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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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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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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리랑카 알기

(2017.10월)

1. 국기 “獅子기” - 獅子의 후예들 ... 1

2. 다문화 다민족 사회... 3

3. 동서양 항해의 중간 기항지 - 신밧드, 마르코 폴로와 정화 ... 4

4. 소승불교의 원산지 ... 7

5. 스리랑카의 세계적 브랜드 - 실론티 ... 8

6. 스리랑카 남성들의 “종교” - 크리켓 ... 10

7. 家門의 정치 그리고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 ... 12

8. LTTE(타밀타이거) 내전 26년 - 아물지 않은 상처 ... 14

9. 리콴유가 부러워 한 나라 ... 16

10. 전세계 국가의 평균 - 중간은 간다 ... 18

11. 콜롬보 코리아타운에는 한국인이 없다 ... 19

12. “코리안 드림” ... 21

13. 코끼리계의 슈퍼파워 ... 22

14. 스리랑카의 먹을거리 - 커리와 야자유 ... 24

15. 떠오르는 관광대국 ... 27

목 차

스리랑카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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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알기

“인도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섬나라 스리랑카는 향긋한 실론티 의 고향이며, 블루 사파이어로 빛나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약 450년 에 걸쳐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독립 후에 는 26년에 걸친 내전 그리고 지진해일로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오늘날 스리랑카는 강력한 리더십과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한 때 아시아의 모범 국가로서의 영화를 재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으며, 진정한 동반자로서 한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다.

이제 신밧드와 부처님, 마르코 폴로와 정화가 다녀간 스리랑카를 방문해보자.

1. 국기 “獅子기” - 獅子의 후예들

스리랑카 국기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사자이다. 칼을 쥐고 있 는 이 금색 사자는 스리랑카 건국 설화에 따라 싱할라족을 의미한다. 사자 주변 4개의 금색 보리수 잎은 불교를 상징한다. 스리랑카 국기는 스리랑카 국민의 다수인 싱할라족을 가장 크게 표현하고, 왼쪽의 주황색 줄과 초록색 줄로 각각 타밀족과 무어족(아랍 혈통의 무슬림)을 표현하여 싱할라족과 소 수 민족간 화합을 상징하고 있다.

사자가 그려진 기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1815년 이전까지 스리랑카 토착왕국의 기로 사용되다가, 1948년 독립과 함께 다시 국기가 되었다. 1951 년에는 초록과 주황의 2색 줄을 추가하였고, 1972년 국명을 실론에서 스리랑 카 공화국으로 바꾸면서 보리수 잎을 추가하여, 현재의 국기 모습이 완성되 었다. 스리랑카 국기는 “사자기(Lion Flag)"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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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 건국설화

ㅇ 지금의 북인도 벵골지역에 ‘방가’라는 왕국의 공주가 사자와 결혼 하여 아들, 딸 쌍둥이를 낳았고, 이들 쌍둥이 사이에서 위자야 (Prince Vijaya)라는 왕자가 태어났다. 위자야 왕자는 BC 486년에 약 700명의 무리들과 함께, 사자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스리랑카 섬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위자야 왕자를 잇는 군주들은 사자를 자유와 희망의 상징으로 여겼고, 싱할라족들은 자신들이 사자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한편, BC 1세기경 두투게무누 왕이 스리랑카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타밀 왕 엘러러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오른쪽 발에 칼을 든 사자기를 들고 있었다고 하여, 사자는 싱할라족의 정체성과 용맹을 상징하게 되었다.

* 위자야 왕자

2. 다문화 다민족 사회

스리랑카 토착인은 웨다(Vedda)족으로서, 외모상 호주 대륙의 애보리진 (Aborigines)과 상당히 닮았으며 이들이 언제 어디에서 스리랑카까지 왔는지 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약 4천명 정도가 남아있으며, 중부 밀림지 역에서 문명과 동떨어진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인도 북부 벵골지역에서 남하하여 스리랑카에 정착한 싱 할라족이 인구의 약 75%를 점하고 있고, 기원전 2세기경부터 타밀족이 인도 남부에서 건너와 현재 약 15%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과거 국명이었던 실론 은 싱할라의 영어식 발음이다.

한편 약 1천년 전부터 아랍계 무슬림들이 보석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였으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약 450년에 걸친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탄생한 백인혼혈인 버거족이 생겨났다.

