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우천왕’
정경희89)*
Ⅰ.머리말
1. 倍達國末 天孫文化圈의 동요와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 2. 천손문화권의 안정과 천손문화의 방향 전환
Ⅱ. 맺음말
【국문요약】
동아시아 상고문화의 원류는 환국-배달국-단군조선으로 이어지 는 ‘천손문화’였다. 이를 이끌어갔던 실질적 宗主는 역대의 환인-환웅-
단군으로 이들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천부)’의 진실을 온전히 지켜나갔던 ‘천부의 전승자-스승이자 군왕’이었다.
환국의 역대 환인들은 사람들이 처한 열악한 물질적 조건을 개선, 천손문화의 문명적 기초를 닦았으며,(造化ㆍ父道) 배달국의 역대 환웅 들은 스승과 군왕의 두 가지 역할 중에서 상대적으로 스승의 역할에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國學科 교수
주력, 천손문화의 수행적 본질을 널리 알려갔다.(敎化ㆍ師道), 단군조 선의 역대 단군들은 상대적으로 군왕의 역할에 치중하여 강력한 통치 력을 발휘함으로써 천손문화의 정치ㆍ사회적 제도화를 이루어내었다.
(治化ㆍ君道)
배달국말은 ‘교화ㆍ사도’에서 ‘치화ㆍ군도’로 나아가는 천손문화의 일대 전환기로 당대의 환웅들에게는 문명 진화의 과정에서 더욱 심 각해져가는 갈등 조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력이 요구되었다.
배달국말 배달국 개창 이래 천손문화의 수혜를 받아왔던 중원지역 에서 천손문화의 본령인 ‘조화’가 아닌 ‘힘’의 논리에 따른 패권 쟁탈 양상이 나타났는데, 급기야 이는 배달국의 천손문화권에서 벗어나 독 자적인 천자국 질서를 구축하려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치화ㆍ군도’
의 의미를 잘 이해하였던 치우천왕은 중원 경략을 통해 중원지역 천손 문화권을 안정시켰으며 ‘치화ㆍ군도’로의 방향 전환을 이루어내었다.
주제어: 배달국, 천손문화, 치우천왕
Ⅰ. 머리말
한국의 대표적인 선도사서 뺷桓檀古記뺸에서는 한민족의 발원지로
‘天海의 동쪽 波奈留山 아래’의 ‘天山산맥’을 제시한다.1) 파나류산은 현재의 파미르고원으로 추정되며2) 천산산맥은 여기에서 북쪽으로
1)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桓國本紀「三聖密記云 波奈留之山下 有桓仁氏之國 天 海以東之地 亦稱波奈留國也」
2) 丹齋 申采浩는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 (갑)파미르고원설, (을)몽고사막설 양 설을 제시하는데,(단재신채호전집 편찬위원회, 「朝鮮上古史」, 뺷丹齋申采浩全 集뺸 제1권 역사,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51쪽) 이는 1910년 대초에 등장한 뺷환단고기뺸류의 영향으로 보인다.
갈려나온 거대 산맥이다. 이곳에서 桓國이 시작되어 동북 방면으로 확대되면서 倍達國과 檀君朝鮮으로 이어진다고 보는데, 그 曆年으로 환국 3301년, 배달국 1565년, 단군조선 2096년을 제시한다.
환국 이래 배달국,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약 7,000년간 지속된 문 화의 정수에 대해서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이래 崔南善(1890∼1957) 의 ‘不咸文化論’을 필두로3) 수많은 학자들이 한결같이 ‘광명문화론 (태양문화론, 밝문화론)’를 주장해 오고 있다.
‘광명문화(태양문화, 밝문화)’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外物로서의 태 양이나 태양빛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밝음 (본성)을 밝히는 ‘선도문화’에 기반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곧
‘선도수행’의 상징적 표상이 ‘광명, 태양, 밝음’이었던 것이다.
환국 이래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전승되어온 ‘광명문화 (태양문화, 밝문화, 선도수행문화)’는 ‘천ㆍ지ㆍ인 삼원론’, 구체적으로 는 ‘一ㆍ三ㆍ九論(三元五行論)’의 氣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ㆍ 삼ㆍ구론(삼원오행론)’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一(一氣ㆍ하느님 )’ 또 는 ‘一’의 세 차원인 ‘天(정보)ㆍ地(질료)ㆍ人(기에너지) 삼원(三ㆍ三氣ㆍ 三 )’으로 바라본다. 존재의 본질인 ‘一(三), 一氣(三氣), 삼신(三 )하 느님’이 움직임을 시작함으로써, 현상인 ‘九氣’ 또는 ‘五氣(氣ㆍ火ㆍ水 ㆍ土ㆍ天符, 또는 木ㆍ火ㆍ土ㆍ金ㆍ水 五行)’가 생겨나고 이들의 어 우러짐에 의해 현상의 물질세계가 만들어진다. 본질인 ‘一(三)’은 현 상에서는 ‘天符’가 되어 나머지 기ㆍ화ㆍ수ㆍ토 또는 목화ㆍ금ㆍ수 4 대 원소를 조화시키게 된다.4)
3) 崔南善, 「不咸文化論」, 뺷六堂崔南善全集뺸2 현암사, 1973.
4) 졸고, 「≪天符經≫ㆍ≪三一 誥≫를 통해 본 韓國仙道의 ‘一ㆍ三ㆍ九論’」, 뺷범한철학뺸 44, 범한철학회, 2007; 「≪符都誌≫에 나타난 韓國仙道의 ‘一ㆍ 三論’」, 뺷선도문화뺸 2,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07; 「韓國仙道 의 ‘삼신하느님’」, 뺷도교문화연구뺸 26, 한국도교문화학회 동과서, 2007; 졸고,
「한국선도의 ‘三元五行論’-‘陰陽五行論’의 포괄」, 뺷동서철학연구뺸 48, 한국 동서철학회, 2008; 「중국의 ‘陰陽五行論’과 한국선도의 ‘三元五行論’」, 뺷동서
본질의 현상화(물질화) 과정에서 생겨난 사람과 만물 중에서도 유 독 사람만이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천부)’을 상ㆍ중ㆍ하 삼단전속 에 온전히 갖추고 있고, 이러한 이유로 유독 사람만이 현상(물질, 몸) 차원의 ‘오행’을 거슬러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천부)’으로의 회귀가 가능하다. 이러한 회귀의 과정이 선도수행이다5).
선도수행의 궁극 목표가 사람속의 ‘천ㆍ지ㆍ인 삼원(천부)’의 회복 이라고 한다면 이는 ‘天孫文化’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천ㆍ지ㆍ인 삼원(천부)’로의 회귀 과정은 ’배 하단전(地, 정보, 몸)의 禁觸 → 가슴 중단전(人, 기에너지, 마음)의 調息 → 머리(뇌) 상단전(天, 정보, 의식) 의 止感‘의 과정인데, 이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삼단전이 각성되어 ‘천ㆍ 지ㆍ인 삼원(천부)’이 온전히 깨어난 사람을 ‘天孫’이라 한다면, ‘천ㆍ 지ㆍ인 삼원(천부)’이 깨어나지 못하고 ‘배 하단전(地, 몸)’ 차원에 머 물러 있는 사람은 ‘地孫’이라 할 수 있다. 선도수행의 목표점인 ‘천손’
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 ‘천손문화’인 것이다.
