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이희승의 [딸깍발이]에 나타난-‘과학적’ 국어학과 연관하여-김영환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이희승의 [딸깍발이]에 나타난-‘과학적’ 국어학과 연관하여-김영환"

Copied!
31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선비관 비판 *

24)

-‘과학적’ 국어학과 연관하여-

김영환

**25)

Ⅰ. 머리말

Ⅱ. 몸말

1. 딸깍발이의 책 읽기와 경제 개념 2. 선비와 의병 활동

3. 선비와 국역 의무 4. 선비와 모화 사상 5. 현대판 딸깍발이 -이희승

Ⅲ. 맺음말

【국문요약】

이희승의 유명한 중수필

「딸깍발이」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매우

대중적인 글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유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없이 단편적인 인상에 기반한 글이라 부정적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 이 논문은 부경대학교 자율창의학술연구비(2015년도)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음.

**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신문방송학과 교수

(2)

할 수 있다. 특히 의병 활동이나 모화 사상에 대한 이해는 큰 오해를 낳고 있다. 어문학자로 알려진 그가 왜 이런 글을 남겼는가라는 문제 는 제대로 음미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추구했던 ‘과학적’ 국어학과 이에 따른 한자 혼용론자로서의 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선비 또는 딸깍발이는 한자 문화의 담당자요 주역이자 그 내용인 유 교 문화의 주역이었다.

이희승은 스스로가

딸깍발이

란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 로가 지조와 학문을 갖춘 이상적 인간상인 딸깍발이로 알려져 있으 나 사실과 매우 다르다. 서울대 교수와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까 지 치렀다는 형식적 기준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경성제대의 ‘과학 적’ 국어학을 그대로 이어받아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민족주의적 전통을 이데올로기로 배척하였다. 그 결과 한글 문화를 억눌러 온 모 화 사상을 그대로 승인하는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한글 전용 운동이 가진 복합적 측면과 사상사적 의의에 대해 알지 못하였 다.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과학적’ 국어학의 한자 혼용론을 옹 호하려는 의도에서

「딸깍발이」에서 선비의 모습을 겉모습으로만 보

거나 왜곡하기도 했다. 이희승을 통하여 식민지 국어학 연구가 1945 년 이후에도 그대로 주류를 이루었다.

주제어 : 과학적 국어학, 모화, 경성제대, 선비, 한자혼용

Ⅰ . 머리말

국어학자로서의 이희승의 학문 세계는 경성제대에서 배운 ‘과학적’

국어학이라 알려져 있다. 그의 ‘과학적’ 국어학은 경성제대에서 오구

라 교수에게 배운 것이다. 오구라는 동경제대에서 그의 스승 우에다

(3)

로부터 언어학의 과학적 법칙성을 강조하는 역사비교언어학을 배웠 다. 이런 방법론은 전통적인 문헌학에 대한 반발이었는데 우에다가 일본에 들여온 것이었다. 우에다는 이 방법론으로 일본의 전통적 국 학파의 언어관을 비판하였다.

1)

이런데서 영양을 받아 이희승도 국어 학 연구에서 법칙의 존중 , 이데올로기 또는 가치 판단의 배제, 언어 의 자연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생각에 따라 그는 주시경과 조선어 학 회의 연구 전통이 ‘괴학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한자 폐지 운동 은 감정에 바탕을 두었고, 비행기를 ‘날틀’로 바꾸는 것은 새말을 인 위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자연성에 어긋난다. ‘과학저’

국어학 대한 부정적 논의는 지난 1994년 그가 이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됨으로써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이후로도 여러 논의가 이어졌 다.

2)

이희승의 또 다른 대중적인 면모는 그가 수필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적지 않은 수필을 남겼고 시와 시조도 많이 남겼다. 그의 수필 은 여러 가지 평가를 받고 있다. ‘생활 문학으로서의 일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3)

또 ‘역사적 기록으로서 소중’하다고 보 기도 하고 ‘선비 정신이 거의 일관된 주제로 나타’난다고 보기도 한 다.

4)

또 그의 수필은 ‘고전에서 인용한 시, 사자성어를 비롯한 관용 구를 대단히 많이 인용’

5)

했다는 평가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수필

딸깍발이

도 이런 성격을 잘 드러낸다. 1952년 잡지 󰡔협동󰡕 제 37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1956년 일조각에서 출판한 첫 수필집 󰡔벙어 리 냉가슴󰡕에 실려 있다. 이희승 수필에 대한 평가에서 ‘역사, 선비 정신 , 사자성어’ 등의 낱말이 드러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딸깍발 이

는 가난한 삶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는 옛날 지식인의 참된 모습

1) 이연숙(2006), 󰡔국어라는 사상-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소명출판, 134-135 2) 이른 시기의 논의로는 김영환(2012), 216-226쪽을 참조.

3) 김우종(1994),

일석 선생의 수필 세계, 󰡔새국어 생활󰡕 4권3호, 112쪽.

4) 김우종(1994),

일석 선생의 수필 세계, 󰡔새국어 생활󰡕 4권3호, 122쪽.

5) 정호웅(2011),

「일석 이희승의 수필 세계, 󰡔애산학보󰡕 37호., 272쪽

(4)

으로 그리고 있다. 한문 투의 강건하고 논리적인 문체로 전통적인 선 비상에서 발견되는 의기와 기백을 부각시켰고, 남산골 샌님의 생활 상을 독특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선비들의 지조, 강직, 의기 등 을 현대인들이 배워야 할 가치로 꼽고 있고 이희승 스스로도 딸깍발 이로 알려져 있다 . 그의 자서전이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6)

란 이름 으로 나온 바도 있다.

딸깍발이

가 유명해진 것은 중등 교육 과정의 작문 교과서에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96년부터 사용한 중학교 3 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수필로 소개되었다. 2000년 3월부터 2004 년 3월에 고교 3학년 교과서까지 적용이 완료된 제7차 교육과정의 검인정 문학 교과서 고등학교 7차 문학교과서 18종 가운데 4종이 딸 깍발이를 싣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

그의 학문 세계는

딸깍발이

로 대표되는 수필 세계와 아무런 관 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과연 선비에 대한 관심은 이희승의 국어 학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인가.

「딸깍발이」의 내용은 얼마나 타당

한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인 검토가 아직까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런 물음은

「딸깍발이」와 딸깍발이로 알려진 이희승에

대한 통념을 재검토 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이 논문은 먼저 「 딸깍발 이」본문의 선비에 대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면서 이희승이 선 비를 예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과학적’ 국어학이 있었음을 제시 하려 한다. 선비 문화의 글쓰기 양식이 한자였고 전통 사회에서 선비 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문자를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이었다. 한자 문화의 주역인 선비에 대한 관심은 한자 폐지와 새말 만들기가 비과 학적 이데올로기라 비판해 온 이희승에게는 뺄 수 없는 한 부분이라 보아야 한다.

8)

‘남산골 샌님’은 곧 이희승 자신이기도 하다. 이희승

6) 이희승(1996),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창비.

7) 고등학교 7차 교육 과정 문학 교과서 18종 가운데 4종에 수록.

blog.naver.com/tycheclover/110123902811. 2011.11.14 게시

8) 선비의 역사관 자체가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비판하는 복고주의적일 경

(5)

스스로를 딸깍발이로 알게 만들 수 있는 우연적 계기들이 있었다. 이 런 여러 요인들은

딸깍발이

를 쓰게 만들었고 선비에 대한 부정적 사실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게 만들었다.

