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연구보고서 2015-13
지 역 사 회 운 동 역 사 Ⅰ
박노동 허 종 김도균 김덕진 한상헌 , , , ,
연구진
연구책임 • 박노동 도시경영연구실 책임연구위원/ 공동연구 • 허 종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공동연구 • 김도균 대전시민사회연구소 / 공동연구 • 김덕진 충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공동연구 • 한상헌 도시경영연구실 연구위원/
요 약 문
서론 1.
연구목적과 연구방법 1.
연구목적
■
사회운동은 운동이슈에 따라 노동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인권운, , , ,
○
동 성소수자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운동이슈의 분화에 , , 따라 새로운 사회운동이 지속해서 출현한다 또한 운동이 발생하는 공간적 범. 위에 따라 지구적 전국적 지역적 차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거시적 공, , . 간에서 미시적 공간으로 세분화 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이슈와 운동의 공간. 적 범위를 교차하면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본 연구는 대전이라는 공간적 . 범위에서 그간 진행되어온 다양한 사회운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 작업은 크게 부와 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1 2 . 1부는 1960년 4·19혁
○
명부터 1970년대 반유신운동, 87년 월 민주항쟁과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기술6 한다면, 2부는 년대 운동의 성과 바탕으로 년대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시80 90 민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할 것이다 현재의 보고서는 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 1
부까지 완성하면 대전지역 사회운동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기술하는 최초의 2
작업이 될 것이다.
연구방법
■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문헌연구과 함께 심층면접을 동시에 실시하
○
였다 본 연구가 과거의 역사를 기술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 1 차적으로 관련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검토한다 심층면접은 문헌으로 파악할 . 수 없는 내용뿐 아니라 참여자들의 정서와 감정까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기술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년대 사회운동 2. 1960
혁명 4 19
■ ․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독재와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과정에서 대전의 고등
○
학생들은 이를 규탄하고 저지하려는 시위를 벌였다. 1960년 월 일 대전고3 8 , 월 일 대전상고 학생들의 시위였다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고등학생들
3 10 . 4 19․
의 시위는 역사적 의의가 매우 컸다 고등학생의 시위는 정부수립 이후 대전. 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위였으며 이전에 있었던 강제 동원에 의한 관제 시위, 가 아니라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여 자발적으로 일으킨 시위 였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이 처음부터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려는 구체적인 목. 표를 가지고 시위를 벌이지는 않았다.
학생 시위의 직접적인 동기는 학생들의 뜻과 배치되는 충남도 당국 특히 문,
○
교 당국과 학교 당국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었다 학원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 무시하고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장기집권 계획에 동조하는 교육 당국을 반 대하는 이유였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기에 학도호국단을 통해 반공이데올로. 기와 이승만 정권의 유지를 위한 각종 궐기대회와 관제 시위에 동원되었으며,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가 대전을 방문할 때 동원되는 등 학원의 자 주성과 학생의 자유는 철저하게 억압된 상황이었다.
년 월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학원의 정치도구화와 비민주성은 더욱 1960 3
○
노골화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영구 집권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했. 으며 교육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부의 지시에 따라 충남도 당국은 정권, . 에 비판적인 교원을 외지로 전출을 시도하거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학생들에게도 정부 홍보 활동을 강화하였다 또한 학. 생들의 자치 활동을 침해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 이기 붕의 활동 내용을 담은 영상을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상영했으며 정권과 자유, 당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선전 옹호하는 신문을 강제로 구독케 하여 이승만 정․ 권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약화시키고 장기집권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심지어 경찰이 학생들의 동향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교사들은 가정방. , 문을 이용하여 학부형들에게도 선거운동을 펼치는 등 학교 전체가 선거 분위 기에 빠져 있었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과 교육 당국이 학원을 정치 도구로 전. 락시키고 학원의 자유를 억압하는 책동을 반대하는 것이 학생들이 시위를 벌 인 일차적인 동기였다 따라서 학생들의 주장도 학원의 정치도구화 배격. ‘ ’,
학원의 자유 보장 서울신문의 강제구독 배격 학생 동태 감시의
‘ ’, ‘ ’, ‘
중지’ 등에 집중되었다.
학생들은 학원의 정치도구화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영구 집권책의 일환
○
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이승만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학생. 들이 정치적 주장을 내세울 경우 시위의 정당성을 훼손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전고와 대전상고 학생들이 발표한 결의문에서 시위가 . 학생들의 정의감과 자발적인 의지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면서 학원에 외부 세 력의 침투를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한 사실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이승만 정. 권과 자유당이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시위를 비롯한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북 한과 좌익 세력이 개입하거나 민주당의 배후조종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주장 하면서 학생시위의 의미를 폄하시키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승. 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실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할 경우 시위의 정당성과 순수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학생들은 학원의 정치도구화 배격과 학원. 의 자유 보장 등을 주장하면서 우회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대전지역 고등학생의 시위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월 일 이전까지 전국에서 4 19
○
발생한 고등학생의 시위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는 점이다 대전고는 전교생 . 여 명이 모두 시위에 참여했으며 대전상고도 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1,000 , 700
를 벌였다 특히 대전고의 시위는 대구에서 고등학교 연합으로 일어난 . 2 28․ 학 생시위의 규모와 비슷할 정도로 큰 시위였다 나아가 . 4 19․ 혁명 과정에서 일어 난 단일 고등학교의 학생시위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큰 시위였다.
년 월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는 학원의 자주화 민주화를 쟁취하기 1960 3
○ ․
위한 운동이었으며 나아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을 규탄하는 민주화운동이었, 다 또한 한국현대사에서 최초로 국민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시키는 혁명으로 . 가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 해방 후 당면 과제였던 자주적인 통일국. 가의 수립이 좌절되면서 느낀 패배감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사소한 저항마 저 거세당했던 민중에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불 러일으키는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주체가 깊은 패배감에 빠져. 있는 기성세대에서 자유와 정의감이 충만한 새로운 세대로 대체되는 출발점 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제 공화국이 무너진 후 노동자와 학생을 비롯한 시1
○
민들은 그 동안 억눌려 있었던 기본권 쟁취와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 학원으로 복구하여 학원자주화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 수들을 어용교원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배척하는 활동을 펼쳤으며 준군사조직, 인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자치학생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 7 29․ 총선을 앞두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선거 계몽 활동을 펼쳤으며 농촌에서는 문맹 퇴치와 생활 , 지도 등의 활동을 도시에서는 외국 상품 사용을 비롯한 사치와 향략 생활 배, 격과 국산품 애용 등의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
○
동운동을 벌였다 특히 사회에서 가장 큰 지식인 집단이었으나 이승만 정권. , 의 학원 통제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교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학원자주화와 사회민주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정부수립 후 활동. 을 중지했던 혁신세력이 4 19․ 혁명기에 정당과 사회운동단체를 조직하고 활동 을 재개하였다 이들은 사회민주화운동과 함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이 . 분단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통일운동을 벌였, 다. 4 19․ 혁명기에 일어난 각계각층의 권익 쟁취와 사회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은 ,
군사쿠데타로 미완의 활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5 16․ .