‘천손문화’는 기존의 접근법에 비해 어떠한 차이를 갖는가? 먼저
‘선도문화’의 경우 ‘仙人’을 이상시한다면 ‘천손문화’는 ‘지손에서 천 손으로 변화하는 것’을 이상시한다. 수행의 현재 지점인 ‘지손’과 수 행의 목표 지점인 ‘천손’을 함께 제시하는 점에서 좀 더 구체적이라 고 할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 ‘천손문화’는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 천손이 될 수도 있고 지손이 될 수도 있다’는 함의를 갖는데, 이는 동 아시아 상고 정치ㆍ종교문화의 주된 테마였던 ‘천손문화’에 대한 새 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곧 한ㆍ중ㆍ일을 막론하고 동아시아 상고의 지배층들은 언제나
철학연구뺸 49, 2008.
5) 졸고, 「韓國仙道의 수행법과 祭天儀禮」, 뺷道敎文化硏究뺸 21 한국도교문화학 회 동과서, 2004; 「한국선도의 ‘一ㆍ三ㆍ九論(三元五行論)’에 나타난 존재의 생성ㆍ회귀론-한국선도의 수행이론」, 뺷동서철학연구뺸 53, 2009.
‘天帝, 天王, 天子, 天君, 天孫, 天皇’ 등을 표방해왔다. 한국사 속의 천 손의식이나 祭天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서도 ‘천자-제후국’의 질 서를 고집하고 祭天을 제한해 왔으며, 일본에서도 ‘天孫降臨사상’이 나 天皇制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천손과 지손을 고정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노 력 여하에 따라서 천손도 지손도 될 수 있다’는 ‘천손문화론’은 새로 운 관점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하늘을 믿고 신앙하 는 천손문화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통찰에 근 간한 천손문화론으로의 시각 전환은 동아시아의 천손문화에 대한 이 해를 한 단계 견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환국 이래의 배달국문화를 ‘천손문화’로 인식한 위에 배달국말기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동아 시아 천손문화의 원류인 한국 천손문화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를 기 대한다.
一章에서는 우선 배달국 말기 중원지역에서 배달국 주도의 천손문 화권으로부터 분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음을 살펴본 다음 배달국 천손문화의 宗主인 치우천왕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중원 경략을 결행하게 되었음을 살펴보겠다. 二章에서는 먼저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 이후 천손문화권이 재차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살펴본 다음 천손문화의 큰 방향이 ‘敎化’에서 ‘治化’로 선회하였음을 살펴보겠다.
1. 倍達國末 天孫文化圈의 동요와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
1) 중원지역의 분립과 천손문화권의 동요
배달국(기원전 3898년∼기원전 2333년6)) 개창 이래 천손문화의 보 6) 선도사서 뺷환단고기뺸의 편년에 따르면 배달국의 개창 시기는 기원전 3898 년으로 후기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배달국의 영역에 속하였던 요서지역 홍산문화후기 유적(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인 牛河梁 유적의 문화
급으로 문화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던 한편으로 높아진 문화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요구 또한 더욱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물산이 풍부한 중원지역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니,7) 중원 지역은 배달국의 문화가 뻗어나가는 일차적 대상 지역이었다.
배달국 계열 중에서 가장 먼저 중원지역으로 들어갔던 일파로 盤 固계가 있다. 환웅이 환인의 명으로 太白山 방면으로 옮겨가 배달국 을 개창할 즈음 반고는 환웅과 함께 길을 나누어가기를 청하여 환인 의 허락을 얻었다.
같은 천손족이면서도 반고는 기이한 술수를 좋아하는 성향으로 묘 사되고 있는데, 환인이 제시했던 金岳, 三危山, 太白山 중에서 삼위산 (현 陝西省 삼위산)으로 방향을 잡은 후 ‘財貨와 十干ㆍ十二支 神將 을 거느리고 삼위산 납림동굴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고 한다. 호종세 력으로는 共工, 有巢, 有苗, 有燧 등이 있었다.8) 반고는 후에 ‘諸畎’
또는 ‘盤固可汗’으로 불리었는데,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창조신으로 묘사되고 있다.9) 반고 일파는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천산 桓國의 천 손문화를 전수하였다.
수준은 흔히 ‘초기국가단계’로 이야기되므로 선도사서에 등장하는 ‘배달국’
이라는 호칭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尹乃鉉은 후기신석기 단계의 한국사 회는 ‘고을나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여러 마을들이 연맹을 맺어 고을을 이루고 정치적 지배자가 출현한 단계라는 것이다.(尹乃鉉, 뺷古朝鮮硏究뺸, 일 지사, 1994, 130∼131쪽)
7)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仲國者西土之 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三神五帝本紀「三光五氣 皆在視聽感覺而世級日 進 攢火焉 發語焉 造字焉 優勝劣敗相競 始乎起耳」
8) 뺷桓檀古記뺸「三聖紀全 下」「時有盤固者 好奇術 欲分道而往請 乃許之 遂積財 寶 率十干十二支之神將 與共工有巢有苗有燧 偕至三危山拉林洞窟 而立爲君 謂之諸畎 是謂盤固可汗也
9) 盤固는 중국신화에서 우주의 창조신으로 이야기되고 있다.(袁珂, 전인초ㆍ김 선자 역, 뺷중국신화전설뺸 1, 민음사, 2009, 31∼33쪽) 有燧는 三皇중 一人인 燧人氏이다, 共工氏는 治水법, 有巢氏는 주거법, 燧人氏는 火食법을 알려주 었다고 한다.
천산 환국의 일 갈래인 반고 계열과 토착민 문화가 융합된 중원지 역, 이른바 ‘華夏族’10)의 문화는 배달국의 전형적인 천손문화와는 거 리가 있었다. 반고가 ‘재보와 술수를 좋아하여 환웅과 길을 달리하였 던’ 점에서 일단의 차이가 느껴지며, 무엇보다 배달국이 동북방에 자 리한 이후 伏羲氏, 女媧氏, 少典氏, 少皞氏 등 배달국의 많은 諸家와 장수들이 중원으로 이주, 배달국의 천손문화를 전수하여 결국 반고 계 열을 제치고 중원문화의 비조가 되었던 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화하지역에 배달국의 문화를 전수한 첫 번째 인물로 흔히 太皥(太 昊) 伏羲가 언급된다. 복희는 배달국 제5대 太虞儀 환웅의 12번째 아 들이자 배달국의 雨師로서 깊은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으며 태백 산에서 수행한 후 얻은 掛圖(八卦ㆍ河圖)로써 교화를 펼친 것으로 이 름높다.11)
복희씨는 배달국의 우사직에서 물러난 후 황하 일대의 陳(현 하남 성 淮陽12)) 땅으로 옮겨갔다. 그곳은 원래 반고의 신하로 알려진 有 燧(燧人氏)의 나라였는데, 복희가 옮겨와 배달국 환웅천왕의 봉함을 받으니 무기를 쓰지 않고도 수인씨를 대신하였고13) 수인, 유소와 더 불어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14) 복희의 陳은 복희의 여동생으로 알려 진 女媧에 의해 계승되었다.15)
陳은 배달국 문화가 화하지역에 전해지는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여 진에 대한 배달국의 관심은 각별하였던 것 같다. 제8세 安夫連 환웅 은 少典氏을 姜水(岐水, 현 섬서성 寶溪 근방)16) 방면에 파견하여 군
10) 황하 중류인 陝西省의 ‘華山’ 및 근방의 황하 지류 ‘夏水’ 일대에서 일어난 종족이라는 의미이다.