Ⅱ . 몸말

1. 딸깍발이의 책 읽기와 경제 개념

딸깍발이

가운데 중요하거나 문제될 부분을 낱낱이 따라가며 따 져 보자.

의관을 정제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수많 은 유교 전적(典籍)을 얼음에 박 밀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 외는 것 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딸깍발이’란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배고프고 춥고 초라한 선비 의 외모 등을 길게 잘 묘사한 것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 나 이런 모습의 뒷면에는 농업만을 숭상하고 상업을 천대하던 선비 들의 경제 관념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 선비는 농, 공, 상과는 근본적 으로 구별되는 지배 계급이었다. 선비 중심 특권 체제를 굳게 유지하 였다 . 경제 활동을 비천한 것으로 여겨 상공업 종사자들에게 그 후손 들마저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했다.

9)

생계를 잊고 학문에 전념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요즘에는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우가 일반적인데

딸깍발이

에서도 선비와 약은 현대인을 대비시키고 있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

의 정신을 좀 배우자.”

9) 강만길(2008), 󰡔한국민족운동사론󰡕, 서해문집, 310쪽

(6)

대한 비판은 이미 구한 말에 나온 바 있다.

目下 都城 鄕邑에 士者儒者ㅣ 多多히 學問에 從事야 善히 誦讀며 善히 講論나 門外一小市에 今日 米價 高下 不知며 經史詩書의 奧旨

 能達나 今日 世帶에 事物變遷은 不知며 四五十年間 精力을 費耗

야 百卷文集을 善히 著述나 一個 活計産業은 營立기를 不得니 此等 人物은 다만 書籍肆라 云이 可지라. 其 功能은 喫飯 字典이라 謂

 이니 家國에 當야 無用의 長物이라 經濟 妨害 食客이라  이 可도다. 이러으로 書卷을 讀야 古人의 言論餘滓만 惑信은 決코 學問이라고 稱하기 難도다.10)

이와 비슷한 견해는 주시경, 박 은식, 장 지연에서도 나타난다.

11)

조선조 주자학 속의 경제는 상품 유통 경제를 막는 것이 기본 원칙 이었다. 명청에 가는 조선 사신의 수행원인 역관이 인삼을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도 경제가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1678년 이후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어 거래를 편리 하게 만들고 이앙법이 번져나가 농업생산성이 증가하고 소농경영이 늘어났지만 농촌에서는 상설시장이 발전하지 못하였다. 상설시장은 대도시에서만 있었다. 이런 경제 발전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조선 후 기에 점차 확대 실시된 대동법은 조세를 쌀이라는 현물로 통일하는 것이었으나 명청대에 조세의 은납화가 이루어질 정도로 화폐 유통이 활발했다.

12)

주자학과 함께 발생한 사대부 계층인 신사는 관리는 물 론, 자주, 소작농, 임금 노동자, 상인, 교사, 의사, 역술가, 자영업자, 예술가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고 가장 높은 사회 계층인 신사가 여러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각 분야는 다른 사회 계층이나 직업 분야 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10) 신해영(1897),

국문자와 한문자의 손익여하

」, 󰡔대조선 독립협회회보󰡕16호

11) 강명관(1985),

한자 폐지론과 애국 계몽기 국한문 논쟁

」, 206-207. 210쪽.

12) 일조편법과 지정은제가 바로 그것이다.

(7)

중국에서는 이앙법, 수차 보급 등 농업 발달에 따른 지주 중산층이 생겨 난 다음에 이를 배경으로 지주 중산층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주자학이 생겨났다. 따라서 중국의 사대부들은 사회 변화를 받아들이고 순응했다. 그 러나 조선에서는 지주 중산층을 배경으로 하는 양반층이 생기기 전에 주자 학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양반층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양반층의 횡포와 주자학적 명분 논리가 갈등과 당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 었다.13)

상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일본은 중국과 다르지 않다.

일본은 무사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무사들 역시 조선의 선비처럼 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기기 위해서는 좋은 기술로 만든 무기와 장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번거로운 철학 사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은 성 주변에 가신인 무사와 그의 가족들을 집단으로 살게 하고, 그 외곽 지대에는 상업과 가내 공업 지 역을 구분하여 상인과 장인이 점포와 공장을 운영하도록 했다.14)

조선에서는 이런 편협한 직업관을 타파하는 문제가 이미 18세기에 제기되고 있었다.

15)

선비의 독서와 학문 내용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전통 사회에서 학 문이나 교육은 유교 경전을 읽고 풀이하는 것이었다. 또 내용으로 보 면 대부분이 윤리 교육이었다. 유교 경전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역사 와 문학, 철학을 담고 있으며 강한 중화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학 문의 내용은 우리 것보다는 중국 것이었다. 김 부식은 신채호의 비판 을 받을 정도로 고전적인 사대-모화론자이지만 12세기에 벌써 그때 임금의 말을 끌어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3) 김우현(2011), 󰡔주자학, 조선, 한국󰡕, 한울, 85쪽 14) 김우현(2011), 󰡔주자학, 조선, 한국󰡕, 한울, 85-86쪽 15) 강만길(2008), 󰡔한국민족운동사론󰡕,서해문집, 309-312쪽

(8)

이르시기를, “오늘날의 학사와 대부가 以謂今之學士大夫

오경과 제자의 서적과 其於五經諸子之書

진(秦)⋅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秦漢歷代之史 간혹 두루 통하고 자상히 말하는 자가 있으나 或有淹通而詳說之者

우리나라 사적에 이르러서는 至於吾邦之事

도리어 아득하여 그 시종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却茫然不知其始末

매우 한탄스러운 일이다.” 甚可歎也

進三國史記表

우리 스스로 독자성과 고유성을 오랑캐 풍속이라 스스로 비웃고 없애기에 열성이었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깔보기가 버릇이 되다시 피 했다. 과거제를 통한 학문과 교육의 지배는 학문과 교육을 무척 획일화하였다.

16)

선비의 외우기 중심의 책읽기만 강조하면 과거에 대한 비판없는 태도를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주자학이 극단 적인 교조화, 획일화 경향을 보인 것은 이런 읽기 관습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샌님의 생각으로는 청렴 개결(介潔)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 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냐. 오직 예의, 염치가 있을 뿐이다. 인(仁)과 의(義)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다. ...사실로는 졌지마는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 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지조는 오늘날의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일 수 있다. 지식인으

로서의 책임감과 비판 의식, 행위의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무엇이 지조인지 내용이 옛날과 사뭇 달라질 수 있지만,

지식인이 원칙과 일관성을 지녀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이

16) 이미 박은식이 이런 견해를 표방하였다.

(9)

해를 따지고 가림을 막는다고 볼 수는 없다. 재물에 대한 무관심은 위선적이다. 이해 관계를 합리적으로 정당하게 따져야 하다. 경제적 이해 관계와 인의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선비 이황 가문의 분재기에 따르면 손자 손녀 5 명이 나누어 가진 노비가 353명이었고 재산도 엄청났다. 이황과 쌍벽 을 이루는 이이 7남매는 노비만 119명을 물려받았고 논밭이 수만 평 이었다. 책으로만 읽은 선비의 모습과 딴판이다. ‘사실로는 졌지마는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은 아큐의 정신 승리법을 연상 시킨다. 아무리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내가 이겼다고 마음속 으로 믿어버리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 약한 자의 슬픈 자 기 방어 기제일 뿐이다.

