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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의료기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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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Special Contribution 精 神 分 析 :第 17 卷 第 1 號 2 0 0 6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 17, No. 1, Page 124~134, 2 0 0 6

의료, 의료기관, 의료인

*

金 二 泳

**

Medical Treatment, Medical Institution & Medical Professional

* Eyong Kim, M.D., Ph.D.**

들어 가는 말

바쁘신 중에도 제 마지막 강의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이런 형태의 행사에 대해 전부터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 았습니다. 한 때는 의대교수의 거창한 환갑잔치가 유행이 었습니다.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 가 환갑잔치는 없어졌습니다만 정년퇴임 행사는 그대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에 보면 다른 대학 교수보다 의대 교수들의 환갑잔치가 많이 요란했던 것 같고 정년퇴임행 사는 약간 더 요란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더구나 제자나 후학들에게 무리한 부담을 주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은 계속 했었습니다. 이런 행사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환갑이던 정년이던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살 아가는 과정에서 그 개인에게는 매우 뜻있는 시점일 수도 있지만 정년퇴임이란 것이 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 형태는 다르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 퇴직이란 아무 때나 할 수 있다는 점, 정년퇴직한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아주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따위의 생 각을 하다 보니 환갑이나 정년퇴직이나 그저 그렇고 그런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환갑 때 그냥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제 환 갑 때는 이미 교수들의 환갑잔치는 거의 자취를 감춘 때 였습니다. 집안에 어르신네가 여러분 살아 계신데 뭐 오래

살았다고 잔치를 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섭섭하다는 주장에“그러면 내가 저녁 사겠다” 고 했습니다.

물론 같이 일하는 과의 식구들만 작은 식당에서 모였습 니다. 그랬더니 이런 저런 선물들을 사오는 바람에 오히려 부담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개운치 않은 뒷맛이 있었습 니다. 그런가 하면 먼저 있던 곳에서도 선물을 사고 오래 같이 고생했던 정신분석학회에서도 그냥 넘어 갈 수 없다 고 모였었습니다. 전부 조촐한 자리였고 큰 돈 들어갈 무 슨 건을 만들지 않았기에 큰 부담을 끼치지 않은 것만으 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 사는 정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이번 정년퇴임은 진짜 그냥 조용히 넘어가겠다고 생각 했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손 댄 일은 많았으나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일을 그만 두면서 요란 을 피우는 것이 좀 쑥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개인의 행동이 꼭 그 개인의 뜻만으로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격이 되었습니다. 어떤 형태 든 행사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실원이나 제자들과 동 문들의 체면도 있고 인생의 한 토막을 정리하는 시점인데 그냥 넘어가기는 곤란하다는 주위의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은 것이 고별강연으로 끝내자는 것이 었습니다. 흔히 만드는 약력집, 논제집, 사진첩들은 안 만 들기로 했습니다. 퇴직 후 남는 시간에 좀 생각해 보고 그 래도 남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 때 무엇인가를 만들지는 모 르겠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나 자신을 크게 드러낼만한 것 이 없다는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일을 놓은 후 남 는 시간에 내가 한 일을 차근히 돌아보고, 한 일을 정리해 보고, 논문도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세상에 대고 했던 여 러 발언들도 다시 점검해 본 다음에 그런 것들을 만들지 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정신과전문의로서 30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는 기념으로 2005년 2월 15일 삼성서울병원 대강당에서 발표한 고별강연을 정 리한 글임.

This paper was presented at Dr. Kim’s Farewell Memorial Lecture for Retirement.

**동국대학병원 의과대학 일산병원 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Dongguk University Ilsan Hospital, Ils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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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강연이 끝나고 그냥 헤어지기는 섭섭하니 강

당 앞에서 간단한 음료를 준비하자고 확대되었고, 이것이 커져서 몇몇 가까운 사람끼리 저녁을 먹자는 데까지 확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큰 행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안하는 것이 좋았을 고별강연이 결국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덕담이나 하고 마는 것이 무난할 것도 같았 습니다. 그러나 제 성격 때문인지 안 하면 몰라도 할 것이 면 할 소리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오늘 강연의 내용입니다.

여러 직종의 청중이 모이는데 정신과 전문 강의를 해야 의미도 없겠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청중의 대부분이 의료에 종사하는 분들이라는 생각에서 의료의 속성에 관한 경험 적 소견과 우리 병원에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습니다.

논리적이거나 학술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의사로서의 일 생에서 보고 느낀 것을 수필형식으로 표현해 봅니다.

의 료

의료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봅니다.

지난 1년간 진료를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보던 환자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정신과의 특성상 오래 다니는 환자들이 많고 오래 전에 보던 환자가 재발되 어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진료환자의 정리가 만만치 않 았습니다. 앞으로 진료를 안 하겠다고 생각했기에 환자들 을 적당한 분에게 의뢰해야 하는 데 의사의 선택이 쉽지 않 았습니다. 치료를 쉬다가 선생님이 어디든 개업하면 찾아 오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환자 보호자를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하게도 되었습니다.

제가 의료현장을 직접 보게 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는 달리 환자로서가 아니라 의사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개 원한 의원에 살면서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방 세 개에 마루 하나 있는 작은 집에서 살림과 의원을 겸하던 시절 이라 아버지의 진료를 직접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 내 의료계 투신입니다. 거의 60년 전이지요. 그때부터 3년 정 도를 빼고는 의료기관 안이나 옆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 교 1년생 때는 포경수술의 조수도 해 보았지요.

그러니 8살 때부터 내 인생의 대부분을 의료현장에서 지 내온 셈입니다. 그중의 35년을 정신과의사로 지냈습니다.