11)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
12) 뺷揆園史話뺸檀君記 「漢淮陽之地 古陳國地 本太昊之墟」
13) 뺷揆園史話뺸太始記
14)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 15)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
사를 감시하게 했다.17)
소전씨는 斐西岬 熊族의 한 갈래이자 제1대 거발한 환웅의 牛加를 역임하였던 高矢氏의 방계 후예였다.18) 배달국에서 소전씨로 하여금 군사를 감시하게 한 이유는 진을 주변의 토착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강수에 안착한 소전씨에게서 난 아들이 神農氏(후의 炎帝)이다. 후 대의 중국기록에서 신농씨가 ‘牛頭人身’의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19) 그가 환웅의 우가 고시씨의 후예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농씨는 천성이 지혜롭고 어질어 온갖 풀의 맛을 보아 약을 만들 고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혁명을 일으켰으며 시장 교역 제도를 만들 어 사람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신농씨의 왕계는 ‘2세 臨魁 → 3 세 承 → 4세 明 → 5세 直 → 6세 厘 → 7세 哀 → 8세 楡罔’의 8대 530년간 이어지게 된다.20)
신농국이 성세를 누리자 배달국의 제10세 葛古환웅은 신농국을 제 후로 봉하고, 空桑[窮桑, 하남성 陳留(淮陽)]21) 일대를 경계로 하여 以 東을 배달국의 영토로, 以西를 신농국의 영토로 하였다.22)
16) 徐旭生, 뺷中國古代的傳說時代뺸, 41∼42쪽; 王大有 著, 林東石 譯, 뺷龍鳳文化 原流뺸, 동문선, 1988(2002), 186쪽.
17)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三韓管境本紀
18)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神農少典之子 少典與少皞 皆高矢氏之傍支也」
19) 袁珂 저, 전인초ㆍ김선자 역, 앞책, 2009, 134쪽
20) 뺷帝王世紀뺸(晉 皇甫謚 編)에서는 신농씨의 왕계가 ‘臨魁→承→明→直→厘→
哀→楡罔’ 8대 530년간 이어졌다고 하였다.(「易稱庖犧氏沒 神農氏作 是爲炎 帝 炎帝神農氏 姜姓也…長于姜水…位在南方…又曰本起烈山 或稱烈山氏…自 陳營都于魯曲阜…在位一百二十年而崩 葬長沙 納奔水氏女 曰聽 生帝臨魁 次帝 承 次帝明 次帝直 次帝厘 次帝哀 次帝楡罔 凡八世 合五百三十年」)
21) 뺷환단고기뺸에는 空桑을 ‘陳留(하남성 淮陽)’라고 하였다.(뺷桓檀古記뺸「太白逸 史」神市本紀「空桑者 今之陳留 楡罔所都也」) 반면 중국학자 王大有는 空桑을
‘曲阜 일대’라 하였다.(王大有 著, 林東錫 譯, 앞책, 1988(2002), 101쪽) 22)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後有葛古桓雄 與神農之國 劃定疆界 空桑以
東屬我」
이로써 신농국에게는 배달국의 ‘三神五帝論’에 입각하여 ‘炎帝’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삼신오제론’은 한국선도의 ‘삼원오행론’의 다른 이름이다. 곧 ‘천ㆍ지ㆍ인 삼원’은 ‘삼신’, ‘氣ㆍ火ㆍ水ㆍ土ㆍ天符 또는 木ㆍ火ㆍ土ㆍ金ㆍ水 5行’은23) ‘黑帝ㆍ赤帝ㆍ靑帝ㆍ白帝ㆍ黃帝 5帝’ 또 는 ‘太水ㆍ太火ㆍ太木ㆍ太今ㆍ太土 5靈’으로도 지칭되고 있다.24)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과 현상인 ‘목ㆍ화ㆍ토ㆍ금ㆍ수(기ㆍ화ㆍ 수ㆍ토ㆍ천부) 오행’의 논리를 정치현실에 적용해보면 ‘천ㆍ지ㆍ인 삼원’은 ‘삼신하느님(上帝)’, 현상인 ‘목ㆍ화ㆍ토ㆍ금ㆍ수 오행’은 ‘五 帝’가 된다. ‘삼신하느님(上帝)국’은 배달국으로 ‘천ㆍ지ㆍ인 삼원(천 부)’의 본질을 전수하는 천손문화의 종주요, 오제로 이름되는 제후국 은 천손문화를 받아들여 펼치는 나라들이다.
23) 환국 이래의 오행론의 원형은 ‘氣ㆍ火ㆍ水ㆍ土ㆍ天符 五行論’이었으나 뺷환 단고기뺸 중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서는 ‘木ㆍ火ㆍ土ㆍ金ㆍ水 五行論’을 사용하고 있다. ‘기ㆍ화ㆍ수ㆍ토ㆍ천부론’과 ‘목ㆍ화ㆍ토ㆍ금ㆍ수론’이 병행 된 것으로 보이는데, 병행 시점은 伏羲의 음양오행설이 등장한 즈음으로 보 인다. 복희가 음양오행설을 창도하여 중원지역에 본격적으로 전파한 이후 이것이 배달국으로도 들어와 ‘기ㆍ화ㆍ수ㆍ토ㆍ천부 오행론’과 병행되었던 듯하다. 단순히 오행의 명칭이 다를 뿐이라면 양자를 통용해도 아무런 문제 가 없다. 선도사서 뺷符都誌뺸에서는 후대의 堯에 이르러 중앙의 ‘天符(土)’의 의미가 ‘조화’에서 ‘힘(권력)’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는 오행론의 본질인 ‘조화 론’을 훼손, 권력투쟁의 역사를 조장한 이론으로 극론하였다.(졸고, 「한국선 도의 삼원오행론-음양오행론의 포괄」, 앞책, 2008, 340∼343쪽)
24)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三神五帝本紀「表訓天詞云…於是遍在天下者 主五帝司 命 是爲天下大將軍也 遍在地下者 主五靈成效 是爲地下女將軍也…稽夫五帝 曰黑帝 曰赤帝 曰靑帝 曰白帝 曰黃帝 黑帝主肅殺 赤帝主光熱 靑帝主生養 白 帝主成熟 黃帝主和調 稽夫五靈 曰太水 曰太火 曰太木 曰太金 曰太土 太水主 榮潤 太火主鎔煎 太木主營築 太金主裁斷 太土主稼種…高麗八觀記三神說 云…五帝說云 北方司命曰太水 其帝曰黑 其號曰玄妙眞元 其左曰桓因 在蘇留 天 是爲大吉祥也 東方司命曰太木 其帝曰靑 其號曰同仁好生 其佐曰大雄 在 太平天 是爲大光明也 南方司命曰太火 其帝曰赤 其號曰盛光普明 其佐曰庖犧 在元精天 是爲大安定也 西方司命曰太金 其帝曰白 其號曰淸淨堅虛 其佐曰治 尤 在鈞和天 是爲大嘉利也 中方司命曰太土 其帝曰黃 其號曰中常悠久 其佐曰 王儉 在安德天 是爲大豫樂也 五帝注曰 五方各有司命…龍王玄龜 主善惡 朱雀 赤熛 主命 靑龍靈山 主穀 白虎兵神 主刑 黃熊女神 主病」
이러한 삼신오제론에 따라 신농씨의 후예에게 炎帝(赤帝)의 칭호 가 주어졌는데, 염제(적제)의 칭호가 그러하듯이 신농씨는 ‘태양의 신’으로 불리었다. 신농국은 배달국 광명문화(태양문화, 밝문화)의 계 승자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배달국의 삼원오행론에 기반한 ‘삼신오제론’, 곧 ‘삼신상 제-오제론’이 후대의 ‘천자-제후 封建論’의 시원이 됨을 알 수 있 다. 대체로 봉건제는 西周시대에 이르러 처음 등장한 것으로 이해되 지만,25) 그 원류는 배달국이며 서주에 이르러 화하족이 배달국 이래 단군조선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주장하면서 배달 국ㆍ단군조선의 봉건제를 모방하여 독자적인 봉건질서를 정립하였 던 것이다.