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1964~1965
■
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은 미국의 동북아 지역통합전략과 박정희 정권의 1965
○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의 마련이라는 이해관계의 일치에서 나온 결과물이었 다 하지만 한일협정의 체결을 위한 회담의 시작단계에서부터 지식인과 학생. 들이 중심이 되어 이를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도시는 물론 읍 면 단위, ․ 에서도 한일협정의 체결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맞. 이한 최초이자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으며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하여 반대, 운동에 대응하였다.
대전에서는 1964년 월 고등학생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시작으로 3 1965년 8
○
월까지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대전에서 전개된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 변호사 단체와 종교계가 일시적으로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 끝까지 이 운동의 중심 세력은 학생들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전국 다른 지역. 과 다르지 않았다 대전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주목되는 사실은 고등학생들. 의 역할과 참여의 규모가 달랐다는 점이다 대전에서는 .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과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은 고등학생의 시위로 시작되었으며, 지역의 대다수 고등학교가 참여하고 연합시위를 벌이는 등 시위 횟수와 규모 면에서 대학생의 반대운동을 능가하였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 려운 양상이었다.
대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속되었으나 고립
○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더욱이 같은 대학 내에서도 총학생회의 주도가 아닌 . 단과대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총학생회와 단과대 대표들이 투쟁위원회를 결성, 했지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운동 양상도 현, . 저히 약화된 후에 고등학생까지 포괄하는 시위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계획이 , 누설되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대전지역에서 전개된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 고등학생들의 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학생들이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체결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회담에 임하는
○
정부의 자세와 추진 방식의 문제였다 학생들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 위협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여 자유반공진영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 일 두 나라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 들은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나라 사이에 쌓인 민족 적 감정과 오해가 해소되어야 보았다 하지만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서 반성하. 기는커녕 여전히 제국주의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 간접 침략을 집요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일본의 자세에 맞서 . 정부는 평등 호혜의 원칙으로 회담을 추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발에 필․ 요한 재원 마련이라는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여 굴욕적인 저자세와 지나친 측 면 외교로 국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학생들은 한일협정의 주요 의제인 청구권과 평화선 문제 등에 대해서도 비판
○
하였다 대일 청구권은 식민지배 동안의 박해와 수탈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는 . 정당한 요구이므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며 청구권 액수도 다른 나라에 비, 해 터무니없이 적다고 비판하였다 평화선은 수많은 어족을 보호하는 선이자 . 생명선이며 국가의 생존권과 주권선 이므로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고 한반도 , , 근해 어장을 독식하려는 일본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학생들은 한일협정 체결 이후 일본의 경제적 예속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인식.
○
으로 한일협정을 제 의 을사조약의 성격을 갖는 매국 조약으로 규정하여 한2
일협정 조인과 비준 반대 전면적 무효를 주장하였다 또한 한일협정을 비준, . 한 국회의 해산과 총선거의 실시 등을 주장했으며 반대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 정부의 학원사찰 반대와 출입금지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주장하였다 한일, . 회담과 협정에 대한 대전지역 학생들의 인식은 전국의 다른 학생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
대전지역의 학생과 전국 일부 도시지역 대학생의 차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
인식에서 드러났다 서울의 비롯한 일부 도시지역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주창. 한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정권의 퇴진 또는 하야를 요구하는 양상이 나타났지만 대전에서는 그러한 인식과 주장이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한일회, . 담과 협정 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미국을 비판하는 주장도 일부 지역에서 나왔지만 대전에서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에 대, . 한 기대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며 박정희 정권, 이 경제를 비롯한 제 분야에서 성과를 거둘 경우 지역 출신 유력 인사가 정 권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일정정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년 년대 대전지역 민주화운동 3. 1970 ~80
년대 대전지역 민주화운동 유신반대운동
1970 ( )
■
유신체제의 성립과 민주화운동
□
유신체제는 1970년대 초 미국 닉슨대통령의
○ 주한미군철수정책과 중국과의
화해의 전격적인 추진과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연장의 욕망이 결합하여 나타 난 국가주도의 체제 전환이었다 유신헌법을 통해 . 1972년 월 일 박정희12 27 가 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해방이후 일반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8 과 요구를 등진 것으로 군부독재의 영속화를 낳았고 민주화운동세력의 도, 전과 저항에 직면하였다.
1972
○ 년 월 일일 박정희 정권의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신헌법은 10 17 , 1972
년 월 일 비상국무회의 축조심의 다음날 공고되었다10 26 , . 11월 일에 개헌21 안 국민투표 실시에서 충남 대전포함 은 투표권자 ( ) 94.9%가 참여, 83.9%가 찬 성으로 나타났다 참여율은 전국적으로 비교하여 낮은 수치이며 대전충남의 . , 경우 강압적인 개헌안 국민투표에서도 박정희 정권에게 절대적 지지를 표현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196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
○
었으며 지속적 민주화운동 성장에 필요한 인적 및 조직자원은 , 1970년대 초 반에 형성되었다 당시의 학생운동 노동운동 도시빈민운동 지식인운동에서. , , , 는 다양한 새로운 이념과 논리가 대두되었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본적, 인 토대를 쌓았다.
대전의 경우 1971년 월 당국의 교련강화정책에 관련하여 충남대학교 교련1 ‘
○
강화 반대시위와 자주선언 이 월부터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는 교련강화’ 4 . ‘ 반대’, ‘학원사찰 중지’, ‘언론자유 보장 이라는 슬로건으로 저항하는 ’ 등 정치운동으로 확대하였다 아울러 . 1971년 월 일 발족한 민주수호국4 19 ‘ 민협의회’ 결성은 1970년대 전반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이념적 구심체 역 할을 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사회적 비판과 반유신운동에 자극받아 당시 언. 론자유수호운동이 일어났고 지역언론인들의 참여가 줄을 이었다 한편 지역, . 대학교수들도 대학자주화선언을 통해 대학의 자주화 정권의 독단적인 대학, 행정 개입에 저항하였다.