2. 선비와 의병 활동

딸깍발이

는 선비의 의기를 지적하면서 의병 활동을 언급하였다.

실상, 그들은 가명인(假明人)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로 만든 것은 어쭙지 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 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육신도 이 샌님의 부류 요, 삼학사도 ‘딸깍발이’의 전형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포은 선생도 그요, 근 세로는 민충정(閔忠正)도 그다. 국호와 왕위 계승에 있어서 명⋅청의 승낙 을 얻어야 했고, 역서(曆書)의 연호를 그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 지마는, 역대 임금의 시호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 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혼(魂)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으로써 지존(至尊)에게 직소(直訴)한 것도 이 샌 님의 족속인 유림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임란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단석 (旦夕)에 박도(迫到)되었을 때,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두목들도 다 이 ‘딸 깍발이’ 기백의 구현인 것은 의심 없다. 구한 말엽 단발령이 내렸을 적에,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서(上書)를 올리어서, "이 목은 잘릴지

(10)

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라고 부르짖으며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미혹하기 짝이 없었지마는, 죽음도 개의하지 않고 덤비는 그 의 기야말로 본 받음직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선비’의 의미는 시대마다 적잖은 변화를 보이는데 신채호에 따르 면 상고 시대에 수두(蘇塗)제단의 무사를 ‘선비’라 칭하였다. 이두로

‘仙人,

先人’으로 기록되었고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이 바로 선

인이며, 신라의 화랑제도 이를 이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대부 개념 은 중국 송대의 것이 주자학의 도입과 더불어 정착하였는데 광범위 한 선비는 사(士 )로서 포의의 독서인층과 비교적 낮은 문관 관료를 의미하였다.

17)

그들은 유학을 공부하여 국가의 관료가 되는 것이 목 적이었다.

18)

이 부분의 내용은 명백한 오류가 많다. 낱낱이 따져 보자. 사대에 따르면 중국 연호와 역법을 써야하는 것은 물론 역대 임금의 시호를 올리는 것도 결코 조선이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 왕의 시호를 청하는 청시사(請諡使)를 보내야 했다. ‘샌님의 혼’이 독 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식민지처럼 내정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사대 관계의 존재 자체가 내정이나 행정에서 자주성에 그 림자를 드리운 것이 사실이다. ‘가짜 명나라 사람’이란 표현은 권덕규 가 처음으로 󰡔동아일보󰡕(1920.5.8.-9)에서 썼던 표현인데 유교를 비판 하면서 그 모화사상을 지적했던 개념이다.

19)

그는 또 일본 유학자 야

17) 이희승은 그의 󰡔국어대사전󰡕(1971)

선비

항목에서 선비를 ‘학식이 있되 벼 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풀이하였다. 이는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 이후에나 성립하는 좁아진 뜻매김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부 귀영화나 훼절의 유혹 자체가 없다. 이희승이 든 위의 의기있는 선비는 벼 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희승 자신이 내린 뜻매김에 따를 때, 선비나 딸깍발이에 속하지 않는다.

18) 이성무(2011), 󰡔선비평전󰡕, 글항아리, 350-351쪽 참조. 북한의 󰡔현대조선말사 전󰡕(1988)에서는

선비

를 ‘양반층 또는 그에 속하는 사람, 낡은 사회에서 실천과 떨어져서 학문을 전문으로 닦는 사람’으로 풀이하였다.

(11)

마자키 안사이(1618-1682)를 조선 유학자와 대비시켜, 수백 년 전에 멸망한 명의 마지막 연호를 고집해 숭정 후(崇禎 後) 몇 년으로 연도 를 표시하며 조선 땅에 살고 있는 성리학자의 그릇된 의식을 비판하 였다.

20)

조선의 주자학이 화이론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 몹시 모화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비판한 것이었다 . 조선 주자학의 존명모 화는 오늘날 우리를 놀라게 할 만큼 강렬하고 또 지속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주자학자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 국가의 존립 근거였다.

모화에는 관료보다 오히려 선비들이 더 심했다. 선비와 관료의 이분 법도 성립하지 않는다. 선비는 예비 관료군이어서 이 둘 사이에 연속 성이 크다. 광해군의 중립 정책은 교조적 선비들에게 ‘반정’의 명분이 될 정도였다. 사대와 모화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획일적인 사상만 이 체제 이데올로기로 남아 심지어 양명학까지도 극단적으로 억압하 였다. 이희승은 이런 숭명 사대란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눈을 감은 채 부정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의병의 성격이다. ‘의병’이란 표현에서 ‘의’

는 춘추 의리를 말한다. 의병은 난신적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일어난 무리인데 ‘난신적자’란 바로 ‘천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었다.

임진왜란 때이건 병자호란 때의 삼학사이건 을미사변 때이건 의병의 충의가 향하던 최종 목적지는 북경에 있는 한족의 천자, 곧 명나라의 황제였다.

21)

주자학적 정치에서 권위의 원천은 치국의 주체인 조선

19) 이 논설로 유림이 󰡔동아일보󰡕 반대 운동을 벌여 사장이 사임하였다.

20) 극단적 모화 사상은 조선 유학과 일본 유학의 큰 차이다. 일본은 중국 문화 를 받아들이면서도 중화 문화가 수반했던 정치적 군사적 측면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런 성격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경우가 야마 자키 안사이다. 이런 태도는 추상적 보편적 가치 속에 깃든 현실적 이해 관 계를 통찰한 것으로 일본 유학에는 이런 전통이 면면히 흘렀다. 주자의 일 본보다 일본의 주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유근호(2004), 󰡔조선조 대외사상의 흐름󰡕, 성신여대 출판부 370-371, 373쪽 참조.

21) 계승범(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역사의 아침, 84쪽.

(12)

왕보다는 평천하의 궁극적 주체인 중국 황제에게 있기 때문이다. 임 금에게 직소하는 언론의 기능이 지배층 내부에서 활발했던 것은 사 실이다. 그러나 이런 선비의 기개와 용기는 조선 임금보다 중국 임금 을 높이고 데서 오는 측면도 있고 지배층 내부에서 신권의 강화란 측면도 크다 . 왕조의 멸망보다 중화가 사라지는 것을 더 걱정했던 그 들에게는 중화는 수호해야 할 궁극적 가치였으며 모화와 사대는 최 대의 의무였다. 이것이 조-명 관계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 았으나 조-청 관계에서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중화 사상에 깃든 인 종적 지역적 기준으로 보아 후금(청)은 중화가 아니었고, 이에 따라 모화의 대상과 사대의 대상이 어긋나게 되었다. 중화를 절대시하는 사상 때문에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후금에 사대를 거부하였다. 그들 은 사대는 마지못해 할 수밖에 없었으나 중화만 지키면 사대 질서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중화 사상이 갖는 인 종적 지역적 한계와 중화 사상을 지탱하던 군사력을 도외시하고 있 는데 주자학이 교조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 란이 일어난 것은 중화 문화의 힘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현실적 힘 의 역학을 무시하게 만든 측면이 컸다. 뻔히 예견된 전쟁의 참극마저 무릅쓰게 만들었다. 주자학적 이념의 교조화는 조선 지배층의 현실 감각마저 허물어 버렸다. 겉으로는 선비와 의병의 기개가 가상하고 지조와 의리에 투철해 보이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지조와 의리 의 내용은 중화 질서요, 유교 가치였다. 나라의 운명보다 춘추 의리 를 중시하자는 사람들이 이른바 척화파였다 . 중화 질서와 가치에 대 한 의리와 지조를 나라의 존망보다 앞세우면 목숨바쳐 나라를 지켜 야 한다라기보다 춘추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육체와 정신 모두 중화 문명에 푹 빠진 사대주의, 세계에서 거의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당송명으로 이어진 중화의 적통임을 강조한 그런 사대주의는 동아시아의 조공 책봉 사례들 가운데서도 매우 예외적인 사례

