두는 회화식 군현지도의 특장은 ‘도성도(都城圖)’에서 두드러진다. 도 읍지의 위상과 품격에 걸맞게 양적, 질적으로 여타 고을을 압도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도’를 살펴보면, 도성을 감싸고 있는 산악을 사방으로 외반시켜 활짝 핀 꽃 을 연상시키는 개화식 구도가 적용되었다(<그림 7> 참조).

<그림 4> 정선. ‘금강전도’. 1734. 종이에 담채. 94.1×30.7cm. 삼성미술관 리움

5

(5)

성곽 안쪽에 비중 있게 묘사된 궁궐과 종묘, 사직단 등 권력 장소와 제례 장 소가 주의를 끌며, 청색 물길과 붉은색 도로가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모습이 자못 인상적이다. 주요 지형지물에 명 칭을 부기해 지도 고유의 매체적 속성 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토산(土山) 과 암봉(巖峰)이 확연히 구별되는 산악 과 곳곳에 줄지어 선 소나무 묘법에서 정통 산수화법, 다름 아닌 정선의 특징 적인 화풍이 감지된다. 이는 진경산수 화와 회화식 지도가 상호 밀착관계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겸재화풍’

이 조선 후기 화단에서 폭넓게 수용되 었던 정황을 예시(例示)한다.

단원 김홍도와 진경산수화

정선의 활약과 더불어 18세기 화단을 풍미한 진경산수화 의 흐름은 정조가 각별히 여긴 화원(畵員)으로 일컬어지 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5년경)에 의해 일 신(一新)되었다. 김홍도는 1788년(정조 12) 정조의 하명 에 따라 선배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금강산과 영동 일대 를 오가며 스케치한 밑그림을 바탕으로 총 70폭의 「해산 첩(海山帖)」을 완성해 진상하였다. 현재 어람용 원본은 전 하지 않으나 다수의 모본이 전하고 있어 그 내용과 화풍을 유추할 수 있다.

김홍도는 정선과 달리 현장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경관 을 충실히 재현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의 전칭작(傳稱作)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에 실린 ‘총석정(叢石亭)’은 강원 도 통천 해변에 자리한 누정과 한 무더기의 천연 돌기둥이 빚어내는 풍치를 담고 있다(<그림 8> 참조). 기이한 형상

의 주상절리 석주들,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그리고 절벽 위의 누정과 유람객까지 최대한 실제 모습에 가깝게 묘사 하였다. 여기서 김홍도가 서양화법에 대한 이해가 한층 진 전되었던 시기에 활동한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해산첩」

이 정조 임금의 ‘와유지자(臥遊之資)’라는 분명한 목적 아 래 제작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김홍도의 화폭 은 대부분 카메라 표준렌즈에 포착되는 범위와 크게 다르 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6년(정조 20) 10월, 정조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화성 성 역(城役)이 28개월 만에 마무리되었다. 당시의 대역사(大役 事)를 기념하며 제작된 「화성춘추팔경도(華城春秋八景圖)」

중 두 폭으로 추정되는 김홍도의 ‘한정품국(閒亭品菊)’과

‘서성우렵(西城羽獵)’도 어명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추팔경(秋八景)의 하나인 ‘서성우렵’의 화제(畵題)는 ‘서성 의 매사냥’이며, 서성은 화성의 서문에 해당하는 화서문 (華西門)에 연결된 성곽을 가리킨다(<그림 9> 참조). 화면 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西將臺)와 성곽 너머 서북쪽 산 특집 국토인문학

<그림 7> 작자미상. ‘도성도’. 1788년경. 채색필사본. 67.5×92.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6)

세를 포괄하고 있는데, 탁 트인 원근의 공간감이 일품이 다. 김홍도는 중층 누각의 구조는 물론 뒤편의 노대(弩臺), 후당 건물, 기다란 깃대까지 제 경물을 꼼꼼히 관찰해 묘

사하였다. 또한 팔달산 너머 평원에서 짐승을 쫓는 일군의 기마인물과 서장대 마당의 구경꾼들, 산자락에서 매를 조 련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곁들여 흥미진진한 장면을 연출 해냈다. 대담한 구도와 거침없는 세필의 선묘에서 화가가 독보적인 기량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한다.