유신체제 지역의 민주화운동 혹은 사회운동의 점진은 대학가 종교계를 중심,
○
으로 지역에서 펼쳐졌다 대전지역에서의 운동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는 저. 항운동과 교육운동이 불었으며 종교계를 중심으로는 인권과 생존 생활에 , , 걸쳐있는 지역 이슈들이 집합되어 유신 반대운동으로 심화되는 흐름을 보여 주었다 대전지역의 경우 많은 사건들이 알려지거나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 만 긴급조치 해제 이후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
년 월에는 충남대학교 학원민주화 시위 학원민주화선언문 로 도서관벽
1974 3 ( )
○
보 사건이 있었으며, 1974년 가을에는 각 대학에서 구속학생들을 위한 석방
관련 서명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제 차 전국 울뜨레야 대회 민주회복과 인간의 4 : 기본권 수호 선언(74.10.3, 대전 대흥동성당 충남대학교 학내시위), (74.10.14~12.4), 지역 언론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지지(74.10.2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인 권회복기도회 개최(74.11.11), 민주회복국민회의 지부 대전( , 75.2.19.) 등으로 이어 지며 독재정권에 대해 지역연대를 통해 저항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
긴급조치 호와 유신체제 후기의 반독재민주화 투쟁9
□
유신정권은 1975년 월 일을 기해 긴급조치 호 국가안전과 공공질서 수호5 13 9 (
○
를 위한 긴급조치 를 선포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일절 용납하) , 지 않기 위해 강권력을 발동하였다 긴급조치 제 호는 유신체제의 등장과 함. 9 께 선포되었던 긴급조치 제 호의 내용을 확대 보강한 것으로 사회통제의 수1 준을 유신 초기의 초강경 수준으로 환원한 것이었다.
긴급조치 호로 학생운동은 위축되었으나 재야 지식인의 저항활동은 꾸준하9 ,
○
게 이어졌다 재야 각계 원로 . 225명의 구국동지회‘ ’ 결성(75.6.5), 김수환, 윤보선 등의 김지하 석방요구‘ ’(75.8.6), 구속자 가족의 목요기도회‘ ’ 부 활(76.1.15), 재야인사들의 ‘3 1․ 민주구국선언’ 발표(76.3.1), 천주교 주교단의
구국선언 지지성명 윤보선 등 인의 민주구국헌장 발표
‘ ’(76.3.15), 10 ‘ ’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선언 이 있다 그리고 (77.3.22), ‘77 ’(77.4.18) .
구속자가족협의회는 구속인사 석방요구‘ ’(77.8.16) 등을 통해 유신헌법 철 폐와 고문 사찰 폭압 정보정치의 종식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 , .
대전지역의 저항적 참여활동은 재야를 주축으로 하는 운동의 경우에는 지부 ○
형태로 대전지역 인사들이 참여하였고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에 대한 반대를 , 통해 정부에 강권적 조치를 정치적 투쟁으로 진전시켜 나아갔다 아울러 종. 교계는 인권회복을 중심으로 기존의 활동을 더욱 심화시키며 현실비판을 통 해 참여를 독려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의 싱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
대전지역의 활동 및 사건으로는
○ 예수교 장로회 ‘청년회전국연합회’ 개최 통일사회당 간부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체포 정효순 김지하 (77.1.21), ( , 78.1.17),
문학의 밤 행사(78.2.26), 목원대 탈춤반 시대비판(79.5), 대전교구사제단 성명서 발표(79.8.3), 공주사대 유신철폐 벽서사건(79.10.13)이 있었다.
년대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민주화운동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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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등장과 지역민주화운동
□
○ 박정희 사망 직후인 1979년 월 일 서울에서 11 24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이 발생하였으며, 79년 월 일 서울에서 있었던 11 29 YMCA위장 결혼식 사건의 내용이 당시 충남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는 도서관 시국선언이 있 었다.
○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 지배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 서울의 봄 이 왔다‘ ’ .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정치적 권리의 쟁취를 위한 투쟁에는 대학생 중심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전후하여 장기간 군 사독재에 억눌려 온 국민의 민주화열망이 전사회의 영역과 부분에서 분출되 었다 민주화의 열망은 어느 특정 개인이나 집단 혹은 정치세력에게 국한된 . 요구가 아니었다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제도권 정치세력을 비롯하여 기. 층 민중에게까지 깊숙이 요구되는 사안이었다.
군사반란과 전두환 군부독재 저항운동
□
○ 1979년 월 일 전두환 노태우 정호영 박준병 최세창 등 육사 출신의 하12 12 , , , , 나회 소속 군인들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군사반란을 통한 새로운 군사독재 정, 권 창출이 기획되었다.
군사반란의 정권창출에 대하여
○ 대전지역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주의로 진전
되지 못한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반성적 촉구와 1970년대의 민주주의 적 이념과 현실 비판정신이 다듬어지고 산출된 실천적 행동이 격렬하게 표출 되었다.
대전의 충남대학교 비상계엄해제시위(1980.5.1.~5.7)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독
○
재화투쟁은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월 일 교. 27 5 14 “ 내시위는 이제 끝났다 가두시위는 민주화투쟁의 연속선상에서 평화적이고 인. 적인 시위가 될 것 이라는 내용의 시국에 관한 합의문을 발표하는 등 서울” , 시내 개 대학과 지방 개 대학생 21 11 150,000여 명이 계엄 철폐를 요구하며 가 두시위를 전개하였다. 5월 일 지식인 15 134명의 시국선언, 5월 일 충남대와 16 목원대 3,000여명 학생들은 시청과 대전역 사이에서 가두시위 및 자유성토, 시민과의 대화를 통해 시민의 이해를 요청하여 지역에서의 민주화 열기를 고 취시켰다.
년 월 일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대전지역에서도 민주화운동에 결정 1980 5 18
○
적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개별 지역에서 주체별 . 독재정권에 대한 퇴진 요구의 목소리가 합치하게 되고 이와 동시에 민주화에 , 대한 국민적 열망이 서서히 응집하게 된다. 5 18․ 을 통해 군사독재정권의 실체 와 사회과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 이를 통한 권력구조의 개혁과 혁명적 실천, 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대전지역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 진실규명. 을 위한 전단 살포(80.5.22), 충남대 우리문화연구회 서클 창립 및 반독재활동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지역적 저항으로 발전시켰다
(80.10.9) .