신농국이 분봉될 당시 산동성 空桑(窮桑) 以東의 땅에는 少皞氏(후 의 白帝)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호씨는 신농국의 선조인 소전씨와 마 찬가지로 斐西岬 熊族의 한 갈래이자 거발한 환웅대 우가 출신인 高 矢氏의 방계 후예였다고 한다.26) 중국측 기록에는 동방의 왕녀 皇娥 가 서쪽으로 옮겨와 ‘窮桑’이라는 거대한 뽕나무가 있는 곳에 정착하 였고 이곳에서 白帝를 만나 소호씨를 낳았다고 한다. ‘공상’은 높이가
전거 분류 기준 水 火 木 金 土
뺷表訓天詞뺸
五帝(德)
(天下大將軍)黑帝(肅殺)赤帝(光熱)靑帝(生養)白帝(成熟) 黃帝 (調和) 五靈(德)
(地下女將軍)太水(榮潤)太火(鎔煎)太木(營築)太金(裁斷)太土(稼種) 뺷高麗八觀記뺸
五帝說 보좌신 桓仁 庖犧 大雄 治尤 王儉
뺷高麗八觀記뺸 五帝注
상징물 역할
龍王玄龜 主善惡
朱雀赤熛 主命
靑龍靈山 主穀
白虎兵神 主刑
黃熊女神 主病
<표 1>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三神五帝本紀에 나타난 ‘五帝論’
25) 尹乃鉉, 「天下思想의 시원」, 뺷中國의 天下思想뺸, 민음사, 1988, 25∼49쪽.
26) 주)18과 같음.
무려 천 길이 되고 일만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보랏빛 열매를 먹으면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이는 분명 배달국
‘광명문화(태양문화, 밝문화)’의 일상징인 신단수였을 것이며, 이 나무 가 있는 ‘공상’ 지역은 소호국의 제일 蘇塗였을 것이다. 소호씨 또한 송골매의 모습이며 신하들도 한결같이 새로 묘사되었으니,27) 배달국
‘광명문화(태양문화, 밝문화)’의 대표적인 상징물의 일종인 ‘새’ 토템 이 적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소호국은 중원지역의 신농국과 달리 성향적으로 배달국 천 손문화와 일체화되어 있던 나라였으니, 공상을 경계로 ‘신농국과 배 달국이 나뉘었다’는 뺷환단고기뺸의 인식이 성립하게 된다.
제13세 斯瓦羅환웅 초에는 空桑 이동에 자리한 배달국의 웅족(소 호족)을 ‘黎(九黎)’28)에 봉하였다.29) 배달국의 삼신오제론에 입각한 분봉제도가 화하의 신농족에 이어 소호족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니, 소호씨가 ‘窮桑帝’30), ‘帝俊’31), ‘白帝’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시점이 이때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화하 일대의 염제국 신농국과 산 동성 일대의 백제국 소호국(九黎國, 空桑國, 帝俊國)’이 배달국의 주 요 제후국으로서 병존하게 되었는데, 배달국의 천손문화에 대한 양
27) 袁珂 저, 전인초ㆍ김선자 역, 뺷중국신화전설뺸 1, 민음사, 2009, 75∼83쪽.
28) 뺷國語뺸「楚語」중의 기록은 少皞氏의 통치권역이 ‘九黎’ 였음을 보여준다.(뺷國 語뺸「楚語」「及少皞之衰也 九黎亂德…其後三苗 復九黎之德 偉昭注 九黎黎氏 九人 蚩尤之徒也…三苗 九黎之后」) 森安太郞은 九黎의 위치를 ‘산동성 渾城 縣 일대’로 비정하였다.(森安太郞, 뺷黃帝的 前說-中國古代神話硏究뺸, 臺北時 報文化出版公司, 1988, 202쪽)
29)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三韓管境本紀「斯瓦羅桓雄之初 熊女君之後曰黎 始得封 於檀墟爲王儉 樹德愛民 土境漸大 諸土境王儉 來獻方物 以歸化者千餘數」배 달국 개창시 환웅족이 웅족과 연맹한 이래 웅족은 배달국의 주족이 되었기 에 배달족은 熊族(또는 ‘有熊族’)으로도 범칭되었다. 소호씨는 비서갑 웅족 출신으로 거발한 환웅의 우가 였던 고시씨의 후예로 역시 웅족이다.
30) 뺷帝王世紀뺸「(少皞氏)居江水有聖德 邑于窮桑以登帝位 都曲阜或謂之窮桑帝」
31) 王大有 著ㆍ林東錫 譯, 앞책, 1988(2002), 104∼106쪽
국의 성향 차이에 대해서는 상기한 바와 같다.
복희-소전-신농으로 이어지는 화하 일대의 토착민 문화는 고고 학적으로는 ‘仰韶文化’(기원전 5000년∼기원전 3000년)에 해당하며, 복희-소호로 이어지는 산동성 일대의 배달국의 문화는 ‘大汶口文 化’(기원전 4,300년∼기원전 2,000년)에 해당한다. 중국 고고학계에서 는 대문구문화를 한결같이 동이족 계통의 문화로 인정하고 있으 니,32) 이는 앞서 살펴본바 뺷환단고기뺸의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하 는 부분이다.
배달국말이 되면 염제 신농국과 백제 소호국의 세력 균형이 깨어 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신농국의 8세) 楡罔이 백성들을 단속하고 다그쳐 민심이 이반되고 제후들이 배반하여 중원지역이 극히 시끄러 워졌기’ 때문이다.33) 신농국이 패권주의적 지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 인데, 이러한 혼란을 틈타 신농국의 유력가였던 公孫 軒轅(후의 黃帝, 기원전 2550년∼기원전 2140년 또는 기원전 2698년∼기원전 2208 년)34)이 화하지역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헌원은 少 典의 아들이자 신농의 형제인 公孫의 후예로서35) 가문으로 보면 역 시 배달국 거발한 환웅의 우가였던 고시씨의 후예이자 신농씨의 족 친이었다.36)
신농의 형제인 공손이 자신에게 주어진 育畜의 임무를 게을리하여 32) 大汶口文化의 주체는 ‘太皥 伏羲氏→少皞氏→顓頊氏’(楊東晨說), 또는 ‘少皞
氏’(唐蘭說)로 이야기되는데, 동이족의 문화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대문구 문화는 大人國, 偏頭, 拔齒, 口含球 풍습, 고인돌 등 한민족 문화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金仁喜, 「상고사에 있어 韓ㆍ中 문화교류-중국 大汶口文化 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뺷동아시아 고고학뺸2, 2000)
33) 뺷揆園史話뺸太始記: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 「及至楡罔 爲政速急 諸 邑携二 民多離散 世道多艱」
34) 王大有 著, 林東錫 譯, 앞책, 1988(2002), 52쪽.
