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원 경략 후 천손문화권의 안정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치우천왕은 헌원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배달 국의 제후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처분을 내렸다. 신농국을 염제국, 소 호국을 백제국에 봉하였던 것과 같이 헌원국을 黃帝國에 봉한 것이다.
배달국의 ‘五帝제도’에서 黃帝는 중앙을 담당하며 주된 역할은 ‘和 調’였다. 한국선도의 삼원오행론(삼신오제론)중 오행론(오제론)에서 중앙의 ‘天符(土)’ 자리는 본질인 ‘천ㆍ지ㆍ인 삼원’을 의미하며 이는
‘기ㆍ화ㆍ수ㆍ토’ 4원소를 조화하는 ‘調和’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 선 상에서 중앙 黃帝의 주된 역할이 ‘和調’로 정해진 것이다. 오행(오제) 중 중앙의 ‘천부(토)’ 자리가 갖는 비중으로 인해, 그 상징도 배달국의 주족 웅족의 상징인 ‘熊’(黃熊)이었다. 68)
오제중 가장 중요한 黃帝位에 헌원이 봉해졌던 점은 천손문화의 깊이를 보여준다. 천손문화에 대해 가장 낮은 이해도를 보임으로써 배달국의 천손문화권에 가장 극력하게 저항하였던 헌원의 목숨을 살 려주었을 뿐 아니라 오제의 첫째위로 삼은 조처는 헌원으로 하여금 천손문화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천손문화의 확실한 맹주 가 될 수밖에 없도록 하였을 것이다. ‘탁록격’에서 헌원에게 ‘마음을 씻어 의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 치우천왕의 처음 마음이 굴절됨 없이 끝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헌원이 황제에 봉해지고 전쟁이 종료됨으로써 배달국과 황제국의 국경도 제10세 갈고환웅 이래 배달국(소호국, 구려국)과 신농국의 국 경이었던 ‘空桑’으로 회복되었다. 공상 이동 지역에는 소호국(구려국) 이 다시 자리를 잡고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다. 치우천왕이 소호국(구 려국)을 되살려 놓았기에 치우천왕은 ‘九黎王’으로도 불리게 되었다.69) 68) 주)24 <표 1> 참조.
치우천왕은 소호국을 되살려 놓았을 뿐아니라 산동성 일대(회ㆍ대 지역)에 奄, 藍, 陽, 介, 嵎 萊, 徐, 淮 등 8국을 새로 봉하였다. 이렇게 산동성 일대에 배달국의 영향력이 확고해지자 이 일대까지도 청구로 불리게 되었다.70)
치우천왕이 산동성 일대에 남긴 흔적은 고고학적으로는 大汶口文 化 말기(기원전 2800년∼기원전 2000년) 및 龍山文化(기원전 2800년∼
기원전 2000년)에 해당한다. 이들 문화는 대체로 동이계 문화로 인식 되는데, 특히 대문구문화 말기의 팽이형 토기에 새겨진 ‘해ㆍ달ㆍ산 문양’71)은 근래 ‘고조선문명권’의 지표로서 해석되고 있다.72) 환국 이 래 천손문화에서 ‘해와 달’이 ‘태양문화(광명문화, 밝음문화)’의 표상으 로 숭상되어왔던 전통에 비추어 보면73) 이 역시 ‘태양삼족오’와 마찬가 지로 ‘태양문화(광명문화, 밝음문화)’의 상징물 중 하나로 이해된다.