제가 1975년에 정신과전문의가 되어 처음 간 곳이 청 량리정신병원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며칠 만에 13살 짜리 중학생이 입원했는데 지금까지 병원에 다니고 있습

니다. 바로 그 환자를 다른 선생님께 인계하기 위해 병상 일지를 정리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는 이 사람의 병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는 이 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는가?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의료의 관점에서 사 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의료의 대상

의료의 대상, 객체는 사람입니다. 사람, 인간을 떠나서 의 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료는 어디까지나 사람이 중심 입니다. 병이 중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병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을 확실히 알아야 의사노릇을 할 수 있 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또 그 소리냐고 하실 분이 있겠 지만 그래도 의료의 중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2. 사 람

그러면 의료의 대상인 사람, 인간의 특성을 살펴봅니다.

첫째,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 주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비록 의료의 대상일 때에는 주체로서보 다는 객체로서의 의미가 강합니다만 자신의 행동을 결정 할 때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겉으로 피동적 일수도 있지만 철저히 능동적인 존재입니다.

둘째,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아직 복제인간이 만들어 지 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하긴 어렵지만 비록 인간복제가 성공하더라도 복제된 인간은 그 원형과 다를 것입니다. 환 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람은 변화가 많습니다. 출생과 성장과 죽음이 모 두 변화입니다. 질병도 그런 변화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중요한 당연한 변화 말고도 인간은 잘 변합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늠하기 힘들 때, 스스로가 약하다고 생각할 때 특히 사람은 잘 변합니다. 가 끔 이해에 관계없이 옳다고 생각하면 죽어도 생각을 안 바꾸거나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확인되는 순간 과감하게 옳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바꿉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바뀌고 자신의 위치에

따라 바뀝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

는 말과 같이 입장에 따라 변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이익

이 된다고 생각되면 생각이 바뀝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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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류에 속합니다.

이런 것은 주장, 생각, 행동의 변화에 관한 것이고 육체 적으로도 인간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환자들도 마찬가지로 잘 변합니다. 사람이 의료의 대상이 될 때는 이미 그 개인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약해 져 있기 때문에 더욱 변화가 많습니다. 질병은 결국 죽음 과 관계되는 것이어서 인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따라 서 이해관계에 예민해 지는 만치 더욱 잘 변합니다. 환자 들이 귀가 얇아져서 돌팔이의사, 사기꾼에게 잘 속는 이유 입니다. 이 병원 저 의사 유명하다는 사람을 찾아 전국을 헤매는 환자들이 대표적입니다.

넷째, 죽음을 무엇보다도 겁내는 존재입니다. 아직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 일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큰일 나지요. 분 명 언젠가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면서도 인간은 죽음을 겁냅니다. 그러기에 더욱 겁을 내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공포는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 건강에 도움이 된 다는 그럴듯한 말에는 맥을 못 춥니다.

앞에서 한 인간의 최종 결정은 철저히 독립적이라고 말 씀 드렸습니다만 이런 여러 가지 속성이 얽혀서 사람들은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어떤 결정도 오직 그 만의 생각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서 그런 결정의 동기를 추정하거나, 결정의 과정을 이해하 기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한 환자의 행동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전 생활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3. 의료의 대상인 사람

그러면 의료의 대상으로서의 사람은 어떤지 알아봅니다.

의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 람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질병이 있다고 생각함으로 써 고통스러운 사람도 포함됩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의 공 포로 고통스러운 사람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의료행위 의 결정권자로서 의료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의료에서 의료행위의 선택, 주치의의 선택, 의료기관의 선택, 등 의료이용의 결정은 비록 환자 가 주체적으로 합니다만 일단 그가 의료기관에 등록되어 의료행위를 하는 과정에서는 그는 철저히 객체가 되고 각 종 의료행위의 종속적 존재로 역할이 바뀝니다. 당연히 일 단 의료에 투입된 환자로서의 사람은 자기주장을 내세울 권한이 축소되고 대신 그 자리를 의료인이 대신하게 됩니

다. 의료에서 의료인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료행위의 모든 결정이 의료인에 의해서 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료행위에서 이 행위의 주 도권의 이동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상황에 따라 편차가 큽니다. 개인마다 독특합니다.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많습니다. 이 주도권 이동의 문제, 즉 행위의 결정 권자의 변화는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의료분쟁의 문제, 의료윤리의 문제의 대부분이 이 주도권과 관계가 있습니다.

결국 의료에서 모든 행위는 의사와 환자의 상호관계에 서 이루어지고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독점할 수는 없게 됩니다. 당연히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환자의 환 경-과 의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료기관의 특성- 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4. 질병과 환자

질병과 환자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봅니다. 그러면 의료 의 대상인 환자가 의료를 추구하게 되는 주된 동기인 질 병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말이 많습니다. 단순화시켜 보겠습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 통 없는 병도 있고 고통 없이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기능 이 고장 난 사람이란 말도 있습니다. 즉 정상이 아니란 말 이지요. 그러면 정상은 무엇인가요? 통계적으로 치우친 사 람이란 개념도 있습니다. 이봉걸이나 하승진 선수는 비정 상인이고 환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겠지만 결국 질병이나, 환자에 대한 똑 부러지는 설명은 불가능하 다는 말이 됩니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만 질병이건 고통이 건 등등은 인생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길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경험의 하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질병에 걸렸다가 치료되 어도 궁극적으로 그는 죽게 됩니다. 하나의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종류의 병 을 앓고 회복되면 금방 다른 병에 걸리고, 그러기를 반복 하면서 일생을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이 들었다 가 회복되고 얼마 후 다른 병에 걸리고, 그러다가 어떤 고 약한 병에 걸리면 회복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병에 걸리고 치유되고 고통 받고 하는 과정 전체가 죽음으로 가 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이고 따라서 질병을 그 사람의 인 생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필요가 생기게 됩니다.

좀 더 과학적인 설명을 보겠습니다. 김광원교수께서 의

예과 1학년을 대상으로 하신 질병에 관한 강의 내용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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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통 병이 있다고 하면“어디 아파?” 하고 묻게 마련입

니다. 그런데 김 교수는 고통 없는 질병을 말합니다. 한편 으로는 아프다는데도 여러 검사를 한 다음에“병이 없다”

고 말 할 때도 있음을 제시합니다. 환자는 물론 그 말을 듣 고도 아픕니다.