(13)

였다. 그런데 그런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런 사대주의를 국가 이데올로기의 차원으로까지 공고히 한 장본인인 선비를 찬양한다면 한 입 으로 두 말하는 꼴이다.22)

의병운동이 그 한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서구의 침략에 대항할 때이다, 조선 말 위정척사파들은 일본

과 서양문명을 야만으로 치부하여 철저히 배격하였다. 여기서도 모

화가 의병 활동의 근거가 되고 있다. 더 나아가 모화로 세계의 질서

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요순시대로 상징되는 이상적 중화

질서에 의한 도덕주의적 문명국가에서 조선은 제후국이 되는데 이는

서양 개념으로서 근대국가 또는 국민국가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

다. 최 익현이나 유 인석은 옛날 중국에서 행해졌던 유교적 이상사회

의 전형으로서 중화질서를 이 땅에 재구축함으로써 서양과 일제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중화에 대

한 이적의 도전, 왕도에 대한 패도의 도전, 정학에 대한 이단의 도전

으로 인식하였다. 즉 중화가 침략에 대항하는 근거이다. 청나라에 대

하여 꼿꼿한 자존심을 내세웠던 까닭도 작은 중화라도 보존하면 이

를 근거로 사대 질서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양과

일본의 침략은 그때까지 보존해 오던 작은 중화마저 사라지게 할 것

이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개화는 야만이며, 중화가

문명이라는 정의 하에 유교적 도덕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 그러나 그들의 도덕주의적 실천 방안은 제국주의의 야만적 폭력

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음에도 현실성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제국

주의 침략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를 허

탈하게 한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구상도 없었고 오로지 요순과 같은

시대로 되돌아간다는 이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민족주의적 지향

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라와 겨레의 자주성이 매우 약하였다. 최익현

22) 계승범(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역사의 아침, 84쪽.

(14)

은 조선을 두고 ‘기자의 옛 강토’이며 ‘대명의 동쪽 울타리’라고 하면 서 조선의 문물을 두고는 “태조대왕 이래 중국 문물로 오랑캐 풍속 을 고쳐 예절을 제정하고 아악을 만들어 인륜이 크게 펴던 나라”라 고 보았다. 그에게 개화를 작은 중화를 작은 일본으로 바꾸는 것이었 고 오랑캐를 따르는 것으로서 작은 중화를 버리는 것이었다 .

23)

이런 모화와 사대는 물론 새삼스런 것도 아니다. 최만리 등은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에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를 이룬 때 중국과 다른 글 자를 만들면 오랑캐가 된다고 했다. 이 황은 예조판서 재임 때 일본 좌무위장군 미나모토에게 보내는 편지에 중국 황제를 천자(하나뿐인 해)라 지칭하고 우리의 종주국으로 보았다.

대명(大明)은 천하의 종주국으로서, 바다 한 모퉁이 해 뜨는 곳 어디를 막론하고 신하로서 복종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귀국도 또한 대대로 조공을 바친 것이다

이 이도 “이제 소국이 대국을 섬겨 군신의 명분이 이미 정하여졌 으니 , 때의 어려움이나 쉬움을 헤아리지 말고 형세의 이로움이나 해 로움에 꺾이지 아니하고 그 정성을 다하는데 힘쓸 따름이다”고

24)

하 여, 사대란 이해득실이나 난이⋅ 성쇠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보 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전국에서 선비들이 주도하는 의병 항쟁이 일어났고 또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이것은 다가오는 위기가 뻔히 보이는데도 대비하지 않은 책임은 이보다 더 크다. 임진왜란도 이미 예고의 신호가 여러 번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여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는 물론이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

23) 최익현, 󰡔면암집󰡕,

지부복권척화의소

」(1876.12.2.), 192쪽.

24) 이이, 󰡔율곡선생전서󰡕 4권 󰡔습유󰡕

공로책(貢路策)」 今夫以小事大。

君臣之

分已定

則不度時之艱易

不揣勢之利害

務盡其誠而已

(15)

하리라는 선위사 오억령의 보고에도 그를 파직시켰을 뿐이다. 이는 화이론에 따른 일본에 대한 우월감이 일본의 군사력이나 객관적 정 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성일은 퇴계학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퇴계의 쓰시마에 대한 시각은 조선의 전통 적 쓰시마 번병의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 즉 그는 조선과 쓰시 마의 관계를 상하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쓰시마를 조선의 번병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당시 명의 책봉체 제에서 이탈한 것을 나무라며,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라 명을 중심으 로 하는 대외질서에 복귀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황의 쓰시마에 대한 시각 내지 정책은 조선을 우위에 두고 무력 사용 같은 물리적 방법 은 가급적 피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쓰시마에 대한 시각 은 조선 정부의 전통적 대일정책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대교린의 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에서 오랫동안 재직했었고, 전통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조선 정부는 일본의 수준에 맞추어 상대 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화의 국가인 조선이 이의 국가인 일본을 언제든지 격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 문이기도 한 것이었다. 여기서도 중화의 가치가 절대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조선이 쓰시마와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 다는 인식 하에 상호 이해와 존중의 입장에서 대일 외교 문제를 해 결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이런 문화적 우월감이 곧 김성일에게도 이 어져 곧 일본 군사력에 대한 평가를 그르치게 만든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

25)

이황의 경우에 이런 중화적 국제질서관이 도전받지 않았 지만, 김성일이 일본에 갔던 때는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 때였으므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26)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주자학의 모화론이 부른 전쟁이다. 광해군

25) 호사카 유지(2007),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김영사, 181쪽.

26) 통신사의 경우에도 조선에 굴욕적인 측면이 적지 않았다. 계승범(2011), 󰡔우리 가 아는 선비는 없다󰡕, 역사의 아침. 173-174에 소개된 이익의 견해를 참조.

(16)

의 실리 외교에 주자학적 명분을 내세우며 패륜으로 몬 서인 반정 세력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사대 모 화를 내세웠다. 조야를 가리지 않고 모화와 숭명 사대주의가 판을 치 고 있었기에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후금과 화친했음이 정변의 주요 명분이었다 . 전쟁을 무릅쓸 정도로 무모하고 절대화된 중화 문 화 절대주의를 보게 된다. 백성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사실 은 잊어버리고 의병의 기개만 기억하는 건 지배층으로서의 딸깍발이 를 긍정적으로 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호소력을 갖는다.