이외에도 19세기 중엽 차 재배 노동자로 인도 남부에서 유입된 최하층 카 스트에 속하는 타밀족, 동시대 영국 식민정부 하급 군인과 경찰로 고용된 말 레이계 무슬림, 그리고 포르투갈이 모잠비크, 앙골라 등지에서 데려온 흑인 노예 후손 등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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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서양 항해의 중간기항지 - 신밧드, 마르코 폴로와 정화

스리랑카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더 이상 육지가 없는 지리적 위치(북위 5-9도)로 인해, 오랜 옛날부터 동서양 항해의 중간 기 항지이자 동서교역의 관문이었다.

스리랑카는 이미 BC 4세기경 그리스 문헌에 등장하였다. 신밧드가 여섯번 째 항해 모험 중 좌초되어 표류하다가 온갖 종류의 보석이 즐비한 곳에 도 착했다는 세렌딥 왕국이 바로 스리랑카이다. 세렌딥은 영어 serendipity(뜻밖 의 행운)의 어원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스리랑카를 탐험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 라는 극찬을 여행기에 남겼다.

한편, 중국의 정화는 1405-1437년간 7차에 걸쳐 대원정대를 이끌고 아프리 카 서안까지 탐험하였다. 정화의 함대는 60여척의 대형 함선과 약 200척의 소형선박으로 구성되었고, 함대의 중심인 寳船은 1500톤에 달하는 당시 최대 규모였다. 100년 뒤 스리랑카에 도착한 포르투갈 선박이 250톤 규모였으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정화는 스리랑카에 수차례 방문했으며 남쪽 골(Galle) 항구에 한자, 타밀 어, 페르시아어로 된 비석을 세웠다. 정화의 비석은 수백 년간 도랑 덮개로 방치되어 있다가 20세기 들어서야 발견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 다.

* 스리랑카를 탐험했던 정화와 당시 중국에서 제작된 지도

* 1602년 캔디왕(Vimaladharmasuriya)과 네덜란드 탐험가(Joris van Splibergen)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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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의 지형

동서 길이는 최장 225km, 남북 길이는 최장 435km로, 면적은 한반 도의 1/3(65,610㎢)에 해당한다. 스리랑카는 최고봉인 피두루탈라갈 라(해발 2,524m)가 있는 중앙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국토의 대부분 이 해안 평야지대이다. 스리랑카는 작은 섬이나, 매우 다양한 자연환 경과 생태계가 공존하고 있다.

* Adam's Bridge

힌두 신화에 의하면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 팔크해협에 30km 구간을 잇는 “Adam's Bridge"라는 인공육로가 지어졌다고 한다. 15세기까지 걸어서 도보로 양국을 이동할 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일련의 작 은 바위섬만 존재한다.

4. 소승불교의 원산지

아침 5시 무렵, 승려들의 경전 읽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리면서 스리랑카 의 하루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루 일과를 보내고, 저녁이 되면 사원에 가서 승려의 가르침을 듣는다. 승려에 대해서는 대통령을 포함한 모 든 사람들이 존경심을 표한다. 또한, 매 음력 보름을 포야데이(Poya Day)로 정하여, 금욕과 참회의 날을 보낸다.

스리랑카는 불교의 나라이다. 특히, 스리랑카의 불교는 개인의 참선과 해 탈을 중시하는 소승불교로 분류된다. BC 3세기 중엽 인도 아소카왕의 마힌 다(Mahinda) 왕자가 스리랑카에 소승불교를 전한 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효 시라는 것이 학자들의 정설이나, 스리랑카 사람들은 부처가 스리랑카를 세 차례 방문하여 직접 설법하였다고 굳게 믿는다.

스리랑카는 인도로부터 소승불교를 전수받았고, 왕과 귀족들이 불교에 귀 의하면서 불교를 진흥시켜 왔다. 게다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나무와 부처의 치아사리가 스리랑카로 오게 되면서, 스리랑카는 명실상부한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스리랑카는 소승불교의 종주국으로서 미얀마(11세기), 태국(13세기), 캄보디아(14세기)로 불교를 전파하여 인근 남아시아 지역 포교의 기지 역할 을 하였다.

