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죽음과 서울의 봄
1) ‘ ’
위장 결혼식 사건 (1) YMCA
년 월 일 년간의 박정희 군사독재는 부산 마산 시민 학생의 항거와
1979 10 26 18 ·
김재규의 총탄으로 붕괴되었다 김재규가 법정 최후진술에서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 위하여 박대통령을 살해했다고 했으나 박대통령의 죽음은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 었던 차지철과의 권력 갈등이 YH사건 야당총재의 제명사태 그리고 이와 연결된 , ,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시위인 부마사태로 인한 결과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의 구. 조적 성장과 운동 중심세력의 운동역량의 증가로 볼 때 대통령의 죽음이 아니더라 도 도전과 대응 사이에서 시간의 문제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로의 전환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유신붕괴가 민주화로 연결되지 않고 권위주의 강경세력의 . 재집권과 신군부 권위주의로의 회귀로 귀착되어 민주전환이 오히려 연장된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120)
박정희 사망 직후인 1979년 월 일 서울에서 11 24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 ’ 발생하였다 계엄령 하에서의 공식적인 집회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당시의 재야 민. ,
120) 마인섭(1999), 앞의 책, pp.299-300.
주 인사들이 결혼식이라는 형식을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선거 저지와 민주화 촉구 대회 를 가진 것이다 이날 참가자들은 집회에서 유신체제 연’ . 장 반대와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참석인사 중 미리 빠져나간 소. 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원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연행되었다.
위장 결혼식은 대전지역 대학가를 중심으로도 파장을 일으켰다 이른바
YMCA .
충남대학교 도서관 시국선언서 낭독 사건이 그것이다. 1979년 월 일 서울에서 11 29 발생한 YMCA위장 결혼식 사건 최열 이해찬 최미나 장영달 등이 주도하여 신군, , , , 부에 대한 경계의 내용으로 시국선언을 하였다 오전 시 즈음 발표가 끝난 후 오. 10 후에 충남대학교에 도착한 선병렬 등이 위장 결혼식 사건을 충남대 학우들에게 알 려야하겠다는 생각으로 1979년 월 일 도서관에서 시국선언을 하였다11 29 .121)
학원민주화운동의 전개 (2)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 지배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 서울의 봄 이 왔다 민‘ ’ . 주화 요구와 정치적 권리 쟁취투쟁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전후하여 장기간 군사독재에 억눌려 온 국민의 민주화 1980
열망이 전사회의 영역에서 분출되었다 당시 민주화의 열망은 어느 특정 개인이나 . 집단 혹은 정치세력에게 국한된 요구가 아니었다.122) 군사정권 하에서 연금 투옥 , 등으로 제도정치권에서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제약 당했던 인사들도 1980년대 초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와 공화당 총재로 취임한 . , 김종필 등의 정치권은 일단 최규하 과도정부를 인정하고 유신헌법의 폐기 및 신헌, 법 제정을 통해 민주화 일정에 따른 조속한 정권이양의 실시를 촉구했다 그리고 .
년 월 일 발표된 대학교수들의 지식인 선언은 기존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 1980 4 24
철회와 새로운 민주질서 이행을 촉구를 바라는 정치인식의 대표적 사례이다.
121) 당시 관련자 박정균 선재규 안은찬 등 명이 연행되었다, , 7 . 12월 일 긴급조치 호가 해제되고8 9 , 도서관 낭독사건에 관계된 학생들은 12월 22일 법원의 불기소처분을 받고 모두 석방되었다 충. 남대학교 민주동문회(2006.3), 충남대학교 민주화운동 소사, 2006.3. p.5. (선병렬 구술증언) 122) 이완범(2005), 박정희정부의 교체와 미국: 1979~1980, 이완범 외, 1980년대 한국사회연구 백,
산서당, pp.68-71.
그러나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치열하게 민주화투쟁 을 전개한 학생운동 세력의 선도적 역할을 비롯하여 특히 군사정권하에서 최소한 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요구였다 예로 강원도 정선군 사북. 읍에 소재한 사북탄광에서는 탄광노조 지도부의 어용성과 지방경찰의 비호에 대한 분로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포함된 시위군중이 경찰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 해 무장하고 면사무소를 점거하는 사태가 벌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노동. 조합 결성 임금인상 해고반대 등 노동조건 개선투쟁이 연이어 일어났고, , , 1980년 5 월 일에는 한국노총이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는 등 노동쟁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11 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가장 강력한 결집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은 급변하는 사태의 와중에서 학생운동 지도부의 미숙한 경험과 인식의 한계로 나타난 서울역 회귀사건‘ ’ 이후 신군부에 저항할 수 있는 조직화된 세력 및 역량은 실질적으로 부재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 1980 년대 초기에 전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광주항쟁을 전환점으로 정치상황의 전면에 재등장한 신군부 주도의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적으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쿠데타와 민주세력 탄압 2) 5.17
년 월 일 전두환 노태우 정호영 박준병 최세창 등 육사 출신의 하나 1979 12 12 , , , ,
회 소속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해 당시 장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충돌 이 발생한다 이것은 군사반란을 통해 새로운 군사독재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기획. 된 것이다 신군부세력은 이 사건을 통해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 1980년 5․
사건을 일으켜 제 공화국의 권력을 축조하였다 사실 사태는 정권을 잡기
17 5 . 12 12․
위한 쿠데타의 음모가 아니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 기 위한 작전에서 출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해당 사건이 유혈사태로 마감된 이후 ,
돌아올 수 없는 강 을 건넜다고 판단한 이들은 종국에 쿠데타를 강행하였다
‘ ’ .123)
123) 박호성(2005), 1980년대 한국 민주주의 전개 제도 의식 생활의 측면에서 이완범 외: , , , , 1980년 대 한국사회연구 백산서당, , pp.68-71.