질병과 질환을 설명 가능한 어떤 이상상태라는 객관적 소 견과 병을 앓은 사람의 주관적 체험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도 합니다. 질병이라는 것이 쉽게 정의내릴 수 없음을 단 적으로 알려 주는 예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질병, 환자라는 말이 매우 복잡한 함 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를 주제로 삼는 의료에 관한 논의도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5. 죽 음

그러면 질병의 결과이면서 사람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종착점인 죽음이란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사상 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의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대부란 영화가 있습니다. 초반부에 대부 콜리오네에게 찾 아와서 콜리오네에게 협력하지 않은 자기의 잘못을 사과 하고 앞으로는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장의사 주인이 나옵 니다. 대부에게 비협조적인 무수히 많은 이태리계 자영업 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장의사를 영화 도입부의 가장 중요 한 장면에 등장시켰다는 점에 이 영화의 묘미가 있습니다.

대부가 말합니다.“자네는 우리 조직에 대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돈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네게 일을 부탁할 때는 철저히 해야 한다.” 고 합니다.‘아하 이 영화가 죽음에 관한 영화로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습 니다. 콜리오네의 장남이 총에 맞아 벌집같이 되어 죽자 그 장의사가 불려옵니다.“이 아이 에미에게 이대로 보여 줄 수는 없다. 네 실력을 총동원해서 밖으로 난 상처가 하 나도 없게 처리해라.” 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어 떻게 죽느냐는 것과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 죽은 후에도 큰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화 를 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콜리오네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독특한 방법으로 죽어갑니다.

삶의 모든 과정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질 병도, 고통도, 즐거움도, 쾌락도 모두 죽음으로 가는 하나 의 형식입니다.

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유란 결국 그 병을 고친다는 뜻도 되지만 그 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죽음으로 가 는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마지하게 해 주는가? 이것만이 의료가 해 줄 수 있는 일 인지도 모릅니다.

6. 의사와 죽음

희망이와 소망이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우리 병원(삼성서 울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쌍둥이로 각각 500gm 정 도의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의료진의 노력으로 지금은 건 강하게 보통 아이들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 때 의료진 중에서 어떤 분이 그들이 평생 아무 병도 없이 잘 살다가 70세를 넘겨서 편안하게 온 가족이 모인 앞에서 조용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분이 계 신가요? 아니면 이 아이들은 평생 제 기능을 못하다가 일 찍 죽을 거라고 생각하신 분이 계신가요. 아마도 그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데만 온통 마음을 빼앗 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의료인들은 환자들을 볼 때 그 질병 너머에 있는 환자의 삶보다는 질병의 치료 방법에 더욱 관심이 많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를 꺼립니다. 환자가 죽는다는 것은 의료인으로서 자존심이 상 하는 일이거든요. 마치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 죽은 것으 로 착각해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로 의 사의 일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 서 추상적으로는 심각하게 생각은 합니다만 현장에서 한 환자라는 개인의 죽음과 만나면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의료는 본질적으로 죽음과 마주칩니다. 어 려운 환자를 만났을 때“살릴 가망이 10%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막막해 집니다. 그러 나“이 사람을 어떤 죽음의 길로 인도할 것인가?” 라는 생 각을 하면 의외로 쉽게 문제가 풀릴 수 있습니다.

7. 의료행위

이제 의료의 구체적인 문제로 넘어갑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인간이 복잡하고 질병 또는 환자라는 것의 개 념이나 속성도 복잡하기 때문에 이런 두 가지 복잡한 것 들이 얽혀 있는 의료라는 것도 설명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그런 수많은 문제 중에서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의 료의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에도 극히 일부입니다.

Fig. 1은 전형적인 정규분포곡선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런 곡선의 구성원들을 보면 가운데로 몰려있는 곳에 위치

한 개체가 그 집단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고 그곳에 몰려

있는 것들이 그 집단 구성원 가운데 가장 정상적인 개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그 집단의 표준인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는 가장 바람직한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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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 대로 양쪽 끝에 치우친 사람은 그 집단의 속성과는 매우 다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통계에서 표준편차(Standard Deviation, sigma)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문에서 흔히 2 SD를 많이 활용하지요.

이 2 SD란 개념은 원래는 분포의 특성, 즉 그 집단의 특 성을 알게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표준편차가 크다는 것은 그 집단의 중앙치에 몰리는 숫자가 적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최근 6 시그마운동이라는 것이 유행하면서 다른 의미가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즉 2 SD 밖의 존재라는 개 념이지요. 다른 말로 불량품이라는 뜻도 내포하게 되었습 니다. 이 밖에 있는 존재는 그 집단의 변경존재, 주변인, 왕 따 시켜야 할 존재쯤으로 취급되게 됩니다. 그 집단의 속성 을 가장 적게 가진 개체들입니다. 의료에서는 환자들입니다.

6 시그마운동에서는 6 시그마 밖의 물건은 확실한 불량 품, 버려야 할 존재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6 시그마 운동 에서는 불량률 제로를 지향하고 불량품이 나오면 가차 없 이 버립니다.

그러면 의료에서의 6 시그마 운동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 이 1 SD 건 2 SD 건 혹은 6 SD 건 그 밖의 존재는 버리 면 되나요? 아닙니다. 의료에서는 반대로 중앙치에서 멀리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관심을 보여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공산품 공장에서는 불량품이 아닌 것의 속성만 잘 찾으 면 됩니다. 6 시그마 밖의 물건들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관 심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줄이기 위해 어떤 속성을 지 닌 것들이 그 속에 있는지는 알아보지만 그것은 그것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릴 것이지만 다시 그런 불량품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의료에서는 바로 이 평균치나 중앙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수록 통상적인 의학 지식과는 동떨어져 있고, 일 상적인 의술만으로는 대응하기가 힘들고 그러면서도 더욱 정성을 들여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어쩌면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사람들이지요.