년 월 일부터 년 월까지 대전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의도적인 탄압사 81 1 5 83 12
○
건과 저항을 전개하였다 한울회 사건. (81.4.17), 국풍 81 반대운동과 광주학살 책임 규명요구(81.5), 충남대 청람회 사건(81.10.28), 지역대학가의 탈춤반 활동 대학의 현장참여적 활동 교육정책 반대 등 충남대 유인물 사건
(81.12~), ( ),
대학 서클활동 충남대 우리문화연구회 등이 있었다 (83.5.3), ( , 83.10.23~11.4) .
년 월부터 약 년간의 군부독재정권의 유화국면을 통해 지역민주화의 1983 12 1
○
역량을 폭발적으로 신장시키는 활동도 이어졌다 당시 정권의 의식화에 반대. 하여 충남대학교 학원자율수호 시위(1984.3.26.~1985.6.4.), 목원대학교 신학부 학원민주화추진(1984.4.13.~5.25), 한남학원자율화운동(1984.5.3.~11.12)이 있었으 며 지역대학의 연대시위로 전두환 방일 반대집회, (84.9.4), 그리고 지역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든 충남민주운동협의회가 년 월 일 결성되었다85 2 4 .
년 이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시위는 전국학생총연합회가 결성되 85
○
고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대전에서는 대전지역 학생연합 광주민주화운동 . 진상규명 요구시위(1985.5.13.~5.17), 충남대학교 ‘학원탄압결사저지투쟁위원 회’ 발대식(85.9.11) 등이 있었다 한편으로 . 1980년대 초부터 학생운동 출신 지식인들의 노동운동에 광범위하게 투신하는 흐름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대전현판식과 학생시위(86.3.5)를 통해 대전지
○
역에서 1985년 월부터 시작된 정권의 탄압국면에서 학생대중운동시기로 전9 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충남대 교수 명이 월 일 대학과 사회의 문제. 21 4 24 ‘ 해결을 위한 제언 이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이들은 사회의 갈등’ , ‘ 이 첨예화되고 있는 현 상황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사회정치구조의 비민주 성에 있다 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
대전에서의 민주화운동 반독재운동 은 조직적 및 인적차원의 확보와 성장에 ( )
○
따라 많은 민주화열망이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데 광주민주항쟁 진상규, 명 유인물 살포(86.6.12), 고문과 폭력추방을 위한 기도회 및 성고문 규탄대회 동양백화점 앞 연합가두시위 한남대학교 학생들의 아시아게 (86.8.11), (86.9.10),
임반대투쟁(86.9.9~11), 은모래 다방 옥상 시위(86.9.24)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 와중에서도 전두환 정권은 충남민주화운동협의회 사무실을 수색(86.11.14) 하 는 등 지역민주화운동의 성장과 활동을 억압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 이러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대전충남 장기집권 음모저지 충남지역 공동‘ 투쟁위원회 결성’ (86.12.26)하는 등 기본적인 지역의 민주화운동 역량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전지역 년 월 항쟁의 출발과 전개과정 4. 87 6
박종철 고문사건과 대전지역 추모대회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박종철 고문사망에 대한 국민‘
○
추도회’(이하 국민추도회 가 결성되었고 국민추도회를 중심으로 , ) , 故 박종철 열사 추모 및 고문살인 종식을 위한 각종 추모집회와 행사가 전국적으로 개 최되었다.
년 월 일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규탄하는 최초의 학생 가두시위가 87 1 27
○
대전의 중심가인 동양백화점 사거리에서 개최되었다 이 가두시위는 당시 학. 생운동 전력으로 수배 중에 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시위와 , 관련해서 박종범 대전대 영문과 년 과 이기원 충남대 미술교육 년 이 구속되( 4 ) ( 4 ) 었다 이 가두시위는 경찰의 신속한 진압으로 대열을 제대로 형성하지도 못하. 고 진압되고 말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해 대전의 중심가에 일어, 난 최초의 가두투쟁이라는 점에서 운동사적 의미가 있다.
월 일 충남지역 공대위를 중심으로 고 박종철열사 추모 및 고문살인 종식
2 2 , ‘
○
을 위한 범도민대회 를 개최하였다 당시 국민추도회를 중심으로 월 일’ . 2 7 , 전국적인 동시다발 추도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대전은 이 보다 앞선 월 , 2 일 독자적으로 범도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범도민대회는 서대전 사거리
2 .
에 위치한 기독교연합봉사회관 중구 문화동 에서 평화적으로 개최할 계획이었( ) 다 하지만 경찰은 대회 시간 전부터 대회장 주변에 전경들을 배치하여 대회 . 1 자체를 원천봉쇄해버렸다 따라서 대회 주최 측인 공대위는 정상적으로 행사. 를 진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오후 시부터 서대전 사거리에서 , 3 가두집회 형태로 행사를 강행하였다.
호헌철폐운동 4·13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개헌에 대한 요
○
구가 전국적으로 수준으로 다시 확산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 환은 이러한 국민적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임기 만료 후 자신의 후임자에 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뜻을 담은 이른바 4·13호원조치를 발표했다 당시 . 호헌조치의 주된 내용은 선거인단을 통한 대통령 간선제 방식으로 정권을 이
양하고 모든 개헌논의를 탄압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 하는 것에 불과, 했다.
대전지역에서는 호헌조치 발표 일주일 후인 4·19혁명 기념시위에서 대학생
○
들이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시 이 시위를 . 주도한 혐의로 한남대학교 총학생장 윤상구가 대전경찰서로 불법 연행되어 조사받던 중에 용공좌경이라는 폭언과 함께 구타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 다 이에 월 일 한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장기집권 분쇄 호헌분쇄 폭력경. 5 6 , , 찰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폭력사건규탄대회가 열렸다.
호헌철폐운동에는 지역사회의 종교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괴정
4·13 .
○
동 가톨릭 성당의 김순호 주임신부를 포함한 여 명의 신부들은 월 일 오30 5 4 후 시부터 대흥동 가톨릭회관 층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기도를 시5 2 “ 작하며 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민주개헌을 요구하는 단식기도회를 월 일” 5 8 까지 진행했다 당시 대흥동 가톨릭성당과 성당 건너편에 위치한 가톨릭 회관. 은 마치 서울의 명동성당처럼 대전지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월 일에는 충남지역 목회자 명이 공동 연명한 담화에 대한 충남목
5 7 197 4·13
○
회자의 입장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장수찬’ ( , 2007: 278). 그리고 연명한 목회자 명은 충남인권선교협의회 소속 강경제일교회 원형수 목사를 중심으32 로 오후 시 분에 대전 제일감리교회 교육회관 동구 원동 에서 단식기도에 9 30 ( ) 들어갔다.
