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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와 식민지배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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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 말기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와 식민지배적 성격

89)

최 현 우*

❙국문초록❙

본고는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가 수여한 조선문화공로상에 천착하여 그 수여 제도의 운영과 수상자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1940

시정

30

을 기념하기 위해 「朝鮮文化功勞賞授與規程」을 제정 하고 그 해부터

1944

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21

명에게 조선문화공로상을 수여하였다

.

조선문화공로상은 도지사의 추천을 거친 자를 대상으로 별도의 전형위원회가 심사하여 수상자를 선정하였 다

.

전형위원회는

20

명에 달하는 규모였으며

,

조선총독부 각 부서 책임자와 경성제국대학 총장 및 교수 등으 로 구성되었다

.

당초 조선문화공로상은 조선총독부가 개청한

10

1

일에 수여되었으나

, 1942

년 제

3

회부터는 수여일이

11

3

일 명치절

(

明治節

)

로 변경되었다

.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는

1

명의 조선인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

수상자의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관 료였으며

,

불이흥업주식회사

·

압록강수력전기회사

·

조선석유주식회사

·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등과 같은 관변 기업의 임원이 포함되었다

.

수상자의 활동 분야는 크게 인문

,

종교

,

의료

,

농림

,

수산

,

지질

,

연료

,

항공

,

토목 으로 구분되었다

.

인문

,

종교

,

의료를 제외한 나머지 농림

,

수산

,

지질

,

연료

,

항공

,

토목에 해당하는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자는 총

14

명으로 전체

21

명의 약

70

퍼센트에 해당한다

.

이들 분야의 수상자는 과학기술 관료와 실업가로 농수산 물

·

광물의 생산 증대

,

운송력의 확대를 가져오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관련 활동을 전개한

공로

로 수상하였다

.

국가총동원체제 아래에 생산력의 증대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문화공로상을 통해 기왕의 연구 성과와 활동을 치하하고

,

이들을

모범

으로 부각시켰다

.

이를 통해 전시 체제에 도움을 주는 생산력의 확대가 곧

문화공로

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한편

,

전 분야에서 추진된 생산력 확대 시책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

[

주제어

]

조선문화공로상

,

국가총동원체제

,

수산시험장

,

지질조사소

,

연료선광연구소

,

철도국

❘목 차❘

.

서 언

.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제도의 창설과 운영

.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의 활동

.

결 어

* 동명여자고등학교 교사 / eduholist@naver.com

(2)

Ⅰ. 서 언

일찍이 여러 국가에서는 국가 발전에 뚜렷한 공로가 있는 자를 대상으로 포상

(

褒賞

)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

이를 국가 시책의 홍보

·

장려 수단으로 삼았다

.

포상은 국가 지배층의 통치 이념과 전략을 피지배층에게 내 재화시켜 그들을 지배체제로 포섭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

일본도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0

년대에 훈장 및 종군기장

(

從軍記章

)

의 제정을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의 포 상 제도를 마련하였다

.

1)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포상 제도를 그대로 이식하여 갖가지 훈장

,

기장

(

記章

),

상사

(

賞賜

)

제도를 시행하였다

.

2) 또한 식민지 조선의 실정에 따라 다양한 표창 규정을 제정하여 안정적인 식민지 배체제 운영과 수탈체제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

3)

조선총독부의 포상 정책과 관련하여 현재까지 일련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

이들 연구를 통해 러일 전쟁기 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에게 협력한 한인들의 실체가 밝혀졌다

.

4) 또한 조선총독부의 표창 수여 에 천착하여 일제가 식민지배체제 운영을 위해

효행

(

孝行

)’

과 교육활동의 의미를 변용한 양상을 드러내는 연 구도 이루어졌다

.

5) 최근에는 조선총독부의 포상 제도를 시기

·

제도

·

유형 등으로 세분화하여 종합적으로 분 석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

6) 이 연구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포상 정책은 식민지배체제의 재원 마련

,

친일 세력 의 확보와 유지

,

인적 동원

,

식민지배체제의 선전 등에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실증되었다

.

이들 연구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포상 제도를 식민지배체제에 적극 활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

특정 사례의 실체가 밝혀졌다

.

하지만 여전히 각 부문에서 일제강점기 포상 제도의 구체적인 실태는 구명

(

究明

)

되 지 않은 상태이다

.

특히 포상 대상자의 활동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본고는 조선총독부가

시정

30

을 기념하여

1940

년에 제정한 「朝鮮文化功勞賞授與規程」에 따라 수여한 조선문화 공로상과 그 수상자의 활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

조선문화공로상은

시정

30

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

조선총독부는 본부 국장을 아우르는 전 형위원회를 조직하여 소수의 수상자를 엄선하였다

.

따라서 해당 상의 수상자를 밝히고

,

그들의 활동을 검토 하는 작업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배체제를 수립하고 유지하는데 역점을 둔 시책을 파악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1940

년대 조선총독부 시책의 주안점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2

장에서는 「조선문화공로상수여규정」의 내용과 제정 배경

,

수상자 선정 과정을 검토하고

,

수상자의 추이 를 분석하겠다

. 3

장에서는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의 활동을 분석하여 그들이 조선총독부 식민지배체제의 운 1) 松本謙堂 編, 󰡔勲章從軍記章佩用者心得󰡕, 改進堂, 1895.

2) 훈장과 기장은 옷에 패용하도록 제작된 휘장(徽章)의 형태였다. 상사는 금배(金杯), 은배(銀杯), 목배(木杯) 등과 같은 기념품 이나 돈을 수여한 것을 말한다.

3) 박선영, 「식민지 조선의 포상정책 연구」, 전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19~182쪽.

4)김윤희, 「러일전쟁기 일본군 협력 한인 연구 – 일본정부의 훈포상자를 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35, 고려사학회, 2009; 박 선영, 「제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 포상(褒賞) 사례 분석 – 포장(褒章)을 중심으로」, 󰡔전북사학󰡕56, 전북사학회, 2019.

5) 박선영, 「일제강점기 효행표창 현황과 성격」, 󰡔韓日關係史硏究󰡕54, 한일관계사학회, 2016; 김광규, 「조선의 ‘교육효적자(敎 育效積者)’– 식민권력이 표창한 모범교원들 –」, 󰡔한국교육사학󰡕 42: 1, 한국교육학회, 2020.

6) 박선영, 위의 논문, 2020.

(3)

영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실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초 석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

Ⅱ.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제도의 창설과 운영

1940

9

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

南次郞

]

는 고시

(963

)

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선문화공로상수 여규정」을 발표하였다

.

1

조 조선문화공로상은 조선 문화의 발달에 관한 공적이 현저한 자에 대하여 조선총독이 수여함

.

2

조 조선문화공로상은 별기

(

別記

)

추형

(

雛形

,

인용자 주 – 서식

)

에 따른 상장임

.

3

조 조선문화공로상을 수여받는 자가 수여 전에 사망할지라도 후손에게 이를 수여함

.

4

조 조선문화공로상을 수여받는 자의 씨명은 조선총독부관보에 고시함

.