김홍도의 역량은 충북 단양의 명소를 재현한 ‘도담삼봉 (島潭三峯)’과 ‘사인암(舍人巖)’, ‘옥순봉(玉筍峯)’ 등에서 거듭 확인된다(<그림 10> 참조). 1796년 작 「병진년화첩 (丙辰年畵帖)」에 실린 작품들로 이채로운 경관의 특징을 포착하되 수묵의 농담과 담채 효과를 통해 자연스러운 대 기감을 구현해냈다. 그가 생존 당시에 이미 ‘국중(國中)의

9

10

<그림 8> 김홍도. ‘총석정’. 「금강사군첩」. 18세기 말. 비단에 담채.

30.4×43.7cm. 개인 소장

<그림 9> 김홍도. ‘서성우렵’. 1796년경. 비단에 담채. 97.7×

41.3cm. 서울대학교박물관

<그림 10> 김홍도. ‘도담삼봉’. 「병진년화첩」. 1796. 종이에 담채.

21.7×31.6cm. 삼성미술관 리움

(7)

특집 국토인문학

화가’로 명성을 날린 까닭은 산수·인물·풍속·화훼 등 거의 모든 제재를 가리지 않고 소화했을 뿐 아니라 ‘신필 (神筆)’로 칭할 만한 표현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람용으로 그린 작품이 전하지 않아 아쉽지만, 김홍도의 진경산수는 18세기 후반 문화계를 관통한 미적 취향과 화 단의 성취를 진단하는 잣대로 삼을 만하다.

19세기 화단과 실경산수화

18세기 이후 국토 산하의 시각화 조류를 이끈 화가는 정선 과 김홍도가 분명하지만,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를 가릴 것 없이 대다수 화가가 기행사경 대열에 동참했다. 아울러 지 방 파견 관리들이 부임지의 실경도를 구해 기념물로 간직 하는 ‘환유(宦遊)’도 관습화되어 갔다. 19세기의 문인 홍기 주(洪岐周)가 자신이 관직을 지낸 고을의 지도를 모아 「환 유첩(宦遊帖)」(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을 꾸몄듯이 공적인

용도 외에 사사로이 제 작한 회화식 지도의 양 도 차츰 늘어났다. 또한 기행유람과 서화고동 (書畵古董)의 수집 열기 가 전 계층으로 확산되 면서 실경도의 수요층 도 저변화된 점을 간과 할 수 없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실경산수화는 새로운 시도나 질적 비 약을 꾀하지 못한 채 화 단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수순을 밟았다. 김홍도 의 「해산첩」 유형의 금 강산도가 반복적으로 모사되었는가 하면, 무명 화공들이 그린 민화류 실경도가 광통교(廣通橋) 일대 지전(紙廛)이 나 서화포(書畵舖)에서 인기리에 거래되었다. 작자미상의

‘금강산도’10곡병은 각 폭에 잘 알려진 금강산의 명소들을 담고 있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화가의 솜씨로 보 기는 어렵다(<그림 11> 참조). 봉우리 표면의 점묘(點描)와 산능선의 수목 등에 ‘겸재화법’의 잔영이 남아 있으나 정형 화된 금강산도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비록 합리적인 공 간감이나 사실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 유치해 보이면서 도 민화 특유의 신선한 감각이 배어 있다.

19세기 화단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기존에 왕실 과 사대부 계층에서 사용해온 병풍화(屛風畵)의 소비가 민 간으로 확대되면서 특정 고을의 실경을 주제로 한 연폭 병 풍이 증가한 점이다. 평양·진주·통영·해주 등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 수영이 설치된 고장에 집중되었는데, 회화 식 지도와 마찬가지로 자연적, 인문적 경관 위주로 그려지

<그림 11> 작자미상. ‘금강산도’ 10곡병. 19~20세기 초. 비단에 담채. 각 90.4×26.0cm. 개인 소장

<그림 12> 작자미상. ‘평양도’ 10곡병.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131.0×390.0cm. 서울대학교박물관 12 11

(8)

참고문헌

노규호. 1997. 조선 후기 교본성 가사 연구. 박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박은순. 1997. 금강산도 연구. 서울: 일지사.

박정애. 2014. 조선시대 평안도 함경도 실경산수화.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_____. 2016. 19세기 연폭 실경도 병풍의 유행과 작화경향. 동아대학교석당박 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기록화 인물화, 276-295. 부산: 동아대학교석 당박물관.

박정혜. 2016. 남승도로 본 조선 명승. 조선의 명승, 정치영, 박정혜, 김지현, 85-195.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송미경. 2011. 팔도유람을 소재로 한 재담 레퍼토리의 전통과 변용. Journal of Korean Culture 16: 291-336.

이영수. 2000. 민화 금강산도에 관한 고찰. 미술사연구 14호: 99-135.

이태호. 2010.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서울: 생각의 나무.

진준현. 1999. 단원 김홍도 연구. 서울: 일지사.