수의사가 희망이와 소망이 같은 형태의 미숙 송아지를 보 았다면 그냥 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60년대 나와 같이 근 무하던 축산과 출신 장교 말에 의하면 학생시절에 제일 싫은 일이 체중미달의 갗 태어난 새끼돼지를 구덩이에 집 어 던지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500gm밖에 안 되는 소망이와 희 망이를 건강하게 키웠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태어날 때 6 시그마 밖에 있었습니다. 관심을 가질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려냈고 건강을 찾아 주었습니다.

전통적인 의료에서는 이런 공산품으로 치자면 불량품에 해당하는, 다른 말로 중앙치에서 먼 사람만 상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의료에서는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 다 시 말해서 기껏 노력해야 살릴 가능성이 적은 사람은 아예 무시해 버렸습니다. 현학적으로 말하면 2 SD개념과 4 SD 개념에 포함되는 환자를 상대하고 6 시그마에 해당되는 사람은 포기했습니다. 치우쳐 있으나 너무 치우치지 않은 사람만 상대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다릅니다. 현대의학의 추세는 의료의 대상을 자꾸 확장시켜 나갑니다. 치료의학 위주에서 예방 의학으로 대상을 확장하는 것이라든지 어떤 질병의 진단 기준을 더 넓게 잡는 것들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세계보건기구의 건강의 개념이 처음 신체적으로 병이 없 고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에서 정서적으로 편안한 사람으 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안녕상태에 있는 사람 으로 확장된 것이 의료의 확장을 대변합니다.

급성 폐렴이나 심근경색의 경우가 고전적 또는 협의의 의 료의 핵심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 의 경우가 예방의료로 확대된 의료대상, 다시 말해서 평균 치에 가까운 사람을 의료의 대상으로 확장한 전형적인 예 라면 호스피스란 의료분야는 과거에는 이제 손 쓸 수 있는 여지는 없으니 집에 가서 임종을 기다리라고 했을 6 SD 밖의 사람을 의료의 대상으로 확장시킨 예가 됩니다.

이런 의료의 확장에서 두 가지의 큰 문제가 제기됩니다.

첫 번째는 의료와 비의료의 경계가 모호해 진다는 것입니다.

영양학자들이 어린이들의 지방질 과다섭취가 성인이 되어 고지혈증의 원인이 되고 순환기 장애의 원인이 되니 어릴 때부터 조심해야 한다고 표준 식단을 만들어 초-중교생 의 식생활에 간섭을 하면 이것이 의료입니까? 아닙니까?

의료법에 비 의료인이 의료행위를 하면 처벌받게 되어 있 으니 이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의료법 위반자가 부 지기수로 발생할 것입니다. 만일 건강식품을 판매할 때에 질병예방효과가 있다는 말을 하고 판매하는 것이 예방의 학에 해당되고 따라서 의료행위에 해당된다면 모든 건강

Fig. 1. Normal distribution cu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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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은 의료인만이 처방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의 문제는 의료의 대상 확장으로 의료의 질, 의 료행위의 방법, 의료행위의 태도, 등이 다양해진다는 문제 가 제기됩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과 급성폐렴으 로 온 환자를 대하는 의료인의 행동은 분명히 달라야 합 니다. 과거에는 인후암에 걸린 사람을 수술해서 목숨을 살 리고 밥 먹고, 숨쉬고, 걸어 다니게 해 주면 대성공이었습 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라낸 성대 대신 어떤 방법으로든 말을 할 수 있게 훈련시키는 일도 의료의 한 부분입니다.

더 나아가서 암환자의 경우 소위 open and close 했을 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환자의 남은 삶의 질을 관리하는 것도 분명 의료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치유되거나 미미하나마 호전되는 환자에 게만 관심이 있고 점점 나빠져 가고 있는 환자에게는 관 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심하면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더 이상 관심 없다는 태도의 의료인을 우리 주변에서 가 끔 만납니다.

결국 의료의 다양화가 현대 의료의 추세이고 의료의 대 상의 확장은 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의료의 확장은 우리 의 먼 선배 의사들이 강조했던 병을 보지 말고 환자를 보 고 그 사람을 보라고 한 지혜를 따라야 하게 변하고 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의료는 한 인간 전체에 관한 문제입니 다. 질병은 의료대상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현대의학은 어떻습니까. 전공의 지나친 세분화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코가 아파서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한참 들여다보고“나는 귀 전문 이비인후과의사니 저쪽의 코 전문 이비인후과로 가라”고 하더랍니다. 그 곳 에 갔더니 다시 옆집으로 가라고 해서“당신이 코 전문이 라고 해서 왔는데 무슨 소리요”하니까“나는 왼쪽 코 전 문이고 당신의 코는 오른쪽이 나쁘니 저 쪽 오른 쪽 코 전 문 이비인후과의사에게 가보시오” 하더랍니다.

현대의 유능한 의사는 불가피하게 자기 분야가 아닌 것 은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전문 분야만 해도 알아 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문분야 가 더욱 세분화되고 관심의 폭은 더욱 좁아 듭니다. 제가 졸업할 때만 해도 소화기전공내과면 됐지 간 전문이다 대 장 전문이다 라고 내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subspecialty정도가 아니라 sub-sub-specialty 까지 논 의되는 판입니다.

제가 진료하던 환자는 다섯 군데의 종합병원과(A 대학 병원 내분비내과, B 대학병원 호흡기내과, C 대학병원 이 비인후과, D 대학병원 류마치스과, K종합병원 소화기내 과) 우리 병원의 순환기내과와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습

니다. 그 분이 처음 제게 왔을 때 제가 한 일은 그 모든 병 원의 처방을 확인하여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중 몇 분 의 의사는 그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처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환자가 받은 처방이 어떤 것이었는지 구태 여 이곳에서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환자분이 용케도 약을 잘 골라서 비슷한 약을 중복으로 복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나친 전문화가 의사의 관심의 폭을 좁힌 예입니다. 자 기 전문분야에 몰두한 나머지 한 환자를 통합적으로 관찰 해야 할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한 탓입니다.