헌원은 목숨을 건졌을 뿐아니라 파격적으로 황제에 봉해짐으로써 치우천왕의 진면모와 천손문화의 본질에 대해서도 큰 자각을 하게 되었던 듯하다. 무엇보다도 청구의 치우천왕을 조회하고 배달국의
69) 뺷史記뺸卷1 五帝本紀 第一 黃帝 「索隱 管子曰蚩尤受 盧山之金 而作五兵 明 非庶人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 뺷書經뺸呂刑「蚩尤惟始作亂. 孔安國傳 九黎之 君號曰蚩尤」 후에 ‘구려’가 중국 남방으로 이주해 苗族(三苗)이 되었기에 치 우는 묘족의 조상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70) 이러한 이유로 청구는 산동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71) 중국학자들은 이를 ‘해ㆍ달ㆍ산’ 또는 ‘해ㆍ불(火)ㆍ산’, ‘해ㆍ새ㆍ산’,(王大有 著ㆍ林東石 譯, 뺷龍鳳文化原流뺸, 동문선, 1988(2002), 108∼109쪽) 또는 ‘해ㆍ 구름ㆍ불’로 보기도 한다.(趙春靑, 뺷문명의 새벽뺸, 시공사, 2003, 143쪽) 이러 한 상형을 통해 旦, 昊, 炅 등의 글자가 생겨난 것으로 해석한다.
72) 신용하는 이를 ‘아사달 문양’으로 해석하고 ‘고조선문명권’의 지표로 보았 다.(愼鏞廈, 「고조선 ‘아사달’문양이 새겨진 산동 대문구문화 유물」, 뺷한국 원 민족 형성과 역사적 전통뺸, 나남출판, 2005, 129∼131쪽)
73) 환국시대 사람들은 해와 달을 숭상하여 ‘아침에는 돋는 해에 절하고 저녁에 는 떠오르는 달에 절하였다.(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桓國本紀 「朝代記曰 古俗 崇尙光明 以日爲神 以天爲祖…太陽者 光明之所會 三神之攸居 人得光以作 而無爲自化 朝則齊登東山 拜日始生 夕則齊趨西川 拜月始生」)
큰 선인이었던 紫府仙人에게 천손문화의 본질인 선도를 배우게 되었 다. 곧
뺷三皇內文經뺸은 紫府先生이 軒轅에게 주어서 그로 하여금 마음을 깨끗 이 씻어 義로 돌아오도록 한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三淸宮에 살았는데 宮 은 靑邱國 大風山의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軒候가 몸소 치우천왕을 朝會 하다가 이름높고 번영한 나라를 지나다가 이러한 높은 가르침을 받게된 것 이다. 經文은 神市의 鹿書로 쓰여졌고 세 편으로 되어 있다.74)
옛날에 황제 헌원이 있어 동쪽 靑邱에 이르러 風山을 지나다가 紫府先 生에게뺷三皇內文뺸을 얻어서 萬神을 부렸다.75)
는 한ㆍ중 양측의 기록은 황제의 변화를 시사한다. 자부선생은 배 달국의 선인 發貴理의 후손으로76) 치우천왕에게 뺷삼황내문경뺸77)을 지어 올리니 이를 가상히 여긴 치우천왕이 삼청궁을 지어 거주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 헌원 외에도 共工, 倉頡, 大撓도 자부선생에게 와 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니78) 자부선생의 講會 참여는 배달국의 제
74)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蘇塗經傳本訓 「三皇內文經 紫府先生授軒轅 使之洗心歸 義者也 先生嘗居三淸之宮 宮在靑邱國大風山之陽 軒候親朝蚩尤 路經名華 有 是承聞也 經文以神市鹿書記之 分爲三篇 後人推演加注 別爲神仙陰符之說 周 秦以來 爲道家者 流之所托 間有鍊丹服食 許多方術之說 紛紜雜出 而多惑溺」
75) 뺷抱朴子뺸「昔有黃帝 東到靑邱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刻召萬神」
76) 紫府仙人은 태어나서부터 신명하였으며 도를 얻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뺷三 皇內文經뺸 외에도 뺷七星曆뺸의 시원이 되는 뺷七政運天圖뺸의 저자로도 알려 져 있다.(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蘇塗經傳本訓 「紫府先生發貴理之後也 生而神 明 得道飛昇 嘗測定日月之纏次 推考五行之數理 著爲七政運天圖 是爲七星曆 之始也」) 뺷七政運天圖뺸는 뺷七回祭神之曆뺸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윷 놀이를 만들어 桓易을 풀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주)78 참조)
77) 뺷列仙傳뺸에서는 뺷三皇內文經뺸이 뺷陰符經뺸의 天皇ㆍ地皇ㆍ人皇 3편을 말한 다고 하였다.(李能和 述ㆍ李鍾殷 역, 뺷朝鮮道敎史뺸, 보성문화사, 2002, 45쪽) 78) 뺷桓檀古記뺸「太白逸史」三韓管境本紀 馬韓世家上「人文早已發達 五穀豊熟 適 以是時 紫府先生 造七回祭神之曆 進三皇內文於天陛 天王嘉之 使建三淸宮而 居之 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 皆來學焉 於是作柶戱 以演桓易 蓋神誌赫德所記
후들에게 주어진 규례였을 수도 있다.