부칙

본령은 소화

15

(

인용자 주 –

1940

) 10

1

일부터 시행함

.7)

규정의 부칙에 나타난 시행 일자는 조선총독부가

1910

년 공식적으로 업무를 개시한 날로

,

조선문화공로상 은 이른바 시정

30

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

[

大野緑一郎

]

는 사상

,

과 학

,

예술

,

산업 등 온갖 분야에 걸쳐 그 진보

·

발달에 공헌이 뚜렷한 사람을 표창함과 동시에 이를 장려할 목적으로 조선문화공로상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

8)

하지만 조선문화공로상은 문화 공헌자에 대한 단순한 표창의 성격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졌다

.

이는

1937

년 일본에서 시행된 문화훈장에 비견될 만큼 높은 영예를 부여하는 것이었지만

,

근본적으로 일본의 병참기지 로서 한반도의 역할을 강조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

.

중일 전쟁 이후 전시 체제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각 방면 에서 그에 기여한 인물을 표창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것이다

.

9) 이러한 사실은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에 관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다음 훈시에 그대로 드러난다

.

오늘 조선총독부 시정

30

주년 기념일에 모여 나라를 받든다

.

미증유의 세국

(

世局

)

에 처하여 강역 내 화동

(

和同

)

하고

,

충성을 다하는 관민은 숭엄

(

崇嚴

)

한 황도

(

皇道

)

에 존재한다

.

시정 이래 성지

(

聖旨

)

를 봉체

(

奉體

)

하는 내선

(

內鮮

)

선각

(

先覺

)

지도자의 공로에서 기인하는 정과

(

政果

)

로 기왕의 감은

(

感恩

)

을 기념한다

.

현재 세계의 위태로운 시국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

동양의 화근

(

禍根

)

을 끊고 황국의 임무를 중시하며 일체

(

一體

)

의 나를 버리고 대정익찬

(

大政翼賛

)

에 진력하는 관민은 마땅히 선인

(

先人

)

의 공적

7) 󰡔朝鮮總督府官報󰡕, 1940년 9월 12일.

8) 文化發達에 貢獻 朝鮮文化功勞賞制定에 關해 大野總監談話 發表, 󰡔每日新報󰡕, 1940년 9월 13일. 9) 社說 文化功勞賞制定, 󰡔每日新報󰡕, 1940년 9월 13일.

(4)

을 갚아야 한다

.

황국통치의 창달에 힘을 모아 조선의 맡은 바를 완전히 수행하길 기대한다

.10)

즉 외형적으로 상의 명칭에

조선문화공로

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

실상은 이 상을 내세워 식민지배체제의 형성과 운영에 기여한 인물을 발굴하고 그를 선양함으로써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병참기지로서 식민 지 조선의 역할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은 기획원을 설치하고

,

「국가총동원법」을 중심으 로 다양한 법령을 제정하여 본격적인 총동원체제의 구현에 나섰다

. 1940

7

월에는 제

2

차 코노에

[

近衛

]

내각 이 「基本國策要綱」을 발표하며 국가총동원체제의 확립을 국시로 삼았다

.

조선총독부에도

1937

9

월 총동원 업무를 전담하는 자원과가 신설되었으며

, 1939

년에는 기획부가 설치되었다

.

11) 일본의 병참기지로서 조선의 역할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체제의 안정화는 물론 국가총동원체제의 강화를 위한 다양 한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

이른바 시정

30

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제도 또한 이러한 활동의 하나로 볼 수 있다

.

당초에 조선문화공로상은 조선총독부가 개청한

10

1

일에 수여되었으나

, 1942

년 제

3

회부터는 수여일이

11

3

일 명치절

(

明治節

)

로 변경되었다

.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자는 도지사의 추천을 받은 인물을 대상으로 별도의 전형위원회가 심사하여 결정하였다

.

전형위원회는

<

1>

과 같이 조선총독부의 여러 부서 책임자는 물론이거니와 경성제국대학 총장과 교수 등도 참여하였으며

, 20

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

<표 1> 조선문화공로상 제정 당시 전형위원회(1940년 9월)

직위 성명 직위 성명

내무국장 大竹十郞 재무국장 水田直昌

식산국장 穗積眞六郞 농림국장 湯村辰二郞

법무국장 宮本元 학무국장 鹽原時三郞

경무국장 三橋孝一郞 체신국장 山田忠次

철도국장 山田新十郞 전매국장 松澤龍雄

외사부장 諏訪務 기획부장 西岡芳次郞

사무관 碓井忠平 사무관 伊藤泰吉

사무관 信原聖 사무관 丹下郁太郞

경성제국대학 총장 篠田治策 경성제국대학 교수 大內武次

경성제국대학 교수 今村豊 해군중장 山家信次

간사 조선총독부 사무관 信原聖

,

湯澤茂彌太

,

溝口好太郞

출전 :文化功勞者 銓衡委員發令, 󰡔每日新報󰡕, 1940년 9월 17일.

10) 󰡔朝鮮總督府官報󰡕, 1940년 10월 1일(호외).

11) 안자코 유카, 「조선총독부의 ‘총동원체제’(1937~1945) 형성 정책」,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66~193쪽.

(5)

제1회(1940년 10월 1일)

성명 출생 출신학교 수상 당시 직위 / 수여 근거

1

周防正季

1885

愛知縣立醫學専門學校 소록도갱생원장

/

소록도갱생원을 창설하고 경영과 환자 진료에 공헌

2

立岩巖

1894

東京帝大 地質 지질조사소장

/

중요 광물을 발견하여 조선 지하자원 개발의 기초를 마련

3

高橋亨

1878

東京帝大 漢文 경성제국대학 교수

/

조선 문학의 연구에 노력하여 전인미답의 분야를 개척

4

藤井寬太郞

1876

불이흥업

(

不二興業

)

사장

/

토지개량사업에 기여

제2회(1941년 10월 1일)

5

久保田豊

1890

東京帝大 土木 압록강수력전기회사 상무

/

부전강

,

장진강

,

허천강

,

압록강 등에 수력발 전공사를 완수

6

小田省吾

1871

東京帝大 史學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장

/

교과용 도서

,

조선사 등의 편찬과 고적조사사업 에 공헌

7

富士川漻

1890

東京帝大 水産 수산시험장 기사

/

수산업 발달에 기여

8

森爲三

1884

東京帝大 博物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

/

이과 교육

,

담수어를 중심으로 한 동물학 연구 에 기여

제3회(1942년 11월 3일)

9

荻野順導 경성화광교원

(

京城和光敎園

)

이사장

/

경성부 세민

(

細民

)

구제 및 각종

교화 사업 추진

10

內田惠太郞

1896

東京帝大 水産 수산시험장 기사

/

수산업 발달에 기여

11

植木秀幹

1882

東京帝大 林學實科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

/

농림 교육 및 산림식물학

·

조림학 발전에 기여

12

鮎貝房之進

1864

仙台縣立師範學校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

조선 고적 문화 연구

,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수집품을 기증

13

小田彌之亮 九州帝大 土木 철도국 기사

/

내폭

(

耐爆

)

구조의 철도교량 설계

·

시공에 기여 제4회(1943년 11월 3일)

14

木野崎吉郞

1899

東京帝大 地質 지질조사소 기사

/

광물

·

광상 조사 연구

조선총독부 각 부

·

국장과 경성제국대학 총장

·

교수가 중심을 이룬 형태의 조선문화공로상 전형위원회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

12) 전형위원회는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었으며

,

조선인은 포함되지 않았 다

.