두 번째의 문제로 지나치게 객관적 data와 기계에 의존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님께 한 학생이“교수님은 왜 객관식 시험문제를 안 냅니까?”라고 했더니“너는 너의 애비가 병이 나도 O-X로 고칠래? ” 하셨답니다.

어떤 의사의 글에서 반 혼수상태의 환자(자신의 시아버 지)의 호흡이 힘들어 지는 것 같아 주치의를 불렀더니 청 진기도 대 보지 않고 chest PA 부터 찍더랍니다. 어차피 찍을 것 청진기 대고 찍으나 그냥 찍으나 별 차이가 없으 니 사진부터 찍는다는 대답을 들었답니다. 제 아버님의 경 우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환자의 병을 볼 때 병을 지닌 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사진과 검사수 치 등, data의 덩어리로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치유의 예술을 넘어서” 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레 넥이 마분지를 말아 심장의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의사들 이 환자의 심장음은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의사와 환자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의료를 환자라는 사람과 의사라는 사람의 교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적인 행위라고 본다면 검사이전에 의사와 환자의 어떤 형태이던, 그것이 문진이건 촉진이건 간에 인 간적인 교류가 있은 다음에 각종 참고자료인 검사 data의 수집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의료의 획일화, 몰개성화 및 규격진료화가 역 시 현대 의학의 성격이자 결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예 화가 있습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라 사람 이름은 잊었 습니다.

한참 당쟁이 심한 조선조 중기의 일입니다. 어떤 당파의

지도자가 병이 났는데 잘 낫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반

대파에 속한 당대의 명의에게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의원이 자기가 약을 조제하지 않고 환자가 속한 파의 의

원에게 처방을 보냈습니다. 처방을 보니 위험한 정도의 비

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의논이 분분했습니다.“저 돌팔이

의사가 명성을 이용해 정적을 죽이려 한다. 그러니 그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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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의료기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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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성화였습니다. 당사자인 환자 가 주치의에게 처방대로 조제시켜서 먹고 치유되었습니다.

획일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그 환자의 특이 체질을 파악해 서 처방을 내린 의원의 탁월한 전문성이 놀랍습니다. 오해 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위험한 처방을 공개한 용기가 대 단합니다. 극약 처방을 아무 의심 없이 복용한 환자의 의사 에 대한 믿음이 부럽습니다. 극약을 처방해도 환자가 따를 것이라고 확신한 의사의 전문가로서의 자신감이 돋보입니 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재될 수 있음을 미리 알고 대책을 세우면서도 자신은 철저히 진료와 감정을 분리해 내는 지 혜가 훌륭합니다. 인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엔지니어나 테크니션으로서의 의사가 아니라 철 학자 의사의 모습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초과학이라야 한다고 믿게 됐습니다. 이 예에서 언뜻 보기에 그 의사는 비과학적 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검증된 과학적 바탕 위에서 그 환자 개인의 특성을 고려한 진료를 한 것입니 다. 비과학적인 돌팔이 의료가 과학에 미달되는 개념이라 면 초과학은 철저히 과학적으로 훈련된 상태에서 단순한 과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진료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 게 되기에는 많은 기술적 훈련과 지식의 탐구와 인간으로 서의 성숙이 필요합니다.

의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제 생각의 결론을 말하 겠습니다. 의료란 한 인간의 건강 전체를 관리하는 일입니 다. 이 속에는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그 사람의 죽 음을 관리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의료는 과학적 지 식의 영역에서 움직이면서도 과학에 머물지 않고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유럽에서는 의료를 기본으로 해서 철 학적 담론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로 출발해 서 철학자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칼 야스퍼스가 의사에 서 철학자로 변신한 경우라면 미셸 푸코는 의학적 자료를 이용해서 철학적 담론을 끄집어 낸 대표적인 사람이지요.

쉬운 말로 하면 의료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고도의 과 학적 기술과 인생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성찰을 접목하여 인생전체를 관리하는 철학적 행위가 됩니다.

의 료 인

의료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몇몇 유형의 의료인 과 의료인의 일반적인 특성을 생각해 봅니다. 자기가 못하 면 그것은 누구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있습니다. 차 선을 생각하지 않고 최선이 아니면 포기하는 의사가 있습 니다. 불치병이라도 그 나름대로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의사가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목표대로 안 되 면 환자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남아있는 생을 병을 가지고 살되 더 밝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의사도 있 습니다. 완치에 너무 매달리기도 합니다.

죽음을 겁내는 의사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환자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겁을 내는 것입니다.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의사들이 이에 해당 됩니다. 환자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의사들 입니다. 치료가 힘들다고 생각되는 환자를 멀리 하는 의사 들입니다. 다른 의사에게 가도 결과는 비슷할 것임을 알면 서도 교묘한 수단으로 환자가 다른 의사를 찾아가게 하는 의사입니다. 자기 뜻대로 병이 진행되지 않으면 불안해 지 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말기환자를 쉽게 포기하는 의사도 이에 해당됩니다. 환자의 증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진 행될 때에 가족의 비협조나 환자의 태만으로 몰아 투정을 부리는 의사도 이에 해당됩니다. 환자나 보호자가 듣기 좋 을 만한 말은 자기가 하고 언짢은 말은 다른 사람이 하게 만드는 의사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도 둘러서 말하고 환 자나 보호자로 하여금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혼 란스럽게 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이런 의사들은 환자를 살리는 것만 의료라는 전제하에 일하는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의료의 대상에서 제쳐 놓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료인은 누구입니까? 의료기관의 주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의사는 그 중심에 있습니다. 기타의 의료기관 의 종사자, 법적으로 의료인의 범주에 들기도 하고 의료인 이 아니면서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합 니다.