스리랑카에는 많은 불교 유적과 신성도시가 있는데, △폴로나루와 갈비하라 사원, △담불라 석굴 사원, △아누라다푸라 보리수 사원, △캔디 불치사(부처 님 진신 치아사리), △마탈레 알루비하라 사원(나뭇잎에 새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 등이 유명하다.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스리랑카를 찾는 전세계 불교도들의 순례가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 스리랑카 켈라니야에서 설법하는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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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리랑카의 세계적 브랜드 - 실론티

1990년대초 우리나라에서 출시되어 인기를 끌던 음료수로 “실론티”가 있 다. 인도양의 석양을 배경으로 배 한 척이 떠있는 광고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 실론티가 바로 스리랑카 차(tea)를 의미한다.

실론티는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수출상품이자 스리랑카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효자상품이다. 스리랑카는 중국, 인도, 케냐와 나란히 전 세계 최대 홍차 생산국 중 하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리랑카의 실론티는 스리랑카 식민지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영국이 스리랑카를 식민 지배하던 1867년 제임스 테일러라는 농장경영자가 차 플랜테이션을 스리랑카 캔디(Kandy) 지역에 도입하였다. 스리랑카 중부의 서늘한 기후가 차 플랜테이션에 딱 맞아, 테일러의 농장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를 시발로 스리랑카 차 산업이 부흥하였다. 실론티는 스리랑카를 대표하게 되었으나, 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기 위해 테일러가 인도 남부의 타밀 노동자들 을 들여오면서 싱할라-타밀족 갈등의 씨앗도 같이 뿌리게 되었다.

현재 실론티는 제주도 면적의 1.2배에 해당하는 약 2,220㎢(스리랑카 면적의 3.38%)에 걸쳐 재배되고 있고, 120만명이 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실론티는 섬 중부 산악지역에서 주로 재배되는데, 산맥 중앙부의 누와라엘리야, 동쪽 의 우바, 서쪽의 딤불라, 북쪽의 캔디, 남쪽의 루후나 등이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산지는 “동양의 스위스”라고도 불리는 누와라엘리야 지역이다. 적도 근처의 강한 햇빛과 2천미터 고도의 청명한 바람으로 재배되는 이 지역의 차는 오렌지빛을 띄고, 우바 및 딤불라 등 다른 산지의 차보다 맛이 깔끔하 고 섬세하여 “실론티의 샴페인”으로 불린다.

스리랑카인들은 오후에 티타임을 가지며, 취향에 따라 우유와 설탕을 가미 하여 즐긴다.

< 중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실론차밭 >

* 스리랑카는 홍차가 아닌 커피 재배지였다?

영국은 1820년대부터 스리랑카에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커피 농업이 곧 번성하였다. 그러나 1869년 커피나무 전염병이 돌면서 커피 농장이 큰 타격을 받자, 영국은 커피 농업을 포기하고 곧바로 차 재배 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커피나무 병충해가 전화위복이 되어 차 재배 성공을 가져온 것이다.

* 립톤과 실론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홍차 브랜드 “립톤티” 역시 스리랑카 실론티와 함께 시작하였다. 1890년대 스리랑카를 방문한 영국의 거부 토마스 립톤은 스리랑카에서 차 재배를 하던 제임스 테일러를 만나게 되고, 둘은 실론티를 수출하는 데 합의한다. 립톤티를 통해 실론티가 유럽과 미국 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립톤티는 홍차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스리랑카 중부 하푸탈레에 가면 립톤이 앉아서 차밭을 바라보던 Lipton's Seat이 있다.

* 하푸탈레 Lipton's Seat에서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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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리랑카 남성들의 “종교”- 크리켓

스리랑카를 여행하다 보면 어느 지역이든 공터마다 크리켓을 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이 주말마다 크리켓 스쿨에 다니기도 하고, 거 의 모든 학교에 크리켓 팀이 있어 학교 대표팀에 선발되는 것을 큰 명예로 여긴다. 주스리랑카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반경 5km이내 크리켓 경기장이 10 개가 있을 정도이다.

성인들 역시 클럽팀에 가입하여 주말마다 시합을 하고, 뛰어난 선수들은 인도, 호주, 영국 등지에서 프로선수로 생활하고 있다. 무랄리, 말링가, 마헬 라 등 세계적인 선수들은 명예와 부를 얻어 국가적 영웅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는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 크리켓 선수권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 을 거두고 있는데, 1996년도에는 우승을, 2007년과 2011년에는 연이어 준우 승을 하는 등 강자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스리랑카가 1948년 런던올 림픽 이후 역대 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은 2개(육상)에 불과하니, 세계 크리 켓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을 때 나라 전체가 며칠간 열광에 빠진 것은 당 연하다. 당시 국가대표팀 주전선수 중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도 있다.