35) 뺷史記뺸卷1 五帝本紀 第一 黃帝「黃帝者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
36) 염제와 헌원은 同母異父의 형제 관계라고도 하며, 헌원이 有熊族(배달족의 범칭) 출신이었다고도 하였다.(袁珂 저, 전인초ㆍ김선자 역, 앞책, 2009, 75쪽)
軒丘 땅에 유배되었는데, 여기에서 태어난 헌원은 이 일대를 기반으 로 세력을 키워나가 유망대에 이르면 신농국의 또 다른 실세이자 토 착민들의 영수로 성장해 있었다. 헌원은 화하지역의 새로운 실력자 로 부상하였지만 用兵으로 일어선 패자였을 뿐 ‘선조인 신농씨의 至 德을 승계하지는 못하여 덕이 없었다’고 평가된다.37)
신농국의 패권정치로 인한 혼란은 주변으로 파급되어갔는데, 인접 한 소호국의 경우 배달국과 밀착되어 천손문화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사태에 대한 위기의식이 한층 강하였을 것이 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위기의식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어 결국 신농국의 攻伐을 당하게 되었던 듯하다.
‘신농씨가 姜水에서 列山으로 옮겼다가 다시 복희의 陳을 접수하 였고 동쪽으로 산동성 曲阜 일대까지 경계를 넓혔다’는 기록은38) 신 농씨 이후 8대 유망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영토확장의 과정일 것인데, 마지막왕인 8대 유망의 수도가 ‘空桑(陳留, 현 하남성 회양)’이었는데도 소호국의 영토였던 산동성 곡부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고 하였다.
유망은 소호국을 범하여 산동성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던 것이 고, 이것이 치우천왕이 거병하는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농국의 패권주의는 천손문화의 정서 하에서는 심각한 변고 였고, 이에 배달국 환웅이 직접 개입하여 사태를 해결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37) 뺷莊子뺸雜篇 권9下 盜跖篇 「神農之世…此至德之隆也 然而黃帝不能致德 與蚩 尤戰於涿鹿之野 流血百里」: 뺷商君書뺸畵策篇 「黃帝內行刀鋸 外用甲兵」
38) 주)20과 같음.
2) 치우천왕39)의 중원 경략
炎帝(赤帝)國 신농국의 亂政으로 중원 일대가 혼란에 빠져들 즈음 배달국의 환웅은 제14대 치우천왕(기원전 2706년∼기원전 2598년)40) 이었다. 초대 거발한 환웅대에 국방 분야를 맡았던 치우씨의 후예로 짐작되나 자세한 가문 내력은 알 수 없다.
배달국 천손문화의 핵이 ‘천ㆍ지ㆍ인 삼원(천부)’의 전승자인 ‘역대 환웅’의 존재였던 만큼 그가 환웅의 위에 올랐던 점을 통하여 당대 최고의 수행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치우천왕의 수행력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적지 않다. 먼저 ‘만물 의 원리를 스스로 점검ㆍ고찰하여 德ㆍ慧ㆍ力을 갖추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1) ‘德ㆍ慧ㆍ力’은 뺷삼일신고뺸 중 천ㆍ지ㆍ인 삼원의 다 른 이름인 ‘大德(人)ㆍ大慧(天)ㆍ大力(地)’에서 가져온 것으로 치우천 왕이 수행을 통해 내면의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을 회복하였음을 말한다.(깨달음, ‘性通’) 더하여 ‘開天ㆍ開地ㆍ開人함으로써 사람들의 삶(生)을 살렸다’는 기록은 수행을 통한 ‘천ㆍ지ㆍ인 본질’의 회복에 그치지 않고 본질을 현실화하였음을 말한다.(깨달음의 실천, ‘功完’) 치우천왕은 한국선도 ‘성통ㆍ공완론’42)의 전형으로서 당대의 ‘천부 39) 치우천왕의 우리말 이름은 ‘자오지’로 ‘엄청난 우레비를 내려 산과 강을 바
뀌게 한다’는 뜻이다.(뺷桓檀古記뺸「三聖紀全 下」「世號爲蚩尤天王 蚩尤 俗言 雷雨大作 山河改換之義也」) 이것이 ‘慈烏支, 治尤, 蚩尤’ 등으로 표기되었는 데, 이중에서 ‘慈烏支’나 ‘治尤’는 천부의 전승자인 치우천왕의 본면목을 반 영한 표기인 반면 ‘蚩尤’는 치우천왕에게 정벌을 당한 중국인의 원망이 담긴 표기이다. 치우천왕의 원래 이름인 ‘자오지(慈烏支)’나 ‘치우(治尤)’를 회복하 는 것이 합당하다.
40) 뺷桓檀古記뺸「三聖紀全 下」에 실린 ‘神市歷代記’를 따랐다. 치우천왕의 재위기 간은 109년이고 수는 151세였다.
41)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 神市本紀 「我蚩尤天王 承神市之餘烈 與民更張 能得 開天知生 開土理生 開人崇生 重物原理 盡自檢察 德無不至 慧無不宜 力無不 備」
42) 한국선도의 3대경전 중 하나인 뺷三一 誥뺸에는 ‘성통ㆍ공완론’이 제시되어 있다. 성통ㆍ공완론에 대해서는, 졸고, 「한국선도의 ‘一ㆍ三ㆍ九論(三元五行
전승자’이자 일세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 이후 중국인들은 치우천왕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았지 만 ‘天符의 神’,43) ‘古天子’44), 또는 ‘황제에게 天道를 알려줌’,45) ‘封禪 (祭天)을 행하였음’46)을 정확하게 기록하기도 하였다.
배달국말 시세의 변화를 감지한 치우천왕은 경장을 통한 천손문화 전수 방식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치우천왕의 경장을 예시하는 첫 번 째의 사건은 移都이다. 배달국 개창 이래 神市 아사달은 천 년이 넘 도록 배달국의 국도였는데 치우천왕은 과감히 서방 靑邱 지역으로의 이도를 결정하였다.47)
정치적 안정기에는 신시 아사달이 동북방에 치우친 점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배달국말 국ㆍ내외의 분쟁이 잦아지면서 환 웅의 정치적, 군사적 역할이 높아가는 시점에서는 효과적 통치가 어 려운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국도의 대상으로 靑邱 일대(현 요서지역 朝陽 북쪽48))가 지목되었다.
論)’에 나타난 존재의 생성ㆍ회귀론-한국선도의 수행이론」, 뺷동서철학연구뺸 53, 2009, 294∼297쪽 참조.