27)

3. 선비와 군역 의무

여러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의병 활동을 의기로 평가하기는 나름 대로 의미있는 일이다 . 그렇지만 이를 조선의 지배층이 평상시의 국 방 의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본다면 선비와 양반의 나 라는 더욱 부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유교적 국가 체제에서 국방과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관직을 지닌 양 반은 군역을 지지 않았다. 양반, 선비 특권의 나라 조선에 양반에게는 군역 의무가 없었다.

28)

관직에 진출한 관료는 이미 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군역을 따로 부담시키지 않았고, 향교 등에 소속된 학생들의 경우에는 유학을 장려하고 국가적 인재의 확보라는 이름으로 군역을 연기시켜 주고 있었다. 지방 양반은 군역을 피하려고 앞다투어 향교 에 입교했다. 평민들 역시 군역을 피하려고 앞다투어 향교에 입교했 다. 그러자 많은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17세기 초반 인조 이후부터 양반은 향교에서 평민과 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고 여겨 ‘동재 유생’이 란 별칭을 사용하였고 양민과 서얼 ‘서재 유생’과 구별하였다.

29) 27) 1905년 이후 의병 활동은 평민 출신 의병장이 등장할 만큼 중화주의적 색채

가 엷어지고 항일구국 활동으로 연결된다.

28) 김우현(2011), 󰡔주자학, 조선, 한국󰡕, 한울, 87-99쪽.

(17)

양반은 교육을 받고 관리가 되고,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다.

따라서 두 번의 왜란과 호란에 양반의 힘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 였다. 몇몇 양반이 의병을 모아 항쟁을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의병의 대부분은 평민과 천민이었다. 양반들이 의병 항쟁을 주도했다는 것 은 주자학만 알고 다가오는 전쟁을 애써 외면하고 대비하지 못한 원 천적 잘못에 비하면 조그만 사죄에 지나지 않는다. 평민은 군역을 담 당하거나 군역에 편성된 자에게 필요한 비용은 평민이 부담해야 했 다. 양반에게는 직접적인 군역 의무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비용 도 지지 않았다. 대원군이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양반에게도 군포 를 내게 하는 호포법을 시행하니 사대부들은 호포법에 강렬하게 반 발했다. 이는 그들이 가진 특권 계급으로서 평민과의 차별 의식을 생 각할 때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이는 대원군이 실각하는 중요 원인 이 되기도 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500년 동안 특권만 누리려 했고 양 반의 부담이 늘어나는 군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들은 전쟁이 났을 때 피할 수 있는 곳 열 군데를 ‘십승지’라 부르며 이상향으로 여겼는 데 이는 지배층의 국방에 대한 의식 수준을 보여 준다. 반면에 평민 은 온갖 짐을 떠맡아야 했다.

상민은 군역을 담당했을 분만 아니라 봉족으로 지정되어 경제적 부담과 함게 각종 세금제 동의 문란으로 농민들은 농토를 벌고 도망가거나, 스스로 노력하여 양반이 되거나 승려가 되거나 세금부담이 없는 천민이 되거나 부 유한 집의 노비가 되었다. 따라서 양반과 천민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국가적 재정을 부담하는 양인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30)

그러나 일단 전쟁이 나자 선비의 척화론은 더없이 거세기만 했다.

전쟁을 막지도 못하고 공맹만을 읽고 군역에 힘을 보태지도 못하면

29) 한국역사연구회(2005),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65쪽.

30) 김우현(2011), 󰡔주자학, 조선, 한국󰡕, 한울, 90쪽

(18)

서 무모하게 척화론을 외쳤다.

서인의 결정적 문제점은 끊임없이 전쟁을 주장하나 전쟁을 준비하지는 않고, 강경한 항쟁을 주장하나 죽음을 결의하지 않으며, 결국은 스스로 나 가 싸우지 않고 오직 화친하는 것만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31)

이러한 생각은 주자학의 화이론을 보편적이라 믿는 소박하고 교조 적인 관점에서 중화 사상을 지탱하던 군사적 힘에 대한 이해가 없었 기 때문이기도 하다.

32)

일본이나 후금과의 관계에서 화이론이 현실 을 보는 데 큰 걸림돌이었듯이 군사 문제에도 입으로만 척화를 외칠 뿐이었다. 전쟁이 나도 우리 가문에는 피해가 없을 것이란 계산을 하 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른바 ‘삼학사’는 주자학적 중화 사상의 인종 주의적 지역적 특성에 눈 뜨지 못해 교조화된 주자학의 희생자이다.

4. 선비와 모화 사상

조선의 모화 사상은 중화 문명을 절대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 대와 모화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고 모화가 절대적인 가치가 됨으 로써 지배층이 현실을 보는 데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사대와 모화 의 가치가 위협받았을 때, 의병 활동을 일으켰는데, 사대와 모화의 대상이 일치하던 16세기는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임진왜란 중의 의병이 지키고자 한 대상은 국가라기보다는 중화 질서요, 그 바 탕이 되는 유교적 가치였다. 모화라는 의병 활동의 이념적 배경이 사 대 질서와 어긋날 때 선비들은 모화를 앞세우며 사대 질서를 거부하 려 하였다 . 오랑캐에 대한 굴욕은 일시적이며 중화는 영원한 것이었

31) 배기찬(2008), 󰡔코리아, 다시 기로에 서다󰡕, 위즈덤 하우스, 167쪽.

32) 중화 사상의 확립과 유지에는 군사력이 그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 다. 배기찬(2008), 󰡔코리아, 다시 기로에 서다󰡕, 위즈덤 하우스, 61쪽

(19)

다. 따라서 중화를 잘 보존하면 올바른 사대 질서는 회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북벌운동이 바로 이런 사상에 기반을 두 고 있었다. 19세기 말의 의병 활동도 주자학적 화이론에서 비롯된 것 이다. 작은 중화라는 문화적 자부심을 갖고 한족 중심의 천하 질서의 회복을 기다리며 굴욕적인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참아내던 것과도 매우 다른 것이었다. 선비에게 19세기 말의 문명 개화를 앞세운 외세 는 남아 있던 작은 중화마저 없애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 호란, 근대화된 일본 세력에 대한 선비의 저항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은 주자학적 화이론에 따른 중화지키기이다.

조선은 철저한 모화 사상을 갖더니 중국을 부모의 나라로 아는 데 까지 이르렀는데 이런 태도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나타났다.

33)

이러 한 의식은 임진왜란 때의 명 원군의 조선 파견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부교리 윤 집(尹集)이 상소하기를,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된 자로서 부 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나라가 살아서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형세가 크게 확장하여 경사(京師)를 핍박하고 황릉을 더럽혔는데,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 하께서는 이때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 상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하였다.34)

나라의 존망보다 중화의 보존이 더 중요하다는 논의는 19세기 말 의 이항로에게도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35)

나라를 상대화하고 중화 문화를 절대시하는 이런 태도는 유교적 천하관에서 나라보다 상위의

33)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144-145쪽.

34)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1월 8일(무신). 조선의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조선이 되기를 힘쓴, 우리 역사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35) 정옥자,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1998, 257-258쪽.