참고로 한국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42개 종목 중 1개 종목을 빼고 모두 참가하였는데, 바로 그 1개 종목이 크리켓이었다. 국내에서는 성 균관대학교가 유일한 팀이었으나, 최근 국가대표팀도 구성되어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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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7. 가문의 정치 그리고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

아버지는 총리, 어머니도 3차례 총리, 딸은 총리도 하고 대통령도 했다. 스 리랑카 제4대 총리를 지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집안의 이야기이다. 반다라 나이케 집안만 특별한가? 아니다. 스리랑카 제1대 총리를 지낸 돈 스테판 세 나나야케 총리의 아들인 더들리 세나나야케 역시 스리랑카 총리를 3차례 역 임하고, 그 손자와 증손자도 국회의원이다. 4대째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정치에 관 여해온 할아버지와 국회의원을 역임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의 형제들도 국회의장(차말 라자팍사), 경제개발부 장관(바실 라자 팍사), 국방부 차관(고타바야 라자팍사)으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그의 아들 나말 라자팍사도 젊은 국회의원으로서 아버지의 정치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위크라마싱하 총리도 명문가 출신으로, 삼촌이 J.R.Jayewardene 제2대 대통령이며, 부친은 스리랑카 최대 언론사 Lake House의 최고경영자로 언론계 거물급 인사였다.

이에 반해, 라자팍사 정권 당시 집권여당인 스리랑카 자유당(SLFP)의 사무 총장이었던 현 시리세나 대통령은 농부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서민 출신의 정치인이다. 쿠마라퉁가 전 대통령 및 야당 연합에 의해 야권 공동후보로 추대되어 2015.1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처럼 스리랑카의 정치는 일부 정치 명망가에서 주도하는 측면이 있다. 스리랑카 국민들은 특정 소수의 가문이 스리랑카를 이끌어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정통성의 유지로 여긴다. 구나와르데나, 자야와르데나, 라트와타 등 이름만 듣고도 그 정치인의 출신과 성향을 아는 것이다.

스리랑카가 1960년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를 배출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서 가능하였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부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 이 암살된 후 눈물의 유세를 통해 솔로몬 총리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얻었고, 결국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렇게 총리로 정계에 입문한 그녀는 단지 남편을 대신한 신출내기 정치인으로 끝나지 않 고, 3차례의 총리 재임기간(60-65년, 70-77년, 94-00년) 동안 국명을 실론에서 스 리랑카로 바꾸고, 사회주의 경제화를 추구하며, 비동맹 노선을 굳건히 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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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다라나이케 총리와 그녀의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 쿠마라퉁가는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1994-2005년간 재임하였다.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모든 행사에 지각하는 것으로 유 명했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총리 아버지와 총리 어머니 밑에서 계 속 총리의 딸로 자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스리랑카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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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LTTE (타밀타이거) 내전 26년 - 아물지 않은 상처

평화롭고 신비스러운 나라, 스리랑카. 그러나 스리랑카인들의 따뜻한 미소 뒤에는 26년간의 내전이 준 상처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벌어지고 있 는 전쟁으로 인한 눈물이 있다.

1983년 7월 24일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반도에서 타밀 분리주의자들이 스 리랑카 정부군 13명을 피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싱할라족이 정부군의 타밀 진압작전에 가세하여 1,000여명의 타밀족을 학살하였다. 타밀 족은 북부지역에서 LTTE(타밀엘람해방호랑이)라는 무장반군을 결성하고 타 밀족의 독립을 주장하며, 정부를 상대로 테러와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것 이 26년간 사자 싱할라와 호랑이 타밀간에 벌어진 스리랑카 내전의 시발이 다.