전형위원회는

1940

년을 시작으로

1944

년까지 총

21

명의 수상자를 결정하였다

.

이들의 명단과 수여 근 거를 간략화하여 제시하면

<

2>

와 같다

.

<표 2>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 명단

12) 󰡔朝鮮總督府官報󰡕, 1941년 9월 8일; 󰡔朝鮮總督府官報󰡕, 1941년 9월 17일; 󰡔朝鮮總督府官報󰡕, 1941년 11월 19일; 󰡔朝鮮總 督府官報󰡕, 1941년 12월 15일; 󰡔朝鮮總督府官報󰡕, 1942년 7월 14일; 󰡔朝鮮總督府官報󰡕, 1943년 3월 19일; 󰡔朝鮮總督府官 報󰡕, 1944년 8월 22일; 󰡔朝鮮總督府官報󰡕, 1944년 9월 4일.

(6)

15

大坪太計雄

1894

東京高等工業學校

일리노이

(Illinois)

대학 조선석유주식회사 전무

,

공장장

/

항공 윤활유 제조장치 연구

16

小倉進平

1882

東京帝大 言語 경성제국대학 교수

/

언어 연구 및 교육

제5회(1944년 11월 3일)

17

遠藤鐵夫

1907

東京帝大 鑛山冶金科

연료선광연구소 기사

/

철광석 선광

,

무연탄을 활용한 제철

,

형석

(

螢石

)

부유선광시험

18

古賀明

1904

임업시험장 기사

/

송진

,

송탄유

(

松炭油

)

채취 방법 개발

19

高橋昇

1892

東京帝大 農學 농사시험장 사리원 서선

(

西鮮

)

지장장

/

소맥 품종 개량 및 기타 전작 작 물 재배법 개선

20

藤塚鄰

1879

東京帝大

支那哲學 경성제국대학 교수

/

유교를 중심으로 하여 동양정신의 구명에 노력

21

眞原勝平

(

조선인

) 1901

小栗飛行學校 東亞飛行學校

조선항공공업 사장

/

항공기를 조종하여 이재민

·

조난 선박 구제에 노 력

,

기념일에 축하 비행

출전 :󰡔朝鮮總督府官報󰡕 1940년 10월 1일(호외); 1941년 10월 1일(호외); 1942년 11월 4일, 󰡔每日新報󰡕 1940년 9월 13일; 1941년 10월 2일; 1943년 11월 3일; 1944년 11월 3일, 󰡔釜山日報󰡕, 1941년 10월 1일.

비고 :인물은 󰡔朝鮮總督府官報󰡕에 게재된 순으로 배열함. 마하라 카츠히라[眞原勝平]는 신용욱(愼鏞頊)의 일본식 성명임.

<

2>

와 같이 조선총독부는

1940

년부터

1944

년까지 매년

3

~5

명의 인사를 뽑아 조선문화공로상을 수 여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불이흥업주식회사

,

압록강수력전기회사

,

조선석유주식회사

,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등과 같은 관변 기업의 임원을 중심으로

1~2

명의 사업가를 수상 대상자에 포함시키고

,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관료를 선정하였다

.

민족별 구성을 살펴보았을 때

,

조선인 수상자는

1944

년의 신용욱

(

愼鏞頊

,

일본식 성명:

마하라 카츠히라

[

眞原勝平

])

1

명에 불과하다

.

조선문화공로상의 수상자의 분야는 해당자의 활동과 연구 내용을 토대로 크게 인문

,

종교

,

의료

,

농림

,

수 산

,

지질

,

연료

,

항공

,

토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이를 바탕으로 수상자의 추이를 검토하면

<

3>

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표 3>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의 활동(연구) 분야

분야(인원수) 해당자 분야(인원수) 해당자

인문

(5)

高橋亨

,

小田省吾

,

鮎貝房之進

,

小倉進平

,

藤塚鄰 지질

(2)

立岩巖

,

木野崎吉郞

종교

(1)

荻野順導 연료

(3)

大坪太計雄

,

遠藤鐵夫

,

古賀明

의료

(1)

周防正季 항공

(1)

眞原勝平

농림

(3)

藤井寬太郞

,

植木秀幹

,

高橋昇 토목

(2)

久保田豊

,

小田彌之亮

수산

(3)

富士川漻

,

森爲三

,

內田惠太郞

(7)

언어

,

문학

,

역사

,

고적

(

古蹟

),

사상 등에 관한 연구와 교육에 해당하는 인문의 경우

3

(

高橋亨

,

小倉進平

,

藤塚鄰

)

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이며

, 1

명은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로 활동하다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장을 맡 은 인물

(

小田省吾

)

이다

.

즉 해당 분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중심으로 교육계에서 두드러진 연구 활동 을 전개한 인물을 대상으로 조선문화공로상이 수여된 사실을 알 수 있다

.

종교계 인사의 경우 경성화광교원을 이끌며 사회사업을 전개한 오기노 준도

[

荻野順導

]

가 유일하다

. 3·1

운동으로 표출된 전국적인 저항에 직면한 조선총독부는

1920

년대부터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를 활용하여 조선인을 식민지배체제에 통합하는

사회교화사업

에 힘을 기울였다

.

13) 조선총독부는 일찍부터 경성에 진출 한 일본 정토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정토종은

1920

년 조선총독부로부터 대지와 건물을 무상 임대받아 화광교원을 설립한 이후 경성의 요충지와 건물을 연속적으로 임대받아 무숙

(

無宿

)

노동자 숙박

,

직업소개

,

토 막민 수용을 비롯하여 다양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

14)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주요 대상으로 삼은 화광교 원의

사회교화사업

을 기획하고 추진한 오기노 준도의 활동을 치하하는 동시에

,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 단 체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그를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

한센병

[

나병

,

癩病

]

환자에 대한 치료 시설 건립

·

확충 및 나병 예방은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으로 추진한 내세운 주요 사회사업에 해당하였다

.

15)소록도갱생원 원장 스오 마사스에

[

周防正季

]

가 조선문화공로상 제

1

회 수상자로 결정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

스오 마사스에는

1933

년 소록도 자혜의원의

4

대 원 장으로 부임한 이래 소록도에 벽돌공장 등 병원 확충에 필요한 시설을 짓고 한센병 환자들을 동원하여 병원 을 증설하였다

.

그뿐만이 아니라 송진 채취

,

가마니 짜기

,

토끼 가죽 채취

,

숯 제조 등 군수물자 생산에 원생 들을 동원하여 다양한 측면에서 국가총동원 체제를 지원하였다

.

이러한

공적

을 바탕으로 스오 마사스에는 조선문화공로자상의 첫 번째 수상자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

16)

인문

,

종교

,

의료를 제외한 나머지 농림

,

수산

,

지질

,

연료

,

항공

,

토목에 해당하는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자 는 총

14

명으로 전체

21

명의 약

70

퍼센트에 해당한다

.

이들 분야의 수상자는 과학기술 관료와 실업가로 농 수산물

·

광물의 생산 증대

,

운송력의 확대를 가져오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관련 활동을 전개한

공로

로 수상 하였다

.