흔히 말하기를 고객은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고객은 상점의 주인입니까? 아닙니다. 고객은 주인에게 왕처럼 대 접받을 수는 있지만 주인은 아닙니다. 주인은 그 기관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가 되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래서 그 의료기관의 소유자가 누구이건 의료기관의 주인은 의료인 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료기관에 의사가 없으면 의료기관 이 아니기 때문에 의료인 중에서도 의사가 의료기관의 주 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관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자가

주인입니다. 의료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환자에 관

한 결정입니다. 그 결정을 하는 사람은 의사이고, 의사는

의료기관의 주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은 최종적인 의

사결정권을 가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든 공과에 대

한 마지막 책임자가 됩니다. 주인으로서의 의료인,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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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二 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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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료인의 속성을 가장 잘 규정하고 따라서 의료인은 모 름지기 어때야 하는지를 가장 잘 정리해 놓은 것이 히포 크라테스(Hippocrates) 선서입니다.

먼저 선서의 전문(前文)입니다.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기회는 잡기 힘들고, 실험은 위험하고, 판단은 힘들다. 의사가 의사의 할 일을 다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환자와 동반자 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환경은 마땅히 환자에 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의료의 특성과 환자와 주변 환경이 어때야 하는지를 포 괄적으로 표현한 말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전문에 해 당되는 부분입니다. 의사와 환자와 환경이 모두 최선의 상 태에 있을 때에야 제대로 된 의료를 할 수 있음을 아주 간 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료 환경이 지금 이천 오백년 전에 선배의사가 천명한 이런 조건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생각해 볼 때입니 다. 환자는 의사를 불신하고, 의사는 여러 조건으로 환자 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정책은 의사 몰아 부치 기 일변도입니다. 의료 환경에서 의사들에 대한 요구는 봇 물 같으면서 환자 자신이나 그 가족들의 노력은 소홀히 취급되고 있습니다.

떠나가는 선배의료인으로서 나름대로 의료보험, 의료정 책, 법제정 등에 간여하면서 의료환경 개선에 노력했으면 서도 이런 절박한 환경을 후배들에게 남겨 주고 떠난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느낄 뿐입니다.

선서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나는 건강을 수호하는 Apollo와 Aesclepius, Hygieia, Panakeia 그리고 모든 남신, 여신들을 불러, 나의 능 력과 판단력에 따라 이런 나의 선서와 나의 의무를 모두 수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선서의 대상입니다. 의료를 관장하는 신들에게 서약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대에는 자신의 양심에 선서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스승과 제자에 관한 선서 내용입니다.

‘나는 본인에게 의술을 가르쳐 준 내 스승을 나의 부모와 같이 섬기고, 그와 함께 인생의 운명을 같이 하며, 그가 곤궁에 처했을 경우 생계에 필요한 것을 보장해 주고, 그의 자식들을 내 친형제처럼 돌봐주 며, 만약 그들이 의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보수를 요구하든가 또는 어떤 의무를 부과함이 없이 가르쳐 줄 것입니다.

나는 의료 법규에 따라 의무를 지고 맹세한 내 자 식들과 내 스승의 자식, 그리고 내 제자들에게 똑같 이 규정에 따라 강의나 기타 전체 교과에 참여하도 록 할 것이나, 그 외에는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로서 스승에 대한 존경과 배움, 제자에 대한 교육과 훈련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의사 의 자질이 있는 사람, 의사로서 직업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술을 가르치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스 승을 존경하고, 스승의 자손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그들이 어려울 때에 돌보며, 자신의 제자나 자식들에게도 똑 같은 윤리의식을 가르치겠다는 서약입니다. 지금도 경청해야 할 말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서로의 경쟁 때문에 동료를 헐뜯고, 선후배를 무시하는 말을 하고, 동료애를 저버리는 일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가르친 제자가 나가서 돌팔이 짓을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제자와 후배를 잘 키워야 합니 다. 의료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차세대 의료 인을 제대로 양성하는 것입니다. 불행스럽게도 우리는 의 사가 제자를 선발할 권리가 대부분 박탈당한 것이 현실입 니다. 면접시험에서 오직 돈벌이만을 위해 의사가 되겠다 는 의지가 분명한 수험생을 불합격시키지 못하는 것이 작 금의 현실입니다.

다음은 환자에게 해로운 시술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입 니다.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력에 따라 환자를 위해서 만 훈령을 내릴 것이며, 또 그들에 대하여 여하한 해 롭고 부당한 행위는 포기할 것입니다. 나는 어느 누 구에게도-또 누가 내게 요청하더라도-치명적인 약제 를 투여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런 조언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와 같은 것은 낙태용 수단으로 부 인에게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환자의 이익만을 위해서 의술을 행한다는 서약입니 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히틀러 군대에서나 일본군에서 시행한 생체실험이나 70년대 남미에서 고문기 술자들에게 피의자를 죽이지 않고 최악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술을 제공한 의사들이 있었습니다.

위에 말한 것은 누구나 악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지 생각해 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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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의료기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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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는 자신은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기준이 아니라 최근에 자 기가 배운 신기술에 맞추어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없었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연구를 위해 비록 동의는 받았 지만 무리한 치료를 한 일은 없었는지 항상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환자를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연구 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듯한 태도가 내게는 없는지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직역 지키기의 서약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성실 결백하게 살 것이며, 내 기 술을 수행할 것입니다. 또 나는 결석절제 수술을 일 체 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런 수술을 직업적으로 자행하는 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최근의 현상으로 자신은 최고의 전문가라고 하면서 한 편으로는 다른 전문분야를 침범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 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전문과의 신기술 워크샾에 참가 하여 기술을 배워서 얼른 간판을 부치는 것을 보면 저 사 람은 자존심도 없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전문가는 전문가답게 자기 전문분야에 정진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전문가로서 자기가 필생의 과업으로 연마한 지식과 기술 을 최선을 다해 환자에게 시술해야 합니다. 현실적이란 이 유로, 환자들이 좋아 하니까, 등등의 이유를 들어 자신의 전문지식에 어긋나는 의료를 하지 말 것을 히포크라테스 는 요구합니다. 비록 요즈음의 의료 환경 때문이라고는 하 지만 전문가로서의 긍지를 지키는 오기쯤은 가져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음란행위의 금지와 비밀유지의 서약입니다.