43) 뺷路史뺸(宋 羅泌 纂) 后紀4 蚩尤傳「蚩尤天符之神 狀類不常 三代彛器 多著蚩 尤之像 爲貪虐者之戒」
44) 뺷史記뺸卷1 五帝本紀 第一 黃帝 「集解 應劭曰 蚩尤古天子」
45) 뺷管子뺸제41편 五行「昔者黃帝得蚩尤而明於天道 得太常而察於地利 得奢龍而 辯於東方 得祝融而辯於南方 得大封而辨於西方 得后土而辯於北方 黃帝得六 相而天下治 神明之至也 蚩尤明乎天道 故使爲當時」
46) 뺷路史뺸 后紀4 蚩尤傳 「阪泉氏蚩于 姜姓 炎帝之裔也 好兵而喜亂 逐帝而居于 涿鹿 興封禪 號炎帝」
47) 뺷桓檀古記뺸「三聖紀全 下」
48) 靑邱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서설과 산동반도설 두 가지가 있는데, 요서설의 경우 근거는 뺷史記뺸, 뺷山海經뺸 등이다.(뺷史記뺸권117 司馬相如傳 「史記正義 服 虔云 靑丘國在海東三百里 郭璞云 靑丘山名 上有田 亦有國 出九尾狐 在海外」:
뺷山海經뺸海外東經 「靑丘國在其北 其虎四足九尾 一曰在朝陽北 其人食五穀 衣絲帛」)이다. 산동반도설의 경우 치우천왕의 중원경략 결과 청구의 영역이 산동반도 방면으로까지 확대된 결과로 처음부터 청구가 산동반도에 있었던
청구 일대는 환국시대 이래 사람과 물산이 집결되어온 문화의 중 심지였다. 이러한 전통에 기반하여 배달국 개창시 1세 환웅인 거발한 환웅은 여기에 井田制를 실시하고 청구를 배달국의 주요 거점 도시 로 삼았다.49) 배달국 초기의 유적인 牛河梁유적(기원전 3,500년∼기 원전 3,000년)은50) 청구 일대에서 전개된 배달국 문화를 보여주는 시 금석이다.
청구로 이도한 치우천왕은 나라 안팎의 정세를 관망하였다. 당시 화하일대 신농국의 난정과 산동성 일대 소호국(구려국)의 쇠퇴로 중 원지역이 일대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이는 치우천왕이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로 부상하였고 결국 치우천왕은 중원 경략을 결행하게 된 다. 신농국을 징벌하고 소호국(구려국)을 扶護함으로써 천손문화권의 안정을 꾀한 것이다.
한국의 선도사서 뺷환단고기뺸에서는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이라는 관점이 일관되고 있으나, 뺷史記뺸를 위시한 중국측 자료들에서는 황 제가 역신 치우를 징벌하여 죽였다는 입장이 우세한 가운데 치우천 왕과 황제를 위시한 당대 인물들에 대한 앞뒤가 맞지 않는 평가나 치우천왕군의 패배와 황제군의 승리에 대한 이중적이고 부정합적인 서술이 혼재되어 있다.51)
중국측 자료의 이러한 문제는 周代 이후 배달국-단군조선으로 이 어진 천자ㆍ제후국의 질서, 곧 천손문화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49) 「(환웅이) 白山ㆍ黑水의 사이에 내려온 후 天坪에 子井과 女井을 긋고 靑邱 에 井地를 그었다. 天符印을 지니고서 五事(주곡ㆍ주명ㆍ주형ㆍ주병ㆍ주선 악: 필자주)를 주관하여 在世理化ㆍ弘益人間하였으니 도읍은 神市요, 국호는 倍達이다.」(뺷桓檀古記뺸「三聖紀全 上」 「降于白山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於靑邱 持天符印 主五事 在世理化 弘益人間 立都神市 國稱倍達」) 50) 우실하, 뺷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뺸, 소나무, 2007, 170∼213쪽
51) 김종미,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蚩尤’의 이중형상(1)」, 뺷中國語文學誌뺸 25집, 2007.
천자ㆍ제후국의 질서를 만들어갔던 중원인들의 착종된 의식의 결과 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뺷환단고기뺸를 근간으로 중국측 자료 를 종합하는 기술 방식을 취하였다.
치우천왕은 河朔(현 하북성 북쪽 일대)에 웅거하여 파병 준비를 하 였다. 81명의 장수를 가려 뽑아 연맹군을 만들었으며, 전력 향상을 위해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청동 및 철제무기를 제작하기로 하고 葛 盧山에서 쇠(金)을 캐내어 劍, 鎧, 矛, 戟, 大弓,52) 楛矢를 제작하였다.
배달연맹군은 索度(하북성 북쪽)로부터 진군하여53) 먼저 涿鹿(현 하북성 탁록현)을 함락한 후 1년 안에 9제후국을 복속시켰다. 다시 雍狐山에 가서 九治를 이용해 쇠(金)를 캐내 芮戈ㆍ雍狐戟을 만들었 다. 동ㆍ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배달군은 화하족으로부터 ‘銅 頭鐵額’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54)
치우천왕은 몸소 연맹군을 이끌고 신농국의 수도 空桑(陳留, 현 하 남성 淮陽)으로 진격하였다. 치우천왕군은 공상을 함락한 후 탁록으 로 도망간 신농국왕 유망과 少昊(少皞)를 추적하여 항복을 받아내었 다. 이 해 안에 12제후국을 합병하였다.
신농국에 밀리고 있던 소호국(구려국)은 치우천왕군의 개입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여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고 새롭게 진영을 정 비, 치우천왕군의 선두가 되었다. 이는 유망에 복속되어 유망의 명에 따라 치우천왕군을 공격하였던 소호가 치우천왕에게 항복하여 치우 천왕군의 선두가 되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치우천왕군과 소호군 의 긴밀한 연대는 ‘헌원이 복희-소호-치우를 차례로 죽이고 帝位
52) 동이족이 大弓을 쓰는 종족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뺷桓檀古記뺸 뺷太白逸史뺸神市本紀: 뺷揆園史話뺸太始記)
53) 뺷桓檀古記뺸「三聖紀全 下」 「蚩尤天王 見炎農之衰 遂抱雄圖 屢起天兵於西 又 自索度進兵 遽有淮垈之間」
54) 뺷太平御覽뺸권79 龍魚河圖 「黃帝攝政前 有蚩尤兄弟八十一人 幷獸身人語 銅 頭鐵額 食沙石子」
에 올랐다’는 기록에서도55) 확인된다.
상기한 바 ‘치우천왕이 갈로산과 옹호산에서 쇠를 캐내어 각종 철 제 병기를 제작하여 9제후국을 복속시키고 이어 12제후국을 복속시 켰다’는 내용은 선도사서 뺷환단고기뺸 중에 기록된 내용인데, 뺷管子뺸 에는 이와 똑같은 단어 및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 글이 실려 있어 주 목을 요한다.56) 뺷관자뺸 이외의 많은 중국측 기록들도 치우천왕에 의 해 철제 무기, 가죽 갑옷, 旗幟, 夔鼓 등 각종 兵制가 창시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57)
‘동두철액’이라는 표현에서 치우천왕이 사용한 금속병기는 청동제 및 철제임을 짐작해보게 되는데, 한ㆍ중 기록은 한결같이 철제무기 를 거론하고 있다. 근래 청구가 자리하였던 요서지역의 牛河梁 유적 에서 기원전 3000년경의 銅片이 발견되는 등 요서지역 청동기 편년 이 기원전 3000년 또는 그 이상으로 올라가고 있으니58) 치우천왕이 55) 뺷鹽鐵論뺸結和篇 「軒轅戰涿鹿 殺兩䁺(太皞ㆍ少皞)蚩尤而爲帝」
56) 뺷管子뺸제77편 地數「黃帝問…伯高對曰…修敎十年 而葛盧之山發而出水 金從 之 送尤受而制之 以爲劍鎧矛戟 是歲相兼者諸侯九 雍狐之山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制之 以爲雍狐之戟芮戈 是歲相兼者諸侯十二 故天下之君 頓戟一怒 伏尸滿野 此見戈之本也」
57) 뺷太平御覽뺸권339 兵部70 敍兵器「뺷太白陰經뺸에 이르기를…황제 때는 玉으로 병기를 만들었으며 치우때는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고 가죽을 잘라 갑옷을 만들었으며, 五兵, 旗幟, 夔鼓 제도를 만들었다.(太白陰經曰 黃帝之時 以玉爲 兵 蚩尤之時 爍金爲兵 割革爲甲 始制五兵 建旗幟 樹夔鼓)」
58) 劉國祥, 「西遼河流域新石器時代至早期靑銅時代考古學文化槪論」, 뺷遼寧師範 大學學報(社會科學版)뺸, 2006-1.