국가총동원체제 아래에 생산력의 증대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문화공로상을 통해 기왕의 연구 성과와 활동을 치하하고

,

이들을

모범

으로 부각시켰다

.

이를 통해 전시 체제에 도움을 주는 생 산력의 확대가 곧

문화공로

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한편

,

전 분야에서 추진된 생산력 확대 시책을 정당화하려

13) 종교를 활용한 식민지배체제의 구축과 운영에 대한 논의는 폴 S. 라인슈(저), 강지원(역), 󰡔近代植民政治論󰡕(白楊社, 1949, 36~50쪽)을 참고할 수 있다.

14) 문혜진, 「일제식민지기 경성부 일본 불교계의 침투양상」, 󰡔서울과 역사󰡕96, 서울역사편찬원, 2017, 239~246쪽; 이병례,

「1920~1930년대 경성 노동숙박소의 장소성과 운영실태」, 󰡔鄕土서울󰡕,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270~275쪽. 15) 조선총독부 편, 박찬승 외 역주,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中)󰡕, 민속원, 2018, 880~887쪽.

16) 1942년 6월 20일, 스오 마사스에는 원생 이춘상(李春相)의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이춘상이 재판에서 진술한 내용은 소록 도갱생원에서 일어난 노동력 착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스오 원장을 죽인 것은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의분에 의한 것 이다. 원장이 총애하는 사토[佐藤] 간호장이 원장의 앞잡이가 되어 확장공사 등 각종 사업에 동료 원생들을 혹독하게 사역시 켰기 때문에 원장을 살해하여 여론화되면 이 기회에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 공개하여 시정을 바라고 싶 었던 것이다.” 국립 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디지털자료실 역사자료(1930~1950).

http://www.sorokdo.go.kr/museum/html/content.do?depth=cm&menu_cd=03_02_02_02

(8)

하였다

.

Ⅲ장에서 이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

조선총독부가 각 분야에서 어떠한 활동에 주목했 는지 파악하겠다

.

Ⅲ.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의 활동

농림 분야의 수상자는 총

3

명으로 후지이 간타로

[

藤井寬太郞

],

우에키 호미키

[

植木秀幹

],

다카하시 노보루

[

高橋昇

]

가 이에 해당한다

.

러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에 진출한 후지이 간타로는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농지를 매수해 나갔으며

,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장을 운영하였다

.

이를 바탕으 로 후지이 간타로는

1914

년 불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

그는 수리시설의 확충을 통한 토지 생산력 증 진과 이에 바탕으로 둔 고율 소작료를 수취한다면 상업활동보다 이익이 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

그래서 수리 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농지나 황무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매수하고

,

수리조합사업을 통한 토지개량사 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

이는 조선총독부의 농업 시책과 부합하여 막대한 보조금뿐만 아니라 저리 자금 원조 하에 진행되었다

.

그러나 수리조합의 설치와 토지개량 사업은 그 혜택을 받는 구역

[

몽리구역

]

내외의 조선인 에 대한 경제적 수탈 과정이었다

.

몽리구역 이외 농지 지주들은 이 사업으로 인해 수원

(

水源

)

을 빼앗기게 되 었고

,

몽리구역 내에 속하는 조선인 조합원들은 높은 수리조합비를 부담해야 했다

.

소규모 농지의 조선인 지 주들은 토지를 헐값에 내놓을 수 밖에 없었으며

,

일본인 지주의 토지 집적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

환언하면 수리조합사업을 중심으로 한 후지이 간타로의 농장경영은 수리시설의 몽리구역을 증진하는 한편

,

일본인의 토지 집적을 촉진했던 것이다

.

17)

우에키 호미키

[

植木秀幹

],

다카하시 노보루

[

高橋昇

]

는 각각 조선의 임산물과 농산물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 개량 연구에 매진한 학자이다

. 1904

년 도쿄제국대학 임학실과

(

林學實科

)

를 졸업한 우에키 호미키는

1907

년 한국으로 건너온 뒤 광복까지 줄곧 임학 연구와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1920

년과

1933

년 두 차례에 걸쳐 우에키 호미키를 구미 선진국 임학의 현황과 자료 수집을 주제로 북미와 유럽에 파견하여

,

조선 에서 임학 연구를 주도하는 인력으로 양성하였다

.

18)그는 한반도 각지의 삼림을 조사하여 식물의 분포를 밝 히고

,

임산 자원의 활용

·

관리 방안을 다각도로 조사하여 조선총독부의 임업 시책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였 다

.

19)

17) 이규수,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의 한국진출과 농장경영」, 󰡔大東文化硏究󰡕 4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5.

18) 최현우, 「朝鮮總督府 歐美 出張 制度의 特徵과 官僚의 派遣 推移」, 󰡔한국문화󰡕 90,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20.

19) 植木秀幹, 「韓國に於ける森林樹木の利用」, 󰡔大日本山林會報󰡕327, 大日本山林會事務所, 1910; 植木秀幹, 朝鮮に於ける松の 害蟲, 󰡔大日本山林會報󰡕 345, 大日本山林會事務所, 1911; 植木秀幹, 「藥用としての朝鮮產森林植物」, 󰡔大日本山林會報󰡕

362, 大日本山林會事務所, 1913; 植木秀幹, 「森林副產物たる植物性油脂」, 󰡔朝鮮彙報󰡕, 朝鮮總督府, 1917년 5월호; 植木秀 幹, 「朝鮮の救荒植物」, 󰡔朝鮮農會報󰡕 14-10, 朝鮮農會, 1919년 10월호; 植木秀幹, 󰡔朝鮮の救荒植物󰡕, 朝鮮総督府山林部, 1919; 植木秀幹, 「朝鮮の林木」, 󰡔林業試験場報告󰡕4, 朝鮮總督府林業試験場, 1926; 植木秀幹, 「朝鮮產赤松ノ樹相及ヒ是カ 改良ニ關スル造林上ノ處理ニ就イテ」, 東京帝国大学 博士學位論文, 1928; 植木秀幹, 「朝鮮の巨樹名木」, 󰡔朝鮮󰡕179, 朝鮮總 督府, 1930년 4월호; 植木秀幹, 「朝鮮產森林樹木の天然記念物としての價値」, 󰡔朝鮮󰡕182, 朝鮮總督府, 1930년 7월호; 植木

(9)

농업은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면서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산업 분야였다

. 1890

년대 만성적인 흉작과 맞물 려 매년

40~50

만명씩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자국민의 조선 이주와 조선의 곡물 이출을 위한 농 업 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

20) 일제의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구상을 적극 구현하였으며

,

한반 도의 재래 품종을 대신하여 일본 품종 쌀을 이식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강제 병탄 이 전에 한국에 정착하여 일본 품종 쌀을 지은 일본인 지주들의 수확 성적을 근거로 권업모범장을 내세워 일본 품종 이식에 힘을 기울였다

.

조선인 농부들은 조선총독부가 내세우는 단기적인 성과만으로 오랫동안 농사지 은 품종을 바꾸기 어려웠다

.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갖은 회유와 강압을 통해 일본 품종 이식 사업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

결국

1925

년에 이르러 한반도 전체적으로 일본 품종 이식률은

70

퍼센트를 넘어서게 되었다

.

하 지만 오히려 쌀의 수확고는

1920

년대에 들어 감소하였다

.