‘내가 어느 집을 들어가든, 나는 오직 환자를 위하 여 갈 것이며, 부당하고 사악한 의도와 같은 것을 멀 리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남녀간의, 또 자유인과 노 예 간의 모든 음란한 교제를 피해 갈 것입니다. 그러 나 내가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에 보고, 들은 것, 또 는 직업적 행위 외에도 인간의 생명에 관하여 체험 하게 되는 모든 것을, 그것이 공개되어서 안 되는 한, 나는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기탁 된 비밀로 간주 할 것입니다.’

의료지식을 의료외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의료행위와 관련해서 알게 된 의료 외적인 정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는 뜻입니다. 현대의 의료, 특히 한국적 현실에서는 오히 려 역설적으로 환자의 질병이외의 신상에 관한 문제를 알

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제가 컨설트 진료 때나 전 공의의 환자 진료를 지도할 때 젊은 의사들에게 환자의 환 경적 요소를 물어 보면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질병을 넘어서, 치유를 넘어서 그 사람의 죽음까지 관리해 주어야 한다면 환자의 내밀한 문제들, 가족관계, 성격특성, 직업, 등등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합니다.

진료로 알게 된 환자의 내밀한 문제에 대하여 비밀을 지 킨다는 것과, 어떤 환자의 집에 들고 나오든 간에 음란한 교제를 피하고 사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겠다는 것은 의료 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만 환자나 환자 가족과 성적으로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단순히 비밀을 지킨다는 뜻을 넘어 좀 더 깊은 윤리적 문제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의료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이 달 라질 수 있습니다. 삼성서울병원의 개원초기에 병원고위층 이나 지도자급 전문의나 그룹 간부 등이 소개하거나 부탁 하는 소위 VIP환자에 대한 특별대우를 하지 않기로 약속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병원이 일급 병원으로 자리잡으면서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음을 종 종 보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수시로 선생님들께 무리한 부탁을 드린 적이 여러 번입니다. 꼭 입원하지 않아도 될 환자를 억지로 부탁하여 입원하게 하여 정말로 입원이 필 요한 사람이 입원하지 못하고 수술이 지연되는 일도 있었 을 것입니다. 선서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는 사람, 내게 기분 좋게 하는 사람, 줄을 잡아 놓으 면 후에 언젠가는 득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의료외적 인 이유로까지 과잉친절을 베푼 적은 없는가? 종교적인 이유, 지역감정적인 이유, 심하면 자신에게 거만하게 대했 다는 이유만으로 환자에게 소홀한 적은 없었는지, 이런 것 들도 바로 이 윤리규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제가 지키기 제일 힘들었던 것이 고 스스로도 비윤리적인 때가 많았다고 자책하는 부분입 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결론부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선서를 파기하지 않고 완수하면, 내게 행복한 인생과 성공적인 활동으로 만족하며 항 상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도록 하여 주시고, 그러나 내가 그 선서를 위반하고 거짓 맹세를 하게 될 경우, 내게 그와 정반대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소 서.’(이상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申東烈 편저“서양 의학발전사”에서 인용함)

간단합니다. 의사로서, 의료인으로서 윤리적인 책임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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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도록 신들에게 기원합니다. 자신이 이 선서를 온

전히 지킬 때에 훌륭한 의사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세 속적인 성공인으로서 대접받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 어 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입니다.

얼마나 이 서약이 지키기 힘든 것인지를 의업을 마쳐가 는 지금에야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히포크라테스 의 서약에는 신들의 처벌을 감수하겠다고 했습니다만 현 대의학으로서는 자신의 양심의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서약 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어느 코메디안이 자기에게 수술 받았다는 것을 공표한 사 건으로 처벌받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의료법 위 반이기 때문에 물론 법이 처벌합니다. 그러나 환자의 계층 따라, 경제력 따라, 성품 따라 치료에 임하는 자세가 다른 것은 그 누구도 처벌할 수 없습니다. 법에도 처벌규정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양심만이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 래서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는 매 순간마다 항상“내가 지 금 진정으로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무런 의료외적인 사심 없이 진료에 임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의료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 전체를 치유한다는 개념입니다. 궁극적으로 질병 이란 한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경험가운데 하 나라고 생각할 때 의료는 한 개인의 질병뿐 아니라 죽음까 지도 관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고도의 윤리성을 띠는 행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학에서는 치유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죽어가는 과정에 대하여 소홀한 경향이 있 었습니다. 다행히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호스피스와 같은 죽음을 관리하는 의료의 개념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치유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관리하고 책임진다는 의미에 서 의료행위는 과학을 넘어 철학적 사유까지 요구되는 초 과학적 행위입니다. 의료행위가 단순한 지식과 기술의 문 제가 아니라 철학적 행위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윤리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 윤리적 행위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의료인의 노 력은 간단합니다. 행위의 순간순간마다 내가 지금 오직 환 자의 이익만을 위해 결정을 하고 그런 결정에 따라 의료 행위를 하는가를 양심에 비추어 자신에게 묻는 것으로 충 분합니다. 물론 그 답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능력 과 용기와 자기처벌의 의지가 있어야 하겠지요.

의 료 기 관

끝으로 의료기관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제가 삼성서울 병원에 전하는 부탁의 말씀 몇 개로 정리할까 합니다.

이청준씨의 소설에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 출신인 의사가 소록도 나병원을 개혁해서 나환자의 천 국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악의 나 개인적인 욕심은 없고 오로지 나환자만을 위해서 입니 다. 저돌적으로 일합니다. 장애가 있으면 밀어붙입니다. 나 환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자신을 따라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이해 못하고 자신의 뜻을 안 받아드린다고 생각하 여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환자로부터 듣는 말은“당신이 애쓴 것 은 알지만 당신들의 천국은 될지 몰라도 우리들의 천국은 아닙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친절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우리 병원을 한번 살펴봅니다.