■ 대전지역 월 항쟁의 시작과 전개과정 6
월 일 항쟁의 시작 6 10
□
월 일 오후 시 충남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대흥동 가톨릭성당에서 고문
6 10 6 ‘
○
살인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를 개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저지’ .
로 무산되면서 투석전이 벌어지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전환되었다 이날 가두. 시위는 대전 시내 곳곳에서 경찰병력과 시위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펼치면 서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충남운동본부와 학생운동세력은 경찰의 원천봉쇄로 원만하게 대회를 개
○
최할 수 없을 것이라 미리 예측하고 다른 계획을 세워 놓았다 사전에 계획한 . 대로 학생들은 국민대회 개최 시간을 앞두고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가까운 대 전극장 동백사거리 성심당제과 등지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학생들은 박종철 , , . 사진 피켓을 들고 독재타도‘ ’,‘호헌철폐 등을 외치면서 대흥동 성당으로 ’ 평화행진을 시도하였지만 전경에 의해 곧 제지당했다 세 곳에서 합세하여 , . 규모가 커진 학생시위대는 거리의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고,‘우리의 소 원의 민주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계속해서 가두행진을 진행하였으며 이에 ’ ,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시위대에게 지지의사를 표현하였다. 6월 일 시민들10 의 호응은 학생시위대의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호 흥은 . 항쟁기간 동안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직접 시위대열에 참 여하는 시민들 또한 늘어났다.
항쟁의 확장
□
월 일에는 대전의 중심시가지인 중앙로 일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6 15
○
시민들로 가득 찼다 경찰도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써 볼 수는 없는 정도로 사. 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날의 이 거대한 시위 물결은 대학 캠퍼스에서 시작되. 었다. 15일 충남대를 포함한 한남대 목원대 대전대 배재대 등에서 교문을 , , , 뚫고 시내로 진출하기 위한 대학동시다발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충남대학교 학생비상총회가 열린 민주광장에는 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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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들었다 이들은 비상총회를 통해 학생들은 수업을 전면 거부하고 투쟁 일선. 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같은 시간 한남대학교에서도 천여 명의 학생들이 도. 5 서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으며 다른 학교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
다 교내집회는 자연스럽게 교문 밖 진출로 이어졌다 교문을 뚫고 시내로 진. . 출하려는 학생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대전 대학가 곳곳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따라서 경찰병력 또한 자연스럽게 여러 . 대학으로 분산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최초로 충남대학교 학생들, 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유성시내로 진입하였다 이후 그 기세를 몰아 대전. 역까지로 도보로 행진하였다.
다음날 벌어진 일 시위는 자연발생적인 대중시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학교16 .
○
를 빠져나와 시내로 집결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오후 시경부터 중앙시장 골6 목과 동백사거리 중앙데파트 등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도, . 심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는 저녁 시를 넘으면서 시위대의 규8 모가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경. 찰병력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8시 분경 경찰병력이 뒤로 물러나면50 서 중앙데파트와 대한통운 앞의 시위대는 스크럼을 하고 대전역 광장으로 집 결하였다 대전역 광장에 있던 시위대와 거리에 있던 시민들이 합세하여 중앙. 로를 가득 메우고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면서 도청 방향으로 행진하여 도청과 , 시청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날은 충남도청에서 대전역에 이르는 중앙로를 시위군중이 장시간 완전히
○
장악하였다 그간 시위대는 시위의 실질적 상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 · 대전의 중심지인 중앙로를 점령하는 것을 시위의 일차적 목표로 설정하고 싸 웠다면 반대로 경찰은 시위대의 중앙로 진출과 점검을 막아야만 했다, .
항쟁의 마무리
□
월 일 대전에서도 평화대행진이 개최되었다 오후 시 학생과 시민들은 원
6 26 . 6
○
동사거리와 가톨릭문화회관 부근에 모여 경찰과 대치했다 대회 초기 경찰이 . 최루탄을 쏘지 않아 시위대는 금세 만 명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학생과 시민2 , 들이 홍명상가와 대전역 사이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시 분부터 경찰이 최. 6 50 루탄을 난사하여 시위대는 한밭식당 골목과 은행동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 7
시경 대흥동 천주교회 앞에 모인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지 맙시다 라는 구“ ” 호를 외쳤으며 대전기독교 여성모임 여 명도 최루탄을 추방하자 라는 피, 20 “ ” 켓을 들고 민주당 동구지구당 방향으로 행진했다.
시위는 일27 , 28일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월 일 당시 민정당 대표 노. 6 29
○
태우가 일명 6·29선언으로 알려진 특별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특별선. 언문에는 당시 시위대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 적 정부이양을 실현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6·29선언이 나오자 국민운 동본부는 환영의 뜻을 밝히고 이는 민주화를 위해 온 몸으로 싸운 국민의 위, 대한 승리임을 천명하였다. 6·29선언은 민주화의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며, 속이구 선언이라는 비판이 이었지만 특별선언이 발표되면서 대전에
‘ ’ , 6·29
서도 월 항쟁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6 .
대전지역 년 노동자 투쟁 5. 87, 88
■ 대전지역 노동운동의 태동
가톨릭노동청년회와 야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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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역의 조직적 노동운동은 년대 초 중반 학생운동 내부에서 노동운동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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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한 사회변혁을 중시하는 현장론 이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태‘ ’ 동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진보적인 사회운동세력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 대전지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종교단체 내부에서 활동하. 던 가톨릭노동청년회‘ (JOC)’ ‘와 야학 등을 통해서 목적의식적인 노동운동’ 이 출발한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당시 야학은 학력수준이 낮았던 노동자. 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의식화된 노동자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노동자들.
과 접촉하고 현장감을 익혀 노동현장에 투신할 준비 태세를 갖추는 공간으로 활동되었다.
당시 대전지역 가톨릭노동청년회에는 주로 대사동 중구 과 대화동 대덕구 에서 ( ) ( )
○
일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대사동에서는 섬유 봉제 방직 성남무역 등의 . , , , 노동자들이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대전의 대표적인 공단지역인 대화동에서는 , 한우 제일제침 마신산업 대성제화 동신전선 등의 노동자들이 주로 참여하, , , , 였다.