LTTE는 인도 남부 타밀족과 영국․캐나다 등 서방에 거주하는 타밀 동포 들의 재정 지원으로 로켓과 탱크, 공군력과 해군력까지 보유하면서, 정규군 못지않은 테러리스트 그룹이 되었다. 초기에는 스리랑카 북부지역과 동부지 역에서 내전을 일으켰으나, 점차 활동범위도 넓어지고, 전술도 다양해져, 수 도 콜롬보와 타밀의 본거지인 인도에서도 테러를 일으켰다. LTTE는 자살특 공대, 소년병 징집은 물론, 민간인 인간방패, 폭격기 폭탄 투하 등을 일삼았 다. 싱할라족뿐만 아니라 동부지역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소수 무슬림들까 지 학살하고 축출하였다. 간디 인도 총리, 프레마다사 스리랑카 대통령, 카디 르가마 외교장관도 LTTE에 의한 테러로 희생되었고, 쿠마라퉁가 대통령도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스리랑카 정부는 LTTE와 강도 높은 전쟁을 치루면서, 한편으로는 타밀족 의 완전한 독립 혹은 자치를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협상을 지속하였다. 인도 의 개입으로 1987년 정전협정을, 노르웨이의 중재로 2002년 휴전협정을 맺기 도 하였으나, LTTE의 테러행위는 계속되었다.

강경 노선의 라자팍사 대통령이 집권한 후 2008년부터 스리랑카 정부는 반군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지속하였다. 때마침 LTTE도 지도층이 분열하 면서, 2009년 5월 난공불락이라고 여겼던 LTTE 장악지역을 정부군이 수복하 고, LTTE 지도자 프라바카란을 사살하면서 26년간의 내전이 마침내 종식되 었다.

* LTTE 소년병 * 1996 중앙은행 폭파

*싱할라와 타밀 갈등의 배경

영국은 식민지배 당시 소수민족인 타밀족을 행정 및 교육 분야에서 우대하여 싱할라족을 감시,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타밀족에 대한 싱할라족의 반감이 생겼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타밀족은 자치를 꾸준히 주장해왔으나, 스리랑카 정부가 싱할라어만 공용어로 채택하고 공무원 채용에서 싱할라족을 우대하는 등 타밀족에 대한 차별 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타밀족은 분리독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최장기에 걸쳐 일어난 LTTE 내전은 7만명의 희생자와 30만명의 국내피난민을 남겼다. 내전으로 인한 민족의 상처와 반목은 더 큰 폐혜이다. 현재 시리세나 대통령은 국가 통합과 화해를 위해 노력중이다. 그 러나 전세계 각지로 흩어진 타밀 동포(diaspora)들은 지금도 타밀 호랑이의 유령이 되어 서구 국가들을 통해 스리랑카 정부가 타밀족에게 더 큰 권한을 주도록 압박하고 있다. 타밀과의 전쟁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 더 넓은 전선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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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9. 리콴유가 부러워한 나라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는 그의 자서전 「싱가포르 스토리(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1965-2000)」에서 1956년 스리랑카를 처음 방문 했을 때 느낀 인상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1956년 런던에 가는 길에 처음으로 실론(스리랑카)에 들렀다. 해안가에 위치 한 골페이스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 구경을 다녔다. 무엇보다 공공 건축물 들이 깨끗하고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총리는 옥스포드대 토론팀 대표 출 신인 반다라나이케 총리였다. 실론의 교육 수준은 매우 높았고 영어로 교육 하는 콜롬보대 및 페라데니야대 등 명문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공무원 들도 우수하였다. 실론은 1930년대부터 의회 정치를 시작했으며, 1948년 독 립 당시에는 한마디로 영연방 내에서 모델케이스로 통했다.”

스리랑카는 1948년 독립 당시부터 전국민을 대상으로 무상의료와 무상교 육을 실시한 아시아의 희망 중 하나였으니,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가 깊은 인 상을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 교과서에 ‘콜롬보 플랜(Colombo Plan)’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었다. 1951년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스리랑카 등 7개국이 아시아 저개발국을 대상으로 원조를 제공하는 국제기구를 콜롬보에 설치하 였다. 이를 통해 많은 아시아 저개발국들이 인프라 건설부터 인적자원 개발 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원을 받았으며, 한국 역시 콜롬보 플랜이 제공하는 장 학금으로 많은 공무원과 교수들이 해외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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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대 초반 콜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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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세계 국가의 평균 – 중간은 간다

스리랑카는 1948년 독립 이후 주위의 부러움을 받으며 필리핀, 버마(미얀 마) 등과 함께 아시아의 선두 그룹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71년과 1989년 2차에 걸친 공산반군의 준동, 1983년부터 26년간 의 내전 그리고 2004년 12월 지진해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을 감안하면, 현 재 최빈국에 속하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스리랑카는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기준에서 보더라도 전 세계 국가 중 중간 정도의 위치는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대단 하다고 할 수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매년 인간개발지수(HDI)를 발표하는데 2016년의 경우 188개 대상국 중에서 71위 터키, 72위 베네수엘라에 이어 73위를 차지 하고 있다. 한국은 18위이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인구자료에 의하면, 스리랑카 인구는 약 2,100만명으로 216개국 중 56위이다. 세계지도에서 인도 아래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로 보여 매우 작은 국가로 생각되지만 작은 나라는 아닌 것이다.

