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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유럽의 지정학적 특징은?

동유럽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주요 통로라는 지정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고대 이래로 여러 민족들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유럽, 러시아, 소아 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왔다. 역사적으로도 이 지역은 중부유럽은 게르만족의 일파 인 아시아 유목민족과 고대 원주민간, 프랑크 왕국과 슬라브족들 간, 신성로마 제국, 합스부 르크 제국 및 러시아간 그리고 프러시아 등 독일 제국 간,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서유럽 국 가들과 소련 간 갈등 선상에 위치하면서 주변의 여러 제국들과의 힘겨루기 속에서 자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유지해 왔었다. 반면, 동·서 로마 제국의 분기점에 자리한 발칸유럽 지 역은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각축전을 시작으로, 로마시대 이후로 동로마(비잔틴 제국) 와 이슬람 제국 간, 합스부르크 제국과 터키 간, 러시아와 터키 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과 러시아간, 이 외에도 발칸 토착세력들 간의 영토 경쟁이 치열하게 이어져 왔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열강들 사이에 자리한 동유럽 국가들의 지정학적 위치는 결과적으 로 아시아 유목 민족의 후예인 마자르족에 의해 세워진 중세 헝가리 왕국이 유럽을 침공한 몽고에 의해 왕국 존립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고, 이후 오스만 터키군의 공격 에 의한 왕국의 소멸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 유럽의 중세 왕국들이 약 400년 이상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더불어 한때 우크라이나 지역을 비롯한 상당 지역을 차지하며 유럽의 강국을 유지하 였던 폴란드는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주변 열강들에 의한 수차례에 걸친 영토 분할 등으로 인해 약 120년 넘게 세계사에서 사라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발칸유럽의 영향력 확보를 둘러싼 발칸유럽 내 국가들 간의 전쟁(1912년 과 1913년 제 1, 2차 발칸전쟁)과 서구 열강들(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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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전개되면서, 결국 발칸유럽은 제 1차 세계대전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20세기 냉전 기간 동안, 동유럽 지역은 서유럽을 향한 소련의 중요한 완충지대 (buffer-zone) 및 이해 영역(Interest sphere) 확대의 역할을 도맡았다면, 1989년 민주화로 의 체제 전환이 이루어진 이후, 오늘날에는 그 역학구도가 반대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즉, 현재 NATO 및 EU 가입의 가속화에 따라, 오늘날 동유럽의 국가들은 미국과 서유럽 진영의 러시아를 향한 완충지대 및 이해 영역 확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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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를 기준으로 한 동유럽의 문화권별 특징

