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일 항쟁의 시작 1) 6 10 :
국민운동본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날인 월 일 전국동시다발 시위6 10 의 형태로 고문살인은폐 및 호언철폐 국민대회 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학생‘ ’ . 들은 6·10국민대회 열기를 고조시키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월 일부6 1 터 서울과 지역의 대학가에서 크고 작은 단식농성과 시위를 진행하였다. 6월 일 5 한남대학교 자유 광장에서 대전지역 개 대학 대전대 목원대 배재대 충남대 한남5 ( , , , , 대 이 모여 군부독재타도 및 장기집권저지 충남권 대학연합 실천대회 를 열었다) ‘ ’ .
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이날 행사는 전경 천 백여 명이 한남대학교 주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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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싼 삼엄한 경계 속에서 치러졌다.179) 그리고 월 일에는 앞에서 언급한 충남 6 8 애학투 출정식이 개최되었다.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벌어진 대회 출정식 시위 월 일 도중 연세
6·10 6·10 (6 9 )
대생 이한열 경영학과 년 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 2 ) 이 발생했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월 일 살의 나이로 사망에 이르렀다 당시 . 7 5 22 . 이한열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함께 군부독재정권의 폭력성을 대중들에게
179) 한남대학교 신문(1987), “5개 대학연합시위 호헌철폐 주장하며- (1987년 월 일6 8 )
각인시킴은 물론 월 항쟁의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6 · .
월 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고 이었다 학생들
6 10 .
의 시위에 대비하여 대회장 주변에 전경을 배치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지 만 대회장 내부는 축제분위였다 인기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진행되었고 노태우가 민, . , 정당 대통령로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는 차기 대통령으로 노태우가 결정된 것이나 . 다를 바 없었다 반면에 대회장 밖에서는 오후 시 국기 하강식을 기점으로 민주개. 6 헌을 요구하는 전국동시다발 국민대회가 계획되었다 즉 월 일은 독재와 반독재. 6 10 라는 서로 대립적인 정치세력들 간에 강렬한 충돌의 벌어진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방식에 있어 월 항쟁의 특징은 전국동시다발 시위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6 , 그리고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다양한 참여방식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했다는 점이다 전국동시다발 시위는 박종철 추모대회 때부터 등장하. 기 시작하여 월 항쟁기간 동안 주요한 시위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전국동시다발 시6 . 위는 독재와 반독재라는 정치전선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 국민운동본부는 분간 소등10 , TV시청거부 기도 묵상 독경 전화걸기 등 낮은 수, , , , 준의 참여방식을 통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적극 권장했다 자료(< 4. 4> 참고).
월 일 오후 시 충남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대흥동 가톨릭성당에서 고문살인
6 10 6 ‘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를 개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 . 면서 투석전이 벌어지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전환되었다 이날 가두시위는 대전 시. 내 곳곳에서 경찰병력과 시위대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펼치면서 자정까지 계속 되었다.
당시 충남운동본부와 학생운동세력은 경찰의 원천봉쇄로 원만하게 대회를 개최 할 수 없을 것이라 미리 예측하고 다른 계획을 세워 놓았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 학생들은 국민대회 개최 시간을 앞두고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가까운 대전극장 동, 백사거리 성심당제과 등지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학생들은 박종철 사진 피켓을 들, . 고 독재타도‘ ’,‘호헌철폐 등을 외치면서 대흥동 성당으로 평화행진을 시도하였’ 지만 전경에 의해 곧 제지당했다 세 곳에서 합세하여 규모가 커진 학생시위대는 , . 거리의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고,‘우리의 소원의 민주 라는 노래를 부르면’
서 계속해서 가두행진을 진행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시위대에게 , 지지의사를 표현하였다.180) 6월 일 시민들의 호응은 학생시위대의 기대를 뛰어넘10 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호응은 항쟁기간 동안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 이 흐르면서 직접 시위대열에 참여하는 시민들 또한 늘어났다.
자료 국민운동본부에서 발표한 국민대회 행동요강 문헌
< 4. 4> 6·10
180) 대전충남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2005), 민주화운동관련 사건 단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 구보고서 대전 충남편: ․ , pp. 170-174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생과 시민들이 계속해서 대흥동 성당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도민대회를 열기로 한 시경 대흥동 성당 정문에는 , 6 4~5백여 명 의 시위군중이 형성되었다 도민대회는 대흥동 성당 정문 앞에 연좌하고 있는 학생. 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전경들은 성당을 겹겹이 에워싸고 시위대. 의 성당 진입을 막고 있었다 따라서 대회 주최자들은 선언문 낭독 구호제창 노래 . , , 등으로 행사를 단축하고 학생과 시민들을 가두행진을 위한 시위대열로 편성하였다,
장수찬 이 무렵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사과탄 지랄탄을 난
( , 2007: 282). ,
사하기 시작했으며 행사장 주변이 매개한 연기로 뒤 덮였다 이때부터 자정까지 본. 격적인 가두투쟁이 진행되었다.