대전지역 학생운동 출신 운동가들의 현장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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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후반부터 지역대학의 일부 학생운동가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두기 1970
○
시작했으며, 70년대 말 최초로 충남대 출신 이완규(73학번 가 노동현장에 투신) 했다 하지만 이는 조직적인 현장이전은 아니었으며. , 1979년 10·26사건 이후 학생운동 강화를 위해 학교로 복학 하면서 현장 활동은 끝나고 만다 당시 학. 생운동의 주된 관심사는 민주화운동에 있었기 때문에 현장이전은 조직적 실 천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 1980년 5·17계엄령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석 방된 충남대 사회학과 출신 선재규(75학번 가 노동운동에 뜻을 품고 년도에 ) 82 개별적으로 현장투신하면서 학생운동 출신의 노동현장 진출이 재개되었다 대. 전지역 학생들의 조직적인 현장 이전은 1983년 민중야학 해산 이후인 84~85 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 대전지역 년 87 7·8·9 노동자 대투쟁
대전지역 년 노동자 대투쟁 개관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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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월 민주항쟁 직후 정치적 기회구조가 열리면서 울산의 현대엔진 민 1987 6
○
주노조결성 투쟁을 시작으로 노동자 투쟁이 전국적으로 대폭발하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 규모 7·8·9
의 노동자 투쟁이었다 당시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 3,749건의 노동쟁의가 발 생했는데 이 수치는 , 1986년 발생한 276건의 무려 13.6배에 이른다.
대전을 포함한 충청지역에서도 27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었다 대전지역만 .
○
놓고 보더라도 대화공단에 위치한 동신전선 투쟁 월 일 을 기점으로 월 초(8 7 ) 9 까지 1,2공단 110개 공장 중 곳에서 파업이 일어날 정도로 놀라운 폭발력을 79 보였다 김문창( , 2008). 대전지역 민주노조운동은 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여 8 9 월로 들어서면서 급격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전국적 인 상황과 일치한다 표(< 5. 1> 참조 파업은 방적 피혁 금속 화학 등 제조업 ). , , , 부문에서 택시 시내버스 등과 같은 운수부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 났다
동신전선 투쟁: 87년 대전지역 노동자 대투쟁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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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역 년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동신전선 파업이었다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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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은 어용노조가 간부가 한 여성노동자를 폭행한 사건에서 시작했다 동신. 전선은 전선을 만드는 회사로 5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대전지역에 서는 제법 큰 규모에 속하는 제조업체였다 당시 여성노동자가 동료의 밀린 . 퇴직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을 찾아가 이를 호소하였다 그런데 . 사측에서는 퇴직금을 지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항의한 여성노동자를 , 해고하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편승하여 어용노조 간부 김, ○○이 퇴직금 문제 를 호소한 이 여성노동자를 폭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폭행사건이 공장현장에 알려지면서 동신전선 노동자들은 더는 회사 앞잡
○
이인 폭력 어용노조를 두고 볼 수 없다며 폭행을 저지른 노조간부의 즉각적 , 퇴진을 요구하는 한편, ‘노조민주화 대책위원회 위원장 박종만( , )’를 결성했 다 그리고 월 일 아침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노조민주화 대책위원회 . 8 7 , 명의로 된 동신전선 여러분께 라는 유인물을 배포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 ’ 투쟁에 돌입, 13시부터는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파업 농성 에 들어갔다 당시 이들의 요구조건은 폭력 어용노조 퇴진 임금 및 상여금 . , 인상 강제 잔업과 철야노동 폐지 작업환경 개선 복지시설 확충 식생활 개, , , , 선 인간적 대우 등이었다, .
동일계전 대전지역 최초의 민주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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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동일계전 투쟁은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 선재규 김동출 등에 의해 사전
87 ,
○
에 철저히 준비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자연발생적이었던 다른 노동자 투쟁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전국적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 속에서 동일계전 투. 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현장에서 준비한 활동가의 헌신적인 . 노력이 없었다면 투쟁의 열기가 민주노조건설로 이어지지 못하고 임금인상 , 및 근로조건 개선에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당시 동일계전 파업투쟁을 주도한 선재규는 충남대학교 사회학과(75학번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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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 1980년 5·17계엄 확대로 수감 생활하던 중에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출소 이후 . 1982년 월경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중구 옥계동에 있1 는 계량기 수리업체인 동일계전 이후 용문동으로 옮김 에 입사했다 노동운동( ) . 을 하겠다는 목적의식은 뚜렷하게 갖고 있었지만 취업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 조직적인 현장투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운동 시절의 인적 연결망과 가톨. 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통해 지역운동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82년부 터 년 노동자대투쟁 당시까지 계속 한 사업장에서 일해 오는 동안 그는 현87 장노동자와 동화되었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사투쟁 연월차휴가 투쟁 등 낮은 수준의 . , 투쟁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들을 얻어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장 분위기를 노동 자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힘을 쏟았다.
년 주요 노동자 투쟁과 충민노련의 결성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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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노동자 투쟁 지역적 차원의 연대투쟁:
□
충청남도 택시노동조합협의회 이하 택노협 는 대전 및 충남지역 택시기사들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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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잃어버린 권익을 찾고자 개 택시노동조합이 참여하여 결성17 (1988년 월 일 한 협의체 조직이다 택노협은 그간 사측 편에 서서 기회주의적 태
7 14 ) .
도를 보이던 연맹지부를 비판하고 진정한 민주노조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택, 시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다 따라서 연맹지부와는 다르게 강한 투쟁성. 을 지니고 있었다.
월 일 오후 시경 중도택시 사장 김선벽이 노동자들에게 공기총을 조준 사 9 9 3 ,
○
격하여 총을 맞은 한 조합원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같은 , . 시간 대성운수에서는 사측이 동원한 구사대가 조합원과 그들의 가족에게 똥 물을 퍼붓고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택시노동자 문제는 노사문제를 넘, 어 지역사회의 핵심적인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반윤리적이고 폭. 력적인 탄압이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사회 소요를 억압하려는 관계기관의 88 직간접적인 묵인 아래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노사문제를 넘어 인권과 민주화 의 문제로 확장되면서 광범위한 사회운동세력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연결고리, 가 형성되었다.