선사시대 이래로 중부 유럽 및 발칸 반도에는 수많은 여러 부족 민족들(게르만족과 그 일파/ 일리리아인, 베네치아인, 다치아인, 트라키아인…)이 자신들의 부족 국가들을 형성하 며 거주하여 왔었다. AD 1세기를 전후로 로마 제국 지배하에 들어간 발칸유럽의 원주민들 이 로마의 영향력 하에서 로마 문화에 융화된 데 반해, 중부 유럽 내 고대 원주민들은 자신 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로마인들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고대 유럽의 기록이 주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듯, 고대 동유럽의 역사적 기록들은 주로 로마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발칸 반도 내 역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오랫동안 게르만족과 스키타이 등 여러 아시아 유목 민족들 그리고 고대 원시 슬라브 족들이 혼재되어 거주해 왔던 중부유럽 지역들은 한 동안 역사적 기록에서 자취를 찾아보기 가 어렵다.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379-395) 황제의 사망과 함께 395 년 로마제국이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된 이후 10세기까지 동유럽 지역은 격동 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게르만족에 의한 서로마의 멸망, 스키타이족과 아바르족, 훈족과 마자르족 등 아시아 유목 민족들의 유럽 침입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동유럽 국가들의 주요 민족을 차지하고 있는 슬라브족의 이주와 정착이 이 시기 동안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 늘날 동유럽의 대부분 지역은 6-7세기를 전후로 진행된 슬라브족의 대규모 이동에 따라 정 착된 슬라브족의 일파들이 주요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슬라브족의 일파들을 분류해 보자 면, 대이동 당시 원시 거주지로부터 크게 움직이지 않았던 슬라브족을 ‘동슬라브족’으로 칭 할 수 있으며, 오늘날 러시아인, 백러시아인(벨로루시), 우크라이나인 등이 이에 속하며, 서 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서슬라브족’으로는 오늘날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그리고 남쪽인 발칸반도로 정착한 ‘남슬라브족’은 오늘날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크로아티아인, 슬 로베니아인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동유럽 국가들 중 헝가리 땅에 아시아 유목 민 족인 마자르족이 9세기를 전후로 정착한 오늘날 헝가리인, 19세기 민족주의 도입 당시 스 스로를 로마 민족의 후예이자 라틴 민족의 일파로 규정한 루마니아인, 그리고 과거 로마인 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발칸유럽 지역에 정착해 왔던 일리리아인들이 자신의 조상이라 주 장하고 있는 알바니아인 등은 비(非)슬라브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 동유럽 지역의 민족 들은 15세기 전까지 약 천년의 세월 동안 문화적으로는 동양 문화(훈족과 마자르족 등 아 시아 유목 민족, 몽고, 오스만 터키)와 서양 문화(게르만, 합스부르크, 베네치아) 그리고 종 교적으로는 가톨릭(서로마 교회, 로마 교회)과 정교(동로마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서 로 복잡하게 혼재되는 특징을 보여 왔다(1054년 크리스트교 종교 대분열).

이후 15세기를 전후로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오스만 터키는 비록 17 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저지에 따라 더 이상의 유럽 진출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발칸 반도 의 지배권을 더욱 더 공고히 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동유럽으로의 이슬람교 확산의 배경을 형성케 하였다. 특히 오스만 터키의 발칸 지배는 러-터 전쟁이후 맺어진 1878년 산 스테파 노 조약(3월)과 베를린 조약(6월)에 의해 이 지역 민족들이 독립하기 이전까지 지속되게 된 다. 16세기를 전후로 대두된 종교 개혁의 여파에 따라 중부유럽이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 교(가톨릭)의 갈등 속에 혼재되는 양상을 띤데 반해, 발칸유럽은 터키에 의해 동양적 문화 요소가 급속도로 확산되게 되었고, 종교적으론 기존의 크리스트교(가톨릭과 정교)외에도 이 슬람교가 유입되어 발칸유럽 지역은 가톨릭, 정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서로 혼재되어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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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역사와 인물 속 한 마디>

- 종교를 기준으로 한 동유럽의 문화권 분류 (주요 종교가 65% 이상을 기준으로 함)

1) 가톨릭 문화권 –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2) 정교 문화권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3) 이슬람 문화권 – 알바니아

4) 정교와 이슬람 혼재 문화권 – 마케도니아

5) 가톨릭, 정교, 이슬람 혼재 문화권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6) 기타 - 체코(가톨릭 약 40%, 프로테스탄트 약 6%, 정교 약 4%, 기타 약 10%, 무교 약 40%)

게 된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크리스트교의 분열,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터키의 약 500 여 년간의 지배는 오늘날 동유럽을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즉 이러한 모자이크는 어느 한 순간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2,000여년의 역사 속에 동유럽 내 민중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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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크리스트교(가톨릭, 정교, 개신교)와 이슬람 그리고 동유럽

1) 크리스트교의 발전과 분열의 역사는?

예수에 대한 정확한 출생 년도와 사망 년도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가 예 수의 탄생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모두들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트교의 믿 음에 따른 여러 기적과 놀라운 행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기존 유대교의 전통과 질서를 벗 어난 언행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감을 샀었고, 마침내 체포된 후, 십자가형으로 처형되 게 된다. 하지만, 예수의 사망 이후에도 크리스트교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 등 예수 제자들 의 활발한 선교 활동으로 인해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크리스트교의 핵심 교리인 유일 신 사상과 메시아니즘 등이 로마의 사회질서와 체제에 부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된 박 해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정식 종교로 공인되고, 테오도시 우스 시절인 392년에 국교로 인정됨으로써 세계 종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 다.