세계사적으로는 기원전 5000년∼4000년경에 근동과 소아시아에서 구리제품 이 사용되었으며 이후 구리에 아연, 주석 등을 합금하면 청동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청동야금술을 발전시켰다. 세계사적으로 무기 혹은 병기로 청동을 사용한 것은 기원전 3500년경이다. 요서지역의 경우 夏家店下層文化 의 청동기 편년이 기원전 24세기 무렵으로 밝혀진 이래 점차 올라가고 있는 추세이다. 윤내현의 기원전 26세기∼24세기설(윤내현, 뺷고조선연구뺸, 일지사, 1995, 106쪽), 김영근의 기원전 25세기설(김영근, 「하가점하층문화에 대한 고 찰」, 뺷단군학연구뺸 14, 2006), 복기대의 기원전 24세기설(복기대, 「한국상고 사와 동북아시아 청동기시대 문화」, 뺷단군학연구뺸 14, 2006), 박정학의 기원
활동하던 기원전 2600년경 청동제 무기 사용은 무리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59) 반면 철제 무기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형편이다. ‘鐵’의 古字가 ‘銕=金+夷’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앞으로의 발굴 추이 등을 두루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치우천왕군에 의해 신농국 유망이 패망하고 신농국의 영향하에 놓 여 있던 소호국이 다시 배달국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자, 신농국 유 망의 신하이자 토착민의 우두머리인 공손 헌원이 화하족을 끌어 모 아60) 군대를 일으켰다. 거병 목적은 배달국 개창 이래의 천손문화권 에서 벗어나 ‘스스로 天子가 되고자 한 것’,61) 곧 독자적 천하질서를 이룩하고자 한 것이었다.
치우천왕은 降將 小昊로 하여금 탁록에 나아가 헌원 연맹군과 대 적하게 하였는데, 헌원이 굴복하지 않자 몸소 보ㆍ기병을 거느리고 탁록의 ‘有熊 들판’로 나아가 격퇴하였다.(‘涿鹿大戰’) 탁록대전시 치 우천왕이 반포한 ‘涿鹿檄’에서는 치우천왕의 천손문화에 대한 인식 및 중원 경략의 진정한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전 30세기∼기원전 24세기설(박정학, 뺷한민족의 형성과 얼에 대한 연구뺸, 강 원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72쪽) 신용하의 기원전 38세기설(신용하, 뺷 한국 원민족 형성과 역사적 전통뺸, 나남출판사, 2005, 49∼51쪽)이 그러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북한 학계의 기원전 40세기설, 김종서의 기원전 40세기 설도 있다.(김종서, 뺷신화로 날조되어온 신시ㆍ단군조선사 연구뺸, 한국학연 구원, 2004) 반면 현행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000년∼1500년 으로 되어 있으니 전향적인 검토가 시급하다.
59) 중국학자 許進雄도 치우가 활동하던 기원전 2700년경 청동기 사용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니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탐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許進雄 저, 홍희 역, 뺷中國古代社會뺸, 동문선, 2003, 158쪽) 60) 중국측 기록을 모아보면 치우천왕연맹군에 風伯, 雨師, 邢天, 魑魅, 魍魎, 夸
父 등, 헌원연맹군에 風后, 應龍, 玄女, 旱魃 등이 있었다.(袁珂 저, 전인초ㆍ 김선자 역, 앞책, 2009, 167∼192쪽)
61)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時有公孫軒轅者 土着之魁 始聞蚩尤天王入城 空桑 大布新政 而敢有自代爲天子之志」
너 軒丘는 짐의 말을 분명히 들을지어다. 해의 아들은 오직 짐 一人으로 짐은 萬世의 公義를 세워 인간의 마음을 씻어내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너 헌 구는 우리 三神一體의 원리를 업신여기고 게을러 三倫ㆍ九誓의 행함을 저버 렸으니 삼신께서 오랫도록 그 더러움을 싫어하사 짐 일인에게 명하여 三神의 토벌을 행하게 하였다. 네가 마음을 씻고 행실을 고쳐 스스로의 성품 속에서 구하면 너의 머릿속에 이미 내려와 계실 것이다. 만약 명을 따르지 않으면 하 늘과 사람이 모두 성내어 목숨을 보전치 못할 것이니 두렵지 않는가?62)
치우천왕은 먼저 자신에 대하여 ‘해의 아들’, 곧 ‘천ㆍ지ㆍ인 삼원 (천부)’의 정통 계승자’로서 천손문화를 이끄는 ‘스승이자 군왕’임을 천명하고, 이어 이러한 자격으로서 ‘萬歲의 公義’, 곧 ‘사람들의 마음 을 씻어 사람속의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천부)’을 회복하겠다’는 맹세를 하였음을 분명히하였다.
다음으로 헌원이 ‘삼신(천ㆍ지ㆍ인 삼원)의 원리’, 곧 내면의 ‘천ㆍ 지ㆍ인 삼원(천부)’을 자각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켜 천손문화권을 혼란에 빠뜨리니 이를 바로세우기 위해 토벌을 행하는 것이라며 용 병의 이유를 명백히 하였다.
마지막으로 치우천왕이 헌원에게 요구한 것은 헌원의 내면에 자리 한 본질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곧 ‘스스로의 성품에서 구해보면 이미 뇌 속에 자리하고 있다(自性求子 降在爾腦)’고 하였는데, 주지하듯 이 는 거발한 환웅대에 반포된 뺷삼일신고뺸 중에63) 나오는 구문이다.
62)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三韓管境本紀 馬韓世家上 「爾軒丘 明聽朕誥 日之有子 惟朕一人 爲萬世爲公之義 作人間洗心之誓 爾軒丘 侮我三神一體之原理 怠棄 三倫九誓之行 三神久厭其穢 命朕一人行三神之討 爾早已洗心改行 自性求子 降在爾腦 若不順命 天人咸怒 其命之不常 爾無可懼乎哉」
63) 배달국 개창후 거발한 환웅은 환국시대부터 구전되어 오던 수행원리를 神誌 氏가 새롭게 개발한 鹿圖文을 사용하여 정리하였다. 이것이 뺷天符經뺸과 뺷三 一 誥뺸이다. 녹도문 형태의 뺷천부경뺸ㆍ뺷三一 誥뺸는 갑골문 형태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졸고, 「麗末學界와≪天符經≫」, 뺷선도문화뺸 7, 국제뇌 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09)
이처럼 ‘탁록격’에는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의 진의가 잘 나타나 있 다. 치우천왕은 신농국을 징벌하고 약해진 소호국을 부호함으로써 천손문화권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것이며 영토 전쟁을 벌였던 것이 아니었다.