일본과 동일한 재배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 에서 조선에 이식된 일본 품종 쌀은 시간이 갈수록 열변

(

劣變

)

퇴화하는 추세를 보인 까닭이다

.

21)

이에 조선총독부는 종래의 농사개량사업 중심의 농업 시책을 토지개량사업 중심으로 전환하였으며

,

권업 모범장의 활동도 한반도 각지에 적합한 일본 품종의 시험에서 벗어나 점차 전작

(

田作

),

면작

,

축산 등 다양한 분야의 조사와 시험으로 전환되었다

.

22)

1918

년 도쿄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1919

6

월부터 권업모범 장 근무를 시작한 다카하시 노보루는

1924

년 전작 시험을 위해 사리원에 설치된 서선 지장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

그는 이곳에서

1944

년 농업시험장 총무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조선 소맥

(

小麥

)

을 비롯하여 기타 전작 작물의 품종 개량과 재배법 개량 연구에 몰두하였다

.

그는

1926

년부터

2

년간 미국과 독일을 중심 으로 구미 각국의 대학과 농사시험장에 파견되어 유전학과 작물학을 수학하며

,

종자 개량에 관한 최신 기술 을 익히고 자료를 수집하였다

.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선의 재래 품종과 농사법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그것의 개량에 힘을 쏟았다

.

23) 특히 그는 조선 북서 지방의 재래 소맥 품종 개량에 천착하여 종래 외국산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제분 원료를 조선산 소맥으로 대체하는 성과를 거두어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았다

.

24)

농업과 더불어 수산업은 일본이 한반도 침탈 초기부터 이권 취득에 매진한 분야이다

.

25)

1910

년대 한반도 근해의 수산 조사

·

연구는 도쿄제국대학

,

일본 농무성 수산강습소

,

식산국 수산과 등이 주축이 되어 단속적 으로 진행되었다

. 1920

년대에 들어 조선총독부는 외부 용역식의 수산 조사

·

연구 행태에서 벗어나 수산에 관한 전문적인 시험

·

조사

·

분석과 양식 종묘 배부 등의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부산 영도에 수

秀幹, 「朝鮮の植物と地位」, 󰡔朝鮮󰡕195, 朝鮮總督府, 1931년 8월호; 植木秀幹, 「樹幹析解に於ける斷面積計算法に就いて」,

󰡔創立二十五周年記念論文集󰡕, 水原高等農林学校創立二十五周年記念祝賀會, 1932; 植木秀幹, 「朝鮮産野生かいだうノ新種二 就イテ」, 󰡔植物研究雜誌󰡕134, 植物研究雜誌編集委員會, 1937; 植木秀幹, 󰡔朝鮮産樹木の種類及其の分布󰡕, 朝鮮總督府水原 高等農林學校, 1940.

20) 이영학, 「통감부의 농업조사와 농업정책」, 󰡔역사문화연구󰡕 49,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4, 82~91쪽. 21) 우대형, 「일제하 조선에서의 미곡기술정책의 전개: 移植에서 育種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38,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91~95쪽; 허수열,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 한길사, 2011, 254~284쪽. 22)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식민지통치기구사전󰡕, 2017, 305쪽.

23) 가와타 히로시(저), 김용권(역), 󰡔다카하시 노보루󰡕, 동아일보사, 2010, 107~159쪽. 24) 銃後奉公의 至誠다한 各界 勤勞者를 表彰 文化功勞者, 󰡔每日新報󰡕, 1944년 11월 3일.

25) 동북아역사재단 편, 󰡔한일 조약 자료집(1896~1910)– 근대외교로 포장된 침략󰡕, 동북아역사재단, 2020, 384~349쪽, 398~

400쪽.

(10)

산시험장을 설치하였다

.

수산시험장의 조사

·

연구 활동은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 졌다

.

26)수산 연구와 기술 개발의

공로

를 인정받아 조선문화공로상을 수여받은 세 사람 중 후지카와 키요시

[

富士川漻

],

우치다 게이타로

[

內田惠太郞

]

두 명은 이곳의 기사로 활동하였다

.

후지카와 키요시는

1917

년 도쿄제국대학 수산학과를 졸업한 직후 도쿄의 나카무라

[

中村

]

연구소 수산부를 거쳐

1919

년 조선총독부 수산과로 자리를 옮겨 수산시험장 창설에 참여한 인물이다

.

그는

1921

년 시험장 조 직과 함께 제조계장으로 취임하여

,

조선 근해의 어획물 이용 연구에 착수하였다

.

후지카와 키요시는 오구라 젠페이

[

小倉善平

]

와 협력하여 어류의 급속냉동과 명태의 화학적 건조법을 개발하였다

.

조미료

,

카제인

(casein)

의 대체재로 정어리를 활용하는 방법과 해초로부터 한천

(

寒天

,

우무를 동결탈수하거나 압착탈수하여 건조시 킨 식품

)

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 개발도 이루어냈다

.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에서도 김을 양식하는 기술을 창안하여 김 양식의 확대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

이들

공로

중에서 조선총독부는 특히 어류의 냉동과 건조 를 통해 어분

(

魚粉

)

을 대량으로 조제하는 기술에 주목하였다

.

어분은 전시 상황에서 곡물을 대체할 식량으로 활용 가능하였기에 조선총독부는 어분 제조를 매우 긴요한 기술로 인식하였다

.

27)

우치다 게이타로는

1922

년 도쿄제국대학 수산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수산 연구를 지속하다

1927

년 말 에 수산시험장 양식계로 발령받았다

.

이후

1942

12

월에 규슈

[

九州

]

제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15

년 간 조선 근해의 물고기를 채집

·

조사하여

,

그 분포 상황과 생활사

(

生活史

)

를 정리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어류 의 산란과 치어

(

稚魚

)

의 성장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정리하는 그의 연구 방법이 어류의 발생 형태와 습성 등에 관한 지식을 확대하여 양식 확대에 구체적인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했다

.

28)

우치다 게이타로가 주로 조선의 해수어 연구에 천착했다면

,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 모리 타메조

[

森爲三

]

는 담수어를 조사

·

연구하였다

.

그는 압록강

,

한강

,

낙동강 등의 상류를 조사한 결과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20

여 종의 담수어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또한 우치다 게이타로와 공동으로 조선산 어류목록을 정리 하여 담수어

136

종을 포함한 조선산 어류

522

종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

29) 모리 타메조는 담수어뿐만 아니라 조선의 동식물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

연구 활동을 진행하였다

.

30)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만몽학술조사 26) 이기복, 「일제강점기 內田惠太郞의 朝鮮産魚類調査와 ‘바다식민’의 잔재」, 󰡔역사민속학󰡕 19, 한국역사민속학회, 2004, 185~

188쪽.

27) 第二回 文化功勞賞 今日光榮의 四氏에 授與, 󰡔每日新報󰡕, 1941년 10월 2일; 水産界の功勞者に初の文化功勞賞 牧之島水産試 驗場 富士川技師の榮譽, 󰡔釜山日報󰡕, 1941년 10월 1일.