세계은행이 2016년에 발표한 GDP자료에 의하면 195개 대상 국가 중 65위 ($813억불)를 차지하고 있고, 2015년과 비교하여 약 4.4%의 GDP 성장률을 보였다.

그리고 국제투명성기구가 2016년 발표한 부패인식지수(CPI) 순위를 보면 스리랑카는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코소보, 몰디브와 함께 공동 95위로서 여타 남아시아 국가들보다는 사정이 비교적 나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1. 콜롬보 코리아타운에는 한국인이 없다.

지난 2011년 10월 콜롬보 시장선거가 한창이던 당시 영문일간지 Sunday Times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콜롬보의 빈민가와 동일시되는 이름이었다.“

1950년대 아시아에서 잘 나가던 스리랑카의 시각에서 6.25 전쟁으로 폐허 가 된 한국은 빈곤과 후진성의 동의어였던 것이다. 1950년대 들어 언제부터 인지 콜롬보를 관통하는 기찻길을 따라 형성된 판자촌을 ‘코리아’라고 부르 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장년세대들은 이를 ‘코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7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수억 불의 ODA를 스리랑카에 제공하고 있고,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취업하기 위해 한국어시험에 응시하는 이곳 젊은이들이 매년 약 3만 명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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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1 12. “코리안 드림”

스리랑카인은 외국인을 처음 만나면 “Where are you from?"을 묻는다.

”Korea"라고 답하면 그때부터 질문한 사람의 눈이 반짝거린다. “내 친구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나도 가고 싶다. 대장금 정말 재미있게 봤다.” 등등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쏟아낸다. 스리랑카에는 지금 “코리안 드림” 열풍이 불고 있다.

스리랑카에 있어 해외에서 근로하는 자국 인력은 큰 경제적 자산이다. 스 리랑카 GDP의 약 10% 정도가 이들 해외근로자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송금 액이다. 스리랑카 해외 근로자들의 85%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와 같은 중 동국가에서 근무한다. 그러나 이 근로자들은 중동에서 약 300불 정도의 적은 월급을 받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외국인 근로자에게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을 적용한다.

같은 일을 하는 근로자는 한국인이든 스리랑카인이든 같은 임금을 받는다. 스리랑카인은 중동에서 일할 때보다 5-10배까지 높은 월급을 받는 것이다.

두세 달만 열심히 일하면 스리랑카에서 1년 동안 일한 것만큼 모을 수 있다.

근무환경 역시 같은 아시아권 불교문화라 익숙하다. 스리랑카인들이 왜 한국 행을 마다하겠는가.

한국으로 가는 근로자를 선발하기 위해 한국어 시험을 본다. 이에 따라 자연스 럽게 한국어 학습 열풍도 뜨거운데, 한국어 시험에는 매년 약 3만 명이 응시한다.

참고로, 켈라니야 대학에는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스리랑카의 많은 청년들과 한국에서 근무 중인 스리랑카 인들은 스리랑카의 경제 인력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스리랑카를 더욱 가깝게 만 드는 소중한 인적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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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코끼리계의 수퍼파워

서울대공원에서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은 바로 코끼리이다. 이 코끼리는 2010년 스리랑카 정부가 우리나라에 기증한 가자바와 수겔라이다.

스리랑카 코끼리는 아시아 코끼리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크고, 또 전세계적으 로 코끼리가 멸종위기 동물로 엄격히 관리되고 있어서, 스리랑카로부터 코끼 리를 기증받고자 하는 국가들이 줄을 서 있는 정도이다.

코끼리는 불교의 상징으로서 스리랑카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고, 오랜 기간 실론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스리랑카의 큰 사찰에서는 코끼리를 키 우고 있고, 축제나 퍼레이드를 할 때 화려하게 치장한 코끼리가 반드시 등장 한다.