최완수. 2009. 겸재 정선 1~3. 서울: 현암사.

한영우, 안휘준, 배우성. 1999.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서울: 효형출판.

도 병풍의 용도가 다변화되면서 일상풍속이나 행사장면이 더해지는 변화를 불러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 양태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서울대학교박물 관 소장 ‘평양도(平壤圖)’ 10곡병이다(<그림 12> 참조). 평 양은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두 번째 가는 도시로 부상하면 서 관련 시각자료의 수요가 동반 상승함에 따라 목판본 평 양도가 제작, 유통되기도 했다. ‘평양도’ 10곡병에는 평양 성 안팎의 풍광과 각종 시설물과 민가, 평안감사의 도임행 렬, 세시풍속으로 행해진 석전(石戰) 장면까지 다양한 내 용이 망라되어 있다. 대형 화면에 고도(古都) 평양에 남은 역사적 흔적, 그리고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 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번화해진 대도회의 면모를 욕심 껏 담아낸 것이다.

한편 1891년 12월에 입국해 평양에서 활동했던 캐나 다 출신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이 사용했던 평양지도, 즉 ‘기성도(箕城圖)’(서 울역사박물관 소장)가 전하고 있어 흥미롭다. 또한 개화기 이후에는 우리나라 화가뿐 아니라 내방한 외국인 화가들 도 각자의 방식으로 실제 풍경을 사생(寫生)하였다. 일본 인 화가들이 많이 그린 금강산도를 제외하더라도 휴버트 보스(Vos. Hubert)의 1899년 작 ‘서울풍경’과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의 1919년 작 ‘평양 동대문’ 등 알려 진 작품이 적지 않다.

나오며

중국 남북조시대 종병(宗炳)은 평생 천하의 명산을 찾아다 니다 노년에 병이 들자 산수화를 벽에 걸어 놓고 ‘와유(臥遊)’

경관을 감상하는 데 있지 않았던 것처럼 조선 땅의 경관을 시각화한 이유도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양란 이후 크게 진척된 우리 역사와 전통, 영토에 대한 관심은 여항(閭巷)으로 스며들었고, 19세기 말 ‘봉산탈춤’

의 사설에 ‘관서팔경’과 ‘관동팔경’ 유람이 수렴되기에 이르 렀다. 20세기 들어서도 ‘팔도유람가’를 비롯해 ‘조선타령’,

‘조선팔경가’ 등 팔도 유람을 매개로 한 민요가 입에서 입 으로 전해졌다. 또한 안성 남사당패의 연희에 포함된 재 담이나 1960~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장소팔과 고춘 자의 만담에 이르기까지 팔도 유람 레퍼토리가 꾸준히 소 비되었다. 이처럼 시각자료 외에도 수백 년에 걸쳐 ‘한라 에서 백두까지’ 국토 전역을 모티프로 창작된 문예적 성과 물이 다채롭고 풍성하다. 분단시대를 살아가며 통일을 꿈 꾸는 우리 모두에게 더없이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참조

관련 문서

등의 취업제한)에 따른 취업제한 대상자 및 타 공공기관에 부정한 방법으로 채용된 사실이 적발되어 채용이 취소된 자는 지원 제한.. 각종 증빙서류는

다음은 조선 시대 식생활 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조선 시대 궁중

새로운 교통체계에 부합하는 교통수단 의 신속한 보급 전통적인 교통체계와 새로운 교통체계간 조화로운 상생 필요. 새로운

이주연은 “춘풍의 처도 조선 후기 노동의 화폐 가치가 증대되는 시대의 흐름에 승하여 지략적 처세술을 유 감없이 발휘하며 능동적 대응을 하고 있다”(ii)고 쓰고 있다.

특히 도시근교는 각종 산업시설과 그에 따른 택지개발이 큰 규모로 실행되었 다.또한 국가의 정책적 일환으로 세웠던 건설행위는 이제 국토면적의 한계

그런데 표현주의 쓰기 이론이 형식주의 이론과 인지주의 이론에 이어 등 장한 이후, 사회구성주의 이론이나 후기 과정 중심 이론 등이 새롭게

- 전기요금 인상이 없다면 전력판매회사가 요금수입 감소액을 부담하게 되므로 원가 회수 가능성이 하락하게 되고, 이로 인해 나타나는 적자를 국가가 보조 한다면 국민의

Ⅲ.. 성취기준과 학습목표를 제시한 이후 본문이 나오고, 한자와 문화에 관련된 것은 본문 이후 평가 앞이거나 평 가 뒤 등 교과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