일제의 강제 병탄을 전후한 시기부터 히로시마[廣島] 출신이 중심이 된 일본인 김 양식업자들이 한반도로 건너간 이후에 일 본식 양식기술이 도입되면서 한반도 각지에 김 양식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김의 품질이 균일하지 않은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후지카와 키요시는 새로운 김 양식 기술을 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태안 남단 대야도(大也島)는 김 양식이 크게 번성하였다.

28) 󰡔朝鮮總督府官報󰡕, 1942년 11월 4일; 第二回 文化功勞賞 今日光榮의 四氏에 授與, 󰡔每日新報󰡕, 1941년 10월 2일. 우치다 게이타로의 대표적인 연구 활동과 그 내용은 그의 자서전인 󰡔稚魚を求めて:ある硏究自敍傳󰡕(岩波書店, 1964)을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은 국내에 󰡔稚魚를 찾아서󰡕(內田惠太郞, 卞忠圭(역), 現代海洋社 1994)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29) 森爲三·內田惠太郞, 󰡔補訂朝鮮産魚類目錄󰡕, 朝鮮總督府, 1934.

30) 森爲三, 「白頭山の植物分布の大要に就て森爲三」, 󰡔朝鮮彙報󰡕, 朝鮮總督府, 1916년 8월호; 森爲三, 「平安南北·黄海三道沿 岸採集鳥類目錄」, 󰡔鳥: 日本鳥學會誌󰡕1-5, 日本鳥學會, 1917; 森爲三, 「珍鳥ヤイロテウ」, 󰡔朝鮮彙報󰡕, 朝鮮總督府, 1918년 11월호; 森爲三, 「濟州島採集の主なる鳥類に就て」, 󰡔鳥: 日本鳥學會誌󰡕2-9, 日本鳥學會, 1920; 森爲三, 「朝鮮の躑躅に就 て」, 󰡔朝鮮彙報󰡕, 朝鮮總督府, 1920년 6월호; 森爲三, 「朝鮮スミレ屬に就て」, 󰡔朝鮮󰡕66, 朝鮮總督府, 1920년 7월호; 森爲

(11)

연구단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위촉을 받아 만주의 동식물로 그 연구 범위를 확대하였다

.

초기에는 학문적 관심으로 한반도의 동식물을 조사

·

연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거치면서 전시 체제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

이러한 태도는 모피 동물과 약용 동물을 집 중적으로 연구하겠다는 수상 소감에도 잘 드러난다

.

31)

다음으로 공업 분야에 종사한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의 활동을 검토하겠다

.

조선총독부는 지질 연구를 통한 중요 광물을 발견하여 조선의 지하자원 개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지질연 구소 소장 다테이와 이와오

[

立岩巖

]

1940

년 제

1

회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

이후

1943

년 제

4

회 때에는 동 연구소 기사 기노사키 요시로

[

木野崎吉郞

]

가 같은

공적

으로 수상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지하자원 개발이 미국

·

영국과의 전쟁에 큰 힘이 되고 있다고 강조하며 기노사키 요시로의 활동을 높이 평 가하였다

.

32)광물은 중요 군수물자로 일본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그 수요가 급증하였다

.

이에 따 라 지질연구소는

1930

년대 중후반부터 텅스텐

(tungsten),

몰리브덴

(molybdenum),

니켈

(Nickel)

등과 같은 군수공업의 핵심 자원에 대한 광상

(

鑛床

)

조사를 핵심 업무로 삼게 되었다

.

33) 조선총독부는

1939

년부터 지 질조사소의 예산을 대폭 인상하고

,

조사 인원의 수도 두 배 넘게 충원하여 지질 조사

·

연구 업무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34)

1940

년에 조선문화공로상을 마련하자마자 지질연구소 소장에게 상을 수여하고

,

이후에도 지질연구소 기사의

공적

을 인정한 것도 전시 체제 아래의 지질 조사

·

연구에 역점을 둔 조선총독부의 태도 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

같은 맥락에서 조선총독부는

1930

년대 말부터 식산국 소속 연료선광연구소의 시험

·

연구 활동에 대한 지 원을 강화하였다

.

석탄 및 기타 연료의 조사 연구 업무를 핵심으로 하는 이 연구소의 엔도 테츠오

[

遠藤鐵夫

]

는 소형으로 제작된 용광로를 통해 조선의 무연탄을 원료로 하는 제철 기술을 개발한 결과를 바탕으로

1944

년 제

4

회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 1930

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경기가 회복되면서 미국 내 고철 수요가 증 가하는 상황에서 유럽에서도 미국산 고철 수요가 증가하면서 일본 철강업계로 수입되는 미국산 고철 가격이 크게 상승하게 되었다

.

이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출되는 고철의 규모를 큰 폭으로 증가시켰으며

,

조선에

三, 󰡔朝鮮植物名彙󰡕, 朝鮮總督府學務局, 1922; 黒田長禮·森爲三, 「朝鮮産ヤマガラ科の新亜種」, 󰡔動物學雜誌󰡕 36, 東京動 物學會, 1924; 黒田長禮·森爲三, 「濟州島産ミソサヾイに就て」, 󰡔動物學雜誌󰡕37, 東京動物學會, 1925; 森爲三, 「動物學か ら見た虎」, 󰡔朝鮮地方行政󰡕 5: 1, 朝鮮地方行政學會, 1926; 森爲三, 「動物學上より見たる兎」, 󰡔朝鮮󰡕 140, 朝鮮總督府, 1927년 1월호; 森爲三, 「鴨緑江と豆滿江との淡水魚と其の動物地理的分布に就て」, 󰡔動物學雜誌󰡕 39, 東京動物學會, 1927;

森爲三, 「濟州島及對馬の動物分布を考察して內鮮兩陸分離の時代とその時代の狀態を推論す」, 󰡔朝鮮󰡕152, 朝鮮總督府, 1928 년 1월호; 森爲三, 「朝鮮産翼手目に就いて」, 󰡔動物學雜誌󰡕 40, 東京動物學會, 1928; 森爲三, 「朝鮮俗離山の胡蝶類」, 󰡔ゼ フィルス󰡕 2: 3, 蝶類同好会, 1930; 岸田久吉·森爲三, 「朝鮮産陸棲哺乳動物の分布に就いて」, 󰡔動物學雜誌󰡕 43, 東京動物 學會, 1931; 森爲三, 「朝鮮產オホアカボシウスバシロテフとその一黑化形に就いて」, 󰡔ゼフィルス󰡕3: 2, 蝶類同好会,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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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第二回 文化功勞賞 今日光榮의 四氏에 授與, 󰡔每日新報󰡕, 1941년 10월 2일. 32) 󰡔每日新報󰡕, 1943년 11월 3일.

33) 조선총독부 편, 박찬승 외 역주,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下)󰡕, 민속원, 2018, 1106~1116쪽; 한국지질자원연구원,

󰡔KIGAM 발자취 100년 VOL. 1. 역사집󰡕, 2019, 51쪽. 34)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위의 책, 2019, 52쪽.

(12)

서는

고철기근

현상이 나타났다

.

조선에서의

고철기근

에 재생선철

(

再生銑鐵

)

공장들은 고철 재생에 필요한 목탄과 코크스

(cokes)

도 부족해 질 것이란 불안감에 해당 원료를 필요 이상으로 매집하였다

.