※ 스리랑카 최대 축제인 페라헤라 중 코끼리 행렬

스리랑카에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코끼리 약 14,000마리가 살고 있었으나, 영국 식민지 시대에 상아 교역을 위해 많이 도살되었다. 스리랑카 정부는 멸 종위기에 처한 스리랑카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2011년에 코끼리 센서스 를 실시했는데, 5,879마리의 코끼리가 살고 있고, 상아를 가진 코끼리는 2%

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상아 코끼리가 몇 마리 되지 않아, 아프리카 와 달리 오늘날 스리랑카에서 상아밀매 문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 : 내전이나 밀렵으로 어미를 잃은 코끼리를 키우는 곳으로 1975년에 설립되었다. 2017년 4월 현재 80여마리 코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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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 주요 음식

ㅇ 호퍼는 쌀가루에 코코넛 밀크를 넣어 반죽을 얇게 구워내는 일종 의 팬케익이다. 코코넛 밀크가 들어가서 맛이 부드러우며, 오목한 프라이팬에 얇게 구어내기 때문에, 바삭바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기호에 따라 반숙한 계란을 넣어 먹는 에그 호퍼, 코코넛 밀크나 크림을 얹은 밀크 호퍼는 주로 아침에 먹으며, 면으로 만든 스트 링 호퍼는 저녁에도 먹는다.

14. 스리랑카의 먹을거리 - 커리와 야자유

스리랑카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오른손으로 커리를 비벼먹는다. 점심에 는 열심히 일한 후 오른손으로 커리를 비벼먹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가 오 른손으로 카레를 비벼먹는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손님의 커리를 주인이 직 접 손으로 정성스럽게 비벼서 주기도 한다. 스리랑카인들이 삼시세끼 먹는 커리는 고칼로리의 야자유를 첨가하여 요리하므로, 스리랑카인들은 어릴때부 터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에 어울리지 않게, 축구공처럼 볼록 튀어나온 배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스리랑카는 인도문화의 영향으로 밥과 커리를 주식으로 한다. 향신 료나 재료도 인도와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스리랑카 음식은 인도 요리에 비 해 전반적으로 매운 맛이 강하고 코코넛을 많이 사용한다.

매콤한 스리랑카 커리로 식사한 후, 달기로 소문난 스리랑카 파인애플로 입가심을 하면 이처럼 개운하고 맛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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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로티는 스리랑카 전통빵으로, 보리와 코코넛 가루로 만든 코코넛 로티, 코코넛 기름에 밀가루 반죽을 구운 플레인 로티, 야채와 치 킨 커리를 넣은 로티 등 종류가 다양하다.

ㅇ 꼬뚜는 잘게 자른 로띠와 야채, 달걀, 치즈 및 기호에 따라 닭고기, 소고기를 매콤한 스리랑카 향신료와 함께 볶은 요리로 주로 저녁에 먹는 음식이다. 꼬뚜를 칼로 다지고 볶는 요리사의 리듬이 마치 우 리나라 난타공연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신나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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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럼프라이스(Lamprais)는 스리랑카를 점령했던 초기 네덜란드 후손인 버거족의 특별요리이다. 노란쌀, 고기를 넣은 럼파라 커리와 야채, 삶아서 튀긴 계란 등을 바나나 잎에 싸서 오랜 시간 구워 내는데, 바나나 잎의 향이 음식에 자연스럽게 배어 들어가 조화를 이룬 음 식이다.

ㅇ 싱할라어로 키리밧은 “우유밥”이라는 뜻으로, 찐 쌀을 소량의 소금 과 코코넛 밀크을 넣어 만든다. 보통 스리랑카 새해 또는 아침식사 로 현지식 고추장 소스인 ‘삼발(Sambol)’을 찍어 먹는다.

15. 떠오르는 관광대국

2010년 뉴욕타임즈 선정 여행지 1위, 2012년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나라 1위, 론리플래닛 추천 여행국 1위국은? 바로 스리랑카이다.

유서 깊은 불교 유적지와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스리랑카는 내전이 끝나고 관광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2016년에 스리랑카를 방문한 외국인은 약 200여만명이나 된다.

스리랑카에서는 여러 테마별 관광이 가능하다. 3천년이나 되는 아시아의 정통 불교유적을 보고 싶다면 스리랑카 중부의 문화 삼각지(Cultural Triangle)가 정답이다. 스리랑카에 진출했던 서양 국가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다면 골 포트(Galle Fort)로 가자. 인간의 문화보다는 원시 그대로의 다양 한 자연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최고의 생물다양성 지역인 중부 산악지대 나 신할라자(Sinharaja) 원시림으로 모험을 떠나도 좋다. 넘실대는 인도양의 파도가 유혹을 한다면 그 파도와 함께 서핑을 해도 좋다. 해질녘 인도양의 석양과 전통적인 장대낚시를 하는 어부들이 연출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은 스리랑카에 온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보너스이다.