동·서 로마의 분리 이후에도, 서로마 지역과 동로마 제국 내에는 크리스트교의 확산이 계속 이어졌고, 그 결과 451년 열린 칼케톤 공의회를 통해 5개의 대주교 관구(로마, 콘스탄 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를 그 순서에 따라 권위를 부여한다는 교회 령이 확정 되게 된다. 이후 7세기경 등장한 마호메트(Muhammad ibn ‘Abdullāh, 570-632) 에 의한 이슬람교의 세력 확장에 따라, 점차 알렉산드리아(641), 안디옥(637) 그리고 예루 살렘(638) 교회가 이슬람교도들의 지배 하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11세기-13세기 사이 로마 교황에 의한 십자군 운동 발단의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되었다. 결국 남게 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이후 한 동안 서로 간의 교세 확장 싸움으로 일련의 갈등을 겪 게 된다.

동·서 로마의 분리는 크리스트교의 분열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 동·서 교회 의 분열은 정치적 분열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희랍어(그리스어)와 라틴어가 서로 통용되는 등, 양대 지역(동·서 로마)에 대한 선교 활동이 자유로웠던 초기 크리스트교 시기와는 달리 동·서 로마 분리 이후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양 지역 교회 간 교류의 단절을 낳게 된다. 이런 가운데 당시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동, 서로마 분리 이후 서로마의 멸망(476년) 과 뒤 이은 로마 교회의 침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일한 로마 제국으로 남겨진 동로마 제 국(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한 동안 그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이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수장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Flavius Justinianus, 483-565, 재위 527-565) 황제는 정치, 종교적으로 다시 한 번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서로마 일부 지역을 탈환하고 로마 교회의 교황을 자신의 지배를 받는 총대주교 자리로 앉히는 등 서로마 지역으로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영향력을 확 장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로마 지역의 로마 교회는 교회의 포교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비잔틴 제국과 같은 세속 국가의 비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이 유로 로마 교황인 레오 3세(St. Pope LEO III, 재위 795-816)는 당시 서유럽의 새로운 패 권 국가로 등장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독일어로 카롤루스 혹은 카 를 대제, 재위 768-814)를 800년 12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승인하였고, 이를 통해 로마 교회 확산을 위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비잔틴 제국은 한 동안 이를 인 정하지 않았지만(812년 승인), 서로마 멸망 이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영향권 하에 억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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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야 했던 로마 교회는 이때 이후로 본격적인 독자 행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로마 교회는 그 동안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영향 하에 있던 여러 지 역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이것은 상대적으로 서유럽 지역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위축 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교세 약화를 불러오게 하였다. 실제 당시 양대 교회는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 그리고 이후에는 양 제국(신성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단절에 따 라 서로마 지역에서는 희랍어(그리스어) 그리고 동로마 지역에선 라틴어 사용자가 드물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초기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문화적 일치성을 상당 부분 훼손 시켜 결과적으로 크리스트교의 종교적 분열로 이어지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 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크리스트교의 분열은 500년 간격으로 크게 3차례에 걸쳐 이루어 졌다. 첫 분열은 5-6세기에 일어났는데, 당시 동, 서로마의 분리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 함에 따라 교회 주도권을 둘러싼 양 대 지역(동·서 로마) 교회 간, 즉 ‘로마 교회와 콘스탄 티노플 교회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두 번째 분열은 비잔틴 제국의 쇠락 속에 기울어져 가던 콘스탄티노플 교회(훗날, ‘정교’로 발전)와 신성 로마 제국의 비호아래 영향력을 확대하 고 있던 로마 교회(훗날, ‘가톨릭’으로 발전)가 교회 주도권 다툼 속에 서로 파문을 하면서 일어난 ‘1054년 교회 대분열’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분열은 서유럽에서 로마 교회를 모태로 발전한 가톨릭이 중세 유럽의 모든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 면죄부 사건 을 계기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남으로써 발생한 ‘신교와 구교로의 분열’을 들 수 있다.