대전극장 성심당제과 동백사거리 등 세 곳에서 시작한 시위는 학생과 시민들의 , , 합세로 순식간에 대규모 시위대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대전의 중심가. 를 누비면서 시위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성심당제과와 대전극장 쪽 시위대는 주로 . 중앙시장 중앙데파트 대전역 대전제일감리교회 등을 돌면서 전경과 숨박꼭질 시, , , 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동백사거리 쪽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로 인해 둘로 쪼개져. , 일부는 중앙데파트 시위대와 결합했고 다른 일부는 선병원 앞에서 시위를 진행하, 였다 그리고 이들은 오후 시 분경 성심당제과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시위. 6 13 대열과 합류 근처 골목을 누비면서 시위를 벌였다 장수찬, ( , 2007:283).
대전 중심가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시위대의 일부가 중 앙로 진출에 성공하였다 이에 즉각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 최루탄에 의해 일시적으로 해산되었던 시위대는 다시 중앙데타트와 중앙극장 양편 에 재집결하고 대전역과 대전우체국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대전우체국 방면으로 , . 갔던 시위대는 원동사거리 대흥동 사거리를 거쳐 오후 시 분경에는 동대전세무, 7 27 서 앞에 모여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시 분경 중앙시장에서 연좌시위를 . 7 46 하고 있던 시위대와 합류 중앙로 진출을 재시도하였지만 경찰의 최루탄에 밀려 , , 중앙시장 쪽으로 후퇴하였다 장수찬( , 2007: 284).
오후 시 분경 경찰은 중앙로 양쪽을 차단하고 도로 양쪽에서 최루탄과 지랄8 50 , 탄을 무차별 난사하여 시위대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였다 시위대는 좌우로 흩어져 .
대전제일감리교회 중소기업은행 대전역에 재집결하여 다시 중앙로 진출을 시도하, , 였다 오후 시 분경 . 9 10 4~5천여 명의 시위대가 다시 중앙로 일부를 점거하고 연좌 농성에 들어갔으며 경찰들 또한 지속적으로 해산을 시도하면서 경찰과 시위대 사, 이의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중앙로에서 흩어진 시위대는 중앙데파트 지하도 . 입구에서 군부독재타도 를 외치면서 전경들과 대치하는 가운데 밤 시까지 동‘ ’ 12 백 사거리 대전역 삼성동 등 중심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지속하였다, , .181)
시위가 끝난 후 일부 시위대는 괴정동 성당과 대전제일감리교회로 모여 철야농 성에 들어갔다 이날 시위로 명. 63 (43명 훈방, 5명 불구속, 15명 즉심 회부 이 연행) 되었으며, 6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182) 이날 시위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 었지만 중앙로를 일부나마 점검하고 자정까지 시위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 반시민들의 참여와 적극적인 지지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그만큼 군부. 독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대전의 . 중앙로가 시위대로 점령된 것은 년 월 항쟁이 최초였다 이 날은 지역사회운동87 6 . 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항쟁의 확장 대전의 중심을 점검한 시위대 2) :
국민대회는 학생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
6·10 . 6·10
회 이후 학생들의 참여 열기는 더욱 고양되었다 당시 대학가는 기말시험을 눈앞에 . 두고 있었지만 시험을 연기하거나 거부하고 계속해서 반독재투쟁을 해야 한다는 , 여론이 강력하게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대전지역의 대학생들도 학교별 학생비상총. 회를 열어 기말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어들었다. 6월 일 12 충남대학교 학생들은 과총회와 단과대학총회를 열고,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주2 간 시험연기 를 결의한다 그리고 당일 오후 시 학생비상총회를 열고 교문 밖 진’ . 3 출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학교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배재. .
181) 대전충남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2005), 민주화운동관련 사건 단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 구보고서 대전 충남편: ․ , pp. 170-174
182) 대전충남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2005), 민주화운동관련 사건 단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
182) 대전충남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2005), 민주화운동관련 사건 단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