충남방적 산업체 예덕실업 고등학교 인금인상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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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충남방적은 전국적 규모를 자랑하는 섬유업체로 산업체 부설학교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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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실업고 충청남도 예산군 를 운영하고 있었다 충남방적은 어려운 가정형편( ) . 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어린 여성노동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 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마음 놓고 착취했다 당시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고향. 의 가난한 가족을 위해 돈을 벌 수 있으면서도 학교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 는 이유 때문에 온갖 비인간적인 멸시를 견뎌내야만 했다.
학생노동자를 위해 여러 노력을 해온 남광균 교사의 해고소식이 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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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면서, 3월 일 새벽 시 분 21 4 30 1,600여 명의 학생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과 기숙사 시설 개선 임금인상 남광균 교사의 복직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 , 들어갔다 같은 날 아침 시 분 학생들은 학교로 재집결하여 일 년에 휴가. 7 30 를 일에서 일로 연장해 줄 것 졸업식 당일은 전학년 휴일로 해줄 것 작업3 5 , , 장과 기숙사 시설 개선 인권존중 남광균 교사의 복직, , , 20% 임금인상과 야근 수당 지급 등을 요구했다
충남민주노동자협의회의 결성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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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전지역 활동가와 선진노동자들은 지역노동운동의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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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과 발전을 위한 공개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운동가들 사이에서 대전지역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지도할 수 있는 대중조직 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여기에 년 월 민주항쟁 이후 완전하지 않. 87 6 지만 공개적으로 노동운동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할 수 있는 합법적인 공간이 , 확보되었다 이에 현장 활동가 기독교 노동자회 모임 가톨릭 노동청년회 등. , , 이 중심이 되어 노동투쟁평가회 를 조직하게 된다 평가회에는 현장 활동 ‘ ’ .
년 이상 사회과학적 이론 무장이 되어 있는 활동가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2 , .
구성원의 상당수는 해고된 학생출신 활동가들이거나 해고된 현장 노동자들이 었다 평가회 모임이 계획했던 것보다 일찍 해산되어 처음에 목적했던 깊이 . 있는 논의를 진행할 수는 없었지만 기존의 활동가 소모임을 발전적으로 해체, 하고 대중적인 공개단체를 결성하자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 1988년 3 월 13 , 일 성남동 있는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충남민주노동자협의회’(이후 충남민주노동자연합으로 명칭 변경 가 결성되었다) .
당시 충민노련에는 대전지역 활동가 역량이 집중되어 있었다 충민노련은 지.
○
역 내에 민주노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속에서 노동운동의 기반을 튼튼 히 하고자 신규노조 건설 삼왕 대덕타올 유성컨트리클럽 대덕염색 팽귄 한( , , , , , 국병원 전자통신연구소 동방의료양행 삼양산업 주류합동 노조 등 여 개, , , , 30 의 신규노조 결성 어용노조 민주화운동 사업 동강 동신전자 남한제지 한국), ( , , , 이연 충남방적 금하방적 대전피혁 대성제화 철도 마신산업 성남무역 국, , , , , , , , 제방직 등 을 강력하게 지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년 택시노조 총파업지원) . 88 , 공동임투 조직 지역운동세력과 함께 교직원노조 탄압저지와 참교육 실현을 , ‘ 위한 대전 충남 공동대책위원회 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 .
목 차
제 장 서론 1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
제 절 연구목적 1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 제 절 연구방법 2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
제 장 2 1960 년대 대전지역 사회운동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
제 절 1 4 19 ․ 혁명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 제 절 2 1964~1965 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8
제 장 3 1970~80 년대 대전지역 민주화운동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3
제 절 1 1970 년대 민주화운동사 반유신운동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3 제 절 2 1980 년대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민주화운동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89
제 장 년 대전지역 월 항쟁의 출발과 전개과정 4 87 6 · · · · · · · · · · · · · 119
제 절 박종철 고문사망과 1 4·13 호헌 철폐투쟁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19
제 절 대전지역 월 항쟁의 전개과정 2 6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29
제 절 대전지역 월 항쟁의 성공요인 3 6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0
제 장 5 87, 88 년 대전지역 노동자 투쟁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5
제 절 대전지역 노동운동의 태동 1 : 1980~1986 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5 제 절 대전지역 년 2 87 7·8·9 노동자 대투쟁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62 제 절 년 주요 노동자 투쟁과 충민노련의 결성 3 88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80 제 절 년대 대전지역 노동운동의 특징 4 80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1
참고문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5
구술자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9
표 목차
표
< 4. 1>
충남지역의 고문 및 폭력저지 공동대책위원회 참여단체 명단 ··· 123표 충남도민운동분부 참여단체
< 4. 2>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32 표
< 5. 1>
대전 충남지역 시기별 주요 노동쟁의 발생건수 단위 건수· ( : , %) ··· 163표 대전 충남지역 노동자대투쟁
< 5. 2> 87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63
자료 목차
자료 충남대학교 학생들 단식농성 장면 년 월 일
< 3. 1> (1974 11 2 ) · · · · · · · · 73 자료 호헌조치 보도내용
< 4. 1> 4.13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26 자료 대흥동 가톨릭 성당
< 4. 2>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27 자료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충남운동본부 발족 선언문
< 4. 3> · · · · · · · · · · · 130 자료
< 4. 4> 국민운동본부에서 발표한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 문헌 · · · · · · 135 자료 월 항쟁 당시 시위대
< 4. 5> 6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2 자료 최루탄의 피해
< 4. 6>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3 자료 민주열사 박응수의 묘
< 4. 7>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8 자료 년 파업당시 동신전선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 5. 1> 87 · · · · · 169 자료 동일계전 민주노조 건설과정에 관한 선재규의 인터뷰
< 5. 2> · · · · · 172 자료 총격사건직후 노동자가 벽에 쓴 글
< 5. 3>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83 자료 예덕실업고등학교 학생노동자 처우 개선에 앞장섰던 남광균
< 5. 4>
교사에 대한 회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88 자료 한 여성노동자가 작성한 확인서
< 5. 5>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1 자료 대화실업에 근무했던 어느 여성노동자의 진성서
< 5. 6> · · · · · · · · · · · · · · 192 자료 충남민주노동자협의 창립대회 안내전단
< 5. 7>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5 자료 충남민주노동자협의회 창립선언문
< 5. 8>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6
제 장 1
서론
제 절 연구목적 1
제 절 연구방법 2
제 장 서론 1
제 절 연구목적 1
한때 사회운동은 군중들의 비합리적이고 감정적 집합행동으로 인식되었지만 현, 대 사회에서 사회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집합적 시도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사회운동은 당대의 첨예한 사회모순과 이를 변화시키고자하는 집합적 . 열망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운동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 추구하고자 했던 집합적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다.