1054년 교회 대분열이 선언된 이후 이슬람교도의 지배로 넘어간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 한다는 이유를 들어 로마 교황의 권위를 세우려 했던 십자군 원정 중, 1204년에 일어난 제 4차 십자군 원정은 더 이상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양 대 교회가 화합 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사태를 이끌어가게 된다. 제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들은 로마 교황의 묵인 속에 이슬람 군대와 싸우는 대신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자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세워 져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약탈하여, 라틴 제국(1204-1261)을 건설하였다. 이 사건 은 결과적으로 크리스트교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비잔틴 제국의 급격한 쇠퇴 그리고 양대 교회 간 불신과 분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2) 크리스트교는 동유럽에 어떻게 전파되었을까?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간의 초기 교세 확장 경쟁은 주로 당시 동·서 로마의 분 기점이자 양대 교회의 접합지역에 해당하였던 발칸유럽을 주 무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동·

서 로마의 분리선은 현재 발칸유럽의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사바-다뉴브-우나 강을 경계로 동, 서로 나뉘어졌다. 따라서 6-7세기 무렵 발칸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온 남슬라브족은 이후 로도 한 동안 이러한 양대 교회의 갈등 속에서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발칸 유럽 내 남슬라브족들 특히 정교 지역의 여러 슬라브족들에게 크리스트교가 전파된 계기는 864년 비잔틴 황제의 명을 받아 모라비아 공국(오늘날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 내 크리스트교 포교와 행정 체계 수립을 위해 떠났던 솔룬(Solun, 오늘날 그리스의 데살로니 끼) 출신의 콘스탄틴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 그리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였다. 중세 가장 뛰어난 문법, 언어 학자중 하나인 키릴과 행정, 정치, 외교 분야에 능했던 메토디우스는 자 신들이 고안한 슬라브 문자와 언어를 기초로 4대 복음서(마테, 마가, 누가, 요한)를 제작해 크리스트교 가르침을 전파하였고, 비잔틴 제국의 행정 체계를 신생 공국에 도입하고자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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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모라비아에서 일어난 권력 내분의 결과 실패로 돌아 갔다. 모라비아 공국은 건국 70년 만에 공국 내 권력 투쟁과 동 프랑크의 공격으로 멸망하 였고, 뒤 이어 등장한 체코의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등은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로마 교회의 영향력 아래 크리스트교(가톨릭)로 개종하게 된다. 이후 역사 속에서 이들 중부유럽 지역에는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 교회(정교)가 일련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모라비아 공국의 내분과 프랑크 성직자들의 압력을 피해 발칸유럽으로 피신해 온 클리멘트와 나움 등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에 교회를 설립해 슬라브 문자(키릴의 업적을 기려 이후 ‘키릴 문자’로 불림)와 언어를 보급하고 남슬라브인들 을 대상으로 한 크리스트교 포교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이에 따라, 주변 불가리아, 세르비 아와 여타 발칸 지역으로 종교와 문자가 확대되어 이들 민족들의 크리스트교로의 개종, 즉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교리에 바탕을 둔 정교를 신봉하게 된다. 훗날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권위에 따른 발칸유럽으로의 크리스트교(정교) 전파는 10세기 말 러시아 민족의 정신적 바 탕이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공국에까지 전파됨으로써 오늘날 발칸유럽 을 비롯한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이 강력한 정교 국가가 되는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반면 발칸유럽 내 국가들 중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로마 교회의 신봉자였던 프랑크 왕국, 이후에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관계로 8세기 중엽 이후로 로마 교회의 영향력 하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반면, 지리적 험준함으로 인한 주변 지역과의 고립 그리고 양대 교회의 접합 점에 위치해 있어 잦은 교회 세력권 다툼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신앙심이 약하 였던 보스니아 내 남슬라브인들은 12세기 말 이후 양대 교회의 특징을 지녔지만, 양대 교회 모두로부터 이단으로 몰렸던 ‘보스니아 교회’를 설립해 신봉하였다.