신군부에 대한 투쟁은 민주주의를 진전시키지 못한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 한 반성적 촉구이며, 1970년대의 민주주의적 이념과 현실 비판정신이 다듬어지고 산출된 행동이었다 대전지역 대학가를 중심으로 발생했던 신군부에 대한 투쟁을 . 사건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충남대학교 비상계엄해제시위‘ ’(교내에서 교외로: 1980.5.1.~5.7)
□
년 월 일 당시 군부는 사회혼란행위를 안보차원에서 엄단하겠다고 발표한 1980 5 1
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적 이슈를 둘러싼 시위는 군부에 쿠데타를 일으킬 명문을 . 준다고 하여 서울에서는 자제하는 분위기였지만 대학을 중심으로 비상계엄해제와 민주주의로의 체제전환을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소리를 들어 온 충남대 학교에서 비상계엄해제 시위를 일으켰다. 5월 일 충남대생 1 2,000여명이 모여 비상 계엄해제를 주제로 학내시위를 진행하다가 대전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날 시위는 충. 남대 최대 규모로 계엄해제 등 시국성토대회가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 시 관련자들의 구술증언에 따르면, 5월 일 오후 시 충남대 대운동장에 1 2 500여명의 학생이 모여 학생총회를 가지고 과도정부는 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국가보위‘ 와 민생안정 그리고 조속한 시일내에 정권을 이양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마련하 는데 전력할 것 을 촉구하였다 또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상계엄령의 해제를 ’ . 요구하였다 증언에 따르면 김용범이 기조시위를 하였는데 . “이유없다 명분없는 . 비상계엄 해제하라”,“유신잔당 물러가라 고 외쳤다고 한다 점차 학생들이 모여” . 들어 5,000명 정도가 되었는데 분 발언대 형식의 자율토론이 전개되어 너도나도 5 마이크를 달라고 하였다 오후 시경 교내시위로 들어가 보운언덕과 본부 앞을 돌. 3 고 난 뒤 다시 대운동장에 집결하였다 이후 내부 격론을 거쳐 대다수의 학생들이 . 교외로 나갈 것을 합의하고 피켓과 플래카드를 준비한 뒤 열로 열을 지어 법과, 10 대학을 선두로 계엄령을 해제하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운동장 정문을 통“ ” 해 밖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미 출동한 기동경찰대가 출동해 있어 대치하게 되자 .
여명의 학생들은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계엄해제 언론자유보장 등의
3,000 ‘ , ’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학생대표들이 경찰측에 비폭력이며 평화적인 . ‘ 시위임 을 알렸으나 경찰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 “5분내로 해산하지 않으 면 전원 입건하겠다 고 하고 페퍼포트와 최루탄을 발사하였으며 학생들은 투석전” , 으로 맞섰다 학교로 후퇴한 학생들은 오후 시 분경 대운동장에 재집결 대전역 . 4 40 , 광장까지의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4진으로 나누어 대전역 광장에 모였다. 마지막까지 경찰과 대치하던 공교대생 1,000명이 대전역에 도착하여 대전역광장에 서 3,000명의 충남대생들이 계엄령해제 등의 구호와 정의가 등의 노래를 부‘ ’ ‘ ’ 르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대전역에서도 경찰과의 대치는 계속되었고 시민들 앞에. , 서 계엄해제 언론자유보장 민주의 수호 등의 구호를 외치고 결의문과 성명서‘ , , ’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학생대표들이 경찰측에 비폭력이며 평화적인 . ‘ 시위임 을 알렸으나 경찰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 “5분내로 해산하지 않으 면 전원 입건하겠다 고 하고 페퍼포트와 최루탄을 발사하였으며 학생들은 투석전” , 으로 맞섰다 학교로 후퇴한 학생들은 오후 시 분경 대운동장에 재집결 대전역 . 4 40 , 광장까지의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4진으로 나누어 대전역 광장에 모였다. 마지막까지 경찰과 대치하던 공교대생 1,000명이 대전역에 도착하여 대전역광장에 서 3,000명의 충남대생들이 계엄령해제 등의 구호와 정의가 등의 노래를 부‘ ’ ‘ ’ 르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대전역에서도 경찰과의 대치는 계속되었고 시민들 앞에. , 서 계엄해제 언론자유보장 민주의 수호 등의 구호를 외치고 결의문과 성명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