저와 가까운 분들이 이 병원을 많이 거쳐 갔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분들도 여러 명입니다. 그들이 병원 이 참 친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밖에서 만나 허심탄회 하게 말할 때,“당신네의 친절이 내게는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병원을 위한 친절인지 환자를 위한 친 절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디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환자를 위해 노력했지만 환자들은“당신 들의 천국” 같이 느꼈다는 말이지요. 환자의 입장에서의 최 선의 친절이 아니라 종사자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생각한 방법으로 친절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까 의료의 대상은 통계적으로 버려야 될 부분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정규분포에서 2 시그마 혹은 4 시그마 밖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평균적인 사람들이 아 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친절은 그 사람 에게는 친절이 아니라 고문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의료는 통계만으로 할 수도 없고, 질병은 O-X로 고쳐 지지 않습니다. 같은 질병을 가지고도 개인마다 느끼는 고 통이 다르고 병의 경과가 다릅니다. 요새 잘 나가는 코메 디프로에 나오는 말처럼 질병과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와 그 치료대책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지금까지 우리 의료계가 너무 불친절했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한 친절한 병원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획일화된 친절, 규격화한 친절, 당신들의 천

국과 같은 친절만 제대로 해도 남을 앞서 갈 수 있었습니

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우리의 경쟁자들이 거의 같은 수

준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우리가 최고라는

자만에 빠져서 거북이에게 지는 토끼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려는 우리

병원에 관료화의 징후, 획일화의 징후, 관습화의 징후, 매

너리즘적 징후가 나타나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이런 징후

들은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우리를 침범하는 세균과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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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의료기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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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친절의 문제는 하나의 예일 뿐 우리 병원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그렇습니다.

이제 틀을 좀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답은 간단 합니다. 개인특성에 맞는 의료를 제공하면 됩니다. 그 순 간 그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그 환자의 입장에서 점검 하여 결정한 다음 의료를 제공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 순간의 최선과 그 환자의 일생을 관통하는 의료서비스를 준비하고 제공해야 합니다. 순간을 위해 일생에는 손해가 되는 의료나 전 생애를 고려한 나머지 그 순간의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조 화시키느냐가 매우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업 을 평생의 직업으로 택한 이상 어렵다고 물러서거나 돌아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매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병원은 초일류 병원을 지향합니다. 2010도 초일류 병원이 되기 위한 작전의 하나입니다. 초일류병원은 병원 을 찾아오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평균 재원일 수의 단축은 전 세계적인 현대의료의 화두라고 할 수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환자를 위한 것인지, 병원경영을 위 한 것인지,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상치되는 것이 없는지 점 검할 때가 되었습니다.

환자를 위해서는 재원일수를 늘려야 되고 경영을 위해 서는 재원일수를 단축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 할 것인지 충분히 고민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초일류 병 원으로 가는 길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경영합 리화도 하면서 환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두 말할 필요 가 없겠지요.

초일류병원으로 가는 길의 하나로 우리 병원은 암센터 를 만들고 있습니다. 암이란 병은 아직까지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병입니다. 자기의 병은 못 고친다는 것을 알고 나 서도 고통스럽게 오래 살 수 있는 병이 암입니다. 암 진단 을 받은 사람의 많은 경우에 일단 치료가 잘 되었다 하더 라도 결함이 남게 되고 조만간 치유불능상태가 되어 병원 에 오게 됩니다. 치료받은 후에도 많은 고통이 남는 것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암치료과정에서 언젠가는 더 이상 호 전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점점 나빠지는 환자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까 모두에서 말씀드린 의료는 질병이 아니라 환자인 사 람의 삶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더 이상 살 아난다는 개념에서의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도 의료의 대상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고통스럽지만 나름대로의 삶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기능이 있는 의료기관이라야 초일류 병원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의 장소로 선택하는 병원, 그런 병원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좋은 병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치병이라도 잘 살려 내는 병원이 좋은 병원이 란 전제아래서 하는 말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한 말씀 보태자면 사람의 크기에는 차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림에 보이는 것처럼 의자가 작은 사람, 의자가 큰 사람, 의자의 크기가 적당한 사람이 있습 니다. 누가 조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가끔 너무 큰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의자가 작다고 투 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스스로 이 병원에 와서, 혹은 그 전의 내 경력에서 큰 의자에 앉았으면서도 투정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나 반성하 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삼성서울병원에 근무하면서 2000년의 의약분업파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임시로 병원의 교수님들을 대표해서 전 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에 나가 의약분업반대 투쟁에 참가 할 때 다른 어떤 병원이나 의과대학보다 병원전체가 가장 단결력이 세고, 의견조정이 잘 되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하 는 조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힘이 우리 병원의 힘일 것입니다. 그런 힘은 어떤 단 체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 힘이면 어떤 난관 도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힘이 점점 더 커지기를 기대하면서 최근의 저의 마음을 어지럽 게도 하고 마음을 비울 수도 있게 한 시 한편을 소개하면 서 말씀을 마치렵니다.

지금 전이된 암과 씨름하면서도 주옥같은 영미시를 골 라 번역하고 자신의 글을 부쳐서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장영희라는 영문학 교수가 소개한 시입니다.

낙엽은 떨어지고 가을이 우리를 사랑하는 기다란 잎새 위에 보릿단 속 생쥐 위에도 머뭅니다.

머리 위 마가목 잎이 노랗게 물들고 이슬 젖은 산딸기 잎새도 노랗습니다.

사랑이 이울어 가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슬픈 우리 영혼은 지금 피곤하고 지쳐있습니다.

헤어집시다.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잊기 전에

그대 숙인 이마에 입맞춤과 눈물을 남기며

William Butler Yeats, 장영희 역

수치

Fig. 1. Normal distribution curv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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