(20)

천하를 상정하고 있고 천하는 중화 문화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 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조선의 극단적 모화 사상은 일본을 보는 눈 에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은 작은 중화라는 우월감으로 일본 을 대하였지만 일본은 조선의 통신사를 일본식 화이 사상에 따라 조 공사로 격하했다 . 화이론을 교조적으로 그대로 수용한 자기 정당화 와 일본 중심으로 변형된 화이론이 충돌하였다. 일본의 경제적 번영 이나 상무적인 분위기를 다만 오랑캐의 미개함으로 여겼고, 조선 문 화의 우수성과 선진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유교적 예의 질서 를 확립하면 그들이 교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도 조선처럼 주자학을 절대시하지 않는 한 이것은 일방적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일본관은 임진왜란 이전이나 이후에도 그다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중화 문화 절대주의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도 심각한 장애를 만들고 있었다. 주자학의 경전만 절대시하다가 현실 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것을 보여준다. 또 선비들은 이런 눈 으로 구한 말 서양과 일본 세력의 문물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천 하 체제의 부활을 꿈꾸던 그들에게 서양의 문물 도입을 문명개화라 부르는 것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동도서기론자로서 온건 개화파 였던 김윤식은 개화란 말도 언짢게 여겼다.

무릇 개화란 오랑캐의 습속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구주의 풍속은 점 차 그 습속을 변혁하여 개화라고 한다고 들었다. 동토는 문명의 땅이니 어 찌 다시 개화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갑신의 역적들은 구주를 숭상하여 요순 과 공맹의 도를 야만이라 하여 도를 바꾸려 하고 이를 개화라고 불렀다36) 중화가 이적을 교화하고 이적이 중화를 흠모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가 본

36) 김윤식, 󰡔속음청사(상)󰡕, 권5, 156면. 음1891.2.17.

余嘗深怪開化之說, 夫開化 者如阿塞諸變, 榛狉之俗, 聞歐洲之風, 而漸革其俗曰開化, 東土文明之地, 更有 何可開之化乎, 甲申諸賊, 盛尊歐洲, 薄堯舜⋅貶孔孟, 以彝倫之道, 謂之野蠻, 欲以其道易之, 動稱開化.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http://db.history.go.kr/

(21)

래 그렇고 인심 또한 마땅히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적 중화로써 이적을 교화시키는 마음은 푸른 하늘에 명백하기에 사들이 그것을 볼 수 있다, (서양은)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조잔하고 이단적이다37)

최익현에게 개화는 조선이라는 작은 중화를 작은 일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38)

조선시대 내내 선비들은 철저히 모화 사상에 빠져 있었 고 그것은 누가 시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자학이 숭상될수록 모화 또는 존화도 절대시되었다. 나라 다스리기의 위에 천하의 평화 를 상정하는 유교적 질서에 따라 선비들은 조선의 군왕이 천조를 중 심으로 구축된 중화 질서에서 천자의 하위에 속하며 중국의 동쪽 울 타리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주자학 수용이 교조적이었던 만큼 나 라의 운명보다 춘추 의리를 지키는 것이 우선하였다. 이런 생각에서 조선의 선비들은 남한산성의 그 극한적 상항 속에서도 ‘구차하게’ 나 라를 유지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으면 후대에 할 말이라도 있다는 논리를 폈다.

39)

척화파로 지목되어 청나라로 끌려간 홍익한, 윤집, 오 달제는 가장 원론적인 주자학적 화이론자인데 불사이군의 의리를 외 치다가 끝내 죽어야 했다 . 그러나 그들이 목숨과 바꾼 지조의 최종 대상은 조선의 왕이라기보다 명나라의 황제였고, 중화 문명이었다.

40)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광해군에게 비 변사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에게 죄를 범할지언정 천자에게는 죄 를 범할 수 없다”

41)

라고 응대하는 데서도 이런 생각을 확인할 수 있 다. 주자학에서 나라보다 상위의 천하가 상정되고 있기 때문에 왕도 천자에 비하여 상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7) 󰡔화서선생 문집󰡕 권25. 217- 218쪽.

38) 󰡔면암집1󰡕. 192 재차 올리는 상소」 (1898.12.19.)

39) 계승범(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푸른역사, 219쪽.

40) 계승범(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푸른역사, 57쪽.

41) 󰡔광해군 일기󰡕 10년6월20일.

(22)

선비에게 국방은 문화적 요인에 종속적인 것으로 보였다. 중화 문 화지상주의였다. 이런 류의 환상적인 현실 파악은 여진족과의 전쟁 을 스스로 부르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만들었다. 모화를 기초로 전통 적인 존명사대의 정치 질서도 회복할 수 있다고 선비들은 생각하였 다 . 중화에 대한 흠모는 사대-조공으로 직결되었다. 마음에 없는 사 대는 일시적인 것이며 곧 극복될 것이었다. 나라의 멸망도 중화의 보 존에 비하면 하찮은 일에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이 다가오던 때 에도 별다른 대비도 없이 그냥 척화만 외친 선비의 행태가 이해된다.

조선 주자학의 극단적 모화주의는 일본이나 서구 세력을 대할 때도 되풀이된다. 중화주의적 천하 질서에 기초한 의병 활동은 겉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처럼 보였으나 엄청난 시대 착오 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런 성격은 병자호란 때부터 나타났으나 제국 주의 세력의 침략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5. 현대판 딸깍발이 -이희승

이렇게 딸깍발이를 일면적으로 파악하거나 잘못을 범한 것은 이희

승의 ‘과학적’ 국어학 주장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남광우와 함께

1969년부터 한국어문 교육 연구회를 만들어 한자 혼용 운동을 펼쳐

왔다. 조선어 학회와의 갈등이 표면화한 것이었다. 이 갈등은 이희승

이 조선어 학회에 가입했을 때에는 분명히 드러나 있었으나 1945년

이후로는 잠재해 있던 것이었다. 다른 경성제대 출신과는 달리 그는

조선어 학회에 참여하였는데 그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휘말려 들면

서 주시경의 학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학자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이희승 스스로도 주시경 스승의 감화를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

연관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42)

오히려 그는 여러 면에서 사

42) 이병근(1992),

「일석 국어학의 성격과 시대적 의의」, 󰡔주시경학보󰡕9호, 113

(23)

실상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과 대결하였다. 해방 후에 이어진 국어학계의 오랜 파쟁과 패권 다툼은 이희승이 경성제대에서 배웠던

‘과학적’ 국어학에 뿌리가 있다. 일제 말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국어 학계는 해방 후로는 식민지 유산의 청산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지만, 사실은 경성제대에 뿌리를 둔 학맥이 주류를 이루었다 . 그는 서울대 에 자리잡아 후진을 양성하면서 국어학계 구성을 주도하였다.

43)

주 시경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런 학문도 있었구나’

44)

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가 주시경의 학문에 공감했다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것 이 아니란 뜻이었다.

45)

조선어 학회와 대립의 중심에 한자 혼용 운동 이 있었다. 한자 문제는 한자가 오랫동안 하나뿐인 쓰기 수단이었고 한자어가 많은 우리말의 특성 때문에 우리 문화의 역사를 어떻게 보 는가라는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또 한자로 적힌 문화유산 의 내용이 유교라 할 수 있다. 구한 말에도 한자 폐지 운동은 유교 비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학부대신 신기선은 “한문을 버리 고 국문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고 고종에게 상소 문을 올렸고

46)

여규형은 「논한문국문」에서 한문을 버리는 것은 공자 의 도를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국문 사용을 강력하게 비판하였 다.