발칸으로 이주해 부족국가를 수립한 남슬라브족들의 계속된 세력 확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오스만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따라 마침내 붕괴되게 된 다. 오스만 터키에 의한 비잔틴 제국의 붕괴 그리고 뒤 이은 발칸유럽 정교 신봉 국가들의 몰락은 로마 교회와 더불어 크리스트교의 양대 축으로 인정되어 왔던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후 비잔틴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권위는 정교 국가로 강력히 무 장한 러시아의 모스크바 교회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따라 로마를 제 1의 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제 2의 로마라 칭한다면, 발칸유럽의 정교 국가들이 이슬람 터키 제 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500여년 가까이 정교의 정통성을 이어 왔던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 라 부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칸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즈음, 로마 교회는 중세 중부 유럽 및 서유럽에서 최대의 권위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이러한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로마 교회는 계속된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한 교황 권 의 추락과 절대 왕권의 도전에 의해 위기에 봉착하였고, 뒤 이어 면죄부 사건에서 비롯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운동에 의해 교회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된 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총 8회 이상 진행된 십자군 원정은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 을 목적으로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자 출전했던 십 자군 원정은 계속된 실패 속에, 초기 정신조차 변질되어 교황권의 급격한 추락을 가져오게 된다. 교황권의 계속된 추락 속에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 1509-1547)를 비롯한 유럽의 절대 왕권 국가들은 왕권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교황 권에 대 한 도전을 확대해 나갔다. 로마 교회의 분열을 가져 온 최대 계기는 16세기 독일에서의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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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트교와 이슬람 발달사 도표>

유대교 크리스트교 로마교회 신교 (서방 종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구교(가톨릭)

콘스탄티노플 교회 (동방 정교) 이슬람교

죄부 판매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면죄부 판매 사건은 루터 등 뜻있는 성직자들과 지식인 그 리고 교황청의 수탈에 시달려 왔던 여러 도시들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1517년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고, 이 반박문은 당시 발달 된 인쇄 기술에 힘입어 곧 이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 종교개혁 운동의 발단이 되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의 종교 전쟁이 일어났고, 30년 종교 전쟁을 끝으로 로마 교회는 마침 내 신교(프로테스탄트, 개신교)와 구교(가톨릭)로 분리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3) 이슬람교의 동유럽으로의 전파와 의미는?

동유럽으로의 이슬람교 전파는 오스만 터키의 진군 경로와 지배 지역에 따라 지리적으론 주로 발칸유럽에 집중되어 이루어지게 된다. 14세기 중엽 세르비아 중세 왕국의 계속된 공 격에 의해 어려움을 겪던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터키에게 용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1345년 오스만 터키의 유럽 원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럽으로 들어온 터키는 발칸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세력권을 확장시켜 갔으며, 특히 세르비아 군을 중심으로 한 발칸유럽의 기독교 10만 연합군을 1389년 6월 코소보에서 대패시킴으로써, 발칸유럽의 실질적인 패권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 가진 기독교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만 터 키는 이때 이후로 발칸유럽 전역에 걸쳐 이슬람교의 확산을 추진하게 되었다. 오스만 터키 의 발칸유럽 지배는 이후 러-터 전쟁의 결과 맺어진 1878년 산스테파노와 베를린 조약 때 까지 이어지게 되며, 터키의 지배 기간 동안 특히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지역엔 상당수의 무 슬림화가 진행되게 된다. 오늘날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지역에 상당수 무슬림이 형성된 배경 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하겠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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