조선 내 재생선 철 공장들이 연료를 사재기하여 나타난 폐해는

1940

년을 전후한 시기 조선의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

이에 조선총독부는

1940

6

월 조선 각지의

39

개 재생선철 공장의 자산 상태를 조사하여

4

개 공장 이외 나머지 공장에 대한 영업금지 조치를 단행하였다

.

이에 반발한 재생선철업자들이 조선총독부에 강하게 항의하며 활 발한 진정 활동을 전개하였다

.

이에 조선총독부는 연료선광연구소 엔도 테츠오에게 고철

·

목탄

·

코크스를 대신하여 철광석

·

무연탄을 이용한 제철 연구를 맡겼다

.

35)

한반도에는 무연탄이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었지만 산업용으로 쓰기에 부적합하였다

.

하지만 엔도 테츠오 는 일본제철주식회사의 자문을 통해 소형용광로를 이용한 제철 시험에 돌입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

이 는 무연탄을 원료로 한 제철 가능성을 타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제철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검증이 미흡하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단기적인 시험 성과에 함몰되어 철강 증산의 모델로 엔 도 테츠오의 소형용광로 제철법에 주목하였다

.

제철 생산력 증강을 통해 전황

(

戰況

)

의 악화를 극복할만한 가 시적인 생산 성과를 보여야 한다고 여긴 까닭이다

.

36)

조선총독부가 주목한 엔도 테츠오의 또 다른 활동은 형석

(

螢石

, fluorite)

의 부유

(

浮游

)

선광 시험

·

연구이 다

.

37) 형석은 제강업 및 알루미늄 공업에 필요한 핵심적인 광물로 중일 전쟁 이전까지는 해외에서 염가로 일본에 들어왔다

.

하지만 중일 전쟁 이후 형석의 수입이 단절됨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형석 채굴과 선광 작업 에 매진하였다

.

38) 이러한 상황에서

1938

년 엔도 테츠오가 개발한 형석 부유 선광법은 조선총독부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39)

중일 전쟁 발발 직전인

1937

4

월부터 석유 구매 제한에 나선 조선총독부는

1938

년 이후부터는 개인의 구매 한도를 급격히 줄여나갔다

. 1941

12

월 일제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석유 수입이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각종 연료에 대한 규제는 심화되었다

.

40) 한편 조선총독부는

1937

3

월 액체연료조사위원 회를 설치하고 석유를 대신할 대체액체연료의 생산 증대 방안을 모색하였다

.

당시 일본에서는 석탄을 액화

(

液化

)

한 연료와 고구마

·

목재를 원료로 한 알코올 생산이 주류를 이루었다

.

조선총독부는

1938

1

월 고구 마를 원료로 한 대규모 무수주정

(

無水酒精

)

제조공장의 제주도 건립을 결정하고

, 1940

년에 착공하였다

.

이 공장은

1943

년에 완공되어 군사용 비행기의 연료를 제공하였다

.

41)이러한 상황에서 송탄유

(

松炭油

)

채취 방 법을 마련한 임업시험장 기사 코가 아키라

[

古賀明

]

의 연구는 조선총독부에게 큰

공로

였다

.

그는

1938

년 송

35) 정안기, 「전시기 일본제국(日本帝國)의 철강증산정책과 “조선형 증산모델”– 소형용광로 제철계획을 중심으로」, 󰡔經濟史學󰡕

47, 經濟史學會, 2009.

36) 遠藤鐵夫·穗積眞六郞, 󰡔朝鮮近代鑛業の創成1– 鐵鉱開發と製鐵事業󰡕, 友邦協會, 1968.

37) 부유 선광은 광물표면이 가지는 특유한 성질 차이를 이용하여 비중과는 관계없이 어떠한 광물들을 물 위에 띄우고 나머지 광물들은 물속에 남겨 둠으로써 서로 분리하는 작업을 말한다. 한국광물자원공사, 󰡔광물자원용어사전󰡕, 2010 참조. 38) 조선총독부 편, 박찬승 외 역주, 앞의 책(下), 2018, 1114쪽.

39) 銃後奉公의 至誠다한 各界 勤勞者를 表彰 文化功勞者, 󰡔每日新報󰡕, 1944년 11월 3일. 40) 센코카이(鮮交會), 최영수·배은선·송상헌(역), 󰡔조선교통사 제4권󰡕, 북갤러리, 2020, 241쪽. 41) 민족문제연구소, 앞의 책, 2017, 629~630쪽.

(13)

진 채취 연구에 착수하여 자비법

(

煮沸法

)

에 의한 채취에 성공하였다

.

또한 송진 채취 후의 잔지

(

殘枝

)

이용의 탄화

(

炭化

)

및 탄요

(

炭窯

,

숯가마

)

의 개량에 몰두하여 수지

(

樹脂

)

타르 즉 송탄유

(

松炭油

)

채취 방법을 고안 하였다

.

42) 즉 송진 채취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목탄을 제조하게 되고

,

송탄유 채취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

조선총독부는 코가 아키라의 연구 성과를

극찬

하고 즉각 송탄유 생산계획을 시행하였다

.

송탄유 생산은 한반도에 산재한 소나무를 이용할 수 있는데다가 복잡한 설비없이 흙으로 만든 가마로 생산할 수 있었기에 인프라 구축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

43)코가 아키라가 송탄유 제조법을 개발하기 전에 이미 일본에서 는 소나무 하단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이른바 송근유

(

松根油

)

기술이 개발된 상태였지만

,

복잡한 설비가 필요 하였다

.

이에 비해 송탄유는 흙가마를 사용하는 비교적 간편한 방법이었기에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았던 것 이다

.

송탄유가 송근유에 비해 생산 방식이 간편했지만

,

일본은 송근유가 항공기 연료로 적합하다는 이유로 송 근유 생산에 몰두하였다

.

44)

2

차 세계 대전에는 공군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었기에 참전국들은 항공기의 제 작과 운용에 매진하였다

.

45)일본 또한

1943

년에 들어서 총동원체제의 생산 계획에서 항공기 생산에 모든 자 원을 집중하였다

.

46)

20

년간 석유 제조업계에서 근무하며

1941

년에 항공 윤활유 제조장치를 개발한 조선 석유주식회사의 오츠보 다케오

[

大坪太計雄

]

1943

년 제

4

회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전시 체 제의 필요를 충족한 까닭이다

.

47)

항공을 중시한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신용욱은 조선인 중 유일하게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에 선정된 것이라 생각된다

.

그는

1920

년대 초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0

년대 초까지 여러 비행학교에서 수학하며

1

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비행학교

,

신항공사업사

(

愼航空事業社

, 1941

년에 조선항공 사업사로 개칭

),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개창한 인물이다

.

그는 항공기 조종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배 체제를 옹호한 친일파로

, 1940

년대에 들어서는 일본군의 수송을 맡고

,

일본 해군기

(

海軍機

)

를 제작하여 일본 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

48)

토목 분야에 종사한 인물을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한 배경도 전시 체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

구보 다 유타카

[

久保田豊

]

는 부전강

,

장진강

,

허천강

,

압록강 등의 거대한 수력발전공사를 완수하여

반도의 대륙 전진 병참기지에 기초를 건설

했다는 근거로

1941

년 제

2

회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

49)

1942

42) 銃後奉公의 至誠다한 各界 勤勞者를 表彰 文化功勞者, 󰡔每日新報󰡕, 1944년 11월 3일. 43) 戰時의 寵兒로 登塲 小磯總督이 激讃한 松炭油大量增産, 󰡔每日新報󰡕, 1943년 4월 24일.