47)

국문 존중의 논의를 펴는 이들도 국문이란 틀과 역사와 문화라

쪽. 이희승(1996),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73쪽.

43) 이준식(2013),

해방 후 국어학계의 분열과 대립

언어민족주의와 ‘과학적’

언어학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학연구󰡕67호―2013.12.

44) 이희승(1996),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창비,49쪽

45) 이희승(1996),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창비, 1996, 61쪽. 또 같은 곳에 같은 주장을‘국어를 학문답게 공부하려면 언어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표현하였다.

주시경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서구식 언어학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고 영근 「일석선생과 국어학 연구」 󰡔어문연구󰡕46-47합집호, 1985.에서는 이 것이 마치 어떤 문제가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227쪽 참조.

46) 󰡔독립신문󰡕,1896.6.4.

47) 󰡔대동학회 월보󰡕 1, 1908.2. 대동학회.

(24)

는 알맹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사대 모화 사상이 위대한 우 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가 잊고 중국을 숭배하게 만들었다며 그 원인 을 국문이 너무 늦게 나온 사실에서 찾았다.

오호라. 이(사대 모화로 국력 쇠퇴-글쓴이 보탬) 원인을 궁구하여 보면 한 국의 국문이 늦게 난 까닭으로 그 세력을 한문에 빼앗기어 일반 인민들이 한 문으로써 국문을 대신하며, 타국 역사로써 본국 역사를 대용한 소이로다48)

유교 문화의 주체, 유교적 인간상의 이상형은 바로 선비다.

「딸깍

발이

를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선비는 바로 문자를 다 루는 능력이 있는 특수한 지배층이었다.

49)

한자 혼용에 애착을 가진 이희승으로서는 딸깍발이를 부정적으로 볼 수 없었다. 이희승의 이 런 생각은 최근 철학이나 사회 과학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와 친근성을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경성제대의 ‘과 학적’ 국어학을 진정한 학문으로 내세우며 민족주의 국어학과 대결 하였다. 그의 국어학은 경제사학을 중심으로 문제가 되었던 식민지 근대화론과 그 맥락이 같다 .

50)

그가 말한 ‘과학적’ 국어학은 민족주의 적인 조선어 학회의 전통과 대조되는데 조선어 학회의 전통은 민족 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기 때문에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때 이해된 ‘과학’은 주로 역사 비교 언어학과 소쉬르 언어학에 영 향을 받고 있었는데 엄격하고 좁은 실증주의적 개념에 사로잡힌 것 이었다. 따라서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의 실질적 내용은 반민족 주의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을 ‘제대로 된 학문’ 으로서의 국어학이라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51)

그가 비판했던 조선어 학회의 전통에는

48) 󰡔대한매일신보󰡕, 1908.3.24

49) 전통적으로 선비는 지배층으로서 곧 문자를 읽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황 현 의 절명시에 ‘識字人’이란 표현이 보인다.

50)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언어학 연구 경향은 정승철(2006),

경성제국대학 과 국어학」2006, 1480-1483쪽에 잘 요약되어 있다.

(25)

‘명사’를 ‘이름씨’로 바꾸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바꾸기를 언어의 인 위적 개조라고 보고 자연성에 어긋난다고 보았으며 한자 폐지는 단 순한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반대했다.

52)

한글의 실 용성이나 대중성이 가질 수 있는 파급력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 다 . 다만 그는 조선어 학회의 형태주의 맞춤법이 박승빈 류의 표음주 의 맞춤법보다 과학적이라고 보아 이에는 찬성하였다. 뒤이어 그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러 학문 경향이 조선어 학회와 차이 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사건은 이희승이 지조있는 딸 깍발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고, 서울대 교수라는 그의 지위는 어쨌 거나 그의 학문이 대단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었다. 이로써 이희승이 애국적이고 능력있고 지조있고 선비라는 딸깍발이 신화가 생겨났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과학적’ 국어학의 산물인 한자 혼용론은 경성제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식민지 유산으로 청산되지 않고 남 았다. 한자 섞어 쓰기에 깃든 모화 이데올로기나 상류층 중심의 정보 독점욕을 보지 못하고 한글로만 쓰기는 단순한 민족주의적 감정의 발로로만 보았다. 그는 한글 문화를 억눌러 온 중화주의에 대해 무지 했으며 글자가 갖는 계급적 성격 등 복합적 측면에도 눈을 뜨지 못 했다.

53)

그가 표명한 ‘과학적’ 국어학도 특정한 관점과 가치 판단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과학적’과 ‘민족주의적’

을 대립시킨 결과 민족주의적 국어학이 비판한 중화주의와 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이희승은 딸깍발이에서 딸깍발이의 가장 부 정적인 측면인 모화 사상을 관료에게 한정했던 것이다 . 그러나 이것 은 거대란 오류임이 명백하다. 그는 한글 문제와 관련된 민족주의에

51) 이희승(1996),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창비, 61쪽. 정승철(2006), 1479쪽.

52) 김영환(2001),

「‘과학적’ 국어학 비판」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53) 한글 문제에 주자학적 세계관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이 대중화되어 있 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김영환,

사대 주의, 방언, 국제어」, 󰡔한글새소식󰡕(2004.3), 379호 참조.

(26)

대해 대단히 단선적이고 소박한 이해밖에 갖지 못했다. 문자를 독점 한 계급으로서 선비는 서기관 계급이자 지식인으로서 예비 권력자였 다.

54)

그 문자의 내용은 모화와 사대를 포함한다. 이에 따라 조선은 작은 중화란 자리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백성을 위하는 정 치를 한다면서도 그들에게 백성은 문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였 다. 조선 왕조에서 끈질기게 이어진 국가적 출판 사업은 유교적 교화 가 그 목적이었고 선비는 백성의 스승이었다.

Ⅲ . 맺음말

이희승에 대한 어학 쪽에서의 비판이 제기된 지 20년이 된 지금

이희승에 대한 여러 허상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아직도 그

의 수필

딸깍발이

는 대중적 영향력이 여전하다. 엄밀한 학술적인

논문이 아닌 수필이기에 이를 굳이 비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

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글의 형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필

이기에 그 부정적 영향력은 더 컸다. 그의 수필에서 한자 혼용의 원

칙이 어휘나 표현에서 잘 드러나지만

딸깍발이

는 한자 문화의 주

역에 대한 직접적 예찬이다. 여기에 그려진 강직하고 청렴하고 더 나

아가 애국적이고 자주적이면서 학문에 힘쓰는 딸깍발이의 모습은 피

상적이거나 왜곡되었다. 부정적인 모습을 지우고 딸깍발이를 통하여

이희승이 말하고 이희승을 통하여 딸깍발이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

가고 있다. 딸깍발이는 이희승 개인이나 그의 학문에 대한 것이든 조

선조 역사의 담당자로서의 선비에 관한 것이든 비판적 재검토가 필

요하다. 이희승이 겪었던 조선어 학회 수난 사건은 그가 주장했던 경

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과 이에 따른 한자 섞어 쓰기에 깃든 일본

54) 각주내용

(27)

따라하기와 모화주의적 성격을 가리는 구실을 하였다. 그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지만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을 내세우며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과 맞섰고 그 중심에 한자 혼용론이 있

었다. 한글을 언문이라 무시한 것도 딸깍발이였다. 한자 혼용론에는

모화 사상의 문제가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이에 대해 눈을 뜨지 못

하였다. 그는 국가의 존립을 상대화하기까지 했던 선비의 절대화된

모화 사상을 단순히 부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깍발이

에서 이희승은 선비의 긍정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경제나 국

방에서 무능했던 선비의 부정적인 모습을 외면했다. 그는 스스로가

그린 딸깍발이로 알려졌고 또 그런 것처럼 여러 사람이 믿도록 말하

고 행동했다.