이후 황제는 선도수행에 몰두하였던 듯 廣成子79), 寧封子, 馬師皇, 容成公, 浮丘公, 雲陽先生 등 많은 신선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鼎胡에서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한다.80) 중국도교 전통에서도 ‘黃 老學’이라 하여 黃帝와 老子를 도교의 비조로 보고 있으며 황제의 작 품으로 알려진 많은 道書나 醫書가 현재까지도 다수 남아 전한다.
황제의 이러한 변화에 화하족은 크게 반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데, 황제는 오히려 치우천왕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그 반발을 억제하 였던 듯하다. ‘치우의 사망으로 천하가 다시 혼란스러워지자 황제가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천하에 위엄을 펴니 천하가 모두 치우가 죽지 않은 줄 알고 복종하였다’는 기록에서81) 이를 짐작해보게 된다.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 이후 단군조선초 堯와의 국경분쟁이 일어나 기 전까지 중원 일대의 천손문화권은 대체로 안정 상태를 유지하였 다. 치우천왕의 도움을 입어 나라를 회복한 소호국의 少皞 金天氏는
‘치우천왕의 후예’로 불릴 정도로82) 치우천왕의 뜻에 충실히 부응하 였다.
또한 황제의 연맹군으로 참전했던 일부 화하족들은 금고를 받았던 듯하다. 곧 뺷山海經뺸에는 치우천왕에 대항하였던 應龍 종족이나 女 魃(旱魃) 종족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서 가뭄이 들게 되었음’을83)
天符之遺意也」
79) 뺷莊子뺸外篇 제11 在宥 「皇帝立爲天子十九年, 令行天下, 聞廣成子在於空同之 山, 故往見之」
80) 袁珂 저, 전인초ㆍ김선자 역, 앞책, 2009, 224∼228쪽.
81) 뺷太平御覽뺸卷79 皇王部四 黃帝軒轅氏 「蚩尤沒後 天下復擾亂不寧 黃帝遂畵 蚩尤形象 以威天下 天下咸謂蚩尤不死 八方萬邦皆爲殄伏」
82) 진태하, 「東夷族 第一祖上 遺跡地 探査」, 뺷치우연구뺸 2, 2002, 165∼166쪽.
83) 뺷山海經뺸「大荒東經」「大荒東北隅中 有山名曰凶犁土丘 應龍處南極 殺蚩尤與 夸父 不得復上 故下數旱」: 「大荒北經」「有人衣靑衣 名曰黃帝女魃 蚩尤作兵伐 黃帝 黃帝乃命應龍功之冀州之野…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魃不得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늘’은 ‘삼신하느님(上帝)국’인 배달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배달국 문화의 수혜 단절을 의미한다.
少皞 金天 이후 중원지역의 주도권이 황제의 손자인 顓頊 高陽에 게 돌아가면서 상황은 다시 달라졌다. 곧 전욱은 배달국의 천손문화 와 상이한 권위적, 가부장적 질서를 만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84) 급 기야 소호국(구려국)을 치기도 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옮겨간 일부 소호족(구려족)은 苗族(三苗族)가 되었다고 한다.85)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산동성 淮ㆍ垈지역에 대한 배달국의 지 배권은 큰 문제없이 배달국말까지 지속되었다. 배달국을 승계한 단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산동성 淮ㆍ垈지역에 대한 배달국의 지 배권은 큰 문제없이 배달국말까지 지속되었다. 배달국을 승계한 단