44) 김윤미, 전시체제기 군수물자 확보와 조선인 근로동원:석유 대용품 松脂, 松炭油, 松根油를 중심으로, 󰡔숭실사학󰡕25, 숭 실대학교사학회, 2010, 220~221쪽.

45)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Paul Eden,

The Encyclopedia of Aircraft of WWII

(Silverdale Books, 2004)를 참고할 수 있다.

46) 「昭和18年度生産擴充實施計劃」, 石川準吉, 󰡔國家總動員史資料編9󰡕, 國家總動員史刊行會, 1980, 702쪽; 「昭和18年上半期重 要物資生産狀況」, 原朗·山崎志郞 編, 󰡔後期物資動員計劃資料󰡕, 現代史料出版, 2001, 67~74쪽.

47) 榮譽의 문화공로상 – 금년은 木野崎, 大坪, 小倉三氏에, 󰡔每日新報󰡕, 1943년 11월 3일.

48) 銃後奉公의 至誠다한 各界 勤勞者를 表彰 文化功勞者, 󰡔每日新報󰡕, 1944년 11월 3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 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4-9󰡕, 2009.

49) 󰡔朝鮮總督府官報󰡕, 1941년 10월 1일(호외); 第二回 文化功勞賞 今日光榮의 四氏에 授與, 󰡔每日新報󰡕, 1941년 10월 2일.

(14)

3

회 수상자인 철도국 오다 야노스케

[

小田彌之亮

]

는 항공기 공습에 견디는 내폭

(

耐爆

)

구조의 철도 교량을 설계한

공로

를 인정받았다

.

그는

1927

년 규슈제국대학 토목과를 졸업한 직후 조선으로 건너와 철도국 부산 공무사무소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 1934

년부터는 철도국 건설과로 자리를 옮겨 교량의 설계

,

개량방 법

,

제작 업무를 일관적으로 담당하였다

.

50)

오다 야노스케는

1930

년대 중반부터 내폭구조의 철도 교량 설계 연구에 착수하여

<

그림

1>

을 기본 구조 로 하는 내폭 교량을 설계하고

,

이를 복사재

(

復斜材

)

구조

[double diagonal truss]

라 이름 붙였다

.

<그림 1> 복사재 구조 내폭 철도 교량의 기본 구조(1형, 2형)

출전:高橋良和·小嶋進太郎·Mya San WAI, 「朝鮮總督府鐵道局による複斜材型トラス橋梁の開發と耐弾性能」, 󰡔土木學會論文 集󰡕76: 1, 日本土木學會, 2020, 20쪽.

비고:출전에는 내탄(耐彈) 구조라 지칭하였지만, 본고에서는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라 내폭이라 지칭하였음. <그림 1>의 첫 번 째 그림이 1형(型), 아래가 2형(型)이다.

복사재 구조는 그 명칭에서 보이듯 트러스 구조에서 자재를 한 격간 내에 서로 엇갈리게 설치하는 방식을 말한다

.

이 구조의 교량은 일부가 폭파되어도 주저앉지 않고

,

평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용이한 복 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해당 설계를 검토한 이후

,

압록강 교량

,

청천강 교량

,

한강 교량

(

상하선

),

임진강 교량

,

대령강

(

大寧江

)

교량 등에 적용하였다

.

압록강 교량의 경우 한반도와 중국을 연 결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기에 유일하게

<

그림

2>

와 같은

‘3

(

)’

구조가 적용되었다

.

51)

<그림 2> 복사재 구조 내폭 철도 교량의 3형 구조

출전:高橋良和·小嶋進太郎·Mya San WAI, 「朝鮮總督府鐵道局による複斜材型トラス橋梁の開發と耐弾性能」, 󰡔土木學會論文 集󰡕76: 1, 日本土木學會, 2020, 25쪽.

50) 高橋良和·小嶋進太郎·Mya San WAI, 「朝鮮總督府鐵道局による複斜材型トラス橋梁の開發と耐弾性能」, 󰡔土木學會論文集󰡕

76: 1, 日本土木學會, 2020, 17쪽.

51) 오다 야노스케가 설계한 복사재 구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그의 박사학위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小田彌之亮, 󰡔複斜 材構ノ応力󰡕, 東京帝國大學 博士學位論文, 1944.

(15)

이렇듯 철도국은 오다 야노스케의 설계에 입각하여 한반도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간선 철도에 내폭 구조 철도 교량을 건설하였다

.

이러한 의미에서 오다 야노스케의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강조한 것처럼 전시 수송력 을 확보하는 국방상의

공헌

이었던 것이다

.

52)

Ⅳ. 결 어

조선총독부는

1940

년부터

1944

년까지

5

년간 총

21

명에게 조선문화공로상을 수여하였다

.

조선총독부는 사상

,

과학

,

예술

,

산업 등 온갖 분야에 걸쳐 그 진보

·

발달에 공헌이 뚜렷한 사람을 표창함과 동시에 이를 장려할 목적으로 조선문화공로상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

하지만 수상자 중 예술 분야 인사는 찾아볼 수 없으 며

,

인문학 분야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나 조선총독부의 식민지배체제를 뒷받침한 인사로 구성되었다

.

더욱이 수상자의

2/3

이상은 농림

,

수산

,

지질

,

연료

,

항공 등과 같은 산업 분야에 치중되어 있었다

.

이들은 조선총 독부 직속 연구 기관에 소속된 과학기술 관료 및 관변 단체의 실업가들로 농수산물

·

광물의 생산 증대와 운 송력의 확대를 가져오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관련 활동을 전개한

공로

로 수상하였다

.

원자재의 원활한 수입이 곤란한 전시 체제에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농림

,

수산 자원 은 물론이거니와 지하자원의 개발과 활용을 극대화하려 하였다

.

조선총독부 산하 연구 기관과 관변 단체의 조사

·

연구 활동과 그에 대한 평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의 활동 분야와 조 선총독부가 밝힌 수상 근거는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

일제의 병참기지로서 식민지 조선의 역할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체제의 안정화는 물 론 국가총동원체제의 강화를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

조선문화공로상 수여제도는 이러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

국가총동원체제 아래에 생산력의 증대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문화공로상을 통 해 기왕의 연구 성과와 활동을 치하하고

,

이들을

모범

으로 부각시켰다

.

이를 통해 전시 체제에 도움을 주는 생산력의 확대가 곧

문화공로

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한편

,

전 분야에서 추진된 생산력 확대 시책을 정당화하 려 하였다

.

본고는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조선문화공로상 수상자의 대다수가 차지하는 과학기술 분야에 천착한 나머 지 인문 분야 수상자의 활동과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였다

.

주지하듯 필자가 인문 분야 수상자 로 분류한 인물들은 조선사와 조선어문 등의 연구를 통해 식민지배체제의 형성과 유지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 다

.

향후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이들의 연구 활동과 포상이 국가총동원체제를 지탱하는 또다른 축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

52) 󰡔朝鮮總督府官報󰡕, 1941년 10월 1일(호외).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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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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