스리랑카 관광객들에게 또 다른 좋은 소식은, 현재 콜롬보 시내에 샹그릴라, 하얏트 호텔 등 유명 호텔을 짓고 있다는 점이다. 향후 수년내에 스리랑카는 지금보다 더욱 발전된 관광대국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시기리야(Sigiriya) 바위산 왕궁>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스리랑카 중부 정글에 요새처럼 우뚝 솟은 화강암 덩어리 위에 건축된 궁궐이 있다. 시기리야는 “사자산”이라는 뜻으 로, 부왕을 시해한 카사파 1세(Kassapa Ⅰ, 재위 478~496)가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해 도피한 곳이다. 그는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고자 새로운 바위 성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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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부분을 깎아 사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프레스코 벽화(미인도)와 궁터, 저수 지터 등이 유명하다.

<캔디 불치사(Temple of the Tooth Relic)>

캔디(Kandy)는 14세기에 건설된 스리랑카 제2의 도시로, 영국의 지배를 받 기 전 싱할라 왕조의 수도였다. 캔디에는 여러 불교유적이 있어 스리랑카인 들과 세계 불교도들에게 성지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성지화의 중심에는 부처 의 송곳니(부처 진신 치아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불치사가 있다. 불치사에 봉 안된 불치는 원래 4세기 인도의 왕자가 가지고 와서 아누라다푸라에 봉납되 었다가 1590년에 캔디로 옮겨졌고, 불치사는 부처의 치아사리를 보존하기 위 해 1604년에 건축되었다.

<폴로나루와 (갈비하라 사원)>

9세기경 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가 파 괴된 이후 건설된 폴로나루와(Polonnaruwa) 고대 도시는 스리랑카의 두 번 째 수도였다. 거대한 불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커다란 벽돌 구조물 랑카틸라 카(Lankatilaka), 싱할라 예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거대한 바위 조각품이 있는 갈 비하라(Gal Vihara), 자타카(부처의 전생을 묘사한 설화)를 그린 1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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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인 티반카 필리마게(Tivanka Pilimage) 등 많은 불교 유적이 존재한다.

<담불라 황금사원(석굴부처상)>

석굴 사원인 담불라 황금사원(Golden Temple of Dambulla)은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지어진 사원으로, 성소 5군데와 함께 약 2,200년간 내려 온 신성한 성지 순례 유적지이다. 이 황금사원은 스리랑카에 있는 석굴 사원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황금사원 안에서도 크기가 2,100㎡

에 이르는 불교 벽화와 157개의 불상과 신상이 특히 유명하다.

<아누라다푸라(보리수 사원)>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신성 도시는 ‘깨달음의 나무(tree of enlightenment)’인 보리수 주변에 건설되었다. 이 보리수의 가지는 아소카 왕 의 딸이 기원전 3세기에 가져왔다고 한다.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993년 타밀족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1,300년간 실론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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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포트>

골(Galle)은 항구도시로 약 1,000년 전부터 동서교역의 중심지였다. 포르투 갈이 1588년에 점령했고 그로부터 50년 후인 1640년에 네덜란드에 넘어갔다.

네덜란드가 골을 점령한 후, 해안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고 14개의 석조 망루 를 만들었다. 이 성체는 스리랑카 최대의 요새였으며 16세기 유럽인들이 건 설한 요새로는 가장 훌륭한 유물이다. 해안의 성벽은 바다로부터 오는 적을 방어하고, 태풍과 해일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내륙의 성곽은 원주 민들과 분리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구획 정리된 도로가 현재까지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지금도 도로로 이용하고 있다.

* 문화 삼각지

스리랑카 중부지역에 위치한 아누라다푸라 - 담불라 - 폴로나루와를

‘문화 삼각지’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스리랑카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황금시대인 2,500년 전 고대 아누라다푸라 왕조 시대의 문화, 건축, 예 술 그리고 종교적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 영화 속의 스리랑카

ㅇ <콰이강의 다리> 야전병원 장면은 콜롬보 근교에 있는 전 영국총독 의 관저인 마운트 라비니아에서, <인디애나 존스>는 캔디 인근 산 악지대에서 촬영하였다. /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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