사회운동은 운동이슈에 따라 노동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인권운동, , , , , 성소수자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운동이슈의 분화에 따라 새로, 운 사회운동이 지속해서 출현한다 또한 운동이 발생하는 공간적 범위에 따라 지구. 적 전국적 지역적 차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거시적 공간에서 미시적 공간, , . 으로 세분화 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이슈와 운동의 공간적 범위를 교차하면 다양. 한 조합이 가능하다 본 연구는 대전이라는 공간적 범위에서 그간 진행되어온 다양. 한 사회운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 작업은 크게 부와 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1 2 . 1부는 1960년 4·19혁명부 터 1970년대 반유신운동, 87년 월 민주항쟁과 년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한6 80 다면, 2부는 년대 운동의 성과 바탕으로 년대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다양한 시80 90 민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할 것이다 현재의 보고서는 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부. 1 2 까지 완성하면 대전지역 사회운동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기술하는 최초의 작업이 될 것이다.
대전지역에서 벌어진 4·19혁명과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에는 고등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70년대 반유신운동과 년대 80 유화국면을 거치면서 지역대학가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학생운동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0, 80년대 대전지역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을 이슈로 주로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87년 월 항쟁과정에서도 종교계와 학생들이 큰 6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들은 지역에서 자생적인 노동운동세력이 출현하는 데에도 직, 간접인 영향을 미쳤다 대전지역 사회운동은 때론 전국적 차원의 발전 경로와 유사. 성을 보이면서도 때론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차별적인 경로를 보이면서 발전해왔, 다.
한국 특유의 서울 혹은 중앙 중심의 사고방식은 정치 경제 문화영역에서만 패권( ) , , 적 형태를 보였던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운동사를 연구하는 학문의 장에서도 동일. 하게 반복되어왔다 따라서 본 연구는 대전이라는 지역적 관점에서 사회운동을 재. 구성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대전지역의 사회운동이 갖는 특성. 은 몰론 지역사회운동이 대전지역의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에 관 한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제 절 연구방법 2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문헌연구과 함께 심층면접을 동시에 진행하였 다 본 연구가 과거의 역사를 기술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차적으로 . 1 관련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검토했다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신문자료 성명. , 서 및 각종 문건 등을 검토하였다 본 연구가 정권에 대항했던 사회운동연구라는 . 점에서 관련 문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지 않거나 유실된 경우가 많았다 따. 라서 필요한 경우 관련자들과의 심층면접을 통해 내용을 보완하였다 심층면접은 . 문헌으로 파악할 수 없는 내용뿐만 아니라 참여자들의 정서와 감정까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제 장 2
년대 대전지역 사회운동 1960
제 절 1 4·19 혁명
제 절 2 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제 장 2 1960 년대 대전지역 사회운동
제 절 1 4 19 ․ 혁명
혁명의 발발 배경 1. 4 19 ․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 정권과 집권 여당인 자유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점점 약화되었다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지 못하는 국정 운영 때문이었다 이승만 . . 정권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고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는 정책을 국 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또 다시 무. 력에 의한 북진통일론을 불사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였다 또한 반공을 지배이. 데올로기로 삼고 반공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과도하게 군과 경찰을 강화했으며 정, 부 정책을 일방적으로 홍보 선전하는 관제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 . 의 영구 집권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 , 의까지 파괴하였다 특히 원조경제라고 불릴 만큼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 미국의 원조정책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율이 높아 져 국민 생활이 날로 어려워져 갔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대한 국민. 의 비판이 고조되어 갔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대한 민심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와 1958년 제 대 국4 회의원 선거에서 나타났다. 1956년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퍼센트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평화통일론과 대중 경제를 내세
70 .
웠던 진보 성향의 조봉암이 퍼센트 득표율을 기록한 점30 , 180여 만표에 달하는 무 효표의 상당수가 선거운동 도중 갑자기 사망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추모표라는 점 그리고 선거운동 과정과 투 개표 과정에서 자행한 엄청난 부정을 고려했을 때 , ․ 이승만 대통령이 승리한 선거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이승만 정권과 . 자유당이 심혈을 기울였던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 이기붕이 낙선하고 민주
당의 장면이 부통령으로 선출된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대전에서는 이승만이 . 퍼센트 조봉암이 퍼센트의 득표율을 획득하여 거의 같은 득표율을 보였다
50.7 , 49.3 .
선거운동의 격차를 포함한 선거 과정의 여러 사정을 감안하면 사실상 조봉암의 승 리였다고 볼 수 있다 대전을 제외한 충남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승만이 퍼센트. 79 , 조봉암이 퍼센트의 득표율을 획득하였다 또한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21 . 후보가 자유당의 이기붕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대전에서 장면은 . 퍼센트 이기붕은 퍼센트의 득표율을 획득했으며 이범석을 비롯한 나머지
69.3 , 20.7 ,
네 후보의 득표율은 퍼센트였다10 .
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더 1958
욱 떨어졌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금권과 관권선거였지만 자유당이 가까스로 . ,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대전에서는 개 선거구 중에서 자유당과 민주당 . 2 후보가 명씩 당선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자유당 후보가 어렵게 당선된 반면에 민1 . 주당 후보는 여유있게 당선된 사실이었다 두 차례의 선거를 통해 이 무렵 대전시. 민의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1)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선거를 통해 나타난 민심 이반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년에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를 일찍부터 대비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선거를 위
1960 .
한 사전정지 작업을 하고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하였다 먼저 정부와 자유당은 . 년 월에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통제하고 야당의 탄압을 강화할 목적으로 1958 12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야당 국회의원을 강제로 감금시키고 국. 회의사당에 무장경찰을 배치한 후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아울러 관권선거를 용이하. 게 하기 위해 그동안 실시된 지방자치 단체장의 직선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로 하는 방식으로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였다 나아가 민심 이반이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 때. 문이라고 판단하고 언론을 규제하기 위해 몇 차례의 필화사건을 일으켰으며 이승, 만 정권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신문이었던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기도 하였다.
자유당은 선거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에 이어 야당을 조기에 제압하기 위해 1959
1) 중앙선거관리위원회(1968), 대한민국선거사, pp.801-809; 중앙선거관리위원회(1989), 역대 국회 의원 선거상황, pp32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