딸깍발이

는 이희승이 추구했던 ‘과학적’ 국어학의 연

속선상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945년 이후 국문학계

나 국사학계가 끊임없이 친일 시비에 휘말린 데 비하여 국어학계는

이런 시비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어학계도 이희

승을 중심으로 한 ‘과학적’ 국어학의 이름으로 식민지의 ‘유산’이 그

대로 남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28)

【參考文獻】

1. 자료

󰡔독립신문󰡕

󰡔면암집󰡕(최익현, 민족문화추진회 번역 1989.

󰡔삼국사기󰡕

󰡔속음청사(상)󰡕김윤식.

󰡔율곡선생전서󰡕 4권 󰡔습유󰡕

󰡔조선왕조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2. 논저

강만길, 2008, 한국민족운동사론. 서해문집

강명관 , 1985, 「 한자 폐지론과 애국 계몽기 국한문 논쟁

」 󰡔한국한문학연구󰡕

8집, 한국한문학회.

계승범 , 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계승범, 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역사의 아침.

고영근 , 1985, 「 일석선생과 국어학 연구

」 󰡔어문연구󰡕

46-47합집호, 한국어 문교육연구학회 .

김영환 , 2001, 「‘과학적’ 국어학 비판」 󰡔한글󰡕252호, 한글학회.

김영환, 2004, 「 사대주의, 방언, 국제어」 󰡔한글새소식󰡕379호, 한글학회.

김영환, 2012, 󰡔한글철학󰡕, 한국학술정보

김우종, 1994, 「 일석 선생의 수필 세계

」(󰡔새국어생활󰡕, 제4권 3호 94년 가을).

김우현, 2011, 󰡔주자학, 조선, 한국󰡕 한울.

배기찬, 2005,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위즈덤하우스.

신해영, 1897, 「 국문자와 한문자의 손익여하

󰡔대조선 독립협회회보󰡕16호.

유근호, 2004, 󰡔조선조 대외 사상의 흐름󰡕 성신여자대학 출판부.

이병근, 1992, 「 일석 국어학의 성격과 시대적 의의

」, 󰡔주시경학보󰡕9.

이성무, 2011, 󰡔선비평전󰡕, 글항아리.

(29)

논문투고일 : 2016년 01월 30일 심사완료일 : 2016년 02월 15일 게재확정일 : 2016년 02월 25일

이연숙, 2006, 󰡔국어라는 사상-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소명출판

이준식, 2013, 「 해방 후 국어학계의 분열과 대립

」―

언어민족주의와 ‘과학 적 ’ 언어학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학연구󰡕67호.

이희승, 1996,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창비.

정옥자, 1998, 󰡔조선 중화 사상 연구󰡕, 일지사.

정승철, 2006, 「 경성제국대학과 국어학

」, 󰡔국어학논총󰡕-이병근선생 퇴임기

념 편집위원회. 태학사.

정호웅, 2011, 「 일석 이희승의 수필세계

」, 󰡔애산학보󰡕37, 「

특집 일석 이희승.

호사카 유지, 2011, 󰡔조선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김영사.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2005.

(30)

【Abstract】

A Critiism on the Ttalkkakbalyi in

「Ttalkkakbalyi」 and its Modern Version.

Kim Yeong-Hwan (Pukyong National University, Department of

Mass-communication)

「Ttalkkakbalyi」, popular essays of Lee Hee-Seung, highly praised

Chosun dynasty litterati called “ttalkkakbalyi”. Lee Hee-Seung himself is also known as ttalkkakbalyi. He seems to have sufficient conditions to deserve the nickname. He was imprison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and renowned professor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Ttalkkakbalyi」

contains several inappropriate understandings of Seon-Bee.

Ttalkkakbalyi enjoyed the privilege of exemption from military services and oppressed commercial industry. Ttalkkakbalyi had great respect for Chinese culture, obsessed with Sino-centrism, they despised Korean indigenous culture as barbarious. Use of Korean alphabet was barbarious.

Lee Hee-Seung, known as ttalkkakbalyi represented ‘scientific’ linguistics

which he had learned from Japanese scholars of Kyeongseung Imperial

University. Here ‘scientific’ linguistics actually means anti-nationalistic

linguistics, claiming exclusive use of Hangeul was merely the product of

national sentiment. He fought against the tradition of the Korean

(31)

nationalistic linguistics which traces back to Chu Si-Gyeong. Confucian litterati called “ttalkkakbalyi” disregarded Korean alphabet as useless and vulgar. Lee Hee-Seung as modern ttalkkakbalyi vigorously opposed to the exclusive use of Hangeul. Ttalkkakbalyi was the only class who can read Chinse Classics and write Classical Chinese. 「Ttalkkakbalyi」 highly praised ttalkkakbalyi. Lee Hee-Seung himself, as the author of 「Ttalkkakbalyi」was widely regarded as ttalkkakbalyi for various unappropriate reasons. He could not but glorify the ttalkkakbalyi in 「Ttalkkakbalyi」in connection with his opposition to the exclusive use of Hangeul as a byproduct of his

‘scientific’ linguistics.

Key Words : scientific linguistics, yearning for Chinese culture,

K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Seon-Bee. abolition

of Chinese characters.

참조

관련 문서

윤주는 이번 일을 계기로 움직임이 재미있고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원리가 들어 가는 오토마타를 친구들과 만들어 보고 오토마타 전시회도 열면 좋겠다는

면담을 통해 과학 의 본성적 지식의 가변성, 과학의 본성적 지식에서 경험적 측면, 과학적 방법, 과학에 서 관찰, 추론, 그리고 이론적 실재, 과학적 이론과 법칙,

소리 또는 음(音)은 사람의 청각기관을 자극하여 뇌에서 해석되는 매질의 움직임이다. 공기나 물 같은 매질의 진동을 통해 전달되는 종파이다. 우리들의 귀에 끊임없이

최첨단 현대미술의 감상과 STEAM 체험이 융합된 STEAM 아웃리치 진로체험 프로그램.. “미래탐사대-예술작품 속 과학적

최첨단 현대미술의 감상과 STEAM 체험이 융합된 STEAM 아웃리치 진로체험 프로그램.. “미래탐사대-예술작품 속 과학적

최첨단 현대미술의 감상과 STEAM 체험이 융합된 STEAM 아웃리치 진로체험 프로그램.. “미래탐사대-예술작품 속 과학적

생활 속의 다양한 소재와 분야로부터 탐구 문제 도출, 가설 설정, 결론 도출 등과 같은 다양 한 과학적 탐구 과정과 절차를 체험하고, 탐구 과정을 통해 연구 윤리와

물리: 자연현상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여 물리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적 사고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력을 길러 사회 생활에 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