탁록대전 후 치우천왕은 탁록에 성을 쌓았으며, 다시 공상으로 들 어가 淮ㆍ垈 일대(산동성의 泰山과 淮水 일대)를 직접 통할하였다.
헌원연맹군은 항복하지 않고 다시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부터는 치우천왕군을 모방하여 각종 병기, 갑주 등을 만들어 대항 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73차례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탁록대전과 같은 큰 전쟁 이후 지속된 잦은 전쟁이란 앞서의 탁록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은 아니며, 피차 상대의 전력을 훤히 알면서 힘을 겨루 는 지구전의 형태였을 것이다.
치우천왕군은 전력적으로 우세하였지만 출정군으로 본국과의 거 리가 멀다는 약점을 갖고 있고, 헌원군은 전력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주변의 화하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인력과 물력을 조달해가면서 지구 전을 펼칠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헌원군은 이러한 이점을 십 분 활용해가며 끈질기게 게릴라식 항전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의 倉頡, 북쪽의 大撓와 연합하려 하였으나 이들 모두는 天王을 따 르는 무리였기에 허사였다. 大撓는 치우천왕에게서 干支術을 배웠고, 倉頡 은 치우천왕에게서 符圖의 문자를 받았기에 당시의 모든 제후들이 천왕을 섬겼다.64)
황제가 치우와 9회 싸워 9회 이기지 못하니 太山에 들어가 3일 밤낮을 고민하다가 玄女를 만나 戰法을 얻었다.65)
64) 뺷桓檀古記뺸「三聖紀全 下」 「時天下鼎峙 涿(涿鹿: 필자주)之北 有大撓 東有倉 頡 西有軒轅 自相以兵 欲專基勝而未也 初軒轅稍後起於蚩尤 每戰不利 欲依 大撓而未得 又依倉頡而不得 二國皆蚩尤之徒也 大撓嘗學干支之術 倉頡受符 圖之文 當時諸侯 罔不臣事者 亦以此也」
앞과 같은 구문은 전세의 불리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항전하였던 헌원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헌원군의 저항이 장기간 지속되자 치우천왕은 중원의 백성들에게 로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염려하였고,66) 이에 헌원군으로 하여금 다 시는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쐐기를 박은 후 종전하기로 마음먹 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치우천왕은 헌원의 항복을 받았는데67) 목숨 을 거두는 대신 배달국의 오제중 하나인 黃帝로 임명하였으니, 이는 천손문화의 종주로서 치우천왕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65) 뺷太平御覽뺸卷十五 天部十五「黃帝玄女戰法云 黃帝與蚩尤九戰九不勝 黃帝歸 於太山 三日三夜霧冥 有一婦人 人首鳥形 黃帝稽首再拜伏不敢起 婦人曰 吾 玄女也 子欲何問 黃帝曰 小子欲萬戰萬勝 遂得戰法焉」
66) 「時蚩尤氏仰觀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 勝誅 況各事其主 不可漫殺無辜 乃決意退還」(뺷揆園史話뺸「太始記」)
67)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三韓管境本紀 「於是軒丘乃平服 天下宗我焉」. 반면 뺷史 記뺸에서는 헌원이 치우를 탁록에서 사로잡아 죽였다고 하였다.(뺷史記뺸卷1 五 帝本紀 第一 黃帝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夜 遂擒殺蚩尤」) 선 도사서 뺷환단고기뺸에서는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함은 공을 서둘다 진중에 서 죽은 치우천왕의 장수 蚩尤飛라고 하였다.(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神市本紀
「是役也 我將蚩尤飛者 不幸有急功陣沒 史記所謂擒殺蚩尤者 盖謂此也」) 현재 탁록 근방에는 4기의 치우묘가 남아 있다. 또한 뺷史記뺸集解에서는 뺷皇覽뺸(魏 王象 作)을 인용하여 ‘치우묘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에 있고,주변의 거야현에는 황제가 치우의 신체를 분리해어 묻은 肩臂塚(어깨ㆍ팔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뺷史記뺸卷1 五帝本紀 第一 黃帝 「集解 皇覽曰 蚩尤塚在東平郡 壽張縣闞鄕城中 高七丈 民常十月祀之 有赤氣出 如匹絳帛 民名爲蚩尤旗 肩臂 塚 在山陽郡鉅野縣重聚 傳言黃帝與蚩尤戰於涿鹿之野 黃帝殺之 身體異處 故 別葬之」) 실제로 산동성 지역에는 치우묘로 알려진 여러 개의 무덤이 있었다 고 한다. 중국정부에서는 1995년 中華三祖堂을 지어 치우를 中華三祖 중 一 人으로 끌어들이면서 치우묘의 복원에 나섰고, 2002년 산동성의 치우묘 중에 서 ‘汶上縣 南旺鎭 서쪽 400미터에 있는 치우묘’를 선정하여 복원하였다.(치우 학회, 「치우천왕의 무덤」, 뺷치우연구뺸 2, 2002, 144∼147쪽) 중원인들의 치우 천왕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이 여럿의 치우묘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들이 실제 치우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2. 천손문화권의 안정과 천손문화의 방향 전환
1) 중원 경략 후 천손문화권의 안정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치우천왕은 헌원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배달 국의 제후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처분을 내렸다. 신농국을 염제국, 소 호국을 백제국에 봉하였던 것과 같이 헌원국을 黃帝國에 봉한 것이다.
배달국의 ‘五帝제도’에서 黃帝는 중앙을 담당하며 주된 역할은 ‘和 調’였다. 한국선도의 삼원오행론(삼신오제론)중 오행론(오제론)에서 중앙의 ‘天符(土)’ 자리는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을 의미하며 이는
‘기ㆍ화ㆍ수ㆍ토’ 4원소를 조화하는 ‘調和’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 선 상에서 중앙 黃帝의 주된 역할이 ‘和調’로 정해진 것이다. 오행(오제) 중 중앙의 ‘천부(토)’ 자리가 갖는 비중으로 인해, 그 상징도 배달국의 주족 웅족의 상징인 ‘熊’(黃熊)이었다. 68)
오제중 가장 중요한 黃帝位에 헌원이 봉해졌던 점은 천손문화의 깊이를 보여준다. 천손문화에 대해 가장 낮은 이해도를 보임으로써 배달국의 천손문화권에 가장 극력하게 저항하였던 헌원의 목숨을 살 려주었을 뿐 아니라 오제의 첫째위로 삼은 조처는 헌원으로 하여금 천손문화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천손문화의 확실한 맹주 가 될 수밖에 없도록 하였을 것이다. ‘탁록격’에서 헌원에게 ‘마음을 씻어 의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 치우천왕의 처음 마음이 굴절됨 없이 끝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헌원이 황제에 봉해지고 전쟁이 종료됨으로써 배달국과 황제국의 국경도 제10세 갈고환웅 이래 배달국(소호국, 구려국)과 신농국의 국 경이었던 ‘空桑’으로 회복되었다. 공상 이동 지역에는 소호국(구려국) 이 다시 자리를 잡고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다. 치우천왕이 소호국(구 려국)을 되살려 놓았기에 치우천왕은 ‘九黎王’으로도 불리게 되었다.69) 68) 주)24 <표 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